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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1호 : 황남대총남분 은관(皇南大塚南墳 銀冠>) 국립경주박물관 1978.12.07 지정
이 은관은 남쪽 무덤 널(관) 밖 머리쪽 껴묻거리 구덩이(부장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높이 17.2㎝, 머리띠(대륜) 너비 3.2㎝, 지름 16.6㎝이다. 머리띠 위의 장식은 3개의 가지가 있는 형식으로 신라시대 관모(冠帽)에서는 보지 못하던 특이한 양식이다. 중앙가지는 위에 돌기가 있고, 활 모양으로 휘어지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마름모 형태의 은판을 붙였다. 좌우에는 반달형 은판을 붙이고, 바깥쪽을 일정한 폭으로 오려낸 다음 하나하나 꼬아서 새털 모양을 만들었다. 새털 모양의 가지는 신라 금관 형식에는 없었던 것으로, 의성 탑리 무덤에서 이와 유사한 관모가 발견되나 경주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된다.
제632호 : 황남대총남분 은제 팔뚝가리개(皇南大塚南墳 銀製脛甲) 국립경주박물관
이 정강이 가리개는 남쪽 무덤 널(관) 밖 머리쪽의 껴묻거리 구덩이(부장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길이 35㎝의 무릎과 정강이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의 일부이다. 무릎에 닿는 부분은 넓고 둥근 판 형태로, 중간쯤부터 좁아져 아래로 내려오며, 중앙에 시계추(錘)같은 돌출된 선이 있다. 전체적으로 안으로 휘어지게 만들었다.
하단부는 안으로 휘어진 은판을 경첩으로 연결하여 닫으면, 정강이를 보호하게 되고 끝에 3개의 고리가 있어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다. 천마총 출토 금동제 정강이 가리개가 출토된 적은 있으나, 은제 정강이 가리개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중요한 유물이다.
제633호 : 경주 황남동 금제 드리개(慶州 皇南洞 金製垂飾)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황남동에 있는 신라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15.5㎝의 한 줄은 길고 세 줄은 짧은 금제 드리개(수식)이다.
긴 줄은 속이 빈 금 구슬에 꽃잎장식을 금실로 꼬아 연결하였고, 끝에 비취색 옥을 달았다. 작은 줄 역시 긴 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현재의 상태가 원형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드리개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작품이다.
제634호 :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慶州 皇南洞 象嵌琉璃玉)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황남동에 있는 신라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24㎝, 상감유리옥 지름 1.8㎝의 옥 목걸이이다.
대체로 8가지 옥을 연결하여 만든 목걸이로, 대부분의 옥이 삼국시대 신라 무덤에서 자주 출토되는 편이지만 상감유리환옥은 처음 출토되었다. 작고 둥그런 유리 옥에는 녹색 물풀이 떠 있는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오리 16마리와 두 사람의 얼굴이 지름 1.8㎝의 작은 표면에 여러 가지 색을 써서, 세밀하게 상감 되어 있다. 유리 옥의 제작지가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얼굴 모습이 우리나라 사람과 차이가 난다. 수공 기술이 놀랍고 색조의 조화가 아름다운 걸작이다.
제635호 : 경주 계림로 보검(慶州 鷄林路 寶劍)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황남동에 있는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된 길이 36㎝의 칼이다. 1973년 계림로 공사 때 노출된 유물의 하나로,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 버리고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 있다. 시신의 허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자루의 끝부분이 골무형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붉은 마노를 박았다. 칼집에 해당되는 부분 위쪽에 납작한 판에는 태극무늬 같은 둥근무늬를 넣었다.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고리자루칼(환두대도)과 그 형태와 문양이 다른데, 이러한 형태의 단검은 유럽에서 중동지방에 걸쳐 발견될 뿐 동양에서는 발견되는 일이 없어, 동·서양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636호 : 서수형토기<미추왕릉>(瑞獸形土器<味鄒王陵>)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미추왕릉 앞에 있는 무덤들 중 C지구 제3호 무덤에서 출토된, 거북 모양의 몸을 하고 있는 높이 15.1㎝, 길이 17.5㎝, 밑지름 5.5㎝의 토기이다. 머리와 꼬리는 용 모양이고, 토기의 받침대 부분은 나팔형인데, 사각형으로 구멍을 뚫어 놓았다. 등뼈에는 2개의 뾰족한 뿔이 달려 있고, 몸체 부분에는 전후에 하나씩과 좌우에 2개씩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머리는 S자형으로 높이 들고 있고 목덜미에는 등에서와 같은 뿔이 5개 붙어 있다.
눈은 크게 뜨고 아래·위의 입술이 밖으로 말려 있으며, 혀를 길게 내밀고 있다. 꼬리는 물결모양을 이루면서 T자로 꺽여 끝을 향하여 거의 수평으로 뻗었는데, 여기에도 뿔이 붙어 있다.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주구(注口)가 길게 붙어 있고, 엉덩이에는 밥그릇 모양의 완이 붙어 있다. 그릇 표면은 진한 흑회색을 띠었고, 받침·주구에서 신라의 다양한 동·식물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토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기본적인 착상은 아주 새롭다.
제637호 : 차륜식토기(車輪飾土器) 국립진주박물관
수레바퀴가 붙은 높이 18.5㎝, 길이 24㎝의 가야 토기로 출토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받침은 이 시대 굽다리 접시(고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이 벌어진 나팔형인데 긴 직사각형의 굽구멍(투창)이 4개 뚫려 있다. 받침 위에 U자형의 뿔잔(각배)을 얹어 놓고, 그 등에는 양쪽으로 고사리 모양 장식을 했으나 한쪽은 없어졌다. 고사리 모양의 장식은 가는 흙 줄을 양쪽으로 말아서 만든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U자형의 뿔잔은 액체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보인다. 뿔잔의 좌우 측면에 수레바퀴를 부착시켰는데, 둥근 바퀴는 축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모양의 창을 6개 뚫어 바퀴살을 표현하고 있다. 회흑색의 바탕 흙은 쇠가 녹슨 듯한 색깔을 띠며, 전형적인 가야 토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는 오리모양·인물모양·말모양·배모양 토기들처럼, 단순하고 환상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제638호 : 기사계첩(耆社契帖) : 이화여대박물관
70세 이상의 노신들을 우대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기사의 모임장면과, 그들의 초상 등으로 꾸민 화첩으로 비단바탕에 채색되어 있으며, 가로 76㎝, 세로 59.5㎝ 크기이다.
숙종 45년(1719)에 왕과 기로소 신하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임방의 서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왕의 시문, 전체내용을 요약한 김유의 발문과 참석명단 및 행사장면의 그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화첩에는 이유·임방 등 참석자 10인의 반신상 초상과 스스로 쓴 축시 및 화원의 명단 등도 포함되어 있다. 모두 12권인데, 한 권만 기로소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참석한 사람들이 각자 소유하였다.
김진여 등 여러 화원이 참여하여 숙종 46년(1720)에 완성한 이 화첩에서의 초상은 반신상이며 화법에 있어서 18세기 초의 전형적인 초상화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같은 종류의 화법 중에서 시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제639호 : 기사계첩(耆社契帖) 서울 홍완구
숙종 45년(1719)에 있었던 소속이 같은 문인들이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풍류를 즐겼던 모임인 계회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글과 그림으로 만든 화첩으로, 크기는 가로 53㎝, 세로 37.5㎝이다.
70세 이상 대신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왕의 시문, 전체 내용을 요약한 김유의 발문과 참석자 명단, 행사장면의 그림 등 5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사계첩은, 보물 638호와 거의 비슷하지만, 김창집을 비롯한 계회참석자 10인의 초상화에서 평소 집무복인 단령의 모양이나 색채가 다르며, 조선 후기 문신인 홍만조의 축시제목이 없는 점 등으로 두 기사계첩을 대조하여 연구해 볼 수 있다.
임금의 초상을 그렸던 박동보·장득만·허숙 등의 화원들이 초상화를 그린 이 기사계첩은 보물 제638호로 지정된 기사계첩과 거의 같으나, 보물 제638호가 1974년 2면을 1면으로 붙인데 반해 이 화첩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작품으로 10여 명의 초상화와 자필로 쓴 축시, 화원 명단이 들어 있어 당시 화풍과 서체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640호 : 인천안목(人天眼目) (재)아단문고
송나라 승려 지소(智昭)가 당시 불교 5개 종파의 기본사상과 창시자들의 행적을 요약하여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우리나라 선가(禪家)에서 많이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원나라에서 활동하던 강금강(姜金剛)이 간행한 책을 원본으로 삼아, 조선 태조 4년(1395)에 무학대사가 회암사에서 다시 새겨 펴낸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 상, 중, 하를 하나의 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27.2㎝, 가로 18㎝이다. 고려시대의 판본을 기초로 조선시대에 간행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조선 초기의 불교학은 물론 서지학의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제641호 :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재)아단문고
선종영가집은 당나라의 승려 현각(玄覺)이 선종(禪宗)의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우리말로 풀이한 언해본(諺解本)이 많이 전해진다.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는데, 크기는 세로 26.9㎝, 가로 16.6㎝이다. 책 끝의 간행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 7년(1381)에 충주 청룡사에서 담여(淡如), 각눌(覺訥), 이인린(李仁隣) 등이 판각하여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이 만들어지게 된 정확한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쇄가 선명하고 매우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다.
제642호 : 성석편(城石片) 이화여대박물관
이것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쌓을 당시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위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도성으로 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 북성(北城) 등 4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성의 길이는 전체 15㎞로 성곽주변은 강으로 둘러싸여 평양시의 중심부를 이루고, 주로 내성벽은 돌로, 외성벽은 흙으로 축성되어 있다. 성의 내부에는 당시 고구려의 도시구획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 성곽에서 현재까지 글자가 새겨진 4개의 성석(城石)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성석편은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성석에 새겨진 글자 수는 모두 7행 27자로, 그 내용은 ‘기유년 5월 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 구간을 물성소형 배 ■백두(物省小兄 俳 ■百頭)가 구축한다’라고 풀이되어지고 있다.
이 성석의 현재 상태는 두 번째 행의 깨어져 나간 부분과 함께 전체 9조각으로 균열되어 있어 석고로 고정시켜 놓은 상태이다.
제643호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호암미술관
제644호 : 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靑華白磁松竹人物文壺) 이화여대박물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높이 47㎝, 아가리 지름 15.4㎝, 밑지름 16.7㎝의 청화백자 항아리로, 목은 짧고 어깨가 올라가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릇 모양을 하고 있다.
밑 부분은 좁게 내려가다가 굽에서 나팔모양으로 퍼졌는데, 이러한 모양은 짧게 수직으로 내려가는 굽을 가진 초기 청화백자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이다. 목 윗부분에는 가로줄 하나를 그린 다음 그 밑에 구름을 그려 넣었고, 굽 부분에도 가로로 한 줄을 그렸다.
그릇의 몸통 전면에는 소나무 한 그루와 대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소나무 밑에는 책상에 팔을 괴고 있는 인물을, 대나무 밑에는 거문고를 든 동자를 거느린 한 선비가 거닐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구도나, 인물의 배치 및 묘사가 16세기 후반의 화풍과 매우 유사하여, 이 항아리의 제작시기는 대체로 16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645호 : 백자철회운룡문호(白磁鐵繪雲龍文壺) 이화여대박물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로 높이 45.8㎝, 아가리 지름 15.8㎝, 밑지름 15.7㎝이다.
아가리 부분은 짧고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져 세웠으며, 몸체는 어깨 부분에서부터 팽배해졌다가 서서히 좁아지며, 아랫부분에서 다시 벌어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을 띠고 있으며 광택이 은은하다.
아가리 부분과 어깨 부분에는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있고, 굽 위에는 이중으로 삼각형무늬가 있는데, 이것은 번개무늬의 변형으로 보인다. 몸체의 전면에는 구름과 여의주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용의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용의 부릅뜬 눈과 입, 뿔과 수염, 갈퀴와 비늘이 휘날리는 구름과 함께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굽은 안바닥을 오목하게 파내었으며, 굽 다리에는 가는 모래 받침을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회백색의 유약과 특이한 그릇모양, 산화철 안료를 이용해서 그린 철회 기법의 무늬, 오목한 굽의 표현은 경기도 광주군 일대의 17세기 가마터인 상림리·선동리·정지리에서 발견되고 있어, 이 항아리도 이 곳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항아리 표면에 그려진 구름과 용의 모습을 보아,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그릇 중 하나인 듯하다. 철회 기법을 사용한 초기 작품으로 중요한 예이며, 17세기 전반 경의 대표적인 철회 백자 항아리이다.
제646호 : 청자상감상약국명합(靑磁象嵌尙藥局銘盒) 한독의약박물관
뚜껑 달린 원통형의 그릇으로, 높이 9.6㎝, 아가리 지름 7.5㎝, 밑지름 6.0㎝의 합이다.
고려 청자에는 이런 합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는데, 키가 작고 납작한 형태와 키가 크고 원통형을 이루고 있는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이 합은 키가 크고 원통형으로 전체적으로 단순한 모양이다. 그릇 아래쪽과 뚜껑 위쪽 모서리를 비스듬히 깍아내 매우 부드럽고 듬직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뚜껑 위의 둥근 평면에는 정교한 솜씨로 구름과 학 모양을 새겨 넣었다.
이 합에서 주목되는 것은 몸체 윗부분과 뚜껑 아랫부분에 흰색으로 상감 처리한 ‘상약국(尙藥局)’이라는 글자인데, 이런 종류의 합은 매우 드물다. 상약국이란 고려시대에 의약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이 합이 약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약국은 고려 목종 때(재위 997∼1009)부터 충선왕 때(재위 1308∼1313)까지 있었는데, 이 합은 그 기간 중에서도 12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상약국’글자가 있는 청자 파편이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가마에서 출토된 바 있고,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대화문화관에도 비슷한 합이 소장되어 있다.
제647호 : 가정을묘명천자총통(嘉靖乙卯銘天字銃筒) 육군박물관
총통은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화포(火砲)이다.
천(天)자는 천자문의 첫 자로 만든 순서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총 길이 1.31m, 통신 길이 1.16m, 포구 지름 12.8㎝로써 포 입구 띠를 제외한 마디는 모두 8개이다. 총신 포구 쪽에는 탄약을 장전하는 약실을 향하여 가로로 ‘가정을묘시월천사백구십삼근십냥장양내요동(嘉靖乙卯十月天四百九十三斤十兩匠梁內了同)’이라는 글이 음각 되어 있어, 조선 명종 10년(1555)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총통은 우리나라 화포 중 가장 큰 화기일 뿐 아니라, 그 명문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방 과학기술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제648호 : 만력을묘명승자총통(萬曆乙卯銘勝字銃筒) 국립중앙박물관
승자총통이란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총통 중 소형으로 개인의 휴대용 화기를 말한다.
전체길이 56.8㎝, 통길이 34.8㎝, 입지름 4㎝, 무게 4.5㎏로 마디는 6개가 있다. 약실쪽의 3마디의 간격을 총구 쪽 보다 좁힌 것은 화약의 폭발 위력을 염려하여 터지지 않도록 한 것이며, 적이 가까이 와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곤봉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끔 양각하였다. 손잡이에는 음각으로 제조연대와 무게, 장인(匠人)의 이름이 새겨 있고, 나무 손잡이는 오래되어서 손실되었다.
명문에 의하면 선조 12년(1579)에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 김지가 만들었다. 이 총통은 승자총통 중에서도 초기 작품으로, 그 당시 휴대용 화포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 병기 제조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일이다.
제649호 : 연기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
(燕岐 蓮華寺 戊寅銘佛碑像 및 臺座)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의 연화사에 소장되어 있는 두 개의 비상(碑像: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을 조각하거나 또는 글을 적은 것) 중 하나로 1961년에 발견되었으며, 원래 위치는 연화사 부근의 생천사지(生千寺址)라고 한다. 4면의 돌에 각각 불상을 조각하고, 다른 돌로 대좌(臺座)를 만들어 놓은 형태이다.
앞면은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양쪽으로 나한상·보살상이 2구씩 놓여진 5존불(五尊佛) 구도이다. 본존의 머리부분에는 둥글게 연꽃이 새겨진 머리광배가 있고, 좌우로 구슬장식과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본존이 앉아 있는 대좌는 연못에서 솟은 연잎과 줄기로 표현되어 있다. 뒷면에는 본존불로 반가사유상이 표현되고, 좌우에 보살상이 꿇어 앉은 삼존불(三尊佛) 구도이다. 본존불은 사각형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오른손을 우측 뺨에 대고 왼손은 오른쪽 발목에 얹고 있다.
좌우의 보살은 향로를 들고 꿇어 앉아 본존불을 공양하고 있는 자세이다. 좌우 측면을 보면 위쪽에는 불상이 있고 아래쪽에는 卍자 무늬를 난간처럼 만들어 놓았으며, 그 위에 불상을 조각한 연도 등을 적은 글을 새겼다. 글에 나타나 있는 무인(戊寅)년은 백제가 이미 멸망한 이후인 신라 문무왕 18년(678)이므로 그 때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제650호 : 연기 연화사 칠존불비상 (燕岐 蓮華寺 七尊佛碑像)
제651호 : 익산연안이씨종중문적(益山延安李氏宗中文籍) 연안이씨 충간공종중
연안 이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로, 보물로 지정된 것은 조선 세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여러 유물이 있다.
이숭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 원년(145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성종 2년(1471)에 명량좌리공신으로 연원군에 봉해졌다. 1485년에는 우참찬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648년 도동사에 모셔졌고, 시호는 ‘충간’이다.
지정된 유물은 이숭원(1428∼1491)의 조부에서 손자까지 내린 교지 18매(보물 제651-1호), 공신록권 1건(보물 제651-2호), 공신회맹문 6책(보물 제651-3호)이다. 이것은 이숭원 가계의 연혁과 내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서지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제652호 : 병와유고(甁窩遺稿) 영천 완산이씨병와공파종회 외
조선 숙종 때의 국학자이자 실학의 선구자였던 병와 이형상(1653∼1733)이 남긴 원고본이다. 이형상 선생은 대 저술가로서 학문의 영역도 매우 넓고 깊어, 경학(經學) 및 성리학을 비롯하여 예학, 역사, 전기, 지리, 시문에 이르는 넓은 분야를 다루었다.
이것에는 그의 저서와 함께 그와 관련된 편지글, 임금이 내린 교지 등의 고문서와 인각(印刻), 기타 유품들이 포함되었다. 『선후천』 3책, 『악학편고』 3책, 『악학습령』 1책, 『강도지』 2책, 『남환박물지』 1책, 『탐라순력도』 1첩, 『동이산략』 1책, 『둔서록(8외십요소)』 1책, 『복부유목』 1책, 『정안여분』 1책 등이 있는데 각각 보물 제652-1호 에서 보물 제652-10까지 구분.지정되어 있다.
제653호 : 자수사계분경도(刺繡四季盆景圖) 서울자수박물관.
고려시대의 자수 병풍으로 전해오는 이 자수사계분경도는 형태가 조선시대 자수 병풍과는 다르다. 조선시대 것은 8∼12폭 이지만 이 병풍은 4폭이다.
무늬 없는 비단에 포도무늬의 분(盆)과 분재(盆栽), 연꽃무늬의 분과 꽃병이 수 놓아졌으며, 다른 2폭에도 매화의 분재와 꽃병에 나비 한 쌍씩이 배치되어 있다. 사찰을 상징하는 卍자가 수놓여 있어,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의 기법은 자련수가 많고, 분의 테, 포도잎 문양 등은 주위를 선수로 처리하여 윤곽을 뚜렷하게 하였으며, 솔은 솔잎 수로 처리하였다.
이 분경도는 중국 송나라의 분경자수 병풍에 비할 때 한국적인 요소가 뚜렷하며, 특히 꼰사수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한국 자수의 특징이며 색감도 안정적이다.
제654호 : 자수가사(刺繡袈裟) : 서울자수박물관
이 자수가사는 25조(條), 240㎝ ×63㎝의 크기이다. 가사는 4장 1단(4長1短)의 짜임새로 첫 단에는 부처불, 둘째와 셋째 단에는 보살, 넷째 단에는 경전, 다섯째 단에는 존자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흰색의 공단 바탕에 위의 그림들을 자련수·평수·선수 등의 기법과 노랑·주홍 등의 색상을 사용하여 정교하고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이 가사는 18세기 전기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가사 후면에 사람 이름이 있으나 생존 연대를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 전해 내려오는 가사로는 10여 점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이 가사는 전체가 그림자수로 되어 있어 특기할 만하다.
제655호 : 성주노석동마애불상군(星州老石洞磨崖佛像群) 칠곡군
거대한 바위면에 얕게 새긴 이 마애불상들은 통일신라 초기의 것이다. 중앙에 본존불과 본존불을 향하고 있는 좌우 협시보살이 표현된 삼존불(三尊佛) 좌상인데, 오른쪽 협시보살 옆에 작은 불좌상이 하나 더 배치된 특이한 구조이다.
본존불은 살이 찐 얼굴에 비해 작은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 균형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주름이 왼쪽 어깨에서 앞을 돌아 오른쪽 무릎 위에 이르는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형식적이다. 머리 주위로는 몸 전체의 빛을 나타내는 둥근 광배(光背)가 뚜렷하고, 그 주위에 새겨진 불꽃무늬들은 화려하다. 왼쪽 협시보살은 세부수법이 본존과 비슷하다. 가슴 앞에 표현된 U자형의 긴 융기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러한 표현은 4불상에 모두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발목이 서로 교차하는 자세로 우리나라 불상에서는 유일한 예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왼쪽과 거의 같은데 다만 왼손으로 연꽃봉오리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점이 다르다. 별도로 조각된 여래좌상은 본존불과 거의 비슷하다. 자세는 오른쪽 발을 내린 반가(半跏)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있지 않고 밑으로 내려 놓았다.
제656호 :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前獅子石燈) 충주
청룡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뚜렷하게 알 수 없고, 현재 절의 옛모습을 짐작해 볼 방법이 없다.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서 있을 뿐이며,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사자의 등에 얹어진 가운데받침은 기둥모양으로 4각의 낮은 돌을 두었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로 2개의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의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다.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제657호 :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磨崖如來立像) 서울 은평구
제658호 :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충주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옆에 국보 제197호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이 있는데, 이 탑은 팔각탑신< 八角塔身 > 부각면에 사천왕< 四天王 >인 듯한 조상< 彫像 >과 각 우주< 隅柱 >는 엔타시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표면에는 반룡< 蟠龍 >이 기어오르고 있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보각국사비< 普覺國師碑 >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제659호 : 백자청화매죽문병(白磁靑花梅竹文甁) 서울 이헌
중국 원, 명나라 도자기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청화백자는 초기에는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무늬와 형태를 보이지만, 이후 중국식에서 탈피하여 한국적인 특징을 갖추게 된다.
높이 33.2㎝, 아가리 지름 8.4㎝, 밑지름 9.9㎝인 이 작품은 매화와 대나무가 새겨진 청화백자로 술병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아가리는 바깥쪽으로 둥글게 말려있고, 짧고 가는 목을 거쳐 밑으로 지나면서 넓어지는 선은 우아하면서도 힘차 보인다. 굽이 비교적 높게 만들어져 균형미를 높여주고 있다. 그릇의 무늬는 서로 마주보는 곳에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그려 있는데, 솜씨가 능숙한 것으로 보아 궁중화가의 그림인 듯하다. 대나무 밑에는 한 줄기의 죽통(竹筒)이 높이 솟아 있고, 매화나무에는 꽃이 만발한 가지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유약은 투명한 유백색으로 고루 녹아서 광택이 있고, 투명하며 깨끗한 느낌을 준다.
이 병은 1967년 11월 경기도 시흥시 과천면에 있는 이해(李해)의 묘를 옮길 때 발견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우수한 작품이다.
제660호 : 최희량임란첩보서목(崔希亮壬亂捷報書目) 국립진주박물관
이것은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당시 흥양(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현감으로 있던 일옹 최희량(1560∼1651)이 당시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관찰사에게 왜적을 격파한 전과보고 문서들이다.
최희량은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전관으로 활약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의 부하로 있으면서 많은 전공을 세워 후에 원종공신에 올랐다.
원래는 따로 흩어져 있던 것을 공의 후손인 최기정이 서목의 뒤에 19절지로 배접하여 첩으로 만들었다. 이 첩책 표지에 최기정이 ‘최일옹파왜보첩원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각 문건마다에 백지 또는 붉은 종이를 표지로 붙여 내용분류를 쉽게 하였다.
이 문건의 내용은 현지에서 작성한 전과보고서로, 그 여백에 상관이 회답을 적어보내는 형태의 당시 공문서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또한, 왜적들과 싸워 크게 승전을 거둔 전말을 담고 있어 다른 기록에는 있지 않은 귀중한 사실이 이 서목을 통해 새로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