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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 Letter(194) 2017. 4. 15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부부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5-27)
만물이 소생하는 부활의 계절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소식을 전합니다. 대구의 낮 기온이 벌써 25-26도입니다. 겨울이 지난 듯 하였는데 여름이 온 것 같습니다. 물론 열대지방에서 고생하는 형제 자매들에게는 시원한 날씨에 불과하겠지만 고국에도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차일피일 하다가 부활절 메시지를 마무리하면서 함께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한국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잘 알겠지만 지난 3월 10일에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인용되어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그리고 3월 31일에는 여러 가지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개인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나누는 것은 부절적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자신의 지도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일에 유익을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배운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지도자의 선한 의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동기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탄핵 인용 결정은 <공직자 파면을 정당화할 만한 중대한 법 위반>이 있을 경우 한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입장입니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몇 가지 법 위반 사안이 '중대하다'고 했습니다. 헌재는 이 '중대성 '판단 기준으로 그 동안 박 전 대통령이 보여준 태도를 주로 지적했습니다. 그동안의 박 전 대통령의 행동과 자세를 볼 때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의 행위는 국민 신임을 배신한 것으로 헌법 수호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다”며 파면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도자의 선한 의지는 현재의 Fact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어떻게 행할 것에 대한 Desire가 관건입니다. 장차 그렇게 행할 선한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에 따라 선한 행동과 영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선한 의지가 없으면 여전히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통법규를 지키려는 선한 의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신호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의지가 없으면 노란불일 때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그렇게 반복하는 경우, 언젠가는 경찰 단속에 붙잡히게 됩니다. 노란불에도 정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정지하고자 노력합니다. 모든 경우에 선한 의지가 발동되어야 합니다. 헌법재판관 8명의 전원 일치 결정은 이런 관점과 분위기 속에서 박 전 대통령의 헌법 수호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상14:1-13 “그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13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여로보암은 많은 악을 행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비야는 비록 어린 왕자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선한 뜻을 품었기에 유일하게 묘실에 묻히게 되었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주님을 향한 선한 동기와 선한 목적과 선한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주님의 평강과 소망과 위로가 각 가정과 사역에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믿음의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벧전1: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시대적 배경
바울의 로마에서의 1차 투옥 무렵(62-64)에,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하였다. 수년 후 네로 황제의 박해로 순교하였다. 아마 그 전에 이 서신을 기록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 박해의 배경(현재 기독인들이 박해받는 원인과 동일시에 초점)
① 크리스챤이 함께 있으면 불신자들은 불편하다(uncomfortable) : 자신들의 삶이 저급하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너무 수준이 낮다. 기독인들은 빛이기 때문이다.(마5:16) 자신들의 어두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음란하고 방탕하고 욕심대로 행하고 싶은데, 빛이 되는 크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 자신들의 욕구대로 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부끄러움과 어두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군에 있을 때 동기생 20명의 카톡방이 연결되 있다. 때론 술 그만들 먹고, 남은 생애를 보다 진리와 경건함을 추구하며 살아보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간증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응답이 없다. 자신들의 삶에 비추어 볼 때 불편하기 때문이다.
② 지금까지의 살아온 종교적 pattern이 다르다. 우상숭배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우상은 자신들이 편의적으로 만든 신에 불과하다. 우상은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 불과하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조상들이 단순히 물려준 쓸모없는 무가치한 삶의 방식이다.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이유는 우상은 죽어있기에 자신들을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기에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고 때론 간섭하신다. 우리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걸음을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살아계시고, 우리의 가장 선한 길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없고 감독자가 없으면 편리하고 제멋대로 할 수는 있으나 마침내는 멸망의 길이 된다. 안타까운 사실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어느 한 사람도 대통령의 잘못된 국정운영과 방향을 조언하거나 간섭하여 줄 정직하고 충성된 참모나 멘토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은 파국과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목자와 보호자와 감독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신다는 것은 복된 것이다. 결코 우상은 죽어있기에 우리의 삶을 인도하거나 보호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은 부모가 어떻게 간섭할 수 있는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③ 네로 황제의 조직적인 박해(로마 대화재 사건의 원인을 기독인들의 방화로 돌림)
A.D 64.7. 19일 로마 대화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방화의 비난의 원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고 수없는 신자들은 체포하였다. 폭군 네로는 궁전 뜰에서 관솔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을 불태우고, 그 불빛 아래서 술을 마셨다. 네로는 모친 아그리피나의 간교로 A.D 54년, 제위에 오른 후 처음 5 년간은 유명한 스토아 파의 철인 세네카와 시위대장 브루스의 보좌로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59년 태후를 암살할 때부터 그의 포악한 본성을 드러내어, 왕후 Octavia, Burce, Ceneca, 시인 루가니스 등을 죽었다. 드디어 민원이 높아지고 반란이 일어나 68년 폭군은 궁에 방화하고 자살하였다. 이 박해의 여파가 그리스도인의 지도자격인 베드로와 바울에게 미쳤다. 바울은 로마 시외 5km되는 오스티안 가두에 마련된 단두대에서 참형의 처형을 받았다. 그는 로마시민권 덕분에 최악의 십자가 처형은 면하였다. 네로가 직접 그의 순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베드로는 바티칸의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자원하여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한다. 센키위츠의 쿼바디스(Sienkiewicz, Quo Vadis)에는 두 사도의 다정한 우정을 부각시키고 있다. 두 사도가 네로의 박해로 인하여 로마에서 순교하였다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여긴다.
<어떻게 믿음의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믿음의 시련과 박해와 핍박 가운데 어떻게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6vs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8vs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엄청난 핍박과 박해의 믿음의 시련(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이들은 기쁨에 넘쳐서 즐거워할 수 있는가?
-또한 이와 같은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가?
◾3vs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9vs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들은 구원에 대한 깊은 감격과 확신이 있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누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깊은 확신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감격과 소망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은 다시 태어났다.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1.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경험하고 살아갈 때 믿음의 시련들을 감당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루어진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인지 깨닫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구원,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①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계획된 구원이다(2vs)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결코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계획된 plan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되어 이루어진 구원이다.(개인 간증)
②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구원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통하여 우리가 순종하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게 하신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구원이다.(슥4:6)
개인적인 간증
(결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믿을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마음은 저주받은 마음이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③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됨으로 이루어진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입었다. 그 혜택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재앙을 내리실 때 문설주와 인방에 피뿌림을 받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보혈의 피를 얻게 된 모두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여기에 분명한 3위 일체의 교리(trinity)가 나타난다. 3위 일체는 Tertullian(160-?)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성자 예수님의 속죄와 피흘리심과 성령 하나님의 성결케 하심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참고: 엡1:3-5, 13)
◾제가 감명 깊게 보았던 사극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 때의 이야기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재미있었던 드라마이었습니다. 숙종에게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여자 친구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동이입니다. 나중에 숙종의 후궁(숙빈 최씨가 됨)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숙종의 본처인 중전이 죽게 되자 숙종은 후궁, 동이를 중전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분이 워낙 천민 출신(노비 출신)이라 신하들이 결사코 반대합니다. 그러나 왕은 동이를 중전에 앉히려고 합니다. 그러나 동이는 스스로 중전 자리를 포기합니다. 또한 숙종과 자신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나중에 영조가 됨)을 새로 맞이한 중전의 양자로 입양케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혼자서 궁궐 밖으로 나가서 어려운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며 함께 살아갑니다. 어느 날 숙종이 동이가 사는 궁궐 밖의 사저를 찾아갑니다. 그때 숙종이 동이에게 질문합니다. “동이야 네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느냐?” 동이의 대답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전하로부터 받은 사랑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동이야 나는 도대체 너에게 무엇이냐?” 동이가 대답합니다. “전하는 나의 전부입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전부입니다. 지금까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만으로도 넉넉합니다. 남은 생애를 온전히 주님께 모두 드린다고 하여도 부족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모든 어려움과 핍박과 환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할 양같이 천대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 -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현대어 성경)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날마다 주님의 사랑에 매여 살아갈 때 일생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환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넉넉히 제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2. 내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넉넉히 시련들을 감당할 수 있다.
8vs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지금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고난과 고통과 모욕을 참을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과 저주와 모욕을 넉넉히 참으셨다면 우리는 왜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위하여 고난과 믿음의 시련들을 왜 이겨낼 수 없는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5-7)
<개인 간증 인용>
1989년 11.20-22에 있었던 3일 동안 죽음에 직면한 사건을 통하여 주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고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형제 한 명(이정호)을 저의 집에 Home 생활로 징모했습니다. 이 형제는 자기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서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이 사건은 그 형제의 아버지에게 심각한 상처와 배신감을 안겨 주었고, 그 배후에 제가 깊이 관여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을 데려 갔다고 분개하여, 저도 죽이고 자신도 죽어버리겠노라 하면서 3일 동안 저의 집을 오가면서 위협하였습니다. 이 사건에 함께 동고동락하였던 형제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사실 저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일에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막상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죽을까 하는 것이 문제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이나 헌신의 마음도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사역을 위한 Vision, 형제 자매들을 위한 순교의 명분도 마음의 평안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이 저에게 큰 평안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죽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은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사역의 동기가 주님의 사랑에 이끌린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산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4-15)
18C 선교사역에 분수령을 이루었던 모라비얀 선교회의 진셀돌프 백작은 바로 고린도후서5:14-15절의 말씀에 의해 감동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여 모라비얀 교회를 창설하였고, 그것이 모체가 되어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 하였습니다. 모토는 한 가지 ‘오직 주님의 사랑’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모라비얀 성도들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요한 웨슬레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 결과 영국 선교의 활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마침내는 죽음의 순간에도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딤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이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라”
사람들이 감독의 직분을 얻고자 하는 선한 열망(good desire)에는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당시의 감독의 직분은 선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위험과 박해와 고난이 올 때 맨 먼저 감당해야 하는 위험한 위치에 있었기에 오늘날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의 직분을 얻고자 하는 선한 열망에는 ① 주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 ② 주님의 사역에 대한 순수한 동기 ③ 주님의 사명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없이는 감독의 직분을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나 지금이나 동일한 선한 열망이 우리의 명예로운 야심(honorable ambition)이 되어야 합니다.
3. 부활의 소망이 넘칠 때 현재의 어려움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
벧전1:3-4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산 소망은 무엇인가? 소망은 확실한 기대를 말한다. 막연한 추측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온전한 기대이다. 산 소망이란 언제나 계속하는 생명을 표현하는 말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생명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삶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소망은 언제나 우리의 삶 가운데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소망은 썩지 않는 것이다.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멸망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명예와 권력에 소망을 둔다. 모두 없어진다. 어떤 사람은 사치스러운 자동차를 구입하고 좋은 집을 사는데 소망을 둔다. 모두 썩어지고 더럽게 되고 없어지게 된다. 썩는 소망은 이 땅의 소망인 것이다.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언젠가는 모두 썩어서 없어지게 된다. 더럽게 된다. 멸망하게 된다. 이 땅에 있는 소망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은 영원하며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 영원한 하나님의 사람, 영원한 상급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어야 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영생의 소망이란 지금의 소망이 아니다. 영생의 소망이란 ‘말세에 나타내기를 예비하신 구원’(벧전1:5)을 말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게 될 칭찬과 영광과 존귀’(벧전1:7)를 말하며, 궁극적으로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말한다.(벧전1:9)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딛1:1-2)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7)
영생의 소망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산 소망을 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얻어진 선물이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 믿음의 핵심이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소망을 인하여 핍박을 받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행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다면 우리의 기독교는 진정한 능력과 매력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죽음으로 생의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간혹 어떤 이는 의인의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의인의 죽음은 칭찬의 대상은 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우리의 구세주는 될 수 없다. 경배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의로운 죽음으로 사람들에게 큰 영향과 감동을 주었다. 2001년 1월 26일, 철로에 떨어진 일본 사람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이수현의 죽음은 일본을 중심으로 추도 사업이 전개되어 왔다. 이에 고향인 부산 지역에서도 교육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의인 이수현 정신 선양회를 만들어 2006년부터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지금까지의 많은 의인들의 죽음과는 다르다.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부활하셨다. 부활하심을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다. 부활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가져다 주셨다.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절망과 고통은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파멸시키며 절망으로 몰아간다.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은 없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며 절망하며 좌절하며 오열한다. 3년이 지난 세월호의 참사는 아직도 유족들에게는 치유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절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죽음 저 편 너머에 새로운 세상과 생명이 있다. 바로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부활하여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계시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3-14)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망 없는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죽음의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는 이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는가? 부활이 소망과 영생의 소망이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본명은 김성화 목사의 간증에서 부활의 능력과 소망>
◆ 1938년 경북 대구 출생, 경북대 문리대 수학과 졸업, 경북대 교육대학원 교육철학 전공, 국제 불교문제연구소 해외홍보국장 역임, 대한불교정토종 교육국장 포교국장 역임하였고, 인도, 스리랑카, 태국, 자유중국, 일본 방문 및 수학을 한 혜경 스님이었다. 1984년 7월, 기독교로 개종하여 현재 총신대학원 졸업하여, 총신대 신학대학, 복음신학 비교종교 강사를 거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 그는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던 중 인생에 회의를 품고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되고 절 생활을 하면서 불교가 너무 썩은 것을 보고 더 회의가 생겼다. 그래서 불교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불교대학을 세우겠다는 꿈을 가지고 땅을 매입했는데, 신실한 불자라던 사기꾼에게 속았다. 결국 불교계 내분문제와 정치문제로 김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독방에서 염불과 참선과 불경공부로써 시간을 보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불경을 보기도 하지만 가끔 교도소 도서관의 화엄경, 법화경 등 불교의 여러 경전을 빌려보기도 하였다. 도서 대출 담당자는 이제 군복무를 마치려고 하는 대학 재학생 경비대원이었다. 언제나 친절하게 대출하여 주던 경비대원이 하루는 느닷없이 기드온 협회에서 나온 성경책을 가지고 왔다. 불경은 어떻게 하고 대출신청도 하지 않은 기독교 책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불경은 모두 대출되고 없어서 스님께서 심심하실 것 같아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스님은 화가 났지만, 기독교의 약점을 알려면 성경도 한번 읽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성경을 계속 읽었다. 그러다가 누가복음7:11-16절에 나오는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죽은 독자를 살리는 내용을 읽게 되었는데, 불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관이 되었다. 불경에는 3대 독자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한 과부가 죽은 아들을 안고 부처님에게 달려가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부처님은 “지금 아랫마을로 가서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 일곱을 찾아서 쌀을 한 움큼씩만 얻어다가 밥을 해서 먹이면 아들이 산다.”고 일러주었다. 과부는 너무 기뻐서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죽음을 맛보지 않은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실망하며 체념하고 돌아온 과부에게 부처님은 “그게 인생이다. 사람은 다 죽는다.”라고 말해 주었다. 감옥에 갇힌 스님에게 부처님의 말씀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버랩 되면서 스님은 예수님만이 참된 구원자이심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이분이 동국대 교수였고 주지스님, 혜경 스님이었고, 지금은 변화되어 목사로 활동하는 김성화 목사이다.
죽음에서의 부활은 모든 인류의 최대 소망이다. 결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살아있는 소망이다. 부활 때 우리의 몸은 썩지 않는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된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이와 같이 죽으면 썩어질 우리의 땅 위의 몸도 다시 살아날 때에는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병이 들거나 죽기 때문에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게 하지만 다시 살아날 때에는 영광에 가득 찬 몸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이지만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에는 굳센 몸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몸이지만 다시 살아난 뒤에는 영적인 몸이 될 것입니다. 자연적인 인간의 몸이 있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영적인 몸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의 기쁨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음의 원동력이며 생명입니다. 또한 삶의 이유이며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주님의 부활이 형제 자매들의 가정과 사역 가운데 평강과 기쁨과 소망이 되시기를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고딕 성당입니다. 3중 출입구의 아취 위에는 세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모든 즐거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왼쪽에는 “모든 괴로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정문 위에는 “영원한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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