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제자 카페에 들어갔더니 카페 화면에 뜨는 광고란에 바로 이런 광고가 났습니다. “댕댕이와 댕냥이의 한복” 이라는 광고가 나오고 그 광고 아래에 예쁜 한복을 차려 입은 강아지와 고양이 사진이 나왔습니다. 제가 이 광고를 보고 쓰디쓴 미소를 지었습니다. 참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참 재미있는 세상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댕댕이와 댕냥이의 한복 가격은 얼마나 될까 하고 찾아보았더니 15,000에서 38,000원대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사회 현상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왜 강아지를 댕댕이라고 하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댕댕이라는 말은 멍멍이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멍멍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강아지라고 알아먹습니다. 강아지가 멍!멍!멍! 하고 짖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멍멍이가 댕댕이가 된 것일까요? 멍멍이라는 글자를 조금 더 이상하게 쓰면 멍이 댕이 될 수 있습니다. 멍이라는 글자에서 “ㄷ”부분과 “ㅐ”부분을 따로 떼어 놓으면 멍이라는 글자가 댕이라는 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멍멍이가 댕댕이가 된 것입니다. 멍멍이가 댕댕이가 되니 비슷한 애완동물인 고양이는 자연스럽게 댕냥이가 된 것이겠지요. 요즈음 신조어는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댕댕이와 댕냥이의 한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나름대로 사람에게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완동물이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 줄 수 있고, 애완동물을 키우므로 사람에게 있는 사랑의 본성이 그 동물에게 표현되므로 사람의 본성을 만족 시키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우리에게 작은 유익이 있지만 그 애완동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이 지불해야 할 댓가가 크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애완동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의 시간을 거기에 투자해야 합니다. 또한 애완동물을 키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사료 값도 많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병원비도 들어갑니다. 또한 그 애완동물을 치장하는데 돈이 들어갑니다. 그래도 자기 자신이 좋아서 그런 것을 투자하는 것에 대해서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자원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어느 나라는 어떤 식량이 많이 생산되기도 하고 어떤 나라는 식량보다는 어떤 지하자원이 많이 생산되기도 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어떤 자원이 많이 생산되든지 그 나라가 선진국이 되면 그 모든 자원을 마음껏 구입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진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돈이 없기에 세상의 모든 자원을 다 구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후진국이 되면 자연스럽게 식량을 마음껏 구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들은 굶주리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진국들은 돈이 많이 있다고 모든 자원을 풍성하게 사용합니다. 강아지와 고양이에게도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사료를 먹입니다. 그런 만큼 세상의 자원은 선진국에서 많이 소비되고 후진국에서는 그 만큼 자원이 부족하여 굶주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제한 된 삶의 한계를 갖고 살아갑니다. 사람에게는 시간의 한계도 있고, 돈의 한계도 있고, 삶의 에너지의 한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에너지 가운데서 애완동물에게 쏟아 붓는 에너지가 많다 보니 정작 중요하게 쏟아 부어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쏟아 부을 에너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완동물을 사랑했다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상을 주실까요? 아닙니다. 사랑을 사랑하는 삶에만 상이 있습니다.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지혜롭게 살고 하나님 앞에서 다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멋진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