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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주몽의 진짜계보와 관련된 고대사 견해
1대단군왕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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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부루 단군 부소왕자(구려국왕) 부우왕자(번한왕)
부여왕자(부여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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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ㅣ 색정(흉노시조)
68대번한왕주한 15대 대음단군
오사달(몽골시조) 4대
오사구단군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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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69대번한왕
기후 ㅣ
ㅣ (흉노수유족
출신, ㅣ
------------------ 번한=기자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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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파불합장군(왜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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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조진무천황 47대고열가단군
48대해모수단군 ㅣ
(단군조선마지막단제) (북부여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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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대고두막단군 : 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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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 고우루 단군을
몰아내고
ㅣ 고진
졸본부여로 국호를 변경하였음
ㅣ
ㅣ 가섭원부여는 고우루의 동생 해부루가
------------------ ㅣ 북부여 변경에 새로 새운
나라였음)
ㅣ ㅣ
고모수 ====== 유화부인
ㅣ
51대단군고우루 해부루왕 ㅣ
53대 고무서단군
(북부여마지막왕) (가섭원부여개국) ㅣ
(단군칭호를 쓴 마지막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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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타발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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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ㅣ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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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 우태====소서노 ==== 동명성제 고주몽 =======
졸본부여공주
ㅣ ㅣ
ㅣ (고구려시조) ㅣ
대소
비류
온조 ㅣ 아달왕
(백제시조) 유리명제
(졸본부여마지막왕)
(고구려2대천왕)
이게 제대로 된 족보다. 물론 47대나 되는 단군조선~고구려건국 시대를 정리하려다보니 중요치 않은 단군, 왕은
다 빼고 혈통만 정리했다.
고구려사로 들어가기 전에 단군사의 핵심 포인트 몇개만 짚고 넘어가자.
첫번째 : 개마국이니 어쩌니 하는 상고사의 잡다한 나라들은 대체 뭐야?
단군조선은 진한,번한, 마한의 삼한 (당시에는 삼조선이라 불렀음)으로 이뤄진 국가이며 그 외각에 여러 제후국을
두었는데 이 삼한과 제후국은 왕자 및 유력씨족이 다스렸다.
만주의 진한은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단군과 귀족의 직할령이었으며 하나라와 국경을 맞댄 중원의 번한은 당연히
군사중심지였고,
한반도 유역의 마한은 여러공신들의 직할령이자 배후병참,자원 기지였다
그리고 이 삼한을 중심으로 여러 제후국, 분국이 있어 왕자나 유력씨족이 다스렸으니 다음과 같다.
파생씨족 통치국 필살기 영지위치
태자
- 부루 호가 최고통치자,진한직할 정통성 수도
아사달
3왕자-부소 응가
구려국 법학 내몽골
부우
노가 번한 의학 중원
부여 부여가
부여국 중재, 기마
만주서북부
5후족-신지씨 마가 중앙정치 제사
수도 아사달
고시씨 우가
청구국 농경
연해주
치우씨 웅가 남국 국방
번한지역의 군사국가
주인씨 학가
개마국 윤리
함경도
여수기 구가
예 행정 간도지방
1비족- 양가 : 단군의 베필을
배출하는 1순위 집단, 단 정치적 실권은 부여하지 않음
기타씨족은 한반도의 마한에 있었다.
두번째 : 기자 조선은 ?
기자는 중국인이 아니다. 조선인인 기후를 공구를 공자, 주희를 주자라 부르듯 성인으로 추앙하여 기자라 부른 것이다.
다만 기후가 고조선의 중앙 실력자는 아니었다.
앞의 도표에서 단군왕검의 제 2왕자 부소가 구려국왕이란 걸 이미 밝혔다.
번한이 중국인들과 전선을 맞댄 군사기지라면 구려국은 북방유목민과 전선을 맞댄 최전선 국가였는데,
당연히 매일 싸움만 할 수는 없고, 그 쪽 민족이 알고보면 다 우리 대쥬신의 방계인지라 법과 질서를 통한 교류, 협력이
잦았다.
단군의
차남 부소의 직계 후손인 구려국 왕족 색정이 훗날 흉노족의 시조가 되고
흉노족이 단군조선의 법도에서 자꾸만 이탈하여 무법의 길을 걷자 색정의 직계 후손이 흉노에서 이탈하여 쥬신
제국의 분국을 표방하는 수유족을 세우는데, 바로 이 시기가 중국역사가 공포로 기록하는 흉노족과 쥬신제국
출신 색정의 직계인 수유족이 분열하는 결정적 시기가 된다. (시조인 색정과 단군에 대한 신앙은 이어졌지만)
단군조선
후기에 흉노가 강성해지자 단군의 후예인 수유족의 수장 기후가
거의
명맥만 남은 북방전투국 구려국
땅에 자리잡게 되고, 대쥬신=단군조선의 남방전투국인 번한과 연맹하게 된다.
그러나 단군왕건의 3남 부우의 후손인 68대 번한왕 주한이 유유부단하여 단군조선을 방위하게 어렵게 되자,
기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번조선까지 아울러 통치하게 되고 아사달의 단군에게 번한왕으로 승인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북방경비국 구려국을 맡았던 왕검의 차남의 후손이 남방경비국 번한을 맡은
왕검의 3남의 나약한 후손을 밀어내고 단군조선의 남방, 북방 경비를 모두 책임지게 된 것이다.
기후는
맹렬기마족인 수유족의 무력과 단군 직계 후손으로서의 정통성, 그리고 통치력을 통해
나약해진
옛
구려국과 번한의 경계를 탄탄히 하여 북방 오랑캐와 남방 중화인들을 막아내었다.
특기할 점은 기후가 단지 무력만으로 단군조선을 지킨 것이 아니라, 법도와 윤리를 바로세워 번한을 재건함으로써
중화와 북방 오랑캐의 도발을 견뎌내는 내성을 길러냈다는 점이다.
기후가 기자로 숭앙받는 이유는 그의 무력이 아닌, 정치적 능력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단군왕검의 3남 부우의 후손을 몰아내고 번한을 재건한 단군왕검의 차남 부소의
후예
기후가 다스린 번한은
이후 여러대에 걸쳐 제국의 버팀목이 되었으나 결국 번한의 속국인 연나라 (중국 전국시대에 무시못할 파워를
가졌던 북쪽 국가)가 진시황에게 패망하면서 종주국에 망명해 온 위만의 무리들을 포용했다가
위만의 쿠데타로 무너진다........
(우거왕
고조선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반, 구라 반이다.
즉
고조선= 단군조선= 대쥬신제국 의 변방이었던
연나라 망명자 위만이 고조선의 국방을 전담한 번한=번조선을 쿠데타로 꿀꺽한 후 고조선의 법도에서 멀어져
문란한 통치를 거듭한 끝에 위만조선=말기 번조선이 한나라에게 투항한 것이다..
그때 고조선의 핵심인 진조선은 망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말기적 증세로 내홍을 겪은 끝에
북부여-가섭원부여-졸본부여- 고구려 등으로 재편하는 진통을 겪느라 중원땅 번조선=번한을 도울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고구려의 동정서벌은 삼한=삼조선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몸부림이었다. )
세번째 : 흉노도 우리거? 일본도 우리거?
계보표를 위부터 살펴보면 우선 오사달=몽골시조 라는 말이 보일것이다.
오사달은 3대 가륵단군님의 차손으로 장손인 오사구 단군님이 4대를 잇자 서북방으로 말을 달려 지금의 몽골족의
시조가 되신 분이다.
오사달님은 이미 있던 부족을 병합하여 몽골을 세운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 후손들이 몽골을 세운 케이스다.
징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했다고 하는데 이건 구라다. 몽골을 통일한게 아니라 몽골부족이 지금의 몽골 초원 일대의
유목민족을 통합시킨 것이다. 즉 몽골은 몽골지역 기마민족을 모두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 지역 기마민족 중의 미약한 소수분파였던 몽골족을 기반으로 일어선 테무진이 그 초원일대를 평정한 후,
그 휘하에 들어온 동질적 문화권 내의 모든 기마민족을 몽골로 통칭한 이후에 몽골족이 된 것이다.
더 쉽게 설명하면 한국이란 작은 부족이 있는데 이 부족이 아시아를 석권한 후
모든 아시아인을 한국인이란 이름으로 통합시킨 것... 이런 의미이다.
그리고
징기스칸을 상징하는 푸른 늑대는 바로 오사달의 환생을 말한다.
몽골 고어 학자인 물티바쿨 울란바토르대 교수는 푸른 늑대의 상고적 표현인 아올루시누에 대해 일본 민간전설인
아오시타누루 ( 아오이 이누 (푸른 개)의 고어)의 예를 들며 일본의 영웅인 미나모토 요시쓰네가 죽지 않고 대륙에
건너가 징기스칸이 되었다는 일본인들의 전설은 고대 탱그리 (=단군) 신화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아오시타누루 = 오사달
역사적 진실은 이런식으로라도 전승되는 법이다.
일본의 시조가 우리?
맞다. 위의 계보에 보듯이 쥬신제국 장군인 언파불합이 왜땅을 평정했고 그의 후손인 진무가 일본 땅에 최초의
문명을 개척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진무천황은 그냥 문명 전파자일 뿐, 제대로 된 나라 형태는 3세기 이후에나 생긴다.
온갖 미개부족 중에서 유력자로 부상한 가야계 왕족이 왜땅의 전설적 인물인 진무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 진무가
환생한 천황임을 선포하긴 했지만 실제 진무는 그냥 문명만 전파한 후 이후 행방이 묘연하고,
훗날 일본 역사가들은 기원적 600년 경에 미개지인 왜땅을 정벌한 언파불합 장군의 후손인 진무와, 진무의 이름을
빌린 왜땅 최초의 왕을 동일 인물로 간주하고 허구 속의 천황을 끼워넣어 역사를 엿가락처럼 늘렸던 것이다.
네 번째 : 삼한은 한반도에 있었던게 아닌가요?
앞서 말했듯이 단군조선은 진한,번한, 마한의 삼한 (당시에는 삼조선이라 불렀음)으로 이뤄진 국가이며
만주의 진한은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단군과 귀족의 직할령이었으며 중원의 번한은 당연히 군방중심지였고,
한반도의 마한은 공신들의 직할령이자 배후 병참, 자원 기지였다
문제는 진한과 번한이 망했다는 것이다.
진한은 내분 끝에 BC 239년 해모수님에 의해 평정을 되찾고 국호를 조선에서 북부여로 개칭하게 된다.
다만 단군의 정통성을 잇기 위하여 47대 고열가 단제를 몰아내고 BC 238년 48대 해모수 단제로 즉위하시게 된다.
국호는 바뀌었지만 단군의 정통성은 이어진 것인데 혈통상으로도 문제가 없었던 이유가,
해모수님이 40대 달음 단제님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이 해모수님이 너무 잘났던데 있었다. 해모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번한이 속주이던 연나라 유민 위만
이란 작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번한을 뻬앗고 위만조선을 세우니 이것이 BC 194년이다.
번한땅의 위만조선이 진한땅의 북부여에 충성을 바치기는 했지만 그 정통성으로 인해 내부 단결이 약화된 것이었다.
결국 BC 108년,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에 이르러 위만조선은 한나라에 무너진다.
여세를 몰아 북부여까지 침노한 한나라와 맞서 나라를 구해낸 의병대장이 바로 동명왕 고두막인데,
고두막은 단군왕검의 막내아들인 부여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북부여를 무너뜨리고 해모수의 증손자인 51대 고우루
단제를 쫓아낸 후 졸본부여를 세운다.
쫓겨난 고우루 단제가 가섭원 땅에 세운 나라가 바로 가섭원 부여, 또는 동부여라 부르는 나라이며 그 고우루의
동생인 해부루가 동부여 2대 황제, 해부루의 아들인 금와가 바로 동부여의 3대 황제 되겠다.
여기가 반환점이다.
BC 108년 번한 땅의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먹히고 같은 해에 진한 땅의 북부여는 고두막 동명왕의 손에 들어간다.
그럼 번한, 진한 땅의 기득권 층은 어디로 갔을까? 당연히 한반도에 위치한 마한 땅이다.
번한, 진한에 비해 뒷전에 밀려있던 마한의 입장에서는 이 유민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없었지만 그래도 한반도의
터주대감인데 너른 호남평야를 내 줄 수는 없는 일...
하여 마한에서도 남쪽 변두리인 경상도 지방을 내주게 되니 진한 귀족이 이주한 땅이 훗날 신라가 되고
번한 무사가 이주한 땅이 훗날 가야가 되는 것이다.
신라가 괜히 골품제가 성한게 아니었고 가야가 괜히 철제무기가 발달하고 김유신같은 장군을 배출한게 아니었다.
다섯 번째 : 주몽의 라이벌은 대소가 아닌 금와였다.
맨 위의 족보에서 알 수 있듯이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인 고진 장군의 후손인 고모수가 하백족의 공주 유화부인과
통정하여 낳은 아들이다.
문제는 해부루 왕이었다... 이 해부루 왕 또한 해모수의 후손이긴 한데, 아들인 금와가 양자였던 것이다....
해부루가 후사가 없어 고민했다가 두꺼비를 주워와 태자를 삼으니 그가 금와였다는 이야기가 괜한 전설이 아니다.
후사가 없어 적적하던 노인네가 잘난 양자를 들여 한숨을 돌린 그 때 공교롭게도 유화부인이 해모수의 혈통인
주몽을 안고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친척이니 궁에 두기는 했는데 피의 정통성 때문에 금와태자가 밀리게 생겼던
거라... 당연히 시비가 생겼다.
참고로 주몽은 BC79년 생, 금와는 BC 77년 생이다.
주몽이 대소랑 라이벌이었다면 꼬마대소랑 쌈박질 했다는 이야기인데 말도 안된다.
대소 이야기는 주몽이 동부여 땅에 두고 온 유리 왕자와의 라이벌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리 왕자는 동부여에서 아비 이름을 따서 주몽이라 불렸는데 이게 훗날 헷갈려서 주몽과 대소가 라이벌이었다고
잘못 전해진 것이다.
어쨌든
해부루는 고민한다.
금와가
비록 애가 없어 들인 양자지만 그래도 기른 정이 얼만데...
그런데 해모수의 혈통인 주몽이란 녀석까지 기어들어 왔으니 이를 어쩐다..
그리고 이 때 아마 금와파와 주몽파의 궁중암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주몽은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로 망명하게 된다.
기막힌 사실은 당시 졸본부여의 왕이던 고무서 단군도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무서 단군은 북부여를 무너뜨리고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 고두막 단제의 아들로 제 53대 단군이자 북부여 2대왕
이다.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 동명왕의 경우, 인물이 워낙 뛰어나 북부여를 무너뜨리고 해부루왕을 동부여로 쫓아낸
영웅이긴 했지만 단군의 혈통이란 증거가 빈약했다.
단군왕검의 막내아들 부여의 후손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2000년 전 이야기였거든..
그래서 나라의 힘은 강성했지만 정통 단군혈통인 해모수의 자손인 해부루왕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구석탱이에
동부여라고 살려뒀던 것이다.
그런 차에 해모수의 후손인 주몽이 망명해오니 이건 그야말로 찬스였던 것이다. 고무서 단군은 혈통적 권위 확보를
위해 냉큰 제 딸과 주몽을 결혼시키고 진짜로 사위가 아닌 아들인양 여기며 후계자 선언을 한다.
그렇게 후사를 세운 1년후인 BC 58년 고무서 황제가 꼴깍 승하하신다.
당연히 사위인 주몽이 졸본부여의 3대왕이자 54대 단제로 즉위를 하긴 하는데...
암만 해모수 혈통이라도 굴러온 돌이었다는게 문제였다.
졸본부여 기득권층은 황비인 졸본공주에게 들러붙어 주몽을 허수아비로 만들려 했고 이 졸본공주 또한 만만챦은
성깔인지라 남편을 제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다.
열받은 주몽, 동부여에서부터 가신그룹이었던 오이, 협보, 마리 등과 함께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이게 그만 실패로 돌아가고 주몽은 또다시 도바리를 친다.
그때가 BC 38년, 주몽의 졸본부여 황제 즉위 20년째 되는 해이다.
이때 도망쳐서 간 곳이 바로 연타발이 있는 곳이다.
연타발은 어마어마한 거상으로 국경도 무시하고 활약한 고대의 다국적 기업 CEO인데 그 딸인 소서노가 또한 걸작
인지라, 주몽이 괜히 연타발에게 간 것이 아니라 주몽이 일으킨 쿠데타가 아미 소서노와 몰래 통정하며 연타발의
힘을 빌렸던 작품이었다.
어쨌든 쿠데타가 실패했으니 졸본부여로 돌아갈 길도 없고, 젊어서 뛰쳐나온 동부여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연타발의
재력과 소서노의 수완, 주몽의 혈통으로 아예 나라를 만들어 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고구려이며 BC38년의 일이다.
한편
주몽이 도망친 후, 졸본부여에서는 졸본공주의 섭정 아래 주몽의 아들인
아달왕이
졸본부여 4대 왕이자, 55대
단제 (단제 칭호를 쓴 마지막 인물)로 등극하는데 당연히 꼭두각시였다.
문제는 이 꼭두각시가 병약하여 꼴까닥 요절한 것이다.
그러자 졸본공주는 금와왕과 정략결혼하여 졸본부여와 동부여를 통합해 버린다.
여기서
숫자계산을 몇 개 해보자.
우선 교과서에는 주몽이 BC58년생이며 만 스물한살 되는 BC3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써있다.
이건 착시현상 때문이다. 주몽은 BC79년생이며 만 흐물한살 되는 BC58년에 졸본부여 왕이 된 거다.
그리고 BC 38년 쿠데타 실패로 도망쳐서 BC 37년에 고구려를 세운것이다.
문제는 주몽의 당시 처지였다. 나라라고 세우긴 했지만 통일부여라는 강대한 적이 눈앞에 있다.
그런 그가 내세울 유일한 점은 바로 혈통 뿐이었다. 그리고 그 혈통을 내세우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해모수
였다. 왜 환웅이나 단군왕검이 아니냐고? 우선 환웅이나 단군왕검은 너무 오래전 인물이었다.
게다가 환웅시대는 혈통적 승계가 아닌 씨족, 부족간 돌려먹는 세습체제였고 단군왕검 시대도 22대 색불루 단제
이전까지는 단군의 후손과 우가 양가 등 유력씨족이 돌아가며 단제 노릇을 해먹었었다.
당연히 혈통적 시원으로 내세울 만한 가장 뽀대나는 인물이 바로 해모수였던 것이다.
문제는 해모수의 북부여를 계승한 통일부여의 존재였고, 국가적 정통성을 표방한 부여에 맞서기 위해 혈통적 정통성
으로 맞선 것이 바로 주몽의 고구려였던 것이다.
흔히
고구려사가 900년이라는 기록을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의 해답이 여기 있다.
고구려사 900년은 고구려사를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BC37년이 아닌 해모수가 나타난 BC 239년에 시작된 것으로
잡은 고구려 사가들 때문이다. 해모수라는 존재는 주몽의 모든 것이었고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고구려 사가들은 고구려와 대립한 부여라는 존재를 배제하기 위해 부여사를 무시하고 대신 해모수라는
혈통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부여 역사인 48대 해모수 단제~55대 아달 단제는 단군에서 빼버리게 되고
고구려의 천조 해모수~ 고구려의 국조 주몽으로 이어지는 족보가 고구려사로 등장한 것이다.
해모수의 5대손인 주몽이 해모수이 아들로 기술된 것도 해모수와 주몽 사이에 존재하는 북부여사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부여사를 계승한 것이 바로 백제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백제가 주몽을 부정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당연히 혈통적 정통성으로서의 해모수~ 주몽~ 온조 라인을 내세우긴 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고구려와의 차별성이 없다. 게다가 고구려에게 멸망한 부여국의 망명귀족 등을 포용하는 차원에서
부여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똑같이 해모수와 주몽을 섬기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쌈박질 한 이유는 고구려 on-ly 를 주장한 고구려와,
BOTH 고구려 AND 부여를 주장한 백제의 정통성 시비 때문이었다.
참고로 백제를 세운 온조는 소서노와 주몽의 혈통이 맞지만, 비류는 주몽의 씨가 아니다.
소서노의 전 남편인 우태와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인데 이 우태가 바로 금와왕의 사촌이다.
(해부루는 씨없는 수박이었다. 아마 우태는 금와가 해부루의 양자가 되기 전의 친가 쪽 사촌이었을 것이다. )
당연히 부여에 대한 애착이 강한 비류였을 것이고 그런 형님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한 온조는 고구려와 부여를
둘 다 표방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여섯 번째 : 주몽은 왜 해씨가 아니라 고씨인가요?
앞서 밝혔듯이 주몽은 결혼을 여러번 했다. 그 중에서 왕위를 이은 것은 예씨와의 사이에서 나온 유리명제였지만
실제 고구려 건국의 주역은 계루부의 수장이자 거부였던 연타발의 딸 소서노야말로 고구려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5부 ?
그중 전왕족이 소노부, 왕족이 계루부, 왕비족이 절노부.
요즘 드라마 주몽에서도 자주 나오듯이 연타발이 계루부 수장이었다는 것은 다들 알 것이다.
계루부는 원래 졸본부여의 토착세력으로 거대한 부를 가진 집단이었으며 나중에 소서노와 주몽의 결혼을 통해
고구려를 세운 집단이다. 당근 온조왕자의 후견새력으로 고구려의 중심에 서는 집단.
근데 생뚱맞게 예씨 소생의 유리가 들어오면서 사태가 급물살을 탄다.
계루부에 밀렸던 소노부는 유리에 올인하고 결국 태자 자리에서 밀린 온조는 열받은 엄마 소서노와 함께 한반도로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다. 이때 상당수의 계루부 출신들도 함께 남하하는데 계루부 사람들의 고향이 바로 졸본부여다.
당연히 백제에는 부여의 색깔이 많이 남게 된다. 백제왕족의 성씨가 괜히 부여씨가 아니다.
어쨌든 이 소노부는 2대 유리명제부터 5대 모본제까지 영달을 누리는데 계루부의 지원을 받은 고추가 재사가
쿠데타를 일으켜 모본제를 죽여불고 자기의 아들을 6대 태조왕으로 세운다.
이 때부터 소노부는 전왕족으로 밀리고 계루부가 왕족이 된다. 그렇다고 계루부 출신이 왕위에 오른다는게 아니고,
왕위에 오르려면 계루부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 된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바로 이 때부터 기존의 해모수를 이어 해씨를 표방하던 고구려 왕족은 계루부가 추천한 고씨로 성을 바꾸게
된다. 왜냐고? 해모수의 해씨는 동부여에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부루가 괜히 해부루가 아니다. 금와, 대소도 해금와, 해대소로 봐야겠지.
근데 계루부의 고향은 졸본부여거덩.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 고두막, 그 아들 고무서. 이 고씨로 왕의 성을 바꿀
필요가 있었던 거다.
주몽의 아버지 이름이 고모수이고 증조부가 고진인 것도 이때 바뀐 것이다.
주몽의 아버지 이름은 북부여 해모수 단제와 똑같은 해모수였고 증조부는 해진이었다.
주몽을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한 게 구라가 아니라 이름이 똑같았기 때문에 그런거다.
다만 해모수는 이미 고유명사화된 신성한 이름인지라 그냥 해모수로 남겨둔 거지... 결국 해주몽은 해모수의 자손인
것은 사실이지만 장인이었던 졸본부여 황족의 성씨인 고씨로 바뀌어 고주몽이 되버린거다.
죄다 주몽이 죽고 한참 후의 일이긴 하지만..
일곱 번째 : 일본과 주몽이 뭔 관계가 있어요?
왕을 만드는 막강집단 계루부를 이끄는 정통 씨족이 바로 연타발의 직계인 연씨이다.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로부터 동부대인을 물려받은거, 이거 그냥 받은게 아니다.
고구려 최강 계루부 내에서도 정통 씨족의 적자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26대 평원왕은 자식이 여럿이었는데 이 중에서 왕위 계승권은 적자인 영양왕과 영류왕에게 있었다.
후비에게서 난 자식이 평강공주와 태양인데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태양의 아들인 보장왕을 세운다..
이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평강공주 이야기를 살짝하자면, 평강공주가
어릴 때 한 약속 때문에 바보랑 결혼
했다는 건 넌센스다. 수도 평양에 거주하며 왕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라면 온달은 평민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인물은 준수한데 융통성이 없고 결벽하여 재물 모을 줄도 입신출세할 줄도 모르는 위인이라
당대의 귀족 사교계에서 바보취급을 받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평강공주는 바보랑 결혼하려고 왕궁을 뛰쳐나간게 아니라, 이복 오빠들인 영양, 영류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서
가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출한 김에 인물 훤하고 싹수가 있어보이면서 오빠들의 입김과 거리가 먼 영락한
귀족인 온달에게 올인해 버린 것이지. 그리고 온달을 기어이 출세시킨 것이고.
문제는 평원왕이 살아있을때는 떠오르는 스타로 갈채받던 온달 장군이 영양왕 즉위 이후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것이다.
사이도 안좋던 배다른 여동생의 남편..
온달이 10배나 되는 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죽은 후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뭘 암시할까?
대고구려가 군사가 모자라서 적의 10분의 1의 병력만 주고 출정시켰을까? 아니다. 그
냥 죽일려고 그렇게 내보낸 것이다. 당연히 온달은 억울했을 것이다.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전설도 그래서 나온거지.
안 그러면 용맹히 싸우다 전사하는 것이야 말로 장수의 명예일진데 뭐가 억울해서 상여가 안움직였겠는가.
어쨌든 이렇게 영양, 영류 형제와 평강공주, 태양 형제는 사이가 안좋았다.
문제의 인물이 바로 이 태양왕자다. 이 양반과 연개소문이 찰떡 궁합이었다.
연개소문이 괜히 태양의 아들인 보장왕을 왕위에 올린게 아니었다.
근데 이 태양왕자랑 연개소문이 일본황실 족보에 끼어들게 된다.
일본의 천황족보는 구라다.
죄다 실존 인물이었던 것은 맞지만 혈연관계나 연대는 다 틀리다.
1대 신무천황의 경우 수백년전 대쥬신제국 언파불합의 아들 신무왕의 이름을 빌린 케이스인데 이 신무천황부터
3대 안녕천황까지 AD 202년~269년은 가야계이다.
여기서 흔히 임나 일본부를 만든 신공황후, 비미호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여자는 천황 족보에는 없고 일본서기에는
나오는 이상한 여자다. 이상할 것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섭정이다.
그리고 출신은 마한 54국 중 하나인 비미국 출신이다.
비미국이 신라에 당하자 비미국왕 연오랑과 그 마누라인 신녀 세오녀는 가야로 도바리를 치고 가야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가야 왕자 한 놈을 꼬셔서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 왕자가 바로 가야 거등왕의 아들인 제 1대 신무천황이고 2대 천황은 신무천황의 여동생과 연오랑, 세오녀의 아들
경경서 사이에서 나온 수정천황, 3대가 수정천황의 아들 안녕 천황이다.
일찌감치 세상을 뜬 연오랑 대신 손자, 증손자를 감놔라 배놔라 한 비미국 신녀 세오녀가 바로 신공황후 또는
비미호로 알려진 그 막강 섭정이시다.
신공황후의 한반도 정벌 및 임나일본부 이야기는 며느리의 오빠인 신무천황을 가야의 왕까지 겸하게 만들려고
가야 땅에 군사를 파견했다가 싸워서 어떻게 해 볼 상대도 아니니 좋게좋게 해결하자고 가야와 평화협정을 맺은
후 조선시대 왜관처럼 무역중계점을 설치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이후로 11대 수인천황에 이르는 동안은 가야계를 중심으로 부여의 유민, 백제인, 신라인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
는데 한마디로 혈통적으로 이어진 왕조가 아니라, 수많은 왜땅의 부족국가 중에서 신라 도래인이 다스리는 부족이
강해지면 신라부족장이 왕이되고 가야인이 다스리는 부족이 강해지면 가야부족장이 왕이 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나타난 4세기가 되면 왜땅은 백제 세력에 의해 도배가 되는데
주로 태자나 똘똘한 왕자가 일본천황으로 일본을 다스리다가 아바마마가 승하하시면 백제로 돌아가 백제왕위를
이어받는 식이었다고 보면 된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너무너무 길다. )
그럼 백제는 왜 일본을 다스렸을까? 돈 때문이었다.
원래 백제가 있던 자리는 마한의 땅이었다. 마한이 백제에 속하게 된 후에도 마한 54국 출신의 토착 귀족들은 그다지
고분고분 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이야 고구려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우선 대부분 원래 진한-부여 땅이었던 고구려 땅에서는 해모수-주몽 이라는 혈통이 말빨이 먹혔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가장 막강한 5부와 친밀하게 지내면서 군소부족과 차별적인 특혜를 주어 5부가 군소부족을
견제하게 했다. 뭐 결정적으로 워낙에 군사강국이었던 탓에 칼로 억누른 것도 사실이다.
백제는 사정이 달랐다. 한반도의 마한 토착 귀족들에게 만주 땅의 영웅 해모수나 주몽의 혈통은 말빨이 먹히질 않았다.
그렇다고 무력을 함부로 쓸 수도 없는 것이, 쪽수가 워낙 딸렸다.
마한이 54개 나라로 갈라져 있어 굴러들어온 돌인 백제에게 일단 복종하고는 있지만, 마음 내키면 돕고 안 내키면
쌩까더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54개 부족이 똘똘 뭉쳐버리면 감당하기 힘들었거덩. 그래서 일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 경영은 두 가지 점에서 요긴했는데, 우선 일본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마한 귀족들을 구워삶는데 요긴했고
다음으로는 마한 주민들을 열심히 신세계 일본으로 이주시켜 마한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도 요긴했다.
백제가
일본을 경영하고 중국 각지에 치외법권 형식의 상업세력권을 둔 게 다
내부의 마한을 구워삶을 돈이 절실
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이를 모를리 없었다. 아직 쿠데타로 영류왕을 죽이기 전의 시점이었는데,
어차피 당나라와 결전을 치룰 정세에 발밑의 백제가 강성해서 좋을 일이 없었다.
하여 연개소문은 태양왕자를 꼬드겨 일본으로 보내고 백제 의자왕의 여동생인 황극천황 (훗날 제명천황으로 이름이
바뀜)과 결혼을 시킨다. 태양왕자야 아들인 보장왕이 연개소문의 후원 하에 고구려 왕이 되고 일본에서 낳는 아들은
일본천황이 되어 두 나라의 아빠가 될 터이니 땡잡은 장사였겠지.
근데 황극천황에게는 전남편 서명천황과의 사이에서 낳은 중대형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중대형 왕자는 엄마에게 불만이 많았다. 자기도 엄마아빠가 백제인이니 백제출신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세계화
시대인데 백제만 찾고 백제만 최고이며 정작 자기가 다스리는 일본의 미래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늘 사비성에만
마음이 가 있는 엄마가 짜증났던 것이다.
하여 가마타리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골수 백제마니아인 소가씨를 몰아내고 엄마를 내쫏고 외삼촌인 효덕천황을
옹립한 후 다이카 개신을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가마타리란 인물인데 이 양반이 바로 고구려의 태양왕자였던 것이다..
즉 의붓아들과 짜고 마누라를 몰아낸거지.
하지만 태양왕자의 본심은 중대형 왕자 체제가 아닌 자기와 황극천황 사이에서 나온 아들 대해인 왕자를 천황으로
세워 일본을 고구려 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고 조카인 중대형 왕자와 가마타리(태양왕자)의 눈치를 보던 효덕천황이 허수아비 노릇에
신물이 나서리 마누라인 황극천황을 복권시킨다. 이 때 황극천황은 이름을 제명천황으로 바꾸고,
오빠인 효덕천황과 공동통치를 하는 남매 천황시대가 시작되는데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망하자 대규모
지원군을 파병해 버렸으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책임을 물어 효덕, 제명천황은 이름만 천황일 뿐 중대형
왕자가 정권을 좌우하게 되며, 이듬해인 661년 외삼촌과 엄마가 죽자마자 스스로 천황이 되니 이가 바로
천지천황(텐지천황) 되겠다.
천지천황은 앞서 말했듯이 독립심이 강한 인사인지라 백제가 망하든 고구려가 망하든 쌩깠던 인물인데 그가 671년
사망하고 그 아들 홍문천황이 즉위하자 사태가 급변한다.
이 때는 이미 백제도 고구려도 망했던 시점이므로 태양왕자에게는 죽으나 사나 일본에서 자리를 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대해인 왕자를 내세워 어린 홍문천황을 쳐버리고 대해인 왕자를 등극시키니 이가 바로
천무천황(덴무천황)이다.
그러나 워낙 구 백제계의 파워가 세다보니 자기 아들이라고 대놓고 말하진 못하고 황극천황의 전 남편인 서명천황의
아들로 호적에 올리고 의자왕의 막내동생이던 효덕천황의 딸과 혼인시키니 이 딸내미가 바로 덴무천황의 뒤를 이은
지토천황이다.
참고로 덴무와 지토는 사촌지간이다. 일본이 천황이라는 호칭을 쓰게 된게 바로 이 지토천황 때 부터이며 가마타리는
후지와라라는 성씨의 시조가 되어 수백년간 왕비들을 배출하며 떵떵거린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일본이 사이가 좋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백제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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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ㅣ ㅣ
백제의자왕
32대효덕천황 ㅣ
ㅣ 태양왕자(가마타리)====31,33대황극천황(여자)======30대서명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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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ㅣ
37대지토천황(여자)============36대 천무천황(대해인) 34대천지천황(중대형)
ㅣ ㅣ
38대문무천황 35대홍문천황
일곱 번째 : 여진족은 또 뭔가요?
1편에서 단군왕검 초기의 3왕자 5후족과 이들이 다스린 분국들에 대해 이미 설명했다.
그 표를 다시 보자.
3왕자- 부소 응가 구려국 법학 내몽골
부우 노가 번한 의학 중원
부여 부여가 부여국 중재, 기마 만주서북부
5후족- 신지씨 마가 중앙정치 제사 수도 아사달
고시씨 우가 청구국 농경 연해주
치우씨 웅가 남국 국방 번한지역의 군사국가
주인씨 학가 개마국 윤리 함경도
여수기 구가 예 행정 간도지방
부소
왕자의 구려국은 북방의 국방을 맡았던 기마군사국이었는데 나중에는 흐지부지 없어졌다가 훗날
고구려가 그
이름을 이어받게 된다.
고구려는 고씨가 세운 구려국이라는 의미쥐. 부여 땅, 부여 세력에 기반하여 나라를 세웠지만,
아무래도 강건한 기마집단임을 강조하기 위해 숭무적인 북방 왕자국 구려국의 이름을 빌렸으리라 추측한다.
부우 왕자의 번한이야 당연히 중국 쪽에 있던 거대한 땅을 말한다.
이건 분국이나 거수국이 아니라 마한,진한,번한의 3조선으로 나눠진 고조선연방의 3분의 1이라고 보면 된다.
부여 왕자의 부여국은 중간에 없어지는데, 훗날 해모수의 북부여, 고두막 동명왕의 졸본부여 등으로 다시 살아난다.
치우씨의 남국은 딱히 정해져 있는 국가가 아니라 고조선의 국방을 책임진 번한 땅에 위치한 군사국가였다.
나중에는 그냥 번한과 섞이게 되고 번한이 망하면서 같이 망한다.
주인씨의 개마국은 계속 살아남고 단군조선이 망하자 독립국가 행세를 하다가 고구려 건국 즈음에는 함경도 지방에
새로 일어난 동예 옥저에 밀려 압록강 유역까지 밀려났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병합당한다.
여수기의 예국은 예맥과 통하긴 하는데 꼭 같지는 않다.
환인, 환웅 시대에 우리 민족이 환국-배달국으로 세를 넓히며 여러 부족을 통합할 때 통합된 여러민족을 통칭하는
개념이 바로 예맥족이다. 예맥족이란 개념에 배달민족이 포함되는 거죠. 여수기의 예국은 예맥족에서 배달개념을
뺀 사람들의 나라를 칭한다. 분명 우리 민족이기는 하지만 중간에 편입된 민족이죠.
이 예국은 국가로서는 오래 가지 않는다. 단군조선이 안정되면서 그렇게 따로 거수국으로 분류할 필요가 없이
그냥 단군의 민족으로 섞여버렸거덩.
여기서
문제가 되는게 고시씨의 청구국이다.
청구국은 숙신으로도 불리는데 상당수의 역사가들은 이를 별개의 나라로 보지만 실은 같은 나라가 이름만 바뀐
것이다.
이 숙신은 지금의 연해주 지방에 있던 나라로 제국의 동쪽 변방인데다가 기후조건이나 토양등이 참 살기 괴로운
동네다.
당연히 애들이 좀 거칠기도 했고 오지랖이 넓기도 했다. 그러니까 분명히 우리 민족이 맞기는 맞는데, 아웃사이더
노릇을 자청한 애들이었고 단군조선의 질서에 정착하기보다는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막 싸돌아 다니던 무리
였다고 보면 될 거다.
그나마 단군조선이 무너지자 국가 개념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그저 무리를 지어 다니는 야인의 무리가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고구려 시대에는 말갈로 불리게 된다.
얘네들이 오지랖이 얼마나 넓냐면, 일단 국경 개념이 없으니까 동해안을 쭉 따라서 연해주에서 부산까지 막 돌아
다닌다. 다만 제국의 고구려의 중심인 만주지역이나 백제 땅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주로 연해주, 함경도,
강원도 일대를 쏘다니는 거쥐.
이 말갈족은 결국 고구려에 편입이 되기는 한다. 다만 말갈족 전체가 고분고분한 신민이 되었다는게 아니라,
말갈의 여러 무리 중 유력한 부족장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유사시 병력을 동원해주는 체계였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게 그렇게 싸돌아다니면서도 감히 고구려에는 피해를 안주고 애꿎은 옥저,
동예를 괴롭히거나 날씨 추우면 남하해서 신라, 백제 등을 괴롭혀주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지.
그럼에도 종종 또라이같은 몇몇 부족이 괜히 심통을 부리며 반항을 할 경우에 진압을 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말갈과 싸웠다는 기록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다 나오는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말갈족은 나중에 발해에 완전히 묶인다. 말갈이란 민족이 따로 있었던게 아니고, 먹고 살기 힘들어 유랑하는
무리를 일컫는 말이었던 만큼, 고구려 멸망 후 나라를 잃고 떠돈 옛 고구려 피지배계급의 대다수가 말갈이라고
봐도 될 거다. 그런데 옛 고구려 지배계급이 다시 발해를 세우자 말갈은 발해의 피지배계급을 일컫는 말이 된다.
이 때의 말갈족은 나름 고분고분했다고 보면 된다.
죄다 말타고 싸돌아 다닌게 아니라 농사 지으며 정착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이 발해가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망하고 발해의 유민인 말갈족은 또다시 옛날처럼 떠돌게 된다.
그런 이들을 다시 묶어 세운이가 바로 신라인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의 신단민사를 그대로 인용한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근데 왜 하필이면 발해가 아닌 신라의 종실 밑으로 뭉쳤을까? 왜냐하면 발해 지배계급은 더 이상 만주 땅에 살지
못하고 거란족에게 죽거나, 생포되어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죄다 고려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들을 후대하지.
그리고 그 무주공산으로 간 것이 망한 신라의 왕족 김극수였던 것이다. 신단민사에도 약간 착오가 있는데,
김극수는 김준의 아들이 아니다.
본인이 바로 김준이지. 그리고 사실은 김준이 아니라 금준이 맞으며 원래 출신은 왕족 출신의 승려였다.
그리고 이름은 함보다. 극수는 퇴계, 율곡과 같은 호이다.. 즉 전 금준법사이던 극수 김함보 님께서 신라를 떠나
만주로 가게되고 거기서 말갈, 즉 여진족과 혼인하면서 한 부족을 이끌게 된 것이다. 기록을 좀더 살펴보면 이러하다.
금나라의 실록인 『금사(金史)』: 금나라 시조는 그 이름이 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 『金史』本紀第一「世紀」)
남송 때 저술된 북방사인 서몽신의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
남송 때 금나라 견문록인 홍호의 송막기문(松漠紀聞) :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이다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이
김함보의 증손이 바로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이다. 그런데 김함보는 신라가 망하면서 북으로 간 사람이 아니다.
바로 견훤의 서라벌 기습 이후에 북으로 간 사람이다.
김함보는 김씨 왕족이었는데 이 김씨 왕족들의 배반과 전횡에 치를 떨고 나라를 등진 인물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927년 견훤이 서라벌을 급습하여 경애왕은 자살하고 경순왕이 등극하는데 이 경애왕이 박씨
였고 경순왕은 김씨였던 것이다.
즉 견훤이 박씨인 경애왕을 치도록 김씨 왕족들이 방조 또는 내응한 것이다.
승려였던 금준법사 김함보는 이 매국적 사태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경순왕 즉위 이후 북으로 간다.
이때만 해도 김함보가 완전히 나라를 등진 것은 아니고, 복귀할 날을 기다리며 강원도 일대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수년 후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며 나라를 꼴랑 내주자 희망을 버리고 만주로 완전히 떠나버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씨들이 짜증나서 나라를 떠났던 그가 성공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가 김씨였기 때문이
었다. 뭔 소리인가 하면, 이 김씨의 시조가 바로 신라의 김알지이다. 김알지의 후손들이 박씨와 석씨를 누르고
신라의 왕위를 이어가기 시작한게 4세기다. (그 이전에 뽀록으로 한 명 있기는 했다. 미추왕이라고..)
앞 장에서 고조선의 진한 귀족들이 망명하여 세운 나라가 신라고 번한 무사들이 망명하여 세운 나라가 가야라고
설명했었다.
근데 더 따져들어가면, 진한 망명 귀족 출신은 김씨 뿐이다. 박씨와 석씨는 그 동네 토착 세력들이었다.
신라 초기에는 이들이 왕을 해먹고 진한 출신의 망명 귀족들은 고조선의 수도 출신들답게 세련된 메너와 신지식,
기술들로 또다시 귀족 질을 해먹었던 거쥐. 그리고 결국은 토착세력인 석씨 왕을 몰아내고 박씨와 결혼 동맹을
통해 김씨 왕국을 세운 것이다. 즉 고조선 귀족이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쥐.
믿었던
고구려도 발해도 망한 여진족들에게 있어서 김씨 성을 가진 김함보야 말로 옛 고조선-진한의 정통을 잇는
고귀한 피였던 것이었다. 게다가 실제 왕족이기도 했으니까. 그 혈통에 눈독을 들인 유력 족장의 딸과 결혼을 한
후 부족을 잇게 되고 그 후손이 다른 부족을 다 통합하여 세운 나라가 바로 금나라인 것이다.
이들은 성씨를 완안으로 바꾼 후 중원의 송나라를 압박하여 남쪽으로 쫓아버리고 조공까지 받는다.
이렇게 대단한 나라가 고려만은 침공하지 않고 형제국으로 맹약을 맺은 이유가 다 동족이라서 그런거다.
고려가 옛 신라 땅인 영남지방 사람들을 후대하고 옛 신라 왕실의 후예들을 계속 중용한 것도, 처음에는 예우 차원
이었겠지만 나중에는 신라 왕족 출신인 금나라와의 우호를 위해서 그리한 측면도 있다.
후에
묘청이 금나라를 치자며 서경 천도를 주장할 때 신라왕족의 후손인 경주 김씨 김부식이 이를 진압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김부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금나라는 위협이 아니라 구 신라계의 빽이었거덩.
오히려 서경 천도를 운운하며 과거 고구려로의 복귀를 선동하는 묘청은 진압대상이었구.. 이미 김부식 때 쯤 되면
애초에 고구려를 승계했다며 건국한 고려는 고구려보다는 신라에 가까운 나라가 되어 있었던 상태이기도 했으니
굳이 고구려정신을 외칠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렇다고 그의 삼국사기마저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신라 중심의 사관이 개입되어 있으니 고구려사에 대한 축소는 필연적이었을 테지...
결국 김부식의 한계는 웅혼한 민족사의 정통성을 고구려에 빼앗기기 싫어 자기의 출신인 신라사로 한정 시키기
위해 축소, 왜곡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여덟번째 : 일본 천황 뿐 아니라 어지간한 유력가문은 다 한국계라면서?
주몽 족보와는 별 상관없지만, 민족사의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일본 무사가문에 대해 서술해준다.
일본 유력 성씨는 후지와라씨, 다이라씨, 미나모토씨의 3성씨를 들 수 있다.
나중에 나오는 오다 노무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뿌리도 다 여기에 있다.
우선 후지와라씨... 앞서 말한 고구려 평원왕의 막내 왕자인 태양이 일본에 건너가 나카도미노 가마티리(중신겸족)
라는 이름으로 다이카 개신을 이루고 하사받은 성씨가 바로 후지와라다. 누군지 모르겠거덩 인터넷 검색창에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라고 쳐보기 바란다. 일부 철없는 애들은 이 후지와라씨가 백제계이며 너무 권세를 부리다가
대해인(덴무천황)에게 죽었다고 떠드는데 그건 후지와라씨가 아니라 소가씨 이야기이며 대해인이 아닌 중대형
왕자(덴지천황)와 가마타리(태양왕자)에게 죽은 거다.
이
후지와라씨는 계속 왕비를 배출하며 섭정정치를 통해 500년간 영화를 누린다. 어찌나 호화롭게 살았던지 이들
덕분에 일본의 귀족문화가 꽃피우게 된다. 문제는 천황가였다. 워낙에 백제기득권의 아성이 강하여 후지와라씨도
백제계인 양~ 하며 살기는 했지만 뿌리를 더듬으면 엄연히 고구려계..
근데 왕비배출을 이 후지와라씨가 독점하다보니 영원한 조국인 백제의 색채가 점점 옅어지는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일본의 고유문화라는거 별거 아니다. 백제의 화려함에 고구려의 웅장함이 가미된 양식이고 여기에
당나라 문화까지 섞인 것이다.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 문화를 알고 싶으면 6~12세기 일본 문화재에서
백제적 요소와 당나라적 요소를 뺀 부분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얼마전
일본천황이 환무천황을 들먹이며 환무천황의 엄마가 백제계라서 친근감을 느끼고 어쩌구 하던데 좀
생뚱맞지 않던가? 원래부터 백제계인데 왜 9세기 초의 환무천황만 이야기하는걸까?
왜냐하면 거의 유일하게 고구려계인 후지와라씨 가문이 아닌 토종백제계 여인이 낳은 천황이 환무천황이기
때문이었다.
이
50대 환무천황에서 52대 사가천황에 아르는 시기가 천황을 압도하는 후지와라씨를 견제하고 왕권을 늘리려고
몸부림치던 시기인데 환무천황과 사가천황이 친 사고가 바로 다이라씨 (平씨=헤이케)와 미나모토씨 (原씨=겐지)였다.
헤이케
즉 다이라씨는 환무천황이 다섯째 아들에게 내려준 성씨이고 겐지
즉 미나모토씨는 사가천황이 왕자,
왕녀에게 내려준 성씨이다.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열어제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츠네 형제 알쥐?
얘들이랑 대립했던 세력이 바로 다이라노 기요모리 등 헤이케 가문이었고...
한마디로 후지와라씨의 귀족정치를 이어 무사정권을 탄생시킨 것이 바로 이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였던 것이다.
천황의 혈통이니 당연히 한국계라고 할 수 있고.. 다만 순수 백제계였던 환무천황에서 분파된 다이라씨는 당연히
백제계와 친했고 사가천황에서 분파된 미나모토씨는 고구려계인 후지와라씨랑 친했었다.
고구려계라고 해도 이때쯤 되면 그냥 백제계에 가깝기는 하지만..
어쨌든
후지와라씨가 몰락하고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의 한판 싸움에서 미나모토씨가 승리를 거두게 되고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게 되는데 이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마누라인 호죠씨 가문이 찬탈해 버린다.
여몽 연합군이 쳐들어갔다가 카미카제로 익사했던 때가 바로 이 호죠씨의 가마쿠라 막부 시대였다.
가마쿠라 막부가 망한 후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씨도 미나모토씨에서 분파된 가문이다.
이 아시카가 가문 말기가 그 유명한 일본의 전국시대인데 이 때 나온 내노라하는 다이묘들의 대부분이 호죠나
미나모토, 다이라씨의 분파라고 보면 된다.
오다
노부나가는 다이라씨의 방계 가문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뿌리는 미나모토씨다. 왜 성이 다르냐고?
그게 일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원래는 마츠다이라씨였다가 나중에 바꾼거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생뚱맞게 풍신수길을 평수길로 호칭한다. 그 외에도 어지간한 일본인은 죄다 그냥 평씨
라고 부른다. 왜그랬을까? 우선 첫째로 평씨 그러니까 다이라씨의 권세가 짧지만 굵었기 때문이었다.
미나모토씨에게 밀렸다고는 했지만 다이라씨만큼 외국에 알려지게 위세를 부린 가문이 또 없었다.
오죽하면 다이라씨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라는 말까지 있었을까.
둘째로
풍신수길 스스로 다이라씨를 자칭하기도 했다. 풍신수길은 원래 족보도 없는 미천한 출신이다.
그러다가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고 결국 오다가의 가업을 계승하여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지. 그러다보니 오다 가문처럼 다이라씨의 방계 혈통이라고 구라를 쳤던거다.
그런 탓에 조선에도 평수길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뭐 이때쯤 되면 지들이 백제 기원인지 고구려 기원인지를 따지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게 또 꼭 그런것은 아니다.
무슨 소리인가하면, 메이지 유신 이후 정권을 거의 독점하며 결국 한국을 병합한 사쓰마번 죠슈번을 살펴보잔 말이다.
사쓰마번은 시마즈 가문, 죠슈번은 모리 가문의 나라였다. 그런데 이 시마즈, 모리 가문이 미나모토, 다이라, 후지와라
등 한국계 유력성씨와 상관없는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가문이었다. 왠만한 다이묘는 죄다 저 성씨에 속하는 판에
그렇게 관계없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사쓰마번은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배출했고, 죠수번은
이토 히로부미를 배출한 번이다. 훗날 사쓰마는 해군, 죠슈는 육군을 독점하며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주도한다.
출신도 불분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미나모토, 다이라, 후지와라 등 백제/고구려계 천황가에서 파생된 유력성씨와
동떨어진 시마즈, 모리씨의 후예...
조선과 국교를 맺으며 우호관계를 계속한 미나모토 씨의 후예인 도쿠가와 막부와는 너무 대조되는 모습 아니던가?
시마즈, 모리의 사쓰마, 죠슈번 출신 군벌들의 광란으로 결국 원자폭탄을 맞게 된 일본...
그리고 이 A급 전범들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야스쿠니 참배를 거부했던 천황... 이게 과연 우연이라고 보여지는가?
본인들이 의식을 하던, 하지 않던 이렇게 피라는게 무서운 것이다.
한단고기에 관하여...
우선 한단고기의 저자인 계연수라는 분에 대해 알아보자면..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이다.
수안계씨가 원래 고려말 명나라에서 귀화해 온 중국의 성씨인데 그 계씨가 중국을 단군조선의 노예노릇을 한
나라로 묘사하는 한단고기와 같은 책을 쓸 수는 없는 일이쥐.
그런데 일본인이란 건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고?
이는 일본의 뿌리가 바로 대동이 쥬신제국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시야를 넓게 봐야 제대로 보인다.
다들 알다 시피 일본 천황은 백제의 후손이다. 그런데 이 일본 천황은 오랫동안 실권을 빼앗기고 궁색하게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천황을 찬밥 취급한 도쿠가와 막부가 한국계인 미나모토씨의 후예라는 점이다. )
문제는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중심의 근대일본을 열어제낀 메이지 유신의 중심세력이 한국계 유력가문과 별
상관이 없는 사쓰마, 죠슈번이었다는데 있었다.
이 때부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당시의 제국주의적 질서에 편승하여 한국을 무력강점하고 식민화시켜야 된다는 사쓰마, 죠슈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뿌리를 가진 동족임을 강조하며 진지한 우호 관계를 강조하는 천황가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천황의 의지를 피력하기엔 사쓰마, 죠슈의 파워가 너무 강했고 결국 이들을 견제하려는 절충적 흐름이 바로
동조근원론이었다.
즉 한국과 일본의 통합을 인정은 하되, 어디까지나 병합이 아닌 대동이 민족의 통일로 가져가야 한다는 흐름이
그것이었다.
사쓰마 죠슈 중심의 강경파 군부 세력이 이 절충안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그랬을 뿐이었다.
한일은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라는 내선일체론이 차별과 핍박으로 얼룩진 허위와 기만이 된 이유가 천황의 뜻을
거스르고 조선인을 억압한 이 군부의 망동때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천황가를 중심으로 동이민족 통일의 타당성을 밝히기 위한 상고사 정리 작업이 이뤄지게 되고 이를 위해
일본, 만주, 조선 등에 흩어진 상고사 사료의 수집, 정리 작업이 이뤄지는데 그 편찬자가 바로 계연수 선생이다.
계연수(桂延壽)는 한국 이름이 아니다.
원래 이름은 가쓰라 하나모토(桂花本)이며 연수라는 이름은 어린 시절의 아명, 또는 별명인데 이 연수(延壽-엔쥬)는
무병장수하라는 의미의 일본 엿이름이다.
계화본이라는 이름으로는 한국에서의 활동에 지장이 많기에 어린 시절에 쓰던 연수라는 이름을 써서 계연수라고
말한 것이다.
이 양반은 일본 궁내부 서고 담당관리인 가쓰라 미치무라의 아들로 이미 어릴 적에 한국어와 역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사료 수집을 위해 한국에 보내진 인물이다.
한국어에 통달하여 다들 한국인으로 알았으나 사실은 일본인이다. 이 계연수 선생이 쓴 책 한단고기는 한일동조론을
불온사상으로 본 일본군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1911년 곧바로 출간되지 못하고 제자인 이유립 선생에 의해 일본
으로 보내진 후 카시마 노보루에 의해 번역된다.
계연수 선생은 1920년에 피살되는데 다들 일본밀정에 의해 죽었다고 알고있지만 사실은, 계연수 선생이 일본인
이고 천황가의 위탁으로 그 책을 썼다는 사실이 밝혀져 홍범도 장군이 보낸 독립운동가의 손에 죽은 것이다.
어쨌든 한단고기 자체의 출간은 미뤄졌지만 환인-환웅-단군-해모수-주몽-온조-일본천황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정통성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고 일선동조론(일본 조선의 조상은 같다는 주장)은 힘을 얻게 된다.
그러자 사악한 일본 군부는 이를 악용하기 시작한다.
즉 대동이제국의 옛 강역을 되찾는 다물대업이라는 명분으로 천황에게 만주침략을 승인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문제는 군부가 천황이 내건 조건을 어겨버린데 있었다. 이때 천황이 내건 조건은
1. 만주에 세우는 국가는 우리 민족의 갈래인 청나라 황제를 정통으로 세워 대동이의 우호를 굳건히 한다.
2. 우리 땅인 만주를 회복한 이후에는 더 이상의 무력분쟁을 중단한다.
3. 향후 일본, 조선, 만주인이 모두 같은 민족임을 명심하여 하등의 차별이 없게 한다.
이 세가지 였는데 1번의 청나라 황제 부의를 옹립한 것 말고는 죄다 어겨버리게 된다.
이때의 군부는 천황도 제어하지 못하는 망나니 집단이었다. 지들 맘대로 천황이름을 팔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상이하 국가 원로들을 벌집으로 만드는 등 개판이었던 것이다.
이때쯤 되면 군부 스스로 일선동조론,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그 근본적인 뜻을 왜곡, 악용한다.
참고로 여진족이 우리 민족이고 금나라 왕실이 신라왕실을 후예임은 이미 설명했거니와,
후금 즉 청나라 또한 마찬가지였고 청나라 황제의 성씨인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하고 각별히 여기라는 의미임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때 천황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국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위무뿐이었다.
이미 천황의 정통성 따위는 무시한 채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만들겠다는 좌파 독립운동 세력은 대동이제국이고
뭐고가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조선내에서 천황의 우군이 될만한 인재는 우파들 뿐이었다.
이를 위해 우파 민족주의 세력을 설득하며 왜 천황이 유일한 단군의 현손인가를 설명하며, 한일의 현실을 옛 단군
조선의 강역을 회복하는 대업으로 인정하고 군부에 의해 저질러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를 위해 협력할 것을
설득하고 다닌 인물이 바로 궁내부 고위 관리였던 마츠다이라노 야부키노스케였다.
야부키노스케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약속했다.
1. 곧 군부의 광란이 한계에 다다를 것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민중과 천황폐하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2. 그때가 되면 현재의 모든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고 일본-조선-만주의 3국의 연방제 형태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3. 새로운 제국의 수도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으로 할 것이며 당연히 천황폐하도 마음의 고향인 평양으로 복귀하실
것이다.
4. 각 연방국의 언어는 각자의 자율에 맡기되 공용문자는 한글로 한다.
일제말기 수많은 우파 민족주의 세력들의 이른바 변절은 변절이 아니라, 보다 웅대한 민족사 재건을 위한 협력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군부는 이 협력을 악용하여 우파 세력을 회유 협박하며 자기들의 무모한 전쟁을 옹호하고 정신대
동원, 학병 지원등을 독려하게 강요했던 것이다.
자, 지금꺼까지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다. 이 긴 글들이 주장하는 바를 설명하고 마무리 하겠다.
환인-환웅-단군시대 도합 약 7000년의 역사를 이어 북부여를 세우신 해모수 단제님의 정통현손 주몽성제께서
고구려의 하늘을 여시고 주몽성제와 소서노어하라님의 아드님이신 온조대황제께서 백제의 바다를 여시메
천하의 중심을 선포하여 하늘과 땅, 바다를 아우르다가 7세기경, 황토족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의 협잡으로 광활한
만주벌판을 잃고 환인-환웅-단군-해모수-주몽-온조의 피를 이은 정통 하늘님이신 천황께서는 일본으로 이주하
시어 1000년을 넘게 권토 중래를 모색하시었으니 결국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대동이제국을 세로 건설하기
위하여 대백제의 현손이신 메이지 천황께서 배달제국의 가장 동쪽에서 태양처럼 일어나시어 조선과 일본을 다시
통일하시고 만주까지 아우르셨으나
천도를 잃고 동족을 핍박한 일부 총독부의 관료들과 천황폐하를 협박하여 전쟁의 천기를 거스르고 전선을 확대한
군부 때문에 대동이제국의 재건이라는 장대한 꿈은 훗날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들 a급 전범에 대한 천황폐하의 심경은 이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하신 쇼와 천황 폐하의 메모
에서 읽을 수 있다. )
이제 일본의 기가 영락하고 그 기가 대한을 옮겨지는 이 때 우리 반도의 동이인들이 먼저 해모수의 현손인 천황
폐하를 옹립하여 한일 동이 제국이 화해 협력하여 새로이 웅비하고 중화 대륙을 회복하여 대쥬신제국을 제국을
재건하고 아사달로 천도하여 새로운 후천 세상의 개벽을 열어나가야 할 때이다.
일본의 자금력과 한국의 정신력이 합친다면 대동이 제국의 앞을 막을 것은 그 무엇도 없다.
그 때에 돌궐(터키), 몽골, 여진(만주족) 등도 함계 떨쳐 거대한 성전에 합류할 것이다.
위글은 '다음'의 세계엔에서 퍼온것이에요. 마지막 결론 부분에 가서는 일본 천왕과 관련하여 다소 거북한
소리도 나오는데, 이러한 견해도 있다는 정도로 알아두시는게 좋을 것 같에요.
그러나 배울 점은 나름대로 있다고 생각되어 퍼온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
(소서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