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한국에서도 대단한 유행을 누리고 있는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들이다. 어른들이 모르는 사이에 20대 이하의 젊은 세대는 또다시 새롭게 다가온 일본 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어른들은 일본 문화를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고 단정하지만, 그들 자신도 한때 <우주소년 아톰>이나 <마징가 Z> 등의 일본 애니메이션에 열광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화려하게 수놓았고, 지금도 우리 아이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 문화의 힘은 무엇일까? 대중문화 평론가 김봉석은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통해 그 힘을 설명한다.
데즈카 오사무에서 오시이 마모루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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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봉석 저,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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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출판 |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은 3개의 장과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3개의 장은 각각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를 설명하고 있으며, 부록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한 문학과 드라마 등을 이야기한다.
첫번째 장 "꿈의 실현 만화" 편은 우리가 과거에 열광했고, 지금 우리가 열광하고 있는 만화들을 이야기한다. 어느덧 고전이자 전설이 된 <드래곤 볼>이나 <슬램덩크> 등을 비롯해, 현재 유행하고 있는 <강철의 연금술사>와 <이누아샤>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성향이나 특정한 주제별로 만화를 묶어 이야기한다.
<북두의 권>이나 <베르세르크> 등, 어른들이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경계할 법도 싶은 만화들이 두루 소개돼 있는 것이 특징인데, 김봉석은 그 폭력과 묘사에 얽힌 작가의 메시지와 힘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한다.
누구나 공감할 만하거나, 아니면 격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만화들이 다양하게 언급돼 있어, 그동안 일본만화 유행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어른이라면, 우리 아이들이, 혹은 우리의 20대들이 왜 일본만화에 여전히 열광하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아이들도 생각없이 일본만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두번째 장인 "움직임의 미학 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일본문화의 가장 큰 저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광은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알려지다시피 <매트릭스> 시리즈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는 어려서부터 일본 만화의 '오타쿠'였으며, 영화 <매트릭스>에는 실제로 <공각기동대>나 <아키라> 등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마주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의 뤽 베송 역시 <제5원소>를 연출하면서 <공각기동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오마주 장면을 드러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볼 수 있는 교훈적인 만화와 어른들이 더 재미있게 볼 법한 심오한 만화들이 동시에 어우러져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이 전자의 예라면,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시리즈(연출)와 <인랑>(각본), 와타나베 신이치로의 <카우보이 비밥>은 후자의 예에 속한다.
김봉석은 애니메이션의 소개에 있어서도 그 이면에 숨은 메시지를 확실하게 파악하여 자세하게 설명한다. 각각의 작품을 감독의 이력이나 말했던 바를 바탕으로, 그 감독의 신념을 이야기하고 있어 앞으로 이들의 작품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특히, 어른들이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 <우주소년 아톰>을 연출한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때문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이 이 책을 봐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어른들이 열광했던 만화나 애니메이션도 골고루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파급력을 지닌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을 어른들에게서도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각종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오타쿠 문화'라 불리우는 소수의 대중 문화로부터 출발했다는 김봉석의 언급이 중요하다. 일본 사회도 우리 사회 못지 않게 보수적이고, 주류 문화의 힘이 강한 사회지만, 전세계적으로 유행을 얻고 있는 일본문화는 주류 문화보다는 '오타쿠 문화'로 대표되는 비주류 문화의 저력이다.
'오타쿠 문화'의 힘은 "장르를 넘어 전진한다 영화"라는 제목의 세번째 장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듯하다. 구로사와 아키라나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등의 3대 거장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접어놨다. 대신 일생에 걸쳐 부침이 심했던 '일본 B급 영화의 대부' 스즈키 세이준과 기타노 다케시, 미이케 다카시 등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다만, 일본영화계의 무서운 신예로 통하고 있는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은 다소 아쉽다. 기타무라 류헤이 역시 한국과 일본에 걸쳐 있는 소수 마니아들의 힘으로 성장한 감독이다.
정확한 지적에 대한 공감과 약간의 아쉬움이 책에서 언급된, 특정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뭉쳐 힘을 모아 특정 작가와 감독의 문화적 성과를 장르로 연결짓는 '오타쿠 문화'는 근본적으로는 '열광의 힘'이며, 세계적인 유행을 타고 있는 일본 문화의 진정한 저력이다. 그리고 이 문화의 이면에는 한국만화에 대한 독자들의 꾸준한 지적, 스크린쿼터 축소나 폐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 마니아들의 지적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한국만화와 영화 모두, 비록 소수에 그칠지라도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새로운 성과가 적다. 아니, 새로움을 시도해보려는 노력 자체가 적다. 만화 독자와 영화 마니아들이 지적하고 있는 아쉬움은 바로 그런 '안일함'이기 때문에 이 책이 줄곧 설명하는 '오타쿠 문화'가 새롭게 와닿을 듯하다.
이 점은 "일본 문화가 우리에게 크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던 김봉석의 언급과는 다른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가까운 만화대여점에만 가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진다. <열혈강호>를 제외하고는 잘 나간다는 만화들은 대부분 일본 만화들이다.
김봉석의 언급대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일본 문화가 우리의 주류 문화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우리의 만화 독자들과 영화 마니아들은 일본애서 소수의 오타쿠가 열광한다는 그 비주류 문화를 접하며, 마찬가지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유행을 이끌어나간다. '소비자'인 20대 이하의 젊은 세대들의 대다수도 이런 현상에는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포털 사이트의 창을 열어보자. 뭐가 나오나? <강철의 연금술사>나 <나루토>, 아니면 <개구리 중사 케로로>와 관련된 것들이 눈에 보일 것이다. 이건 지금의 어른들이나 20대들이 자랄 때도 마찬가지였다. 20대들은 쉬는 시간에 학교에서 무슨 얘기를 했나? 대부분 <독수리 5형제>나 <피구왕 통키>, 아니면 <달려라 부메랑>을 이야기했다. 이들은 모두 일본 애니메이션들이다.
그외에도 평론가 특유의 문체로 인해 그 자세한 설명이 약간 지루하게 와닿을 수 있는 아쉬움도 있다. 아무래도 책인만큼 문단의 구분이 없는 편이며, 다소 장황하게 언급된 부분이나 줄거리 설명이 많아 인터넷에서의 '가벼운 글 읽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할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모두 '지루함'을 피해 즐기면서 열광하는 문화 장르들이므로, 생각은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에 언급된 이야기들은 어찌 됐든 모두 우리 만화나 영화에 꼭 필요한 영양분들이므로, 동감할 만한 이야기들이다. 이 영양분을 우리 만화와 영화가 어떻게, 얼마나 흡수하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