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고장 보성군 의병사] 25 무신 창의의 안규홍<安圭洪>의병장
▲ 뮤지컹 의병장 안규홍 광고판 |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은 뒤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왜병들이 지방에 까지 나타나서 감시를 하곤 하던 1907년<융희원년> 정미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보성읍 우산리 출생이었지만, 문덕면 법화리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던 안규홍이 젊은 나무꾼 10여 명과 같이 나무를 하러 가던 중에 왜병 5명이 총을 세워놓고 식사를 하다가 이들을 보고 의병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이들은 대답을 하는 척 가까이 다가가서는 총을 빼앗고 왜군들을 잡아 죽이고, 의병으로 나서기로 결의를 하였다.
▲ 뮤지컹 의병장 안규홍 창의장면 |
이듬해 2월에는 300여 명의 의병들이 함께 뭉쳐서 모두의 뜻을 모아서 대장에 안규홍, 부장에 염재보, 참모장에 송기휴, 양동훈, 선봉장에 이관회, 좌우를 담당할 장수에는 김도규, 임민호, 손덕호, 정기찬, 송경회, 장재창을 그리고 유격장에 안택환, 소휘천, 참모에 오주일, 라창운, 서기에는 임정현, 군수 책임자인 군수장에는 박제현, 연락과 첩보에는 유우삼 등으로 결정을 하여 군부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싸움에서 공을 세웠는데, 3월 26일 적의 중대장 영호구웅(永戶久雄)이 인솔하는 왜병 육군 8중대가 순천에서 보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듣고, 득량면 파청 부락 앞의 비들고개<鳩峙>에 전 병력이 매복을 하였다가 통과하려는 왜병장 영호대장 외에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의병의 고장 보성군에서 가장 유명한 파청대첩이다.
안대장은 이곳에서 왜병들에게서 빼앗은 무기 등 수많은 전리품을 안고 문덕면 대원사로 향하였다. 그 후 문덕면 양가랭이재, 동복 운월치, 복내 서봉산 등에서 대소 접전에서 왜적들을 수없이 체포하거나 사살하였고, 그해 7월 28일 순천지구 주둔헌병대와 기마대 대장 도변연추<渡邊廷秋>가 합동으로 우리 의병을 습격하자, 이들을 문덕면 웃 진산으로 끌어 들여 크게 승리를 거두므로 해서 파청대첩에 이은 다음가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 후로도 십여 차례의 격전을 하면서 그 동안 많은 의병은 물론 라창운, 박활, 이관회, 안택환, 임정현, 이영삼, 소휘천, 박우진, 송기휴 등의 중진들도 전사 하여 크게 힘들게 되었다. 거기다가 왜적들이 전술을 바꾸어서 의병들의 가족들을 갖은 협박을 가할 뿐만 아니라, 탄환과 군수가 끊기어 더 이상 싸울 힘을 잃어 가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어 1909년 8월에 의병을 해산하고, 그 해 9월에 문덕면 법화리에서 정기찬, 손덕호와 함께 왜병에게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1912년 5월5일 처형 되고 말았다.
▲ 뮤지컹 의병장 안규홍 일경에게 문초 |
담산 안규홍대장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내의 대가인 복내면 반곡 안극 참봉과 미력면 송림 박보현 참판이 안규홍의 창의에 찬동하여 그 배후에서 군수품을 공급하였는데, 이를 숨기기 위하여 안 참봉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학장소인 일송정을 불지르는 등 두 분에게 거짓 협박을 하기도 하였다.
또 파청대첩 이후에 합세한 강성인이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고 군사의 규칙을 자주어기니, 안 대장은 강의 목을 배어 의병을 일으킨 정신과 군사의 규율을 다시 바로 잡았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 파청대첩지에는 전승비를 세웠고, 정부에서는 1963년 2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을 그 손자에게 수여하여 안대장의 충성스러움을 칭찬하여 영원히 빛나게 하였다.
<참고 : 韓國獨立運動史, 全羅南道史, 澹山實記,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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