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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로 보는 세상] 새옹지마...에이즈와 HIV감염, 항암제
2022.12.06 09:00
○ 요기 베라의 명언과 새옹지마(塞翁之馬)
90분 정규 경기시간이 끝날 때까지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16강 탈락이 유력했다. 그러나 추가시간이 시작되자마자 골을 넣어 포르투갈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6강 진출이 결정되었고, 수많은 축구팬들의 염원이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 활약한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 뉴욕 양키즈의 전설 요기 베라가 이야기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말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중국 고사성어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오래 전 만리장성의 변방에 한 ‘새옹’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이 노인은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말이 멀리 달아나 버렸다.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말이 사라졌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노인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듯했다.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도망갔던 말은 아주 훌륭한 말과 함께 노인의 집으로 돌아왔다. 한 순간에 두 마리 말이 생긴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했다. 그러나 노인은 또 무심한 듯이 대답했다.
“이 일이 나쁜 일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얼마 후 노인의 아들이 그 훌륭한 말을 타다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아들이 다리를 다친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위로했다. 그러자 노인은 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세월이 흘렀다.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마을에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터로 차출되었다. 많은 이들이 전투중에 목숨을 잃었지만 다리를 다쳐서 전쟁터에 갈 수 없었던 노인의 아들은 화를 입지 않았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 어려움을 보여 주는 이 고사를 새옹지마(새옹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의 말)라 한다.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좋은 업적을 내어 인류에게 이바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한다. 그리하여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예측하기 어렵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의 발견과 은유의 문제점
1981년 미국에 그 전에 보지 못한 무서운 병이 나타났다. 인체의 방어를 담당하는 면역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병으로 보통 상태라면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병원체에 감염되는 경우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감염병이 진행되어 결국에는 목숨을 잃게 되는 병이었다.
이 새로운 병의 특징으로 마약을 사용한 남성 동성연애자들에게 흔히 발생하고, 말기암 환자 등 면역기능이 아주 떨어진 경우에 볼 수 있는 주폐포자충이 감염되어 있었으며, 피부에 드물게 발생하는 카포지육종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주폐포자충 감염과 카포지육종이 흔히 그러하듯이 후천적인 면역기능이 아주 떨어져 있었으므로 1982년 9월에 미국 질병통제센터(CDC)는 이를 면역기능 중에서도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면역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를 후천성면역결핍증(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의 앞글자를 따서 에이즈(AIDS)라 부르기 시작했다.
1983년에 프랑스의 지누시(Françoise Barré-Sinoussi)와 몽타니에(Luc Montagnier)는 이 감염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발견했고(이 두 명은 200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갈로(Robert Gallo)는 이 바이러스가 새로운 병을 일으키는 원인임을 증명했다. 초기에는 다른 이름을 붙였지만 1986년부터 이 바이러스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아래 HIV)라 불리게 되었다.
바이러스가 발견되기 전까지 에이즈는 불치의 병이었다. 이미 바이러스가 충분히 증식하여 사람의 몸에서 면역을 담당하는 백혈구를 마구 파괴해 놓았으므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HIV가 발견되면서 조기 진단이 가능해졌다. HIV가 몸에 처음 들어온 후 백혈구에 침입하여 에이즈에 이르기 전에 진단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나라에 에이즈 환자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에이즈 환자가 증가한 게 아니라 HIV 감염자를 미리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지만 많은 매스컴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된 사람이 아무 증상을 보이지 않더라도 에이즈에 포함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 병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검출되더라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질병이라 할 수 없으며, 빨리 조치를 취하여 병이 생기기 전에 해결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바이러스만 검출되면 에이즈라 함으로써 사회생활이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을 쓴 미국의 손택(Suzan Sontag)은 『에이즈와 그 은유(AIDS and Its Metaphors)』를 통해 질병과 에이즈를 대하는 사람들이 실제보다 은유에 의존함으로써 질병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은유적 표현에 집중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두 책은 하나로 합쳐서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에이즈는 HIV가 사람에게 감염된 후 바이러스가 증식을 계속하면서 백혈구를 파괴하고, 이에 따라 후천성면역이 발휘되지 못하는 무서운 병이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감염된 후 에이즈에 이르기 전에 치료를 하면 에이즈에 이르지 않으므로 HIV 감염자와 에이즈 환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 에이즈는 치료가 어렵지만 HIV 감염은 치료가 가능하다
HIV에 감염되어 피 검사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 하더라도 이 바이러스의 증식을 막을 수 있다면 에이즈로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에이즈를 예방하려면 HIV에 감염된 사람을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면 된다.
손택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에이즈는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감염병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HIV 감염자와 에이즈를 구별하지 않고 에이즈라 부르고 있으며, 이미 바이러스의 증식을 막을 수 있는 치료제가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 감염자를 에이즈라 함으로써 치료가 불가능한 걸로 생각한 사람들이 치료를 포기하고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세상을 등지는 일이 흔히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는 글을 쓴 적 있다.(의학계 이슈 | ‘치명적 질병’의 사회학 - 에이즈보다 결핵이 더 무섭다!,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3181) 이 글을 쓴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에이즈는 치료될 수 있는 병인가?”하는 것이다. 대답은 “에이즈는 이미 병이 말기에 이른 상태이므로 치료하기 어렵다. 그러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로 발견되면 약을 이용하여 에이즈에 이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다.
HIV의 증식을 막을 수 있는 약이 있다는 말에 놀라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아마도 에이즈는 불치병이라는 오래된 은유적 표현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HIV가 오염된 피를 받는 경우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감염이 되고, 그대로 두면 언젠가 에이즈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피를 관리하는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서는 헌혈받은 피에 HIV가 오염되어 있는지 검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
HIV 감염자는 치료를 받으면 된다. 지금은 여러 종류의 약이 발견되어 있으며, 3가지 이상의 약을 함께 사용하는 칵테일요법으로 치료를 한다. 여러 약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내성을 지닌 병원체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다. 치료가 빨리 끝나지 않으면 내성 병원체 출현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서로 다른 작용기전을 가진 약을 한꺼번에 사용하여 바이러스가 내성을 가지기 전에 빨리 퇴치하는 것이 칵테일요법이다. 세균에 의해 발생하는 결핵 등 여러 질병에서 칵테일요법이 활용되고 있다.
○ HIV 치료약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항암제
1983년에 에이즈의 원인이 되는 HIV가 발견되자 전세계 수많은 의학자들이 이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약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신약을 개발하는 것은 바이러스의 생활사를 연구하고, 그 생활사를 참고로 하여 어느 부분에 개입하여 증식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를 연구한 다음 적당한 물질을 찾아내거나 합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새로운 약을 찾아내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중에 새로 발견된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최초의 HIV 치료제는 아무 데도 쓸데없는 물질 지도부딘(zidovudine, azidothymidine)이다.
지도부딘은 1964년에 호로위쯔(Jerome Horwitz)가 항암제로 사용하기 위해 처음 합성했다. 이 약은 DNA를 구성하는 네 가지 염기중 T(thymidine)와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으므로 DNA 합성 과정에서 T대신 들어감으로써 DNA 합성을 억제하는 물질이다. 항암제로 사용하려 한 것은 암세포의 증식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는데 동물실험에서 좋은 효과를 보여주지 않아서 사용되지 못했다.
1974년에 독일의 오스터탁(Wolfram Ostertag)은 지도부딘이 이루 백혈병에서 효과가 있음을 발견했지만 흔치 않은 백혈병이고, 정확한 작용기전에 대해 알지 못했으므로 또 사용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HIV는 RNA 바이러스이고, RNA 바이러스는 숙주세포내에서 역전사에 의해 DNA를 합성해야 생존 가능하므로 이 과정을 막을 수 있다면 RNA 바이러스의 증식을 막을 수 있음이 알려졌다.
1985년 미국 국립 암연구소에서 HIV 치료제를 찾던 중 이미 개발되었으나 아무 쓸모도 없던 지도부딘이 HIV에 좋은 효과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임상시험을 통해 지도부딘이 HIV 환자에게 사용해도 안전하고, 사람의 몸에서 면역을 담당하는 세포 수 증가와 면역력 회복을 확인함으로써 지도부딘이 HIV 치료제로 승인되었다.
새로운 암 치료제를 찾으려는 목표로 열심히 연구하여 얻은 물질이 결과적으로는 사람의 암 치료에 아무 쓸모가 없는 물질로 판명되었지만 20여 년이 흐른 후 인류에게 공포로 다가온 새로운 감염병 치료제로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 HIV 감염에 사용할 수 있는 여러 물질이 더 발견됨으로써 HIV 감염은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없이 치료만 잘 받으면 에이즈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인생에서는 새옹지마를 수시로 경험하게 되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1.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재원 역. 이후. 2002
2. Erik De Clercq. The history of antiretrovirals: key discoveries over the past 25 years. Reviews in Medical Virology. 2009;19(5):287-99
3. Samuel Broder. The development of antiretroviral therapy and its impact on the HIV-1/AIDS pandemic. Antiviral Research. 2010;85(1):1-38.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대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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