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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측 자료:(5월21일) 13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월간조선 88년 7월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라고 한다. 권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시민군 이수범의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원 한 명이 즉사하고 두 명이 부상입었다. 이수범은 그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는 도중 시민 쪽에서 가지고 있던 APC 장갑차 한 대가 군인들 쪽으로 달려 갔다. 그때 공수부대원들은 2열 횡대로 해서 YMCA 앞 횡단보도를 중심으로 우리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갑차를 몰고 가니 미처 피하지 못한 군인들이 몇 명 치어버렸다. 그때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부상을 당한 걸로 알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공수부대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오후 1시 30분이었다. 내가 왜 그 시간을 기억을 하냐면 우리가 계속 시간 카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보면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 http://cafe220.daum.net/_c21_/bbs_read?grpid=14LzD&mgrpid=&fldid=8yGb&page=1&prev_page 도청 뒷문쪽에서 시민군 김종배(당시 조선대 3년)가 최초 발포하였다는 당시 도청 직원의 증언을 여기서는 배제하더라도 시민군이 먼저 발포하였다. 그 상황을 당시 11공수 61대대 안부웅 중령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13시 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나간 뒤 저의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약간 스칠 정도로 총알을 맞아 비틀비틀 하길래 자기가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뒤 도망을 가 분수대에 도착한 후 전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4개 대대병력이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시위대도 더 이상 분수대 쪽으로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는 잠시 쉬고 있었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야" 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분수대 옆 충장로 쪽으로 시위대 버스 1대가 저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저희 병력들은 쉬느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 http://cafe.empas.com/518/bbs/b3/read.html?asn=42¬ice=0&pno=1&oby=2&odir=0&fd=0&bt=16&ac=50&rurl=list.html ) 5월 21일 오후 11시쯤 송정읍 영광동에서 시위 군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불을 질러 밀고 가던 대한통운 트럭이 노인 1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5월 22일 오전 광산군 동곡면 하산리 동곡교에서 시위군중이 몰고 가던 군용 진압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용수로에 전복 추락, 신원 미상의 청년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시민군 차량 안전사고에 의한 사망자가 이외에도 많이 있었거니와 최초 발포자는 시민군이었음을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은 5월 21일 시민군 오발 사고로 시민군이 죽어간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 시민군 김여수(당시 20세, 용접공)는 광주사태 당시 발포는 시민군 편에서만 일방적으로 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단다. <언젠가 학운동에 있는 배고픈다리에서 계엄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등성이에서 군인들이 3, 4명씩 넘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 쪽에서 먼저 발사를 했다. 우리는 다리 부근의 주택에서 주로 총을 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총을 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총을 쏘는지 모르기도 했고 또 이동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탈북자들은 광주사태 당시 침투한 북한군이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시민군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군인이 쏜 것처럼 유언비어 퍼뜨려 폭동을 선동했다고 증언하는바, 그런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언들이 시민군 증언록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시민군 김용균(당시 21세 용접공)는 5월 22일 목격한 그 사실을 광주사태 9년후 이렇게 서술한다. <건물(서방 철길 바로 옆 2층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심장이 멋는 듯했다. '아!'하는 짧은 외마디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뻣뻣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나를 붙잡던 학생이 입구에 나뒹굴어 쓰러져 있었다. 계단에는 피가 낭자했다.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총소리가 입구에 있는 학생을 명중한 것이었다. 계엄군들은 동신고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 학생이 총을 맞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렇다면 건물 맞은 편 광주상고나 광주교육대학교 부근에도 계엄군들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직까지도 나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광주사태 당시 최초 사망자는 공수부대원이었다. 광주천변으로 떨어진 공수부대원을 폭도들이 돌로 찍어 머리를 으깨어 죽임으로 생긴 첫 사망자였다. 시민군 김현채(당시 19세의 식당종업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곳(양동)에서 시민들이 공수를 돌로 찍어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으나 공수를 이미 병원으로 옮긴 뒤였다. 시민군 최종북 (당시 15세로 무진중학교 3학년)도 5월 19일 광주공원 앞에서 발생한 그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폭력경찰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학생과 시민 2백여 명은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 얼마 후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공수부대원 한 명이 따로 떨어진 채 광주천변으로 붸겨갔다. 그러다 광주천변으로 떨어져 버렸다. 시민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또한 군인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 20일에는 군인들에게 밥을 실어다 주는 배식차를 시위대가 쓰러뜨리자 달려온 공수부대원을 시위대가 차량으로 깔아죽였다. ( 증언록 보러가기 ) 이어 21일에는 시민군 장갑차로 공수부대원을 깔아 죽였다. 이외에도 5월 19일 시위대가 버스로 순경 4명을 압사시켰다(사건 장면 동영상: http://study21.org/518/video/515.htm ). 5월21일 13시경 현재 공수부대원 3명, 경찰 4명 학살당하고 시민군 차량사고와 시민군 오발에 의한 시민군 4 명(혹은 6명) 사망. 사망자 전원 시민군의 흉기나 무기에 의한 사망이었으며, 군경에 의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음. 광주사태의 진실: 영화 "화려한 휴가" 실제인물 사진전 광주사태 당시 광주 31사 한동석 중위의 이어지는 댓글 증언 과거사위의 깡통 무식 드러낸 "전두환 자위권 발동 주장설"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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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독교의 복음과 우리의 문화 원문보기 글쓴이: 역사학도
첫댓글 나 정말로 27년 지났어도 버스로 순경치건 생생하게 기억하지요. 우리집에 대한전선 칼라tv처음 사서보던때(그때 칼라TV 처음나와서 아무 집에나 있는 것 아니였거든 ) 그런데 말이죠 왜 기억하냐면 왜 동영상이 도중에 잘렸을까 생각했거든 한참 고민하다 전두환씨가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도록 몰기위해 조작한 것이라 결론 내렸거든(아 27년전에 결론 내렸던것 여기서 써먹네) 동영상 생각하며 잘보세요 왜 이유 없이 잘나가다 치기 바로 전장면에서 잘렸는지..쓰러진 세사람중 한사람은 과학적으로 봤을 때 차에 치일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니까요... 각도를 보세요.. 난 그때부터 아 이것 조작이다생각하고 전두환씨 말은 안믿기로 했지..
그때는 518 막 터진때라 별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때인데..왜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기억하는지 참 이상하네..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니 나도 이상한 사람인가 ? 그리고 왜 차가 지나간 다음에 쓰러지냐고..우습다.
탈취한 버스의 운전사를 강제로 하차시키고 폭도로 추정되는 시민 누군가 질주한 장면인데요, 우둑하니 서있던 사람들이 치어 죽임당하는 건 눈에 안보이시나요?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습니다. 죽은 광주시민은 보이고 살해당한 순경은 안보이시나요? 고인들과 그들의 유가족이 우습다고요?
History-Maker 거짓말에 속아드릴 수가 없는 것이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순경들 죽인 날은 5월 15일이었습니다. 광주사태가 일어날 것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때였으며, 더구나 님이 아직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니요 난 기억합니다. 정확하게 님이 말한데로 18일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뉴스 자료가 좀 이상했지요 그래서 이것 조작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미 조작은 시작된 것입니다.
History-Maker님, 그 어느 언론사도 5월 15일이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영향력이 언론계에 미쳤던 때라고 말하지는 않을 때인데요? 근거에 바탕을 둔 주장을 하시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History-Maker님. 대한전선 칼라tv에 치기 바로 전장면에 잘리지 않고 사람을 깔아버리는 장면까지 그대로 나온다면 더 이상할 거 같기도 한데요? 공중파에 차가 사람을 깔아뭉개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는 건 일본이라야 가능한 거 아닌가?
History-Maker님의 말은 그럼, 쓰러진 세 사람 중 2명은 과학적으로 봤을 때 차에 치일 수 있는 자리였다는 말이잖아. 나머지 1명은 다가오는 차를 피해 움직이다 버스 동선의 가장자리에서 치었거나 버스에 치어 구르거나 튕겨 나갔겠지.
내가 볼 때는 공중파에 버스가 사람을 깔고 지나가는 장면이 그대로 나오기를 바래고 안 나온다고 해서 조작이라고 단정하는 게 더 이상하네. 쓰러진 2명이 차에 치일 수 있는 위치였고 1명은 버스에 부딪쳐 튕겨 이동되었다면 그건 버스에 치인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