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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長白山]과 조선사[朝鮮史]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정신[精神]적인 지주요, 마음의 고향이며, 민족[民族]의 발상지[發祥地]로서, 한국[韓國]의 국민[國民] 모두가 숭앙[崇仰]하는 민족[民族]의 성산[聖山]인 백두산[白頭山], 이 신령[神靈]스럽고 영묘[靈妙]한 백두산[白頭山]은, 반도[半島]땅, 한국[韓國]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대[先代] 왕조[王朝]와 조상[祖上]님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백두산[白頭山]이 있는, 북쪽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으며, 지형[地形] 지리[地理]도 부합되는 면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韓國]의 선대[先代]께서 남긴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하등의 관계가 없으니, 침략[侵略]자들이 남긴 조선사[朝鮮史]의 명맥[命脈]을 말살[抹殺]시키기 위한 식민사관[植民史觀]과 그 하수인들의 치졸하고 교활[狡猾]한 음모[陰謀]는, 일단 성공 한 것같이 보이리라.
역사[歷史]의 장구[長久]한 세월 속에서, 인간[人間]이 걸어온 생생한 발자취와 인간[人間]의 모습을,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자들은, 교활[교활]하고 간악[奸惡]한 음모[陰謀]를 꾸며, 민족[民族]의 정신[精神]과 혼[魂]과 얼을 말살[抹殺]하고, 미개하고 후진적인 거짓과 위선[僞善]으로 가득찬 역사[歷史]를 만들고, 그 하수인들은, 신[新] 학문[學文]이라는 미명[美名]아래 그러한 무리들이 만들어 놓은 혼란[混亂]과 모순[矛盾]으로 가득찬 역사[歷史]를, 의문[疑問]하나 제기함이 없이, 일만년[一萬年]의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라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르쳐 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15卷, 5年[1459 己卯]
諭咸吉道都節制使楊汀曰: “斡朶里所麟可、非常可等還本事, 已諭於李滿住, 卿姑勿遣所衆可刷還” [중략]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유시(諭示)하기를,“알타리(斡朶里) 소린가(所麟可)·비상가(非常可) 등이 본처(本處)에 돌아간 사건은 이미 이만주(李滿住)에게 유시(諭示)하였으니, 경은 아직 소중가(所衆可)를 보내어 쇄환(刷還)시키지 말라.” 하였다. [중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15卷, 5年[1459 己卯]
爾兀狄哈等雖阻斡朶里, 予令勿遮。 爾嫌舊罪, 予則不有, 勿以路阻爲難, 勿以舊罪爲嫌。 且以爾相讎浪死無益, 故予欲刷還爾等妻子牛馬, 使之和解, 各安生業。’ 爾往諭予意。” 因賜弓箭衣劍以遣, 麻尙哈曰: “死且不避命矣 [중략]
너희 올적합(兀狄哈) 등이 비록 알타리(斡朶里)에게 길이 막혔다 하더라도 내가 막지 말도록 하겠다. 너희가 옛날 죄(罪)를 혐의스럽게 여기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길이 막혀 어렵다고 하지 말고 옛날의 죄가 혐의스럽다 하지 말라. 또 너희가 서로 원수를 갚는 일로써 개죽음[浪死]하는 것도 무익(無益) 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의 처자(妻子)와 우마(牛馬)를 쇄환(刷還)하고 너희들로 하여금 화해(和解)시켜, 각각 그 생업(生業)에 안정하게 하고자 한다.’ 하라. 네가 가서 나의 뜻을 유시(諭示)하라.”하고, 인하여 활·화살·옷·칼을 주어서 보내니, 김마상합(金麻尙哈)이 말하기를,“죽더라도 명(命)을 피(避)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중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15卷, 5年[1459 己卯]
咸吉道都體察使申叔舟馳啓: 臣到會寧, 招兀良哈、斡朶里等諸酋, 諭以上旨, 且語之曰, “我今承命來, 聽爾等情願, 將招兀狄哈, 使與和解, 汝等以爲如何?” 諸酋皆叩頭曰, “此皆殿下爲我等至計, 敢不如命 [중략]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가 치계(馳啓)하기를,신이 회령(會寧)에 이르러 올량합(兀良哈)·알타리(斡朶里) 등의 여러 추장(酋長)들을 불러서 성상의 뜻을 가지고 타이르고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금 명(命)을 받들고 와서 너희들의 정원(情願)을 들어 주고, 장차 올적합(兀狄哈)을 불러서 그들로 하여금 너희들과 더불어 화해(和解)하게 할 터인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여러 추장(酋長)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전하의 우리들을 위한 지극하신 계책(計策)이시니, 감히 명하신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중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15卷, 5年(1459 己卯
臣乃作書, 譯以女眞字, 付加霜哈, 諭也堂其等。 書曰, “玆者骨看兀狄哈麻尙哈持木契進啓曰, 照兒好兀狄哈送木契言, 「兀未車兀狄哈爲兀良哈、斡朶里等所攻殺, 妻子見擄, 因此路阻, 願從骨看地面別路朝見 [중략]
신이 곧 글을 지어 여진 글자[女眞字]로 번역하여 가상합(加霜哈)에게 부쳐서 야당기(也堂其) 등을 타일렀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근자에 골간 올적합(骨看兀狄哈)의 마상합(麻尙哈)이 목계(木契)를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조아호 올적합(照兒好兀狄哈)이 목계(木契)를 보내어 말하기를, 올미거 올적합(兀未車兀狄哈)이 올량합(兀良哈)·알타리(斡朶里) 등에게 공격 살해당하여 처자(妻子)들이 사로잡혔는데, 이로 인하여 길이 막혔으니, 골간(骨看) 지방의 딴 길을 따라 조현(朝見)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중략]
조선[朝鮮]의 백두산[白頭山]과 여진[女眞], 올적합[兀狄哈], 올량합[兀良哈], 알타리[斡朶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만 보더라도, 이에 대한 기록[記錄]은 수도 없이 나온다.
올적합[兀狄哈], 올량합[兀良哈], 알타리[斡朶里]가 지금의 반도[半島] 북방, 한국[韓國]에 있었던가 ?
이들이 있는 곳에는 조선[朝鮮]의 육진[六鎭]이 있었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업[王業]의 터전을 닦은 곳이며,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가 있는 지역[地域]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15卷, 5年[1459 己卯]
我殿下命臣若曰, ‘兀狄哈與兀良哈、斡朶里舊相讎殺, 於我國固無利害。 然彼雖殊俗, 人情則同, 故予與我國人一視之 [중략]
우리 전하께서 신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올적합(兀狄哈)이 올량합(兀良哈)·알타리(斡朶里)와 더불어 옛부터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진실로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저들이 비록 이속(異俗)의 종족이라 하더라도 인정(人情)은 같기 때문에 내가 우리 나라 사람과 한가지로 돌보는 것이다. [중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15卷, 5年(1459 己卯
今觀兀良哈、斡朶里、女眞等環居六鎭近境, 特承上恩, 唯邊將所使與我國人無異。 臣今來, 處處無男女老少, 皆奔走爭來謁見, 數百爲群 [중략]
지금 보건대, 올적합(兀狄哈)·알타리(斡朶里)·여진(女眞) 등이 6진(六鎭)의 근경(近境)을 빙 둘러싸고 있는데,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받들어 오직 변장(邊將)의 부리는 자들은 우리 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이 지금 오니, 곳곳에서 남녀노소(男女老少) 할 것 없이 모두 달려와서 다투어 알현(謁見)하는데, 수백 명씩 떼를 이룹니다. [중략]
올적합[兀狄哈], 올량합[兀良哈], 알타리[斡朶里]가, 비록 이속[異俗]의 종족[種族]이라 하더라도, 인간[人間]의 인정[人情]은 같기 때문에, 우리나라 조선[朝鮮]의 백성[百姓]과 같이 한가지로 돌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偉大]하고 훌륭한 일인가 ?
비록 조선[朝鮮]의 사람과 다른 종족[種族]이지만, 같은 조선[朝鮮] 사람과 차별[差別] 없이 돌본다는 이러한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인가 ?
지금의 백두산[白頭山] 주변의 인근[隣近] 지역[地域]에, 이속[異俗]의 종족[種族]이 터전을 마련하고 살고 있었을까 ?
올적합[兀狄哈], 알타리[斡朶里] 여진[女眞]등이, 조선[朝鮮] 육진[六鎭]의 근경[近境]을 빙 둘러싸고 있는데, 성상[聖上]의 은혜[恩惠]를 받들어 변장[邊將]을 부리는 자들은, 조선[朝鮮]의 사람과 다름이 없다.
여진[女眞]은 숙신[肅愼]이며, 식신[息愼]이라고 하였고,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불리워 왔다.
그 지역[地域]은, 고구려[高句麗]이후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으며, 영고탑[寧古塔]이 있는 지역[地域]이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대황[大荒]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하며, 숙신[肅愼]의 나라가 있다고 했고, 회남자[淮南子]에서는, 무릇 바다 밖에 36국[國]이 있는데, 서북[西北]쪽에서 서남[西南}쪽에 이르기까지 수고[脩股]의 사람, 천[天]의 사람, 숙신[肅愼]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주[註]에서는, 숙신[肅愼]은 북이[北夷]로, 현도[玄菟]에서 북[북]쪽으로 300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했고, 국어[國語]에서는 숙신[肅愼]은 북이[北夷]의 나라라고 하였으며,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소[疏]에서, 위소[韋昭]]는 이르기를, 숙신[肅愼]은 동북이[東北夷]의 나라로 부여[夫餘]에서 1000리 떨어져 있으며, 진[晉]나라 때의 현도[玄菟]이고, 바로 요[遼]의 동북[東北]쪽에 있다. 라고 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제순[帝舜]25년에 식신[息愼]이 와서 궁시[弓矢]를 공물[貢物]로 바쳤다고 하였고, 사기[史記]에서는, 식신[息愼]은 숙신[肅愼]이라고 하는데, 동북이[東北夷]의 나라라고 했으며, 사기[史記] 순본기[舜本紀]에서는, 그 지역[地域]을 칭[稱]하여, 발[發]과 식신[息愼]이라고 하였는데, 식신[息愼]은 바로 숙신[肅愼]으로, 그 지역[地域]이 바로 영고탑[寧古塔]이라고 하였다.
중니[仲尼]공자[孔子]는, 새매를 관통한 화살을 보고, 숙신[肅愼]의 화살이라고 했으며, 위소[韋昭]는 말하기를, 구이[九夷]는, 동이[東夷]의 아홉나라 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숙신[肅愼]땅에 있는데, 서{西]쪽으로는 돌궐[突厥]에 닿아 있고, 남[南]쪽은 고구려[高句麗]이며, 북[北]쪽은 실위[室韋]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역[地域]에 있는, 조선[朝鮮]의 함길도[咸吉道]가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현재, 백두산[白頭山]의 인근[隣近] 지역[地域]이던가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16卷, 5年(1459 己卯
御書曰: “咸吉道, 乃興王之地, 祖宗時從仕者多, 而今則少。 其訪可用者于崔濡及曾經其道觀察使成奉祖、節制使朴從愚ㆍ郭連城, 幷諭其道訪之 [중략]
어서(御書)로 이르기를,“함길도(咸吉道)는 곧 왕업(王業)을 일으킨 땅으로, 조종(祖宗) 때에는 벼슬한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적으니, 임용할 만한 사람을 최유(崔濡) 및 일찍이 그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성봉조(成奉祖), 절제사(節制使)를 지낸 박종우(朴從愚)및 곽연성에게 묻고, 아울러 그 도(道)에 유시(諭示)하여 찾게 하라.” 하였다. [중략]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업[王業]을 일으킨 지역[地域]이다.
함경도[咸鏡道] 즉 함길도[咸吉道]에는, 대황지중[大荒地中]의 불함산[不咸山]인, 백두산[白頭山]이 있고,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이 있으며, 숙신[肅愼]과 여진[女眞]의 지역[地域]이며, 올적합[兀狄哈], 올량합[兀良哈], 알타리[斡朶里]가 연관[聯關]되어 있는 지역[地域]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
10월. 상이 왕세자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평양을 순행(巡行)하였다. 영숭전(永崇殿) - 태조의 진전(眞殿)이다. - 에 직접 제사지내고, 또 단군(檀君), 기자(箕子), 동명왕(東明王)의 전(殿)에 제사를 지냈다. 대동관(大同館)에 나아가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노인이 남녀를 합해 모두 100명이었다. 신숙주가 북쪽으로부터 와서 알현하고 북쪽 정벌에 공을 세운 자들을 적어 올리니, 홍윤성(洪允成) 등을 가자하였다. [중략]
조선[朝鮮]의 세조[世祖]가, 서[西]쪽으로 평양[平壤]을 순행[巡行]하고 있다. 평양[平壤]에서 단군전[檀君殿], 기자전[箕子殿], 고구려[高句麗]의 동명왕[東明王]전[殿]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朝鮮]의 왕조[王朝]는, 단군[檀君]을 모시는 전각[殿閣]을 세우고, 민족[民族]의 시조[始祖]로서 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이에 관한 기록[記錄]은, 수없이 조선사[朝鮮史]에 기록[記錄]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역사[歷史] 공교육[公敎育]에서는, 단군[檀君]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으며, 어떻게 가르쳐 왔는가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22卷, 6年(1460 庚辰
己未/上親祭于永崇殿, 遂詣檀君、高句麗始祖、箕子殿行祭。 問承旨洪應曰: “高〈句〉麗始祖誰?” 應對曰: “高朱蒙。” 上曰: “三國高句麗莫强焉 [중략]
임금이 친히 영숭전(永崇殿)에 제사하고, 마침내 단군(檀君)·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기자전(箕子殿)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홍응(洪應)에게 묻기를,“고구려 시조가 누구인가?”하니, 홍은이 대답하기를,“고주몽(高朱蒙)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三國) 중에서 고구려가 막강하였다. 하였다. [중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世祖 22卷, 6年[1460 庚辰]
御製諭咸吉〈道〉都節制使朴烱曰:旣委卿以大任, 卿本知予心, 待時而用者也。 申政丞平戎之後, 虜必更生心, 此勢之必然也。 今聞虜有欲侵之志, 予料以我兵力何足慮哉? 但未知卿意如何 [중략]
어제(御製)로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박형(朴炯)에게 유시(諭示)하기를,“이미 경에게 대임(大任)을 맡기었으니, 경은 본디 내 마음을 알아서 때를 기다려 쓰는 자이다. 신정승(申政丞)이 오랑캐를 평정한 뒤에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마음을 낼 것이니, 이것은 필연(必然)한 형세(形勢)이다. 지금 듣건대, 오랑개가 침노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고 하니, 내가 우리 병력을 헤아리면 어찌 족히 염려할까마는 다만 경의 뜻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중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卿若有勇志, 則予有一言, 卿其審聽。 可選精兵數百數千, 迭入侵突, 或擊東西, 或軼南北, 使敵莫知所備, 期殲凶類漠北無人, 然後乃已。 其間用兵節目, 予豈遙授? 卿可出氣力任意而行。 大抵善保爲上, 成功次之, 生事最下 [중략]
경이 만일 용감한 뜻이 있다면 내가 한 마디 하겠으니, 경은 살펴 들으라. 정병(精兵) 수백 수천을 뽑아서 번갈아 들어가 침공하여 혹은 동서를 치고 혹은 남북을 침노하여 적(敵)으로 하여금 방비할 바를 알지 못하게 하여, 기여코 흉한 무리를 섬멸하여 막북(漠北)에 사람이 없게 한 연후에야 그치라. 그 사이에 군사 쓰는 절목(節目)은 내가 어찌 멀리서 지휘하겠는가? 경이 기력(氣力)을 내어 임의대로 행하라. 대저 잘 보전하는 것이 상(上)이 되고 성공하는 것이 다음이며, 일을 내는 것이 최하이다.” [중략]
조선[朝鮮]의 세조[世祖]는, 천하[天下]를 진동[震動]시킨 웅대[雄大]한 포부[抱負]와 기상[氣像]을 지닌 제왕[帝王] 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眞實]은 일부분일 뿐이다. 조카인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차지한 임금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을 뿐이니,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 상실[喪失]된 오늘날, 그 때 당시의 상황을 유추[類推]할수 있는 정황도 그려 볼수 조차 없다.
단지 왕조실록[王朝實錄]에 기록[記錄]된 간략한 내용만으로 세조[世祖]의 면목[面目]을 일부나마 볼수 있을 뿐이다.
정병[精兵] 수백, 수천을 뽑아서 번갈아 침공[侵攻]하고 돌격[突擊]하여, 혹은 동[東]과 서[西]를 치고, 혹은 남[南] 북[北]을 번개같이 침노[侵擄]하여, 적[(敵]이 방비할 틈을 주지 말고 흉[凶]한 무리들을 섬멸[殲滅]하라는 세조[世祖]의 추상[秋霜]같은 엄명[嚴命]은, 조선[朝鮮]의 천하[天下]를 덮는 기상[氣像]과 위상[位相]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세조[世祖]가 내린 이 유시[諭示]는,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가 세조[世祖]의 명[命]을 받아 북정[北征]을 끝낸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세조[世祖]가, 추상[秋霜]같은 명[命]을 내린 막북[漠北]은 어느 지역[地域]을 말하는 것일까 ?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업[王業]의 터전을 닦은, 조선[朝鮮]의 함길도[咸吉道]를 침입[侵入]하는 이속[異俗]의 종족[種族]들이 살고 있는, 함길도[咸吉道] 외곽 인근[隣近] 지역[地域]의, 사막[沙漠]이 있는 북[北}쪽 지역[地域]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조선사[朝鮮史]의 흐름을 보면서,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은, 혼란[混亂]스러움 그 자체이지만,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자들도, 많은 모순[矛盾]점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이제 곧 세상에 그, 본연의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다. 오랑캐의 말로 알목하(斡木河)라 한다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한다. 우리 왕조 태종(太宗) 때에 알타리의 동맹가 첨목아(童孟哥帖木兒)가 빈 틈을 타서 들어와 거주하였다. 세종(世宗) 15년에 올적합(兀狄哈)이 맹가(孟哥)의 부자를 죽이니 알목하(斡木河)에는 추장이 없어졌다.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16년에 마침내 석막(石幕)에 있는 영북진(寧北鎭)을 백안수소(伯顔愁所)에 옮기고, 바로 알목하의 서북 지역이 적(賊)의 요충 지대에 해당하며 또한 알타리(斡朶里)의 남아 있는 종족들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특별히 성보(城堡)를 설치하여 영북진 절제사(寧北鎭節制使)가 이곳을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은 진(鎭)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정보와 응원이 잘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해 여름에 따로 알목하(斡木河)에다 진(鎭)을 설치하고.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우라한현(于羅漢峴) 부의 서남쪽 45리에 있다, 백두산의 남쪽 지맥이다. [중략]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풍산천(豐山川)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전괘현(錢掛峴)의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풍산보(豐山堡)를 경유하고, 부의 성 서쪽을 경유하여 알목하(斡木河)가 되어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두만강(豆滿江) 부의 북쪽에 있다. [중략]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백두산(白頭山)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부의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거리에 있다. 산이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 리요, 가로는 천 리에 뻗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라고 했는데, 아마 속평강(速平江)을 가리킨 듯하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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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편5[軍政編五]
홍세태백두산기[洪世泰白頭山記]
白頭山。北方諸山之祖也。淸祖自此起。去我北邊三百餘里。彼曰長白山。我曰白頭山。兩國以山上二江爲界。然地極荒絶。盖莫得而詳焉 [생략]
홍세태(洪世泰)의 백두산 기문에 이르기를, “백두산은 북방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다. 청조(淸朝)의 선조(先祖)가 여기에서 일어났으니 우리의 북쪽 국경에서 300여 리 쯤 되는 곳이다. 저들은 장백산(長白山)이라 하고 우리는 백두산이라 하는데, 두 나라가 산 위에서 갈라진 두 강으로 경계를 삼는다. 그러나 지역이 멀고 거칠어서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었다. [중략]
홍세태백두산기[洪世泰白頭山記]
癸巳。到山頂。日已午矣。是山首起西北。直下大荒。至此陡立。其高極天。不知其幾千萬仞。頂有池。如人䪿穴。周可二三十里。色黝黑不測。時正孟夏。氷雪委積。望之漠漠。一銀海也。山形。在遠望若覆白甕。[중략]
계사일에 산꼭대기에 이르니 해가 벌써 정오가 되었다. 이 산이 처음에는 서북에서 시작하여 황막한 들로 내려오다가 여기에 이르러 우뚝 솟았는데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서 몇 천만 길[丈]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사람의 숨구멍[䪿穴]과 같고, 둘레가 2ㆍ3C리쯤되며 빛깔이 시커머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때는 첫 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아득한 하나의 은바다를 이루었다. 산 모양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흰 독[白甕]을 엎어 놓은 듯한데,[중략]
조선사[朝鮮史]와 백두산[白頭山],.......... 백두산[白頭山], 불함산[不咸山], 장백산[長白山] 알목하[斡木河], 알타리[斡朶里], 올량합[兀良哈], 올적합[兀狄哈],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 알타이 공화국, 4개국의 국경[國境]을 접하고 있는 알타이산맥, 두만강[豆滿江], 천하[天下]의 삼대수[三大水]중의 하나라는 압록강[鴨綠江], 모두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와 관계가 깊고, 조선사[朝鮮史]와 연원[淵源]이 깊은 곳이다.
본인은 오래전에, 이 지역[地域]의 현지 조사[調査]를 마치고 나서, 소위 학자[學者]라는 자들의 연구[硏究]결과 라는 자료[資料]들을 보고 질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歷史]의 연구[硏究]라고 한다면, 역사서[歷史書]가 가리키는 지역[地域]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그 인근[隣近]의 여러 지역[地域]을, 포괄적으로 현지 조사[調査]를 진행하고, 그 역사[歷史]의 시원[始原]과, 그 역사[歷史]의 흐름과, 그 역사[歷史]의 근본[根本]과, 그러한 역사[歷史]를 증명[證明]하고 고증[考證]할수 있는, 고대[古代]로부터 전[傳]해져 내려오는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등을 찾아서, 그 역사[歷史]의 흐름과, 연원[淵源]을 분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은 도외시 하고, 외국 학자[學者]의 견해와 연구가 무엇 무엇이라고 하며, 조선사[朝鮮史]의 근본[根本]이 되는 내용들을 무시하고, 개인의 사견[私見]을 담는 그러한 것을, 어떻게 연구[硏究]결과라고 할수 있는 것인지, 의문[疑問]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행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이니, 반세기에 걸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뿌리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정신[精神]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학자[學者]의 사명[使命]은 막중한 것이다. 세상[世上]이 혼란[混亂]스러우면, 학자[學者]들이 학문[學文]으로 세상[世上]을 밝게 하고, 세상[世上]을 바르게 이끌 스승으로서의 무거운 사표[師表]가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학자[學者]라고 하면서, 세상[世上]을 어지럽게 하는데 있어서 일조를 한다면, 그러한 자들은 이미 학자[學者]로서, 또한 스승으로서의 자질[資質]을 포기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軍政編五
구지부벽지의[舊地復闢之議]
盖慈城,虞芮二郡距遼瀋境至近。茂昌,閭延二郡接壤於三,甲。沿江七百里無人之地。土甚膏沃。路且平易。山低野濶。廣或爲三十里或二十里。而慈城至茂昌界則廣或爲百里或爲八九十里。皆是民人可居之地。以蔘政一事言之。七百里間曠之山。前者廣採而足用者。今焉耗縮年年益甚。其必有所以然之 [중략]
대개 자성ㆍ우예의 2개 군은 요심(遼瀋)의 경계와 극히 가깝고, 무창ㆍ여연의 2개 군은 삼수ㆍ갑산과 경계가 닿아 있습니다. 강의 연안 700리 무인지대(無人地帶)가 땅이 매우 비옥하고 길도 또한 평탄하며, 산은 낮고 들이 넓은데 넓이가 더러는 30리 더러는 20리[或二十里]가 되며, 자성에서 무창(茂昌)의 경계까지는[界則] 넓이가 100리 또는 8ㆍ90리가 되니 이런 곳은 모두 백성이 거주할 만한 땅입니다. 인삼 정책에 대한 문제로 말하면 700리 사이 비어 있는[間曠] 산에 전에는 널리 채취(採取)하여 넉넉히 쓰던 것이 지금은 줄어들기가 해마다 더욱 심하니, 그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중략]
조선[朝鮮] 함경도[咸鏡道]의 자성[慈城], 우예[虞芮]의 2개군[郡]은, 요심[遼瀋]의 경계[境界]와 극히 가깝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요심[遼瀋]이라고 한다면, 바로 사막[沙漠]이 펼쳐진 광활한 요동[遼東]의 인근[隣近] 지역[地域]이라는 말이 아닌가 ?
이러한 기록[記錄]은,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이 남긴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들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며, 이십오사[二十五史]의 원전[原典]과도 일치 하고 있음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5[軍政編五]
자성폐군[慈城廢郡]
四郡。自甲山而分爲閭延。自閭延而分爲茂昌,虞芮,慈城。自咸鏡道而隷平安道。世祖乙亥。敬差官梁誠之上疏有曰。閭延,茂昌,虞芮等邑列於江邊。今罷三邑。慈城一郡獨當賊衝。據此。慈城之罷。最後於三邑。而未詳其在於何年。故勝覽只言世祖朝者。亦以此也。[중략]
4군은 갑산에서 갈라져서 여연이 되었고, 여연에서 갈라져서 무창ㆍ우예ㆍ자성이 되었으니, 함경도에서 평안도로 예속된 것이다. 세조 원년 을해에 경차관(敬差官) 양성지의 상소에 아뢰기를, “여연ㆍ무창ㆍ우예 등 읍이 압록강 가로 벌려 있었는데, 지금 3개 읍은 폐지되고 자성군 하나만 적(賊)의 요충에 맞서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로 본다면, 자성의 폐지[罷]는 3읍 중에서 맨 나중이었을 것이나 그것이 어느 해에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여지승람》에서도 세조 때라고만 한 것이 이 까닭이다. [중략]
국조보감[國朝寶鑑]
태종이 일찍이 명하기를, ‘만약 호인(胡人)이 와서 살거든 쫓아버리고 행여 적들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고 한 일이 있다. 지금 소다로와 공주는 풀이 무성하게 자랐고 오랑캐들이 멋대로 짓밟고 다니면서 사냥터로 삼고 있으니,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리고 알목하(斡木河)는 바로 두만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토지가 비옥하여 경작이나 목축도 적당하며 요충지인 만큼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북문을 방어하기에 적합하다. [중략]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와 평안도[平安道]는, 인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朝鮮]의 세조[世祖]가 평양[平壤]으로 순행[巡行] 하였을 때, 함길도[咸吉道]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가, 북[北]쪽으로부터 와서 세조[世祖]를 알현 했으니, 고구려[高句麗] 평양[平壤]의 위치[位置]를 정확히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을 함락하고, 당[唐]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한 지역[地域]을, 여러 사서[史書]와 현지에서 조사[調査]한 자료[資料]들과 대입하여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고, 여러 설[說]이 분분한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을, 정확히 증명[證明]하고 고증[考證]하여 그 위치[位置]를 명확히 할수 있다.
그리고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을 서경으로 정한 그 지역[地域]을 분명히 고증[考證] 할수 있으리라.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것은 분명하지만, 희미하고 짧게나마 전[傳]하는 기록[記錄]중에, 고구려[高句麗]의 평원왕[平原王] 이십팔년[二十八年], 서기 586년 에, 장안성[長安城]으로 국도[國都]을 옮겼다는 이 기록[記錄]은,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와 조선사[朝鮮史]의 의문[疑問]을 푸는데 있어서 중요[重要]한 기록[記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당[羅唐]의 연합군이 점령한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과, 고구려[高句麗]의 장안성[長安成]은, 분명히 다른 지역[地域]이다.
지금의 서안[西安]이, 장안[長安], 유경[柳京], 호경[鎬京], 평양[平壤], 낙랑[樂浪]이라고 하며, 인근에 주[周]나라의 빈[邠]이 인접하고 있다. 빈[邠]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祖父]인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있던 곳이었는데, 융적[戎狄]의 침입을 피하여, 기산[岐山]으로 옮겼다고 사기[史記]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지금의 서안[西安]은, 여러 기록[記錄]이 존재하며 많은 설[說]이 오고 가고 있다.
북사[北史],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원사[元史], 명사[明史], 통전[通典]의,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며 한[漢]의 낙랑[樂浪]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의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고 호경[鎬京]이며 유경[柳京]이고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하는 기록[記錄]을 보면서,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과 비사[秘史]를 찾아가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險難]한 일인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여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대로, 서안[西安]이 장안[長安]이며 평양[平壤]이라면, 신라[新羅]와 당[唐]의 고구려[高句麗] 평양[平壤]점령 이후, 당[唐]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서안[西安]에 있어야하는 모순[矛盾]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朝鮮]시대의 역사[歷史]기록[記錄]과, 연행록[燕行錄], 사대부[士大夫] 들의 문집[文集]속에 들어 있는 기록[記錄]들은, 당[唐]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사막[沙漠]이 펼쳐친 요동[遼東]에 있는 것으로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또한 이에 대한 많은 시[詩]들을 남기고 있다.
이처럼 조선사[朝鮮史]는, 혼란[混亂]과 모순[矛盾]이 가득한 의문[疑問]투성이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에 나타나는 기록[記錄]을 따라, 광활[廣闊]한 조선사[朝鮮史]의 영역[領域]을, 정밀[精密]한 현지 조사[調査]를 통하여 실사[實査]를 해보면, 역사서[歷史書]의 의문[疑問]과, 혼란[混亂]스러운 모순[矛盾]점을 풀수 있으며, 왜곡[歪曲] 조작[造作]의 범위와 그 실체[實體]를 파악하고, 피폐[疲弊]된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알수 있는 것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軍政編五
군려대성[軍旅大成]
歲庚寅。寇盜草竊。守臣失禦。退寓居蘇多老。孔州。鞠爲茂草。胡騎踐蹂。[중략]
태종 10년 경인(1410년)에 좀도적들이 몰래 쳐들어 왔으나 지방관이 막아내지 못하고 물러나와 소다로에 우거(寓居)하여, 공주는 황무(荒蕪)한 폐허가 되어 오랑캐의 말발굽이 짓밟게 되었다. [중략]
군려대성[軍旅大成]
予欲紹述先志。復還慶源府于蘇多老。移寧北鎭于斡木河。募民以實之。於是以金宗瑞爲咸吉道觀察使。設置慶興,會寧,鍾城,穩城,慶源,富寧。築城實民凡六年。而六鎭定 [중략]
나는 선대의 뜻을 이어 받들기 위하여 경원부를 소다로로 도로 옮기고 알목하에 영북진(寧北鎭)을 옮겨셔 백성을 모집하여 이주시키겠다.’ 하여, 김종서(金宗瑞)룰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삼아 경흥(慶興)ㆍ회령(會寧)ㆍ종성(鍾城)ㆍ온성(穩城)ㆍ경원(慶源)ㆍ부령(富寧)을 설치하고, 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켜 전후 6년 만에 육진(六鎭)이 정해졌다.” 한다. [중략]
국조보감(國朝寶鑑)
세종 밀유[世宗密諭]
國朝寶鑑。世宗丁巳。璽書密諭咸吉道節制使金宗瑞曰。初富居慶源之民告于朝曰。古慶源之地。宜牧農。且有江易守。請遷居之。又有言者曰。古之爲國者務廣其地。公嶮鎭以南不可棄也。癸丑之冬。適有兀狄哈破殺管禿父子。而斡木河無酋長矣 [중략]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세종 19년 정사(1437년)에 새서(璽書)를 내려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에게 비밀히 이르기를, ‘처음에 부거(富居)와 경원의 백성이 조정에 고하기를, 옛 경원의 토지는 목축과 농경(農耕)에 알맞으며 또한 강이 가로막혀서 지키기 쉬우니 이곳으로 옮겨 살게 해 달라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옛적에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지역을 확장하기에 힘썼으니 공험진(公嶮鎭) 이남의 토지를 버려두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15년 계축 겨울에 마침 올적합이 관독부자(父子)를 격파하여 죽이니, 알목하에는 추장(酋長)이 없게 되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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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政編五
군려대성[軍旅大成]
軍旅大成曰。世宗壬子。兀狄哈攻斡木河。殺管禿父子。其黨凡察反伊等款塞。願處慶源近地。不許 [중략]
군려대성(軍旅大成)에 의하면, “세종 14년 임자(1432년)에 올적합(兀狄哈)이 알목하(斡木河)를 공격하여 관독(管禿) 부자(父子)를 죽이니, 그의 무리인 범찰반이(凡察反伊) 등이 우리 나라에 청하여[款塞] 경원(慶源) 근처에 거주하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중략]
군려대성[軍旅大成]
敎兵曹曰。我國北界豆滿江。太祖始置慶源府于孔州。太宗移府治于蘇多老。皆所以重肇基之地也 [중략]
병조에 교서로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북쪽 국경은 두만강(豆滿江)이다. 태조께서 처음 공주(孔州)에 경원부를 설치하고 태종께서 부의 치소(治所)를 소다로(蘇多老)에 옮긴 것은 모두 왕업(王業)의 터전을 닦은 곳을 중히 여긴 까닭이다. [중략]
천하[天下]를 통일한 조선[朝鮮]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업[王業]의 터전을 닦은 유서[由緖]깊은 지역[地域], 불함산[不咸山],백두산[白頭山]이 있고, 조선[朝鮮]의 평안도[平安道]가 인접한 막북[漠北] 지역[地域], 숙신[肅愼]과 후에 여진[女眞]이라고 부르던 조선[朝鮮]의 근간지지,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이 흐르는 광활[廣闊]한 조선[朝鮮]의 북방[北方] 지역[地域], 이 곳이 바로 조선[朝鮮]의 태조[太祖]가 왕업[王業]의 터전을 닦고,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서남[西南]으로 굽어보는 함길도[咸吉道] 지역[地域]이다.
알타리[斡朶里], 올량합[兀良哈], 올적합[兀狄哈]의 이속[異俗]의 종족[種族]들이 서[西]쪽과 북[北]쪽에 인접하고 자리 잡고 있던,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 지역[地域]은, 오늘날 발하슈호와 알타이산맥이라고 불리는 대황지중[大荒地中]의 북방[北方] 지역[地域]과, 알타이 자치구가 있는 평원[平原]과, 사막[沙漠]이 인접하고 펼쳐진 대야[大野]에,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는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지역[地域]에는, 현재에도 과거의 옛 지명[地名]들이 상당수 그대로 전[傳]하고 있으며, 고대[古代]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증명[證明]하고, 고증[考證]할수 있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수 없이 존재[存在]하고 있으며, 오늘 이 시간에도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의한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정신[精神]과 혼[魂]을 잃어버리고 있는 한국[韓國]의 현실[現實]을, 그 무엇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일만년[一萬年]의 장구[長久]한 역사[歷史]를 이어온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천하[天下]에 위대[偉大]한 인간[人間]의 문명[文明]을 일으키고, 천하[天下]에 인간[人間]의 길을 바로 세우고 닦은, 조선사[朝鮮史]의 학문[學文]의 근본[根本]은 어디로 사라져 가고 있는가 ?
침략[侵略]의 무리들이 조선[朝鮮]의 명맥[命脈]을 끊기 위하여,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과 이를 바로 세우는 일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선대[先代]의 일이요, 우리 조상[祖上]님들의 살아오신 모습을 올바로 보고, 바로 새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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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알타이산맥의 최고봉인 "금산"이 "불함산이요, 장백산이며, 백두산"이라는 설명, 좋은 배치며, 훌륭한 설명같습니다.
조선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결고리는 "백두산"입니다.
"백두산 곧 장백산 곧 불함산"은 산해경으로부터 시작되는 기록에 등장하며, 숙신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위치가 항상 문제였습니다. 금산(알타이산=벨루하산 4508m)! 이 산이 백두산일 가능성은 항상 대두되었으며, 거의 확정적인 것이었는데, 님께서도 그곳을 낙점하시고 현장 답사까지 하셨다니 놀랍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서의 기록과 그 지형지리가 부합되는가일 것입니다. 좋은 글,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일목요연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환국고려님의 명문을 다시 보게 되어 기쁩니다.
반도의 남해도 금산에 묻힌 이성계 마눌의 무덤의 원본이 알타이 근처 어딘가에 있겠지요?
남해금산이란 시집을 쓴 시인 이성복의 시를 보면 뭔가 냄새를 맡은 흔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상징과 은유를 평론가들은 단무지(단순.무식.지랄)스럽게 해석하지만요.
이성복의 연작시 '겨울 비가, 와 시집 '남해 금산'은 분명 조선사를 은유한 한 세트라고 봅니다.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 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檀君) 도 (후에) 기자(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 (하략)” 사고전서 四庫全書
2002년 심백강 박사가 사학계를 맹렬히 비난하며 단군에 대해 발표했던 것이라 합니다.
1772년 겨울, 건륭제는 각 성과 현의 관리들에게 그들이 관장하는 모든 서고에 보관된 희귀본과 귀중본을 조사하여 보고하고 필사하여 그 성과물을 북경을 보낼 것을 명령한다. 이것이 바로 <사고전서>의 편찬사업의 시작이다. 이 책은 <사고전서>의 편찬과정을 통해 건륭제시대의 학자와 국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것이다라 적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명이 왕험,, 창려에 험독현이 있고 여기에 왕검성이 있다라. 많이 혼돈스러운 지명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