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만이 지니고 있는 말하는 버릇이 있다. 시종일관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혼자서 떠들어대는 사람도 있다.
말을 너무 많이 허거나 너무 적게 해도 남에게 빈축을 살 수가 있는데, 결국 말이란 듣고 말하는 것을 적당하게 조절해야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을 좀 많이 하더라도 장소와 분위기에 맞도록 재치 있게 말하는 사람을 보노 라면 밉지 않을 때도 있다.
여담에 지나지 않는 화제를 가지고도 문자를 동원해서 격식에 맞추어 가며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눈만 뜨면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이 말인데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경직되고 공식적인 어투로만 말한다면 그 또한 질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대원군은 풍류를 알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느 날 문안 차 찾아온 시골선비에게 대원군은 처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쉽게 "예, 어느 집안에 장가 를 들었습니다"하고 대답했으면 좋았을 것을 선비는 유식한 체하고 격식에 맞추어 대답을 했다.
"황문(黃門)에 취처(娶妻)하였습니다."
대원군은 그 체하는 알량한 선비가 미워서, "항문이라니, 똥구멍에 장가를 갔다는 말인가"하고 핀잔을 주어 선비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모름지기 말을 쉽고 재미있게 하면서, 예의를 벗어나지 않게 한다면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유식한 체할 것도 없다.
더더구나 틀에 맞추어 얘기하는 것은 서로가 피곤하고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혼자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하고 말을
너무 아끼는 것 또한 좋은 버릇은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과 삶이 일치했 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고 믿음을 갖게 되며,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말은 실행의 그림자]라고 하지 않던가.
[태양은 우리에게 빛으로 얘기하고
향기와 빛깔로 꽃은 얘기한다.
대기는 비와 눈으로 얘기하며
자연은 온갖 몸짓으로 계절을 얘기한다.
그런데 사람은 입과 입으로 얘기한다.]
J. 폴랭의 시에서처럼 사람은 모든 의사를 입으로 말한다. 따라서 말하는 버릇은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과 같이 정이 메마르고 세상살이가 어려운 때일수록 부드러운 말 속에 재치 있게 유머를 섞어 쓸 줄 아는 사람, 솔직하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면 사회는 한결 밝고 아름다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