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살문 (紅箭門)
陵·園·廟·宮殿·官衙,鄕校,書院,旌閭閣 등의 正面 入口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으로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성역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홍살문 옆에는 [下馬碑]가 세워지며 [大小人員 皆 下馬]란 글자가 새겨저 있으며 모든사람은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 존경의 뜻으로 걸어가야 한다
◎- 홍살문 형태는 문門자를 형상화 하였으며
◎- 화살의 표시는 나뿐 잡귀나 무례한 귀신이나 불순한 사람이 친입할때는 활로 쏘아 버릴것이라는 상징적 의미이며
◎- 가운데 태극문양은 天道에 基礎한 陰陽의 原理를 表現한 것이며
◎- 붉은칠을 한 것은 辟邪의 意味이다
◎- 座臺는 八角인데 이는 여덜방위를 뜻한다
(본고는 필자가 경기도 문화유산해설사를 7년간 하면서 보고 배운 것을 메모하였다가 정리한 것입니다 잘못된 점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
≪성균관홈,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질의”≫
서원 향교 왕능등 여러곳에 홍살문이 있습니다.
홍살문의 의미와 홍살의 숫자 규모 중앙에 태극 문양등의 의미에 되해서 궁급합니다.
草庵 의 답변 (2010-09-24 13:33:40)
아래와 같이 紅門(홍살문)에 관한 전거는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헌에서 찾아지나 그 註釋文은 찾아지지 않으니 제법이나 그 하나하나의 의미는 함부로 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형태는 둥근 기둥(약 30尺)을 길 등의 양편에 세우고 위에 가로목 둘을 대고 그 가로목에 11개의 각목은 위를 뾰족하게 만들어 간격을 균일하게 세우고 위 가로목 가운데에 태극 형상을 세우고 그 위에 삼치창을 박아 세워 놓고 모두 붉을 칠을 하였는데 붉은 색은 중국인들이 제일 선호하는 색이며 불가에서는 악귀가 근접하지 못한다. 라는 설이 있는 것 같습니다.태극의 의미에 관하여는 한두 마디로 압축 약술하여 이해되게끔 간단하지를 않습니다. 太極은 陰陽 二元前의 宇宙 誕生의 최고 원리로서 繫辭傳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兩義(陰陽)가 生하고 兩義에서 四象이 生하고 四象에서 八卦가 生하야 宇宙萬物의 생함이라 이를 주염계가 太極圖說에서 음양오행을 조합하여 만물의 생성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또 朱夫子께서는 이를 性理學의 근본인 理라 해석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 태극도설을 성리학의 근본서로 널리 읽히게 되었습니다.[태극을 간단히 말하자면 우주의 생성원리를 상징한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雁門集(著 薩都剌 字 天錫 號 直齋 元人)和閑閑吳眞人條紅門下馬見天子袖 有一卷養生書
●公山誌學校篇墻垣內紅門下馬碑
◎ 【명사】(국어사전)
궁전, 관청, 능, 묘 따위의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윗부분에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우고 중간에는 태극 문양을 그려 놓았다.
홍전문 (紅箭門) 예문(2개)
1=관아에서 잡아들였던 죄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홍살문 안이 발칵 뒤집혔다.
2=결혼식에 운동복 차림으로 가겠다니, 쥐구멍에 홍살문 세우겠구나.
홍살문(紅--門)은 왕릉의 출입문으로 이 곳부터 왕릉의 영역임을 알 수 있으며, 홍살문은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없이 살만 박아 놓았습니다. 나무 기둥과 살에는 붉은 칠을 하여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림은 물론, 붉은색은 악귀를 내 쫒는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화살 '전(箭)'자를 '살'로 발음하여 지금 홍살문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홍살의 수]는 홍살문마다 똑같지 않아서 조사해 보니 3가지(9개, 11개, 13개)가 주로많이 있었으며, 중앙에는 홍살 2개가 태극 모양 있는 곳을 지나면서 꼬여서 위에는 3개의 삼지창 모양이 됩니다. 그러나 갯수에서는 둥근 태극 안에 든 것 1개만 유효합니다. 홍살문 중에 홍살의 수가 9개인 것이 가장 많은데, 그 이유는 9가 완성된 수라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홍살 수에 대해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원인과 이유가 있을 것이나 지금와서 알지못할 뿐이다
그 이외에 동구릉 같은 경우에는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폭이 긴 홍살문을 만납니다. 이 홍살문에는 홍살이 19개가 있습니다. 각 각의 왕릉 앞이 아닌 왕릉군 초입에 있는 홍살의 갯수는 입구의 길의(도로)넓이에 따라서 의미없이 홍살을 세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 동구릉 입구 (홍살 19개)
▲ 목릉 (홍살 9개)
▲ 서오릉의 익릉(홍살 11개)
▲ 파주의 장릉(홍살 13개)
▲ 연천향교 (홍살 9개)
▲ 경순왕릉 (홍살 9개)
▲ 연천숭의전 (홍살 9개)
홍살 중앙에 홍살 2개가 꼬인 부분에는 둥그런 태극이 걸려 있다.[태극 문양은 3 태극]으로 [3태극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 한다고 한다. 또 [2태극]이 주로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홍살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와 있는 향덕(向德)의 기록을 보면
신라 웅천주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신라 경덕왕 14년(755) 흉년으로 그 부모가 굶주림과 병이 들자 자기의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내어 이를 아버지에게 먹여 병이 낫게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왕은 벼 3백석과 집한 채와 구분전(口分田)을 하사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돌에 이 사실을 새겨 이 뜻을 표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고을을 효가리(孝家里)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는데, 거기에는 이름이 향득사지(向得舍知)로 되어 있고 간단한 효행사실과 아울러 벼 5백석을 하사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비록 정려(旌閭, 홍살문)라고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능으로는 우리 나라 최초의 홍살문이 될 것이다.
홍살문(紅箭門)설계도
(사진이 안올라 갑니다)
≪실록에 나타나는 홍살문 ≫
조선왕능과 향교,서원,충,효,열,의 [정려각]에는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충신(忠臣)·효자(孝子)·열녀(烈女) 등의 집 앞에도 문을 세워서 표창하는 것. 이 문을 홍살문[紅箭門]이라 부르는데, 두 개의 기둥 상단에 나무를 가로 걸치고 화살 창을 박고 문 전체를 붉게 칠하며, [행적에 따라 충(忠)·효(孝)·열(烈) 등 글자와 관직(官職)·성명을 새긴다],
조선태조에서 정종. 태종. 세종1년까지 조선실록에는[홍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는데
세종4년에 홍살문[紅箭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록된다
홍문은 중국 대성전이나 일본의 신사당 종교신좌에는 없다
1399년.10월.8일 정종때에는 [홍문]이라고 했다
.. 전명(殿名)을 세우지 않고, 궁문(宮門) 밖에 홍문(紅門)을 설치하지 않아서, 평범한 사람의 거실(居室)과 다를 것이 없으니, 존엄을 보이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하는 기록도 있다
1418 세종즉위년 9월 에는
...장전 앞에는 홍문(紅門)을 세워 오색 비단으로 꾸미고,.... 라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세종 4년에 홍살문이라는 단어가 조선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세종4년]......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유사는 우주를 받들어 떠나게 되는데, 임금은 도보로 홍살문 밖에 이르러 소연(素輦)을 타고, 백관들은 홍살문 밖에서 백 보쯤 나와 말에 올라 따르게 되고, 서울에 남아 있던 여러 신하들은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맞아들여---
[세종7년]......서북편에 설치하고, 홍살문[紅門]을 장전의 북쪽에 세우되, 채붕(綵棚)을 매고,----
[세종15년].....문묘의 세 방향을 바깥담으로 두르고 남쪽에는 홍살문[欞星門]을 짓고 동쪽에 문 하나를 짓기로-----
고려시대에는 화살창살이 없는 '홍문'이였다
조선 세종4년 때에 홍살을 꽂아서 홍살문으로 만들었다
홍살문의 유래
홍살문(紅箭門)이란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여 임금이 그 집이나 마을 앞, 능(陵), 원(園), 묘(廟), 궁전(宮殿), 관아(官衙) 등에 세우도록 한 붉은 門이다.
일반 향교나 서원에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는 휼륭한 성현이나 유학자의 위폐를 서원에 모셨기 때문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정려(旌閭), 정문(旌門), 작설(綽楔), 도설(棹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좌우에 높은 기둥을 세우고 지붕은 없이 斜籠(사롱)만 얹고 붉은 단청을 한다. 붉은 단청을 하는 것은 신성한 곳을 나타내기도 하고 악귀를 내쫓는 벽사의 뜻이기도 하다.
(綽楔之典 = 忠臣,烈女,孝子,가 난 집안을 表彰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旌門을 세워주던 特典)
(斜籠 = 대문이나 중문위에 댄창살)
홍살문의 유래와 역사
홍살문이란 말이 처음 쓰인 곳은 중국의 『주례(周禮)』로서 임금이 행차시에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바깥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 또는 빈객을 만나는 곳을 나타내던 기(旗)나 문(門)의 표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후대에와서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표창하여 집이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붉은 색 문의 표시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우리 나라 홍살문은 신라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다. 특히 성종이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으면서 정려[홍살문] 또한 많이 건립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많은수가 세워졌다.
홍살문은 대개 효행을 중심으로 많이 포상의 형식으로 주어졌으며 조선조에는 의부(義夫), 절부(節婦, 열녀) 등에게도 내려져 효행과 여성의 절개를 중시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서원 또한 많이 건립이 되고 유명 서원에서는 유학선현들의 위폐를 모시는 경우가 많아 홍살문 또한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명종2년까지 홍문- 紅箭門 선조7년
홍살문은 홍문(紅門)이라고도 불리는데, 본래 궁전(宮殿), 관아(官衙), 능(陵), 원(園:세자,나 대군, 공주, 등의 묘)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신성한 곳을 알리는 문(門)입니다.
한자로는 홍전문(紅箭門)이라 표현하는데, 형태는 30자 이상되는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쭉 박았습니다.
또한 홍살문 오른쪽에는 왕이 제례(祭禮) 시에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가는 배위(拜位)가 있습니다.
능의 정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홍살문을 지나면서 성역인 능역이 되는 것이다
능으로 가는 길 참도(參道)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丁字閣)까지 긴 돌길인 참도(參道)가 펼쳐져 있다. 참도는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고 , 오른쪽 부분은 단을 낮게 만들었다. 이유는 신성한 정령(精靈)[王의 魂靈]이 다니는 왼쪽 신로(神路) 부분과 신하가 걸어 다니는 오른쪽 인로(人路) 부분을 분리해 놓은 것이다.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얇은 돌[박석(薄石)]을 깔아 반듯하게 조성한 참도는 왕릉의 신성함을 표현한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연천향교 도평박동일 조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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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달님 !! 뎃글 감사 합니다
자주 뵈옵고 좋은 대화가 오고갈수 있기를 회망합니다
가는해에 마무리 잘하시고 오는해에는 복많이 받으세요 (박동일 올림)
홍살문에 관해 정리를 잘해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선생님 ! 남순자입니다.이렇게 글로라도 뵈올수있어 반갑습니다.
건강하시죠?
언제나 좋은글 올려주시어 읽기만 잘하였읍니다.
다가오는 신년새해도 건강하시고 밝고 좋은일들만 있으십시요.
덕분에 항상 잘보고 많은 도움 감사합니다 선생님 새해엔 더욱 건강하시고 복많이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