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적인 영물이라고 말하는 동양의 용은 비록 그것이 동물세계에 실존한 존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동양인의 마음과 정신생활에 5,000년 동안이나 지배해왔고, 조형적으로 표현된 지도 4,000년이나 되므로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용은 엄연한 실존물로 느끼게 된다.
용은 조물주의 단독 창조물이 아니고 자연현상과 인간의 마음이 융합함으로써 태어난 환상적인 또 하나의 창조물로, 어느 특수한 종교의 독점물도 아니고 모든 종교적 신앙행위뿐 아니라 민속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다같이 받아들인 영물이므로 위대한 존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용에 관한 수많은 신화·설화·전설들은 용에 대한 신앙·학설·문학 또는 미술의 형태로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이 모든 문화적 소산물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용의 형상이며, 그 형상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용의 미술이다.
용이 올라간다는 자연현상이나 용꿈에서 용의 모습을 찾고, 그것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조형시키려는 과정에서 용의 형상을 나타낸다. 용의 조형물 덕분에 더욱 실감나는 용꿈을 꾸고 등천하는 용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환상과 조형물이 주고받는 동안에 용의 형상은 다듬어지게 된 것이다. ≪전한서 前漢書≫ 교사지(郊祀志)에 황제(黃帝)를 영접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용이 내려왔다고 하였고, ≪사기 史記≫에는 황제가 토덕(土德)을 얻어서 황룡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미술사는 이론적으로나마 용의 조형사를 황제로부터 시발한다. 한(漢)나라 때 ≪논형 論衡≫에 용이 승천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당나라 때 ≪유양잡조 酉陽雜俎≫에도 승룡에 관한 이론이 나온다.
민간에 퍼진 승룡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으며, 현대인들도 고대인과 다름없이 우레 소리와 회오리바람에서 실감나게 용이 하늘로 오르는 현상을 경험해왔다.
용의 모습은 뇌성(雷聲)·괴운(怪雲)·선풍(旋風)·전화(電火)·폭우(暴雨)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탄생하였다. 은(殷)나라 때 뇌운문(雷雲文)에서 용 미술사가 실질적으로 출발하여 용이 동물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는 용의 탄생에서부터 비룡(飛龍)에 이르기까지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론이 태어났고 이에 병행하여 용의 조형사가 뒤따르게 되었다.
대개 현대의 용 미술사는 중국의 유물과 문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 나라 자료에는 소홀한 감이 든다. 깊이 따지고 보면 용 미술사에 있어서 우리 나라의 미술자료가 탁월한 것이 많고, 중국 자료에서 찾지 못하는 귀중한 민속자료가 많이 숨어 있으니, 여기서는 그 숨은 자료를 활성화시켜서 과거의 용 미술연구를 보완하고자 한다.
용의 조형사에 있어서는 용의 탄생론보다 화생론(化生論)이 중요시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화생론은 사룡(蛇龍)과 어룡(魚龍)의 화룡설이다. 용의 형상에 있어서 뱀과 잉어의 요소가 지배적으로 나타나 있으니 이러한 화생론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뱀의 화룡설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본초강목 本草綱目≫의 기록과 같이 석척(流狩, 도마뱀·도롱뇽)이 용이 된다는 설과 ≪시경 詩經≫의 훼사(懊蛇)·훼훼(懊懊 其電)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 독사뱀〔落〕의 화룡설이다. 어룡설에 있어서도 잉어의 화룡설과 문어〔林〕의 화룡설 두 가지가 대립되고 있다.
이러한 실존동물의 화룡설을 떠나서 용을 선행하는 기(具)라는 괴물이 용이 된다는 기룡설(具龍說)도 나타났다. 기의 모습은 도깨비얼굴을 가지고 올챙이같이 생긴 외다리 괴물이라는데, 그것이 자라서 기룡이 된다는 설이다. 우리 나라에는 이무기라는 특이한 이름이 있으며, 이것은 용의 새끼를 뜻한다.
그래서 훼룡이나 어룡이 다 이무기로 해석되고 그러한 것을 뒷받침할만한 조형물도 풍부하게 남아 있다. 훼는 은나라 때 동기문에 많이 나타나며, 두개의 훼룡 측면도를 합쳐서 하나의 도철문(瑾隨文)을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훼룡이 자라서 500년이 지나면 교룡(蛟龍)이 된다 하고, 용의 조형도 이 과정을 따르고 있다.
≪대자전 大字典≫에 교룡은 용의 새끼이며, 모양이 뱀같이 생기고 길이가 열 자나 되며 네 개의 넓고 짧은 발이 있다고 하였다. 이십팔방각명신도(二十八方各名神圖, 에밀레박물관 소장)에 교룡과 용의 비교도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데, 한눈에 이무기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교룡은 다람쥐 같은 귀여운 얼굴에 귀가 달리고 잉어꼬리와 네 발을 갖춘 뱀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광아≫에 비늘 달린 용(有鱗, 蛟龍)을 교룡이라 하였으나 실증자료가 없다. 또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에 한나라 고조의 어머니 머리 위에 교룡이 나타난 뒤 고조가 탄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훼룡이 자라서 교룡이 되어 승천한다고 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도상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나라 자료로 보완하여 판단하면 훼룡은 올챙이 꼴에 귀가 달린 이무기며, 교룡은 귀 달린 올챙이에 네 발이 달린 과정의 이무기로 보인다. 다음에 이룡(賂龍)이라는 것이 있다. ≪광아≫에 뿔 없는 용을 이룡이라고 하였으나 고증자료가 확실하지 않다.
≪대자원 大字源≫에는 이무기라 하였고, ≪한서 漢書≫에 붉은 교룡이 이룡이라 하였고, ≪삼재도회 三才圖會≫의 이룡 형상이 교룡과 비슷한데다 발가락이 독수리 같은 꼴로 보아 교룡이 한 단계 더 자라서 용에 가까운 형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룡의 가장 좋은 자료는 신라시대의 석비이수(石碑賂首)가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돌계단에 설치하였던 계호석(階護石)으로 보이는 단독 이룡의 돌조각의 걸작이 발견되어 그 자상하고 세밀함이 분명해졌다(에밀레박물관 소장).
이 작품도 한눈에 이무기라는 점을 느낄 수 있는 귀여운 새끼용으로, 얼굴은 토끼같이 부드러운데 뿔이 약간 자라고 있는 상태이며, 몸에 비늘이 있고 꼬리가 유난히 길게 생겼다.
다음의 규룡(适龍)은 ≪광아≫에 뿔이 달린 용으로 되어 있고, 사전에는 뿔이 없는 용으로 되어 있어서 혼동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적당한 고증자료도 없다.
다음의 반룡(蟠龍)은 ≪광아≫에 의하면 하늘에 올라가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고 하였다. 이 과정의 용을 형태로 표현할 때는 엄밀히 따져서 구름의 배경 없이 몸을 구부린 자세로 나타내어야 옳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나는 완성된 용을 응룡(應龍)이라고 하는데, 문헌상에는 흔히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고대의 유물에는 날개가 달려 있으나 한나라 이후의 것은 불꽃무늬〔火焰文〕로 바뀌어 동양 특유의 비룡상을 창작해내었다.
그러나 화염문은 사자·해태·기린 등의 영수에도 달았으니 그것은 상징적인 성화문(聖火文)이며 날개 대신 나타낸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불꽃무늬를 나는 장치로 해석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일이다.
동양의 용이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는 여의주(如意珠)라는 구슬을 지녀야만 한다. 원래는 척목(尺木)이라는 공작꼬리무늬같이 생긴 보물로 되어 있었다.
≪유양잡조≫에 말하기를 용머리에 박산(博山: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집)과 같이 생긴 척목이 있어야 승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동안 용의 형상을 연구한 사람들은 중국 육조시대 석각에 어렴풋이 보이는 척목자료를 억지로 제시하면서 그 기록에 부합시켜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우리 나라의 용 미술 유물에는 상세하게 나타난 박산의 자료가 풍부하게 보전되어 있다(에밀레박물관 소장, 운룡도·와당). 박산이라는 특이한 용의 보물은 보주로 변하고, 불교의 참여로 인하여 여의주로 발전하여 용 몸에서 분리된다.
용의 턱밑에 보주가 감추어졌다는 장자(莊子)의 이야기가 용궁에 가서 여의주를 얻었다는 ≪태평어람 太平御覽≫의 이야기로 발전된다.
동양 고유의 용은 당나라 때에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광범위하게 그 조형미술이 발달되어 회화부문에 있어서나 조각·공예부문에 있어서 동양 최고의 걸작들이 창작되었다.
완성된 용의 형상은 ≪회편세전 會編世傳≫의 구이삼정지설(九以三停之說)에 의하면 용의 뿔은 사슴뿔을 닮았고, 머리는 낙타머리를 닮았으며, 눈은 도깨비의 눈을 닮았고, 이마는 뱀의 머리를 닮았으며, 배는 지렁이의 배를 닮았고, 비늘은 잉어비늘을 닮았으며, 발가락은 독수리발가락을 닮았고, 발바닥은 호랑이발바닥을 닮았으며, 귀는 소의 귀를 닮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빠진 것이 있다면 용의 코밑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간 촉각과 얼굴 사면에 달린 털이다. 턱수염이나 구연(口緣:입의 가장지리)의 수염이나 이마의 털은 여러 가지 형태로 도안화되고, 촉각은 일반 귀면(鬼面:귀신의 얼굴)과 구별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지표가 된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 이후의 그림과 조각을 중심으로 용의 형상을 상징성과 조형물의 용도를 대조해가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 나라의 용 미술은 용이 승천하여 하늘을 상징하는 최고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용의 성격은 주로 궁중미술에 적용되어 임금의 자리(龍座)·수레〔龍駕〕·배〔龍架〕·복장〔龍袍〕 등의 조형물이 생기고, 용좌(임금이 앉는 자리) 천장을 장식하는 ‘쌍룡도’ 그림이나 용좌의 배경으로 ‘용병(龍屛)’이 꾸며졌다.
궁중용으로 사치스럽게 마련된 이러한 미술품에서는 별로 주목을 끌만한 작품이 없다. 다만 ‘일룡병(一龍屛)’의 거작이 옛날 사생물에 나타나 있으나 보존되지 못하였다.
천룡사상은 불교 속으로도 침투하여 천룡호법의 탈을 쓰고 사찰건축의 천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통도사 대들보에 그려진 백룡의 단청화는 우리 나라 용그림을 대표할 수 있는 큰 규모의 걸작이다.
둘째로 용은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수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바다 속의 용왕으로서, 용신각 속의 용신으로서, 기우제의 우신(雨神)으로서, 지붕 위의 방와신으로서 용의 존재는 폭넓은 것이었다.
이러한 신앙이 5,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살아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조형물도 전해지고 있다. 용신신앙은 민간신앙이라고 하지만 임금까지 깊숙이 참여한 ‘민’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이 신앙행위에서 태어난 미술품 중에는 미술사상 문제가 될만한 용의 그림들이 있다. 옛날에는 기우제를 토룡제(土龍祭) 또는 화룡제(怜龍祭)라고 불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평왕 50년에 화룡제를 지냈다고 하였고, ≪문헌비고≫에도 용의 그림을 단상에 걸고 화룡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도처에 화룡을 임금께 바친 기록이 보인다.
≪용재총화 弁齋叢話≫에는 오룡제를 지냈다 하였으니 오색화룡을 썼던 사실이 짐작된다. 이러한 화룡의 자료는 정통화 위주의 미술사에서는 도외시되어왔으나 민화의 재발견운동에 따라서 귀중한 자료가 다소 보존되었다(에밀레박물관 소장, 청룡도·백룡도·황룡도).
용신신앙 역시 불교와 융화되어 다듬어지고 ≪용왕경≫을 탄생시키고 불화 공들에 의하여 격조높은 단청화나 탱화양식의 용 그림을 크게 발전시켰다.
용신신앙의 소산물로서 또 하나 주목되는 자료는 ‘용신탱화(龍神幀怜)’이다. 이것은 용궁에 있는 용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용이 인격과 신격을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산신탱화(山神幀怜)와 병행하는 귀중한 종교화이다.
산신과 같이 용신도 백발의 노인 상으로 나타나는데 수염이 용의 수염을 닮은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용궁부인으로 여신상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용신탱화는 무당들도 모셨고, 사찰에서도 모셨고, 도관(道觀)에서도 모셨으나 문제작이 보존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셋째로 용은 귀신을 쫓는 벽사신(陽邪神)으로서도 큰 일을 담당해왔다. 수신으로서 불을 막는 구실을 한 것은 물론이고, 사신(四神 : 靑龍·白虎·朱雀·玄武)의 하나로서 동방의 수호신이 되고, 십이지신(十二支神)의 하나로서 진시(辰時)의 시직신장(時直神將)의 임무를 차지하였다. 천룡으로서 만복을 베풀고, 수신으로서 온 천지의 물을 지배한 용이 수호신으로서는 전문분야에 국한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신, 그 중에서도 좌청룡·우백호의 신앙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쉴새없이 지키고 있다. 양택(陽宅)을 정할 때나 음택(陰宅)을 정할 때나 청룡백호의 명당자리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어 수천 년 동안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여왔으며, 이러한 민간신앙에서 용호도가 자라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청룡도는 사신도의 최고의 작품으로서 정통미술사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왔다. 고려시대의 유물로서 석관(石棺)에 새겨진 음각문이 남아 있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대문에 붙이는 호축삼재(虎逐三災)·용수오복(龍輸五福)을 뜻하는 용호도로서 민예적(民藝的)인 용 그림을 크게 발전시켰다.
십이지신장으로서의 조형은 신라시대 왕릉병풍호석으로서 석조각 형태로 드러났고, 조선시대에는 불교식 장례에 쓰여진 현화(懸怜)로서 인신용면(人身龍面)의 특이한 형상을 나타내었다. 방화신(防火神)으로서는 삼국시대부터 와당무늬나 용마루의 용두(龍頭) 형식으로 조각품을 풍부하게 남겼다.
넷째로 용은 복을 가져다주는 시복신(施福神)으로서 서수(瑞獸 : 상서로운 징조로 나타나는 짐승)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즉, 용은 사령(四靈 : 龍·鳳·龜·麟)의 첫머리 위치를 차지하면서 길상(吉祥:좋은 조짐)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사람들은 용꿈을 좋아하였고, 그러한 꿈을 몰래 간직하기 위하여 용꿈그림〔夢龍圖〕까지 그렸다.
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세계에서도 한결같이 용꿈이 숭상되었던 사실은 오죽헌(烏竹軒)의 몽룡실(夢龍室) 현판이 실증하여주고 있다. 이밖에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고사에 따라 등용출세와 득남을 상징하는 어룡의 약리도(躍鯉圖)가 민화적인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림뿐 아니라 공예분야에 있어서도 잉어연적이 정형화되었고, 용 항아리가 상식화되고, 잉어자물쇠나 목기장식으로도 광범위하게 애용되었다. 사령미술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거북의 머리조각이다.
고려시대의 귀부(龜趺:거북모양의 빗돌 받침)에 있어서 거북머리를 용두로 조각한 것은 확실히 그 시대의 뚜렷한 경향이라고 보인다. 금산사혜덕왕사탑비·법천사지광국사탑비·고달사원종대사탑비·쌍봉사철감선사탑비·봉림사진경대사탑비 등의 귀부는 모두가 다 용두구신(龍頭龜身)으로 조형된 고려유물의 대표적인 걸작들이다.
다섯째로 용은 음악신(音樂神)으로서의 지위가 특이하다. ≪시경≫에 훼훼는 뇌성이라 하였듯이 이무기는 우레소리와 함께 움직인다.
≪병장도 兵將圖≫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대적인 치우족(蚩尤族)은 용의 울음소리를 제일 싫어하였다 하여 탁록대전(鴉鹿大戰)에서 황제군은 소각(小角)·대각(大角)의 악기를 만들어 용소리를 내면서 응룡으로 하여금 치우군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잡조 五雜俎≫나 ≪잠확류서 潛確類書≫에 기록된 구룡자(九龍子)의 제1자 포뢰(蒲牢)는 울기를 좋아하였고, 제2자 수우(囚牛)는 소리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범종 천장에 음통을 뚫고 용뉴(종의 꼭대기 부문의 장식)를 설치하였으며, 북통〔鼓筒〕에 용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구룡자(蒲牢·囚牛·蚩吻·嘲風·苗櫓·眉洌·葯摹·壟猊·覇下)의 모습은 현존하는 궁궐건축 지붕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고 ≪삼재도회≫에도 나타나 있다. 그 형상은 용의 모습과는 다른 괴수의 꼴로 나타나 있어서 용의 형상을 추구하는 데 다소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섯째로 용은 학문의 세계에서도 숭상되었으며, 철학적으로 ≪역경≫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문학·동양서예·정통회화사 등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용(龍)자의 대자글씨는 예로부터 서예가들이 다투어 쓰던 글씨였고 때로는 용 그림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통화 계통의 용그림은 대작이 보존되지 못하여 유감스러운 일이나 석경(石敬)의 〈운룡도〉, 현재(玄齋)의 〈승룡도 昇龍圖〉, 최북(崔北)의 〈의룡도 醫龍圖〉, 정수영(鄭遂榮)의 〈등룡도 登龍圖〉 등 몇몇 작품들이 전해지기는 하였으나, 중국 진용화(陳容華)의 〈구룡도 九龍圖〉같은 대작에 비하면 왜소한 자료들이다.
정통화 화제에 있어서 비룡재천(飛龍在天)·용반호거(龍盤虎踞)·용비봉무(龍飛鳳舞)·용호상박(龍虎相搏)·어변성룡·용문소미(龍門燒尾)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통화 속에도 다분히 민속적인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용 미술자료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여보면 고구려의 벽화, 신라의 용뉴와 이수, 백제의 용문전, 고려의 귀부, 조선조의 용민화 등이 각 시대를 대표하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자료는 고대 용신앙이 불교와 습합되어 불교식 신앙행위와 불화 공들의 탁월한 솜씨로 완숙되었다.
미술사자료로는 종뉴·이수·귀부·치문·당간용두·용문단청·벽화·용신탱화·용문부도·용고·목어(木魚)·용문와전 등 용의 그림과 조각의 걸작들이 거의 불교미술에서 나왔다. 용의 전체적 형상을 정리해보면, 사형(蛇形)·사족수형(四足獸形), 그 중간형, 그리고 어룡형(魚龍形)으로 크게 분류해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창룡(蒼龍 : 별이름)은 사족수형의 대표적 작품이고, 조선조의 운룡도는 모두가 다 사형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하여 신라시대 와당(瓦當기와 마구리)에 나오는 용은 그 중간형으로 보이고, 절간 누각에 모셔진 목어는 어룡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색채를 중심으로 나누어보면 청(靑)·백(白)·주(朱)·현(玄)·황(黃)의 오방색으로 나타나서 ≪용왕경≫이나 오행설 기록상의 용과 일치된다.
용 그림의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구름을 배경 삼는 운룡도, 물속에서 뛰어나오는 수룡도, 아무 배경 없이 나오는 반룡도, 한쌍으로 꾸며지는 쌍룡도, 호랑이와 짝을 짓는 용호도, 호랑이와 힘 다툼하는 용호상박도, 용궁의 용왕으로 나오는 용신도, 하늘로 올라가는 승룡도,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도, 용꿈을 그린 몽룡도 등으로 나누어진다. 용의 조형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귀두(鬼頭)·뿔·촉각·앞배·수염·뒷등·영치(靈齒)·비늘·발가락·꼬리·여의주 등으로 구성된다.
용의 모습은 이러한 구성의 표현 여하에 따라서 용격이 이루어지고, 미술적인 화격이 정해진다. 특히, 용의 얼굴은 전통 귀면과 일치되며 눈·코·입·이·뿔·눈썹·촉각·수염의 표현이 용의 관상을 결정짓는다.
호랑이·도깨비·해태 같은 다른 벽사미술의 한국적 특성은 용의 미술에 있어서도 되풀이되어 무섭다든가 징그럽다기보다는 부드럽고, 맑고, 친밀감 넘치는 작품이 많다.
이러한 작품 중에는 할아버지 얼굴과 같은 인격을 갖춘 것도 있고, 바보스러운 표정도 나오고, 토끼같이 귀여운 모습도 나온다. 때로는 용두를 남근형으로 그려 웃음을 터뜨리는 매우 해학적인 모습도 나타나서 놀라게 한다.
신흥사 대웅전의 계호석 석룡조각은 부드러운 우리나라 용조각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하겠으며, 신라시대의 이수조각은 귀염성을 여지없이 나타내었고, 조선조의 용그림은 매우 해학적이다.
용의 발가락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한나라 고조(高祖) 때는 제왕과 제1·2왕자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고, 제3·4왕자는 네 발가락의 용을 쓰도록 규정하였다.
이 규정이 후세에 와서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고, 한국의 왕은 네 발가락의 용을, 일본의 왕은 세 발가락의 용으로 규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통화에서는 이러한 규정을 온순하게 지킨 것 같고, 민화의 세계에서는 다섯 발가락의 용 그림이 자유롭게 나타나 있다. 용의 몸집은 뱀을 닮은 탓으로 그 자세가 자유로워서 천변만화의 가지가지 자세를 취하면서 나타난다.
하늘을 나는 비룡상은 운룡으로서 표현되는데, 그림의 운룡도뿐 아니라 조각에 있어서도 환상적인 대작은 운룡으로서 용 미술의 멋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나라의 용 미술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민족적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민속적인 상징미술로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광범위하게 성장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참여한 가운데 일상생활에서 같이 살고, 초복벽사의 뜻을 품고, 한국미술의 멋을 여지없이 발휘한 특이한 창작으로서 미술사에 공헌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