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있었던 일이다. 마산 실내체육관에서 마산시 양덕동 옛 한일합섬 부지 8만7천여평에 건립되는 “메트로 시티” 분양권 추첨이 진행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실내에서는 1만여명의 분양신청자들이 가득 들어찼고, 출입구에는 당첨자를 만나기 위해 “떳다방 들이 진을 치고 있고, 당첨자 발표가 날 때마다 환호와 탄식이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는 소식이다. 나는 " 아 이제 마산에도 부동산 투기바람이 부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당첨자 발표 직후 웃돈이 적게는 300만~400만 원에서 많게는 1,500만~2,000만 원까지 붙었다고 했다. 고도로 성장하는 창원에 밀려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던 마산에서는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분양가가 당시 마산의 다른 신축아파트의 두 배에 가까운 점을 감안하면, 그야 말로 “광풍”이었다. 메트로시티는 발표당시 3,800여 가구가 건립되는 마산 최대규모의 복합주거단지였다.
그리고 몇 년후 다시 지인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는 그곳 입주예정자들이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메트로시티의 핵심이었던 2차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송을 추진하던 입주자들 이야기로는 태영건설 측이 당초 분양 당시 광고했던 주상복합 2차 사업을 예정대로 시행하지 않아 재산가치하락 등의 피해를 보고 있어 과대광고 및 사기분양에 대한 계약취소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 소송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않고 있지만, 바로 그 지역이 한때 한국 수출산업에 지대한 공헌을 했었던 옛 “한일합섬”터였기에 점점 쇠락해가는 마산의 한 단면을 보며, 그 옛날 화려했던 한일합섬이라는 기업의 부침을 생각해보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양덕동의 한일합섬 시대
<한일합섬이 들어서기 전의 양덕들판>
1964년 설립되어 우리나라 섬유산업을 선도해 온 한일합섬은 국민 의생활 개선은 물론 경제 발전기에 제조와 수출을 통해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해 왔다. 한일합섬은 1960년대 당시 ‘신비의 섬유’라 불리는 아크릴 섬유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해, 해외 수출의 길을 열었으며 1973년 단일 기업으로는 국내 최초로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79년에는 4억불 수출탑을 수상하였으며 아크릴 섬유의 방적, 염색에서 시작해 이후 스판 본드 및 특수사의 개발 생산 등 섬유산업을 선도했다. 또한 의류 수출과 패션분야의 진출을 통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의류 및 합섬 전문기업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말까지 지속적 성장을 통해 사업 확장 과 비약적 발전을 이루는 가운데 산업 환경 변화에 따라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내 설비를 해외 로 이전,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해외 생산 네트워크를 갖추기도 하였으나, 1990년대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던 중 IMF구제금융을 받는 등 어려웠던 국내경제환경에서 약 9년여간 어려움을 겪은 후 드디어 2007년 2월 동양그룹으로 넘어갔다.
한일합섬 창립자인 고 김한수 회장은 64년 6월 창업자본 1500만원으로 한일합섬 섬유공업(주)를 창립했는데,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기공식을 했다. 1986년에 펴낸 “한일합섬 20년사” 에 의하면 ‘양덕동 허허벌판에 기공의 삽을 힘차게 꽂은 지 만 1년, 마침내 준공 테이프를 끊게 된 아크릴 섬유공장은 ․․․․․․’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잘못되었다. 그 곳은 그냥 벌판이 아니라 삼호천과 산호천 사이의 기름진 논밭이었다.
아크릴 섬유로 시작한 한일합섬은 후에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했다. 1967년 4,300명으로 시작했던 사원수는 1976년경에는 27,000명까지 늘었다. 사원 수가 이 정도였으니 지역사회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했다. 당시 정부시책에 따른 국가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1967년 68만 불이던 수출액이 71년에 2,286만 불까지 급성장을 이루었고, 1973년에는 국내 최초로 수출 1억불을 달성했다. 창립 후 불과 5-6년 만에 수출액 15,000% 성장이라는 기적의 기록을 가진, 그 시절 최고 최대의 기업이었다. 소위 “전국 7대도시 마산”도 이 한일합섬이 일조하여 탄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한일합섬은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한일여고(한일전산여고)를 설립했다. 기업으로서는 내실있는 훌륭한 투자였다. 1974년에 설립한 한일전산여고는 첫 해에는 28학급 1,680명 규모였으나, 1980년에는 120학급 7,200명까지 늘었다. 학급 수가 120, 한 학년 40반 정도의 큰 규모였으니,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큰 규모였다. 이 학교 학생들은 한일합섬에 취업해서 돈을 벌어 대부분을 고향의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자신들의 공부도 하려했던 갸륵한 마음씨를 가진 나이 어린 여공들이었다. 이제 그녀들은 나이 50을 넘나드는 중년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선진화된 대한민국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봐야 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인근에 들어선 마산수출자유 지역과 함께 양덕동의 "한일합섬의 시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경제 산업동맥 ‘파란만장’- 섬유산업 사양화로 ‘쇠락의 길’
한일합섬은 계열회사인 경남모직의 부산·마산공장, (주)한효 등을 중심으로 ‘하니론’이라는 브랜드를 개발, 150여개에 진출하는 세계적 종합섬유회사로 성장했다. 이후 한일합섬은 80년 후반 (주)국제상사·진해화학(주) 인수를 시작으로 94년에는 최고 15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한일그룹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한일그룹은 섬유산업의 급격한 사양화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국제통화기금 지원이 이뤄진 98년 6월 모기업인 한일합섬과 계열회사인 남주개발·신남개발·진해화학이 퇴출기업으로 분류돼 좌초 위기를 맞았다.
부도-법정관리-적자-터 매각
급기야 한일그룹은 같은 달 6개 계열사 중 한일합섬과 국제상사를 제외한 경남모직·부국증권·한효건설·한효개발 등 4개사와 보유 부동산을 매각하는 내용의 구조조정을 발표한다. 그러나, 증권거래소에서는 한일합섬의 부도설로 98년 6월 23일 주권 매매거래가 중단되고, 같은 해 7월 1일 한일은행 용산지점에 돌아온 58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한일합섬은 결국 부도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한일합섬은 창원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으며, 법원이 회사정리계획안을 승인함에 따라 법원의 관리를 받게 됐다. 법정관리 기간 중에도 한일합섬은 첨단섬유산업인 라이오셀 사업을 진행, 회생을 모색했지만 기존 아크릴섬유산업의 침체로 적자가 지속됐다.
한일합섬은 이에 따라 한일합섬 마산공장 터를 매각해 채무를 변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회사정리계획 변경계획안을 제출, 법원이 이를 승인했으며, 한일합섬과 (주)태영·한림건설(주)컨소시엄이 2850억원의 매입가격으로 한일합섬 마산공장 터의 매매계약을 체결함에 따라 창립이후 40년동안 지켜왔던 마산 양덕동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것이다.
부도이후 위기를 맞았던 한일합섬은 동양그룹에 인수합병, 부도 9년 만에 법정관리를 졸업하고 새 출발을 선언했으나 섬유를 뺀 대부분 사업분야가 동양그룹으로 흡수됐다. "70년대만 해도 한일합섬 마크 달린 옷을 입고 있으면 시내 술집에서 외상을 줄 정도였고, 직원들도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한 퇴직직원의 말에서 그 시절 마산의 "한일합섬" 시대가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일합섬은 본 공장 외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규모 혹은 짜투리 땅들을 대부분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어 분양처분했다. 규모가 작은 땅들이라 한채 혹은 두어 채 정도였고 저층이었으며, 주택이름은 모두 ‘한일’이나 ‘한효’가 들어간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 옛날 양덕동 일대 주민들의 땀이 벤 옥토가 30 ~35여 년 만에 아파트 터로 변한 셈이다. 이제는 메트로 시티니 뭐니 하면서 외래어 이름을 붙인 대단지 고급주택단지가 들어서니 도시의 외관은 달라지겠지만, 도시의 질이 과연 어떻게 될지 걱정스럽다. 마,창,진 3개 도시 통합과 맞물려 이 지역이 어떻게 발전될지 기대를 해본다.
<건설 초기 모습>
<고향에서 가져온 팔도잔디를 가꾸는 한일여고생들>
<최고 전성기 때의 한일합섬, 오른쪽 운동장이 한일여고 팔도잔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