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3일. 이미 뱃속에 준희를 가지고 있는 준희 엄마와 정말 어렵게 어렵게 결혼식을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제 고집으로 진행되었음을 느낍니다. 결코 되지 않을 일들이 일어났었고, 저는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현실들을 덮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저희는 결혼 기념일을 챙기지 않습니다. 워낙에 기념일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준희 애미의 성격이 있긴 하지만, 저 역시도 이상하게 7월 3일이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요즘 결혼하는 친구들을 봅니다.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이 여자도 만나보고, 저 여자도 만나보고, 준희 엄마 친구들도 봅니다. 이 남자도 만나보고, 저 남자도 만나보고... 결국은 조금 늦기는 해도 자기 짝을 찾아서 결혼을 하더라구요. 그런 모습을 보면, 솔직히, 아주 정말 가끔은, 정말 힘들게 박박 우겨서 결혼을 했던 제 자신이 후회가 될 때가 있습니다. 준희 애미랑 결혼을 해서 후회가 된다기 보다는, 그냥, 그 시절, 아무 것도 몰랐던 철없던 시절,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결혼을 그저 소꿉장난으로 여겼던 그 시절이 후회가 됩니다. 그리고, 저 하는 모습을 그냥 쳐다보고, 어떻게 하실 수 없었던 어머니, 아버지의 심정을 헤야려 보면 또, 한번 가슴이 답답합니다.
신혼 여행을 다녀와서 처남이 그러더군요. 어떻게 신혼 여행 가는데, 친구들도 아니고, 동생이 데려다 주느냐구요. 물론, 은혜가 저와 결혼을 서두른 이유가 처남 때문인 것도 있기 때문에, 처남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안 됐지만서도,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뻔뻔하기 그지 없지요. 뭐, 그랬습니다. 저는 신혼 여행을 친구들이 데려다 줘야한다는 사실 조차도 몰랐습니다. 뭐, 누구 결혼식에 가봤어야 말이죠.
결국, 그 이후에 겪었던 말하기 조차 힘든 마음 고생들... 정말, 죽고 싶었던 순간들... 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가끔 드라마에서 예쁜 사랑이야기가 나온다던가, 리얼리티 쇼에서 가상 부부로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 준희 엄마나 저나 거의 동시에 얘기합니다. "에휴.. 저거 다 결혼하고 애 낳기 전까지 얘기지. 좋을 때다." 그래서, 가끔은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가서 조금은 다시 살아보고 싶은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 제가 조금 더 나이가 먹고, 조금 더 세상을 경험하고, 연애도 조금 더 해 보고 결혼을 했더라면... 다른 친구들처럼 조금 더 준비가 된 상태에서 결혼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처럼 준희 엄마가 악독하고 고약한 며느리가 되지는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6년. 그래도 다행히 남은 것은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지금의 저희 가족은 일단 무엇보다 똘똘 뭉쳐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저희 세 식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찌됐건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간에, 결국 꿋꿋하게 버텼던 저희들은,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준희 애미도.. 그리고, 준희까지도, 쥐 나오고, 욕실에 하수구 오물들이 튀어나오는 흑인 아파트에 살면서도, 꿋꿋하게 버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준희 두살 되던 생일날 준희를 놀이방에 맡기고 아르바이트를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두살까지 젖도 못 때던 준희가 갑자기 엄마, 아빠하고 떨어져서, 그것도 놀이방 자리가 잘 안나서 그 동네에서 보통 한국 사람들이 잘 안 보내던 놀이방에 준희를 맡겼었습니다.
준희 두살 생일날, 준희를 맡기고 나오던 날, 차안에서 정말, 눈물을 꾹 참고, 한 10분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오후 4시쯤 준희를 데리러 가면, 준희는 친구들이 다 가고, 심심해서 어디 구석에 혼자 누워서 뒹굴뒹굴 거리고 있다가 저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마구 달려나왔었습니다. 그 때는, 그래, 이렇게 사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준희 엄마가 일하는 뷰티샵 사장님이 한달에 30만원씩 보태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하면서 버텼었습니다. 요즘, 두살 짜리 아이들을 가끔 보고 있으면, 예전 준희가 저만할때, 정말, 이제, 뒤뚱뒤뚱 걷기 시작할 때 준희를 그렇게 혼자 떼어 놨었구나 생각을 하면, 정말 준희한테 너무너무 미안하고 안스러운 마음 뿐입니다.
그리고, 박사 3년차, 이제 4년차에 들어가면 장학금이 끊기는 상황에서, 제 머릿 속에는 온갖 걱정 뿐이었습니다. 가장 큰 걱정이 준희였습니다. 내가 결국 직장을 못 잡아서, 우리 형편이 더 어려워 진다면... 우리 준희는 어떻게 하나. 또, 특히나 준희가 알라바마에서 마지막으로 다닌 놀이방은 대학에서 운영하는 놀이방이라 시설은 좋았지만, 가끔씩 학생 아들이라 알게 모르게 당하는 차별 대우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선생님이 저에게 주의를 주어서 준희가 집에 와서 혼났던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가끔 주저 앉고 싶어도, 솔직히 저를 다시 일어나게 해 준 힘은 누가 뭐래도 준희였습니다. 준희 얼굴 쳐다보면서, 그래. 준희야, 아빠가 내년에는 꼭 학생 아들 아니고, 교수 아들 만들어 줄께. 물론, 저에게는 한국에서 항상 응원하는 가족들도 있었고, 제가 믿는 하나님도 계셨었지만, 결국에는 준희가 저를 더 강하게 하고, 항상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준희는 9월이면 유치원에 갑니다. 특히 이 곳은 유치원부터 의무 교육이 시작이라, 저희는 처음으로 취학 통지서라는 것을 받고, 학부모 모임에도 벌써 한번 다녀왔습니다.
결혼 6년. 준희 엄마는 아직도 철이 없습니다. 제가 요즘에는 아예 "김막내"라고 부릅니다. 이제는 그런 것쯤 기분 나빠하지 않을만큼 준희 엄마도 무뎌졌습니다. 예전 처녀적이라면 아마 삐져서 일주일은 말을 안 했을겁니다. 제가 퇴근하고 오면 하루종일 심심했는지 끊임없이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합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께 이제는 좀 전화도 드리고,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관계가 편해질텐데, 그걸 못합니다. 벌써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내년에 한국에 나가더라도. 그 일이 가장 걱정입니다. 언젠가 한번 터져야 할 일. 겪을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이제는 이립의 나이인만큼 그런 일에 흔들릴만큼 나약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준희는 요즘 글 쓰는 것을 배워서 툭하면 편지를 써서 줍니다. 꼭 엄마 한장, 아빠 한장 이렇게 줍니다. "I Love Mom" "I Love Dad" 항상 똑같은 편지이지만, 받을 때마다 가슴이 짠합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준희는 정이 너무 많은 아이입니다. 요즘에는 잘못했을 때, 준희가 그러면 엄마, 아빠가 슬프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금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서럽게 웁니다. 예전에 장모님이 저한테 사람이 그렇게 착하기만 해도 못 쓴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정이 많아서,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그렇게 정이 많은게, 딱, 제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참 행복합니다.
결혼 6년. 절대 쉽지 않은 6년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가끔, 정말 가끔, 6년 전 내가 조금 더 신중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아주 가끔입니다. 제가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하고, 창현이, 초아에게 고마운 것만큼이나 준희 엄마와 준희에게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머니와 아버지께 지금 나에게 준희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아버지께서 하루 14시간을 강의하실 수 있었던 원동력이 "나"였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가슴이 벅차옵니다. 그리고, 지금의 준희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 어머니의 모습을 몹니다. 물론, 준희 엄마가 겪은 고생이 어머니께서 하셨던 고생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준희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그냥 쳐다 보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힘들어하면서도 가끔 준희 데리고 오랫동안 나갔다 오면, 준희 붙들고 입을 쪽쪽 맞추는, 준희 엄마를 보면서,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7월 3일은 저희 결혼 6주년이고. 준희 애미는 교수 사모, 준희가 교수 아들이 되고 처음 맞는 결혼 기념일입니다. 올해도 별 일은 없이 지나갈 것입니다. 그냥, 한살 한살 먹으면서, 결혼 생활 1년, 1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커가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더 어머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준희 애미도 같이 앉아서, 도란 도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년 결혼 기념일에는 한국에서 어머니, 아버지께 말썽꾸러기 손주 맡겨 놓고, 준희 애미랑 단 둘이 영화라도 보러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6년전 그 때, 아니, 결혼 신고는 7년전에 했으니, 7년전 그 때, 철없는 아들이 "사랑"이라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제가 힘든 결혼 생활로 아파할 때, 철없는 말로 어머니, 아버지 마음 아프게 할 때에도,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네가 선택한 길이니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제가 힘을 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낳아주시고, 저를 그렇게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 좋은 어머니, 아버지 상을 보여주셔서, 제가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 후 살아온 6년보다 더 행복하게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첫댓글 그래 나도 고맙다....^^
내일이면 오늘 되는 우리의 내일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조용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 이해인 시 <익어가는 가을> 중에서 -
*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가을 하늘은 높디높다. 가을비가 쏟아진 계곡엔 넘치는 물이 물보라를 치며 흘러내린다.여름내 해님의 시선을 따르던 해바라기가 멀쑥이 서 있다. 산이 높으면 구름도 잠시 쉬어간다는데...세월은 마루 넘은 수레바퀴가 굴러 내리 듯하다.그렇다.내일이면 오늘 되는 우리의 내일이다.6년!! 눈 뜨면 보이는 사람,
그래서 무엇보다 더 이상의 그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해야지. 그런데 그렇게 눈에만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일까? 오늘의 내가 있게 한 것이 무엇일까? 결혼식 양가 사진을 가끔 꺼내 보아야 한다.나는 과연 그 모두를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들이 지금의 나를 받쳐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단 한 시간도 잊지 않고 살아왔는지를... 누구는 부처를 또 누구는 하나님을 섬기며 늘 감사하며 산다지만 글쎄? 그들이 존재하지 않고서도 오늘 내가 부처를 혹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을까?몰라서, 혹은 비루해서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지 마라. 석가도 예수도 알고보면 더 없이 천박한 무식쟁이였느니...
오늘날 그들이 숭상의 대상인 것은 그들이 무식하고 비루해서 자신들을 있게한 그 모두를 잊고 오직 하나만 알고 증진했기에 가능했으리라.그래서 그들이 자고나면 일용할 양식을 줘서 고맙다고 한다면, 진실로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너는 이미 이 세상에 너를 배아픔을 이기며 낳아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존재로 키워서 오늘 이 자리에 있게한 네 엄마와 아빠는 영원히 잊어도 좋으리라.그러면 너는 얼마나 홀가분하랴?마치 자신을 키워준 자양분인 햇볕과 물과 지력이 있음에도 그들이 피워 준 꽃의 아름다움에만 도취된 꽃나무처럼 ~~
종교는 제가 미국에서 힘든 생활을 버티게 해 준 힘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감사함이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비기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 종류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것은 온전히 부모님과 가족의 힘이라는 생각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런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 모든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픕니다. 조금만 더 믿고 지켜봐주십시오.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그러한 때가 아주 오래 가지 않아서 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