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 합동 산행기
고향에서 진행하는 서울산악회와의 합동 산행으로 직지사주차장에서 버스로 도착한 김성규회장님의 서울산악회원들과 반갑게 만난후 바람재목장길을 따라서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오늘따라 눈이 시리도록 맑고 푸른 구름 한점 없는 천고마비의 가을날씨에다 산들거리는 시원한 바람을 벗삼아 계곡으로 들어가니 마치 낙원이나 이상향에 들어온듯한 생각이 들 정도이며 옥같은 물과 바람, 공기가 마치 선계로 빠져 들어가는것같이 상큼하고 싱그러웠다.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의 중추인 백두대간의 허리부분에 자라잡고 있으며 해발 1,111미터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제2봉인 형제봉과 백운봉,신선봉,운수봉이 산아래의 직지사를 둥글게 감싸고 있으며 산의 형세가 학처럼 생겼다고 하기도 하고 또 옛날에는 학이 많이 서식했던 곳이어서 황학산이라 불리기도 하는 산으로서 학은 고아한 기품을 지닌 새로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풍수학에서는 학모양의 산이 고결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을 낳고 기른다고 보며 옛날의 선인들은 학을 많이 타고 다니는데 학을 선인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짐승으로 묘사한 것은 학모양의 산에 서린 선계의 기운때문일 것이다.
사실 황악산은 완만한 육산이어서 산행하기가 아주 좋은 산으로서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산허리께까지 둘러처진 단풍이 새색시의 다홍치마같이 울긋불긋하였는데 빨간색이라도 진홍에다 주홍, 주황에다 연분홍까지 가세하였고 또 푸른 색은 그대로 싱싱함을 자랑하니 색의 파노라마요 그대로 서 있으면 옷이 단풍색으로 물들 것 같은 단풍의 잔치요 향연이었다.
아름다운 단풍에다 키보다 큰 억새가 가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요염스럽게 춤까지 추어대니 화려한 궁중무용보다 더 보기 좋은 광경이었으며 게다가 부드러운 흙을 밟으면서 걸으니 시멘트 포장길에 익숙한 도회인들로서는 마치 비단결같기도 하고 처녀의 젖기슴처럼 탄력이 좋고 부드럽고도 편안해서 아늑한 느낌이었는데 게다가 모교의 교가에도 나오는 주산이자 고향의 흙임에랴.
해발 800여미터의 바람재목장의 주택은 마치 산속의 별장과도 같았으며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인후 백두대간갈이자 정상인 비로봉을 향하여 형제봉까지 간후 오후에는 시민들까지 참여하는 문화행사인 나화랑 가요한마당 행사에 맞추기 위하여 산악회장의 요청으로 형제봉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김밥과 과일에다 서울산악회장님이 찬조한 맛있는 돼지고기를 막걸리를 곁들여 서로 권하면서 먹으니 산정의 별미였다.
아래에는 능여계곡을 지나서 신라 눌지왕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조선중기에는 밀양 출신으로 사명당이 입산 수도한 천년 고찰 직지사가 바둑판같이 자리잡았고 시가지와 들판너머로 금오산과 수도산, 가야산 줄기가 뻗어 있으며 돌아보면 물한계곡너머로 삼도봉과 민주지산의 힘찬 산줄기가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줄기다웠다.
하산도 식당예약으로 바람재로 다시 내려온후 바람재고개 아래의 백운산장에서의 장터국밥 회식은 어릴적의 구수한 맛을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고향의 맛이 깃던 시래기를 넣어서 끓여낸 장국밥이었는데 가반을 해도 맛있었고 막걸리와 돼지고기를 곁들이니 별미로 함포고복을 하고 밖에 나와서는 전형적인 가을의 농촌 풍경인 주렁주렁 열려서 익어가는 감을 장대로 따기도 하였다.
그후 오후 4시에 시작하는 직지문화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나화랑 가요한마당 행사에 앞서 산행 결산 모임을 가졌는데 본부에서 주관한 김정우회장의 인사에 이어 오늘의 행사를 주최한 김성규서울산악회장님의 "송설산악회를 발전시켜서 텔레비전에도 보도되도록 노력해보자"는 당부의 말씀이 있었고 그 외 준비에 수고한 이장구 서울 총무님과 주요 임원들의 소개가 있었는데 산악회의 활상화를 위하여 노심초사하던 김정우회장께서 앞으로 조직 확대에 크게 기여할 문상무수석부회장과 산행의 주역이 될 씩씩하고 활기찬 이윤관산행대장의 소개와 이응탁 재경 32회동기회산악회장은 열명에 가까운 동기들과 같이 내려와서 산행을 해주었다.
그후에는 고향출신의 작곡가 나화랑선생을 기리면서 그분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한 교육자이자 시인인 민경탁(필명: 빛솔)동문의 사회로 "나화랑 가요 한마당"행사를 개최하였는데 고 나화랑씨는 본명이 조광환씨로서 모교의 선배님(5회 졸업생)이며 고향이 봉계인데 창녕조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회군의 주역이었던 조민수좌군도통사의 후예로서 낙향하여 봉계에 정착한후 야은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의 제자인 매계 조위같은 학자를 배출하기도 하였고 근대에는 죽산 조봉암같은 인물을 내기도 한 집안 출신으로 학창시절부터 밴드부에서 활동하다가 광복직후 김천여고에서 음악교사 생활후 상경하여 당시 원방현, 금사향, 박재홍등의 전속가수들이 소속되어 있는 서울레코드사에 입사하여 작사가 반야월,작곡가 김교성과 한그룹이 되어 작곡할동에 전념하게 되는데 7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470여편을 작곡하여 송민도,도미,명국환,남일해,박재란,이미자등을 유명 가수로 데뷔 또는 배출시켰다.
그후 70년대를 지나면서 포크송,록의 등장으로 트로트가 힘을 상실하면서 그의 작품수도 현격히 줄어 들었는데 1983년 62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작고하였으며 나화랑의 대표적인 히트곡으로는 김정애노래의 "닐늬리 맘보",은방울자매노래의 "향기품은 군사우편", 도미노래의 "청포도 사랑" 역시 도미노래의 "비의 탱고", 백설희노래의 "하늘에 황금마차", 송민도노래의 "서귀포사랑" 남일해노래의 "낙엽의 탱고", 이미자데뷔곡인 "열아홉순정", 남인수노래의 "무너진 사랑탑", 이미자노래의 "님이라 부르리까"등의 주옥같은 곡을 남겼으며 주로 고향 출신인 가수 정태수, 김민아,안기호씨와 젊고 뜨는 가수인 인동남,나국성씨의 노래와 김정우산악회장의 라노비아곡의 섹스폰연주도 있었다.
김성규서울산악회장님의 열창을 끝으로 위대한 작곡가인 나화랑선생의 가요한마당행사를 마쳤는데 앞으로는 시민들의 성원으로 "나화랑 가요제"가 열려서 김천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함으로서 목포의 이난영 가요제나, 진주의 남인수 가요제 못지 않는 큰 가요제로 시민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송 설 산 악 회 부 회 장 이 영 규 드 림
첫댓글 선배님 잘 읽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은 한번 읽지만 쓰는 사람의 노고는 그러하지 않지요. 지속적으로 산행기를 남겨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