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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도둑으로 보였나
금남호남정맥에서는 베이스캠프 벌떼가든의 마지막 밤이었다.
새벽같이 옥산동고개로 다시 가려면 또 주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곧 장수땅으로 넘어가게 되므로 귀찮게 구는 것도 금호정맥에선
정녕 마지막일 것이라며 주인 손종일을 위로(?)했다.
사인동에서는 우측에 성수산이 우뚝하게 다가온다.
등산로도 잘 나있다.
날 성수산에 오르려는 늙은이려니 했는데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수상쩍어 보였는가.
일할 형편이 못돼 보이는(건강상태가) 한 노인이 이른 아침에 왜
나와서 시비(?)일까.
대꾸했으나 귀를 잡수셨거나 이해되지 않은 것인가.
뭐하러 가느냔다.
요즘, 인삼도둑이 들끓어 낭패가 이만저만 아니라는데 혹 옥산동
일대의 한적한 인삼밭을 노리는 인삼 도둑 쯤으로 보였나.
전날 마이산 자락에서는 심마니로 보더니.
삼(蔘)과 인인이 있어 보이는가.
피식 웃고 길을 재촉했다.
간벌인가 대체 식목을 위한 정지작업인가.
너절한 나무들이 훼방꾼이었다.
옥산동고개에서 남동의 1059m성수산을 겨냥하고 꾸준히 오르면
헬기장을 지나고 얼마 가지 않아 성수산 정상이다.
진안군 백운면과 장수군 천천면계(界)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전일상호신용금고와 전북산사랑회의 스테인
리스 안내판이 서있는데 고도의 부정확한 표기가 옥의 티.
지나온 정맥은 별 감흥을 주지 못해도 마이산은 역시 명물이다.
그런데, 청담 이중환(淸潭李重煥)은 마이산을 왜 강조했을까.
전라도땅을 밟아 보지 않았으니 누군가로부터 들었겠지만 그의
택리지에는 덕유산의 서쪽으로 나온 한 가지가 마이산이며......
마이산의 한 맥이 북쪽으로 가다가 주줄산이 되었다고 했다.
(德裕山...西出一枝...爲馬耳山.... 馬耳北行爲珠崒山)
하지만,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주줄산은 그 위치로 보아 3정맥의
분기점인 주줄산이 아니고 운장산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가 지칭한 주줄산은 애매하다.
산경표가 출간되기 전이기 때문인지 대간과 정맥 개념도 없다.
아무튼, 주줄산은 주화산(珠華)으로 둔갑까지 하면서 이래 저래
애를 먹이고 있다.
서구리재와 서구이재
신광치로 내려서면 널따란 채소밭이다.
덕태산 분기점인 시루봉(1110m 헬기장)에 올랐다가 홍두깨재와
1080m봉을 넘으면 전망만점의 삿갓봉(1114m)에 이어 오계치가
발 아래다.
다소 까다로운 암릉을 따라 내려서게 되는데 2009년 추석무렵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전망대와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서 편했다.
오계치는 야영 여건이 그만이다
공간이 충분한데다 와룡자연휴양림과 백운면 양쪽, 아무데로나
조금만 내려가면 물을 구할 수 있으니까.
기상만 양호하면 천막에 비해 잔손이 가지 않고 꾸물거릴 일 없는
통비닐이 한결 편하다.
또한, 금방 쏟아져 온 몸을 덮치기라도 할 듯 총총한 별들을 헤아
리며 얘기 나누다 잠들 수 있어 행복하다.
게다가, 기동시간이 빨라지는 이점까지 있다.
윤곽이 아직 뚜렷해지지 않은 시각에 팔공산 길을 열기 시작됐다.
데미샘(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상추막이골)이 겨우 670m아래다.
'봉우리'라는 뜻인 '더미'의 전라도 사투리란다.
팔공산 북서측 물줄기와 합수한 후 신암리계곡, 백운면소재지를
관통하는 섬진강(蟾津江) 발원지로 365일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샘인데 확인하기를 포기했다.
물이 부족했다면 아마 다녀왔을 것이다.
팔공산을 향해 좀 더 나아가면 장수읍(장수군)과 백운면(진안군)
민이 내왕하던 해발 850m서구리재다.
산속 오지에 같혀 생활이 궁핍했던 시절에 갖가지 사연들이 뿌려
졌을 고개다.
이 재가 확포장은 물론 에코브리지(echo bridge야생동물이동통
로)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 통과가 불편했는데 저번에 다시 갔을
때는 어엿한 742번 지방도로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지 않은가.
이 길이 아마 의기(義妓) 논개사당과 의암공원으로 이어질 것.
그런데, 결코 어렵지 않은, 사소한 점인데 왜 그럴까.
장수와 진안이 표지판과 지도 등에 각기'서구리재', '서구이재'로
표기하는 것은 고집인가 등한인가 .
설마, 차별성의 표출은 아닐 텐데 왜?
거리나 높이에서 흔히 보는 것도 불쾌하기 짝 없는데 지명까지?
팔공산과 합미성
팔공산 전후가 산죽, 싸리, 진달래, 철쭉, 덩굴 등이 숲을 이루어
애로 투성이다.
그러나, 산길에 그들의 숲이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들이 있어야 하며 살아가야 할 터전이니까.
다른 어느 지대와 마찬가지로 이 정맥에서도 이제까지 그랬던 것
처럼 이후로도 모두 그들의 세계다.
그러니까, 짜증보다 오히려 그들과의 잦은 만남을 즐겨야 한다.
팔공산 정상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통신중계탑이 서있다.
지근에는 헬기장이 부대시설처럼 자리잡고 있다.
무수한 헬기장들은 산정의 불가피한 시설들을 위해 조성되었다.
결단코 바람직하지 않은 자연파괴지만 국가적 시설을 위해 길을
닦는 대단위 파괴를 막는다는 점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에 대한 미안함까지 면탈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고민해야 할 과제니까.
팔공산의 고도 표기도 제각각이다.(진안1147.6m, 장수1151m,
지도들도 1136m를 비롯해 제각각)
戊寅 金海人 金容出槿書의 頂上표석과 전일상호신용금고와 전북
산사랑회, 홀산 등의 표지판이 어지럽기도 하지만 여기 역시 제멋
대로인 고도표기가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래도, 이제껏 밟고 온 산들중 최고봉 답게 탁 트인 시야에 지나
온 정맥이 한 눈에 들어와 상쾌하기 그지 없게 하는 산이다.
뿐만 아니라 장안산~영취산에 이르는 가야 할 남은 정맥은 물론
덕유산까지 아련해 온다.
예전에는 8명의 성(聖)스러운 스님이 수도하였다 하여 팔성사(八
聖寺)라는 사찰이 팔공산에 있었단다.(현 위치의 팔성사는 借名)
대구의 팔공산과 동명이산인 진안 장수의 팔공산(八公山) 이름을
팔성사에서 유추하는 이도 있는 듯 하다.
진안을 떼어버린 정맥은 함미성지를 거쳐 차고재로 떨어진다.
후백제(892-936)때의 성으로 둘레 300m, 높이 4.5m의 석성이다.
전라북도기념물 제75호인 합미성(合米城:장수읍대성리))은 일부
나마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주둔 병사들의 군량미를 저장하였다 하여 합미성이라 했다나.
이 지역을 '쑤꾸머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까닭은 '군사가 주둔
했던 곳 즉 수군지(守軍址)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소박한 소망
해발 658m인 대성고원(大成高原), 차고개는 소공원이다.
자고개, 잣고개, 작고개 등은 구전(口傳)중 생긴 이름들일 게다.
26번국도에서 분기해 장수군 천천과 임실군 오수 간을 이어주던
719번지방도로에서 근래에 13번국도로 승격한 노상이다.
<지나는 길손들이여. 이곳 꽃.숲 십리길은 우리 대성, 식천
마을 주민들의 순박한 의지와 사랑을 담아 대대손손 자연을
사랑하고 애향 정신을 함양코저 온 주민이 땀흘려 닦았으니,
이 동산에 쉬어 갈때마다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어 길이 밝은
세상. 평강을 누릴지어다,>
13년 전(1997년 4월)에 세운 '愛鄕' 표석의 글이다.
문장이 지루하지만 내용은 전달되겠기에 그대로 옮겼다.
합심 협력만 하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무수한 '대성, 식천' 주민이
나올 수 있으련만.
그리고 그들의 소망처럼 길손은 덕분에 평강을 누리게 되고.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나로 하여금 흐뭇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참 동안 머물게 했다.
'애향심'을 담은 표석은 흔하다.
자기 고향 자랑 일색이다.
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위 마을처럼 고향에 대한 자부심에 플러스 알파(plus alpha)를
하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겠기에 갖는 아쉬움일 뿐이다.
신무산과 뜬봉샘
신무산으로 오르는 정맥은 목장지대(대축목장?) 철망과 전선을
지그재그할 수 밖에 없다.
낡고 느슨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상에는 역시 전일상호신용금고와 전북산사랑회의 스테인리스
표지판이 서있다.
후백제시대에 이 일대에서 전투가 치열했단다.
합미성에서는 주위에 허수아비들을 세워 적의 접근을 막았을 뿐
아니라 여기 신무산(神無山)으로 유인하여 무찔렀다니까.
반복하듯 누누이 하는 지적을 또 할 수 밖에 없다.
성적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신무산(神舞)의 높이는 986.8m,
869.8m 중 어느 쪽이 맞는가.
신무산에서 수분재(水分嶺)로 가는 정맥이야 말로 애매하다.
내로라 하는 이들이 링반데룽에 걸렸을 정도로.
동동남으로 잠시 나아가면 차량들이 장수~남원을 분주히 오가는
19번국도상의 수분령이 눈에 잡힌다.
이후로는 이를 정조준하고 내려갈 수 밖에 없다.
갈팡질팡 뻗어있는 임도를 선호하면 고생 많이 하게 된다.
간혹 있는 표지기도 믿을 게 못된다.
자신(自信) 없는 곳에서는 그 흔한 표지기 달기 경쟁도 꽁무니를
빼는데 어쩌다 잘못 달고도 철거하지 않은 표지기이기 때문이다.
더러는 금강발원지로 알려진 뜬봉샘(뜸봉샘)의 유혹을 받는단다.
큰 일을 벌이려는 이성계가 계시를 받으려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다니던 중 신무산 중턱에 단을 쌓고 백일기도중이었다.
마지막 날 새벽, 지근 골짜기에서 떠오르는 무지개를 타고 봉황이
날으는 하늘로부터 개국(쿠데타?)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이성계는 봉황이 뜬 곳을 찾아가 풀섭에 덮인 옹달샘을 발견했다.
뜬봉샘(飛鳳泉)의 유래란다.
예전에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빌기 위해 산 곳곳에 마치 뜸
뜨듯 봉화를 올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