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관광호텔 318호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최 대 관
“따르릉~ 따르릉~”
집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하지만 바쁠 것도 없는 나는 통신병 출신 특유의 여유와 예의를 지키며 점잖게 전화를 받는다.
“예, ◯◯집인데요, 말씀 하십시오.”
상대방은 전화를 늦게 받는다며 볼멘소리였다.
“아니, 큰아버님, 왜 핸드폰을 안 받으세요? 몇 차례 전화를 드렸는데도 전화를 안 받으시기에 큰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지금 집에 계신다기에 집전화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으~응, 그래? 미안하네. 그런데 웬 일인가?”
“큰아버님, 바쁘지 않으시면 지금 저희 사무실로 좀 나와 주시죠.”
“그래? 지금 준비하고 나가면 한 시간 뒤쯤 도착하겠네.”
나는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약속장소로 가면서도 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에서 일거리를 놓은 지도 여러 달이 되어 무언가 일거리가 필요했다. 또 무엇보다 궁한 것은 바로 용돈이었다. 그래서 김제 백구에서 조그마한 제경(製鏡)사업을 하고 있는 조카가 만나자고 했으니 혹여 일자리라도 주겠다는 것인지 내심 기대도 해보았으나 초라해진 내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조카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조카사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급한 나는 거추장스런 인사말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결론인즉 관공서 납품과 입찰자격요건 강화를 위해 산업표준화법에 의한 KS마크를 획득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품질관리 담당자’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그 업무를 볼 수 있으니 내가 교육을 받고 그 자격증을 따서 회사일을 봐 달라는 것이었다. 내심으로는 기쁘면서도 시험을 보아야 한다니 자신이 없었으나 선택의 여지가 좁은 나는 흔쾌히 승낙하고 말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나를 선택했느냐고 물으니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교육을 시켜놓으면 자격증도 못 따오는가 하면 설령 따온다 해도 몸값만 올려 다른 회사로 이직해버리니 오갈 데 없는 내가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에 작년 말에 교육을 신청했으나 금년 초로 밀리고 말았다.
품질교육담당자의 교육기간은 2014년 1월 6일부터 24일까지 12박 15일 합숙교육이었다. 교육비는 210만원이고, 무려 100시간의 교육을 마치고 시험을 치러야하며, 평균 60점이 되어야하고 과락(40점)이 있으면 탈락이라고 했다. 아무려면 내가 떨어질까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이 얼마 만에 홀로 떠나는 겨울여행이란 말인가! 그것도 겨울낭만이 가득한 백양관광호텔! 금상첨화로 교육비와 숙박비도 모두 회사에서 부담하지 않은가?
1월 5일 오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치 여행이라도 떠나듯이 짐을 꾸렸다. 몸이 떠나기 전, 마음은 먼저 여행을 떠나버렸다. 만물이 고이 잠든 이른 새벽에 천지의 맑은 기운을 나 혼자 깊숙이 빨아들이며 넓은 호텔 앞마당에서 아침운동을 하고, 수업이 끝나면 책도 읽고, 수필도 써야지 하는 당찬 포부를 안고 가방 속에는 운동복과 두툼한 전북문단과 원고지도 준비하여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끔 깊은 착각 속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나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줄을 나는 꿈에도 몰랐다.
교육장에 도착해보니 정말로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소한을 지난 다음 날이라 등산객들은 보이지 않고 먼저 도착한 교육생들만이 멀쑥한 모습으로 낯설게 앉아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보다 연배인 듯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한결같이 젊은 사람들 일색이었다. 시간이 되자 주최 측에서 교육생들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고 간단한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방 배정을 했다. 한 방에 3명씩인데 나의 룸메이트는 아들보다도 한참 어린 24살짜리와 31살짜리가 배정되었다. 이때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교육생들은 모두 60명인데 그중 여성지원자가 13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성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연장자가 한 분이 계셨고 60대는 나를 포함해 2명, 50대 1명 나머지는 40대 이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35년 만에 그것도 젊은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되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아직 나이 들지 않았다는 생각과 아직도 이들과 실력을 겨룰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들에게 결코 지지 않을 거라는, 아니 져서는 안 된다는 오기 등 실로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이윽고 교재가 나누어지고 첫 번째 강사님이 들어오셨다. 들어오시더니 시험이 어려우니 우습게 생각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모두 낙방할거라 잔뜩 겁을 주었다. 이윽고 첫 시간 수업이 끝나자 내 곁으로 오시더니 나의 나이를 묻기에 알려드렸더니 그 나이에 참으로 대단하시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그리고 다음 날,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품질관리담당자교육에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분포, 확률, 통계에다 추정, 검정은 또 뭐란 말인가. 명색이 이공계학과를 공부하여 수학이라면 이골이 난 나에게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니 짜증이 나고 불안해졌다. 조카는, 우리 큰아버님은 공부도 잘하셨고 큰 회사에서 근무하셨으니 이런 시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을 터인데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무슨 창피란 말인가.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죽자 살자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지 생각하고 그날 밤부터 새벽 1시까지 책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쳐다보던 젊은이들이 저러다 하루 이틀 지나면 그만 두겠지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곳에서도 나는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인생의 한 수를 가르쳐주고 온 셈이다. 휴일을 맞아 집에 와보니 냉장고에는 보약이 가득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남편을 위한 아내의 배려였다.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그 대신 아침운동이며 독서며 수필 집필은 접어야만 했다.
3주간의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시험도 치르고 지난 주말에 집으로 돌아오니 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는 데가 없었다. 다행히 시험에 합격했으니 체면은 세운 편이다. 이제 또 열심히 준비하여 KS마크를 획득해주어야만 내 밥값을 할 것이다. 세상에 편한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경험했다. 낭만이 깃든 백양관광호텔 318호실! 이번에는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내 결코 잊지 않고 꼭 너를 다시 찾으리라.
(2014. 0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