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벌 귀족 사회는 성종 때(제6대 왕, 960~997, 재위 981~997)를 거쳐 문종 때(제11대 왕, 1019~1083, 재위 1046~1083) 자리를 잡게 됩니다. 문벌 귀족은 처음에는 호족이나 육두품 출신이었는데 고려 왕조가 성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중앙의 관직에 진출하고 이를 세습하면서 하나의 가문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음서제도와 과거제도를 통해서 정치권을 독점하였고 불법으로 토지를 차지하고 공음전을 통해 경제까지도 독점하였습니다. 또한 정략결혼을 통해서 정권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모두 독점하고 있었던 문벌 귀족은 모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이자겸의 난은 모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자겸의 난(인종 4, 1126)
이자겸(?~1126)은 가장 대표적인 문벌 귀족이었습니다.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 두 왕에 거쳐서 딸을 3명이나 시집보냈습니다. 둘째 딸은 예종(제16대 왕, 1079~1122, 재위 1105~1122)의 후궁으로 보내고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외손주인 인종(제17대 왕, 1109~1146, 재위 1122~1146)에게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시집보냅니다. 자매인데도 언니가 시어머니가 되고 손주가 딸과 결혼하는 이상한 혼인이 이루어집니다.
이자겸의 권력은 막강해지고 이자겸의 아들과 친척도 요직을 차지하고 횡포를 부렸습니다. 1126년에 인종의 측근인 김찬과 안보린이 지녹연에게 이자겸과 척준경 등을 모의하자 인종은 동의합니다. 상장군 오탁, 대장군 권수 등과 대궐을 장악하여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을 죽이고 시체를 궐 밖에 버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자겸과 척중경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최탁을 죽이고 자신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유배시키고 인종을 자신의 집에 감금시킵니다. 이자겸은 인종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둘째 왕비가 된 넷째 딸로 인해 실패합니다.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척준경을 회유하는데 마침 이자겸의 셋째 아들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을 욕하는 사건으로 인해 척준경은 이자겸과 거리를 둡니다.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가 틀어진 틈을 타서 이자겸을 없애주면 높은 자리에 승진시켜주겠다는 인종의 제안을 받고 척준경이 이자겸을 제압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진압됩니다. 이자겸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자겸의 난은 문벌 귀족사회의 모순이 보여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나서 벌어졌던 것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입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뒤 특정 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른 지방 세력으로 균형 발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나타납니다. 지방들 중에서도 조금 강했던 곳이 서경 세력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묘청(?~1135)입니다. 묘청은 풍수지리를 이용해 개경은 이미 썩었고, 새로운 명당자리인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국가를 이끌어가자는 서경 천도 운동(인종 13, 1135)을 합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는 신채호가 1천 년 역사 이래 최고의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묘청은 「서경으로 천도하자」 「칭제 건원하자(황제라고 칭하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 「여진족의 금국을 정벌하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자겸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금과의 굴욕적인 사대 관계를 반대했던 파가 묘청의 서경파입니다.
묘청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 연호를 '천개'로 하며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지만 민생 안정을 내세우며 서경 천도를 반대했던 개경파의 김부식이 이끈 관군에 의해서 진압이 됩니다. 이자겸의 난에 이어 묘청의 서경 천도를 거치면서 문벌 귀족 사회는 분열되고 동요되었으며 무신정변(1160)이 일어나면서 붕괴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