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공부한답시고 집에 있던 장서를 모조리 리어카로 옮겼다. 700여권, 당시 학생 신분치고는 상당한 분량의 장서였다. 중고책에 낡디낡은 책이 대부분이라 보잘것 없었지만 한 권 한 권 소중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하루종일 학교 주변 개울을 치우고 받은 일당, 명산동 어느 대서방에서 몇 달 심부름, 문화동 카디날 장갑공장에서 노가다로 뛰며 번 돈, 신문배달 등 갖은 고생과 땀으로 일군 책들이었다. 그러니 책이 아니라 내 분신 같은 존재, 평생을 동고동락해야할 운명이었다.
학교 졸업하고 마침내 원양어선에 승선했다. 사회생활이 시작된거다. 출항하기전 낡은 배를 수리하고, 선원들을 모집할때까지 당분간 부산생활을 해야한다. 하숙집은 영도고 수산회사는 건너편 충무동이었다. 수산회사를 가려면 영도다리를 건너 자갈치 시장을 통과해야 한다. 시장을 지날 때마다 구수한 꼼장어 냄새가 허기진 뱃속을 괴롭혔다. 하지만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못해 단 한번 꼼장어를 먹어보지 못했다. 돈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책 사느라 호주머니는 먼지만 풀풀날렸다. 영도다리 아래 국밥집, 자갈치 시장 꼼장어를 맘껏 먹어보는게 늘 꿈이었다. 그러나 단호히 유혹을 떨쳐내고 그곳을 통과했다.
대신 발걸음은 자갈치 시장 골목길, 국제시장을 지나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향했다. 국밥 한 그릇, 교통비를 아껴 사모은 책들, 비록 먹지 않고 허기져도 책만 있으면 배가 불렀다. 사방에 책이 있으니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아, 평생 책만 읽고 살 수 있다면...그러나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얼른 돈벌어 가족들을 먹여살려야한다. 꼼장어, 국밥의 유혹 정도야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지만 책 욕심을 버리기가 너무 힙들었다. 그 시절, 그렇게도 먹고싶던 꼼장어를 마침내 딱 한 번 먹을 기회가왔다.
출항을 하루 앞두고 군산에서 부모님이 내려오셨다. 그날 저녁 부모님과 함께 자갈치 시장에 갔다. 하지만 막상 꼼장어 맛은 기대했던것보다 별로였다. 실은 맛이 없다기 보다 오랜세월 집을 떠나려고보니 어린 동생들, 부모님 생각으로 그만 입맛을 잃었던거다
날이 새자 드디어 부산항을 출항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집에 있는 장서를 어떻게 해야하나. 소중한 내 분신, 내 사랑하는 연인들...가슴이 먹먹했다. 모든것을 놓고 떠냐야한다니 눈물이 다 나왔다. 대서양 뱃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자나깨나 집에 두고 온 책을 잊을 수가 없었다.
원양어선을 타면서도 오로지 집에 두고온 책 생각뿐이었다. 오죽하면 꿈에 다 나왔을까. 안되겠다싶어 편지를 썼다.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눈으로 보면 좀 위로가 되겠지. 이윽고 항구에 입항하자 편지와 함께 사진이 도착했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난듯 반가웠다. 아쉬운대로 머리맡에 두고보니 조금은 서운함이 덜어졌다.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어데 한 두 가지인가. 늦은밤 동인천 역 어느 서점에 들렀다. 불문학자 김붕구 교수의 <보들레르> 연구서가 눈에 확~ 들어왔다. 책값을 따져보니 교통비까지 몽땅 투입해야 했다. 아, 어떻게해야지. 망설이던 끝에 결국 책을 사들고 연안부두 그 먼길을 두 시간 가까이 걸어 온 일. 결혼 후 아내 결혼 반지며 목거리 모조리 팔아 책을 사고 그것도 부족해 월급봉투 축내는건 예사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속이 없는 한심한 작자였다.
비록 이해할 수 없지만 장정이 아름다워 구입한 책도 있다. 어떤 책은 들고 다니는것만으로 자랑스럽고 폼이 났다. 평민사에서 출간한 R 프리덴탈의 <괴테-생애와 시대>가 바로 그런 경우다. 베이지색 커버, 견고한 하드케이스 장정이 고상하다못해 품위까지 있었다. 내 지적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수 없지만 언젠가 읽을 수 있겠지 하며 구입한 책도 있다. 두툼한 분량의 제임스 조이스 전집이다.
엊그제 한겨레 신간 서평란을 보니 칸트전집을 발간한다는 소식이 있다. 오래 전 아카넷에서 출간한 바 있는데 한길사에서 새 전집을 번역한다. 어렵쇼, 그렇다면 두 군데서 발간되는게 아닌가. 아직 한길사는 시작 단계고, 아카넷은 이미 상당수 출간되었다. 그리고 아카넷에서는 칸트전집 발간 15주년 기념으로 한정판으로 '칸트선집'을 출간한다는 소식도 있다. 선집은 모두 네 권인데, 전체 2,800여쪽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전집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어차피 칸트는 이해 안 될 책이니 그냥 소장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사진으로 봐도 멋진 칸트선집, 저걸 꼭 소장해야겠다. 한길사 전집은 나중으로 미루고......
사실 나는 철학에 흥미가 있어 딴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시 독학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하기도 아쉬웠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원저를 읽어낼 능력이 없어 철학사나 철학개론, 2차 해설서나 읽는 정도였다. 다른 철학자에 비해 제법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칸트는 더욱 난해한 편에 속했다.
진즉 칸트 전공 1세대 격인 최재희 교수의 박영사판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을 구입했지만 아예 읽을 엄두를 못냈다. 지금까지 읽은 칸트라고해봐야 고작 이화여대 신옥희 교수가 번역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가 유일하고 2차 해설서 두 세권이 고작이다. 그래도 퇴직하면 도전해봐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던참에 오늘 아침 칸트전집 출간소식에 다시 발동이 걸린거다.
내 비록 이해할 수는 없어도 머리맡에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히 행복할 것 같다. 누가 아랴, 자꾸 쳐다보면 언젠가 본전 생각나서 읽고 싶을 때가 있을줄. 아니면 70, 80이 돼서 읽을수도 있겠지. 못읽으면 어때 서문만이라도 읽지. 일금 15만원. 하지만 저 돈을 만들려면 아내를 구슬려야한다. 옛날이야 반지팔고, 월급 축내고 내 맘대로였지만 이제는 단 한 푼 아내 허락없이 불가능하다.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다 오늘 아침, 결국 아내에게 눈치도 없이 칸트선집 어쩌고 하다 댓바람에 머퉁이만 먹었다.
- 이봐욧~ 당신 대체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요 뭐요, 하이고 옛날에 내가 순진했지, 이젠 어림 한푼 없수, 암만 어림도...
아내는 엔간한 건 다 너그러운데 고놈의 책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꿈을 버릴수가 없다. 60평생 경험에 의하면 뭔가 간절히 소망하면 반드시 이뤄진다. 글쎄 자랑인지 바보짓인지 몰라도 갖고싶은 책은 기어이 내 수중에 들어와야 직성이 풀린다.
당장은 살 수 없으니 그 옛날 원양어선에서 그랬듯 우선 사진이라도 보며 아쉬움을 달래야겠다.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 잠깐 위쪽 사진을 보시기 바란다. 어떤가. 아흐 저 푸른빛 은은한 감동이여, 아우라여~ 얼마나 기품있는가, 얼마나 아름다운 선집인가! 여하튼 내 기필코 칸트선집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때만을 떠올리며 나는 가슴 두근대는 소년처럼 오늘을 보낸다. 꿈이여 제발 이뤄지길....
첫댓글 책은 음악과 더불어 평생 변치않는 친구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어요. 일금 15만원으로 닿을 수 있는 선생님의 작은 꿈, 꼭 이루시기를 저도 기원하겠습니다~
간절하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겠죠? 김중희 샘 감사합니다.^^
같은 취미 두가지가 겹치네요. 월요일 저녁은 샘과 같이 할 수 있어서 저에겐 기쁨이죠. 또하난 선생님은 선생님의 시간대에 문학과 철학으로 전 저의 시간대에 다른 분야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또 자연을 느끼고.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속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당신과 공유할 수 있슴 은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책 코스모스 중에서-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찰나의 순간, 공유...뭔가 힘이 나고 격려가 되는 참 매력적인 말이네요. 한 가지 취미만으로도 좋은데, 두 가지라니 더욱 든든하고 흐믓하군요.^^
선생님 글을 읽으니 책을 더 소중히 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칸트선집, 말씀대로 멋지네요!
그렇죠? 파랑과 하얀 색상이 조화된 심플한 북커버, 두툼한 장정의 책 모양이 좀 그럴듯하지요? 거실 한켠에 인테리어용으로 비치해도 멋질것 같습니다. ^^ 그나저나 1,000질 한정판이라 절판되기 전에 얼른 구입해야할텐데 그게 걱정이네요~~^^
꿈은 이루어진다고 2002년도에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
맞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