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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행정자치부 지방혁신인력개발원에서 1년 과정으로 교육받고 있는
교육생들과 함께 中南美를 다녀왔습니다.
이미 다녀오신 분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비교하는 뜻에서, 아직 안 가보신
분들은 이곳 여행계획을 세울 때 참고하는 의미에서 한번씩 읽어보시면
다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쓰다보니 글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中南美를 다녀와서
여름 늦더위 속에 초가을의 정취가 어리는 9월 4일부터 15일까지 11박 12일간의 일정으로
브라질.페루.멕시코 등 中南美 3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동행자는 지난 7월 백두산을
다녀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부시장.부군수급 공무원들이었다.
여행 목적은 지방자치단체의 고위직에 있는 이들에게 국제적인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1년간의 교육과정을 완전 수료하고 직무에 복귀했을 때 해외에서 보고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발전을 위한 정책개발에 기여할 수 있게 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정책연수인 것이다. 나는 그들의 교육과정을 편성 운영하는
책임적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인솔관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다.
연수의 주요 테마는 페루 주변의 고원 지대에 형성된 잉카문명 유적과 멕시코 근교에
흩어져 있는 고대 마야.아즈텍 문명유적지, 그리고 브라질 중심의 관광.휴양 문명권을
직접 견문하는 것이었다. 이들 나라의 관광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배울 점을 찾아
지역발전에 접목시키려는 것이다.
이번 연수를 위해 개인적으로 준비한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 다만 처음 가는 지역이어서
그곳의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서점에 나가 이미 다녀온
사람들이 써놓은 중남미 여행기를 찾았으나 만족할 만한 안내서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세계 곳곳을 여행한 뒤 흥미위주로 써놓은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중남미 편)’이라는 책을 구입해서 읽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자세한 여행 안내서로의 역할은 매우 부족하였지만 중남미 지역이 어떠한 곳이라는
분위기 정도는 대충 전해주고 있었다. 이밖에 또 준비한 것으로는 미화 $300과 옷 몇 가지,
두 권의 책, 김, 라면 등이었다.
책 두 권은 다산연구소 이사장인 박석무의 ‘새벽녘 초당에서 온 편지(문학수첩 刊)’와
중국 청나라 때 張潮와 朱錫綏의 소품 산문을 엮은 ‘내가 사랑하는 삶(태학사 刊)’이었다.
9월 4일(월), 여행 첫째 날, 출발 일행은 인천국제공항 3층 D구역 앞에서 11:30에 만나
12:00경 탑승(Boarding)절차를 모두 마치고 탑승구(Gate)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15:00 출발 예정인 대한항공(KE 017편)이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면세점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우선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였다.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에 첫 기착지인 LA를 향하여 이륙하였다.
이번 해외연수를 뒷바라지할 회사로는 중남미 지역의 경험이 풍부한 주원 항공여행사가
선정되었고 담당 부장(천선기)이 동행하였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곧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깨어서 보니 창 밖은 어둑어둑했다.
가지고 온 책 중 ‘새벽녘 초당에서 온 편지’를 꺼내 읽다가 지난 4월 다산연구소에
기고했던 나의 글이 책 말미에 실린 것을 확인하였다.
미국에는 1991년 4월 중앙부처 국장급 정책연수 때 총무처 교육훈련과 담당사무관으로서
이들의 교육과정을 점검하기 위해 약 1개월 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때에도 LA 국제공항에 내려 할리우드, 럭키 산맥의 백년설로 둘러싸인 맑고 아름다운
타워(Tahoe)湖水 등을 관광하고, 영화 서부활극의 무대인 네바다주로 이동하여 州廳
소재지인 리노(Reno)에 머물면서 그곳 주립대학에서 열린 1주일간의 연수에 참관하였다.
강의가 끝나고 인근의 라스베가스, 그랜드 케년(Grand Canyon) 등을 관광하고, 미 대륙
중부에 위치한 나이아가라 폭포와 그 인근의 캐나다 국경도시를 돌아보았다.
그런 뒤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백악관, 링컨 기념관 등을 정식 방문한 뒤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의과대학이 있는 볼트모어市에서 명예 市民證을
받고 뉴욕으로 이동하여 통일교 문선명 목사가 경영하는 호텔(뉴욕커)에서 몇 일간
휴식한 후 그곳 케네디 공항에서 알래스카(Alaska)를 거쳐 귀국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이번 미국 행은 실로 15년 만에 다시 이루어진 것이다.
약 10시간 30분간의 비행 끝에 LA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언뜻 본 공항의 모습은
15년 전 그대로였다. 오늘 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브라질 꾸리티바(Curitiba)市였기 때문에
다시 이곳에서 환승을 해서 페루 수도 리마와 브라질 상파울루(Sao Paulo)를 거쳐가야만
하였다. LA에서 비행시간만으로 다시 15시간 이상을 가는 거리이다. 그러니 비행시간
26시간에 환승을 위한 체류 시간까지 합치면 30시간이 훨씬 넘었다. 보통의 체력으로는
감내하기 힘든 여정이었다. LA에서의 환승 비행기는 칠레 항공인 LAN이었다.
비행기는 멕시코를 지나 안테스 산맥을 넘어 남태평양의 해안도시 리마에 기착하였다.
거기에서 약 2시간 동안 머무른 뒤에 같은 비행기로 우리 교민이 약 4만 명 가량 살고 있다는
브라질 상파울루로 향하였다.
현지 시간으로 아침 5시경, 비행기 속에서 내려다 본 안데스산맥의 풍경은 산등성이가
그렇게 뾰족 뾰족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산하처럼 두루뭉실하게 보였다.
한참 후 상파울루에 가까워지자 멀리 대서양이 보이기 시작하고 산골짜기마다 오밀조밀하게
흩어진 民家에서 햇빛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긴 강을 따라 피어오른
뽀얀 안개가 굽이치고 넓지는 않지만 야트막한 산에 잘 가꾸어진 草地와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계획이 잘된 모습도 나타났다.
9월 5일, 여행 둘째 날, 상파울루에는 현지시간으로 아침 9시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다시
환승하여 꾸리티바市에 무사히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경이었다.
그런데 상파울루에서 꾸리티바까지는 비행기로 불과 35분 거리인데도 이렇게 늦게 도착한
데에는 얼른 이해되지 않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파울루 공항의 컴퓨터 단말기가 멎은
것에 대한 신속한 대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작업을 해서라도 고객들이 불편하지 않게
빨리 출국 수속을 해 주어야하는 데에도 컴퓨터가 복구되기를 기다리면서 놀다가 결국 복구가
너무 늦어지니까 뒤늦게 수작업으로 출국 수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느긋하고 태평스런
성격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최영진)의 안내로 우선 점심식사를 어느 초밥 집에서 하였다.
그리고 미리 예약된 Bourbon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에는 가이드의 안내로 市에서 계획적으로 설계하여 잘 닦아놓은 꽃길 등 밤거리를
답사하였고, 꾸리티바市의 상징적 교통수단으로 알려진 2중 굴절버스도 타보았다.
가이드는 브라질에 이민 온 지 25년째 되는 40대 초반의 好男兒로 보였다. 그는 이곳
공용어인 포르투갈어에 능숙하고 매너가 시원시원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와 정반대 쪽에 있는 도시로서 시차가 12시간 늦게 난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곳 밤 8시는 한국의 다음날 아침 8시에 해당된다. 같은 시차가 꾸리티바市 외에도 인근의
이과수(Iguassu), 리오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 상파울루 등 브라질 동남부 일대의
도시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들 도시에 머물게 될 앞으로 3-4일간은 한국에서의 습관을
벗어나 밤과 낮이 완전히 뒤바뀐 생활에 빨리 적응해야만 했다.
내일 꾸리티바市 공식방문을 위하여 일찍 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9월 6일, 여행 셋째 날, Bourbon호텔의 이른 아침 식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짐을 꾸려 전용버스에 싣고 꾸리티바 시청을 방문하였다. 이번 정책연수의 첫째 목적이
세계적인 환경도시, 계획도시로 알려진 이곳의 대중교통 체계 등을 배우러 왔기 때문이다.
시청으로 가는 도중 차안에서 현지 가이드의 자세한 안내가 있었다. 이곳은 세계 각 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이고, 소나무 상단 끝은 둥그렇게 깎아 놓은 것처럼 생긴
것이 특징이며, 기후는 아열대성이라 건조한 편이라는 등 도시환경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한 가운데 어느덧 시청 도시계획연구소 앞에 이르렀을 때 그곳 관계자가 나와 친절하게
안내하였다. 다소 허름하고 어두컴컴한 브리핑 실에서 약 2시간 가량 설명과 질문을
반복하면서 방문 목적을 완수하고 물러 나왔다. 이번 연수 중 중요한 정책과제 하나를
해결한 셈이다.
그런데 브리핑을 듣는 도중 한 가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에
무엇이 유명하다고 하면 너도나도 뒤질세라 몰린다는 점이다. 꾸리티바市가 도심 교통체계를
확립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자 서울시를 비롯하여 수년 전에 대전광역시 도시계획
관계자, 지난해에는 제주도 지사까지 다녀갔다는 것이다.
머나먼 이곳에서 수집한 자료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국내의 이 기관 저 기관이
동일한 목적으로 이곳을 찾느냐 하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체면이 걸린 조금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꾸리티바 시청을 나와 곧장 공항으로 가서 이과수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시간은
약 1시간 걸렸다. 그곳에서도 현지 가이드(김재욱)가 보조 가이드 까를라(20대 초반의 아가씨)와
함께 마중 나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그는 고국을 떠나 남미에 이민 온지 29년째라고 했다.
숙소로 가는 차안에서 가이드 특유의 강의가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이과수는 관광도시이면서 휴양도시로서 브라질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곳이다. 그리고 브라질에 유명한 것은 축구.삼바 춤.복권인데, 유럽에서 열리는 월드컵 대회에는
南美팀이 우승하기 어려운 징크스가 있고, 삼바 춤으로 카니발 베이비가 많이 태어날 정도로
성이 문란하며, 브라질에 없는 것으로는 지진(자연재해).전쟁.인종차별이라고 하였다.
또 브라질 총인구는 1억 8천만 명으로 남미의 다른 나라에 비해 인구가 월등히 많아 감히
넘보지 못해 전쟁이 일어날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관광이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과수에는
우리 교민이 30가구 가량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 이과수에는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보다도
규모가 큰 세계적인 폭포가 있다. 그래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것이다.
그런데 폭포 관광일정에 다소 차질이 생겼다. 브라질 쪽 이과수폭포를 관광한 다음날
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폭포를 관광하기로 되어 있는데 아르헨티나 쪽의 노조파업으로
그쪽 관광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조파업과 이과수폭포 관광과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언어가 불편한 상황에서 가이드의 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갑자기 그쪽으로 하는 관광이 어렵다니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현지 가이드의 권유로 인근의 이따이푸(Itaipu)댐을 관광하는 것이었다.
가이드에 의하면 이 댐은 파라과이.아르헨티나.브라질 등 3국의 국경 지대에 만든 댐인데,
그 규모가 세계적이며 지금 건설 중인 중국의 삼협댐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따이푸는 인디언 말로 ‘돌이 노래하다’ 라는 뜻인데,댐의 길이 7.7Km, 높이 196m,
담수량 290억만 톤으로서 수력발전량이 시간당 1,400Kw라고 한다.
또 이 수력발전소는 파라과이와 브라질이 각각 50%씩 소유하고 있고, 발전량의 95%를
브라질에서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파라과이의 경우 상업을 위주로 하는 국가여서
전력 사용량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댐 관광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였다. 이곳 숙소인 Mabu Iguassu 호텔은 수영장 시설까지
갖춘 일류급이었다. 저녁식사는 파라과이.아르헨티나.브라질 3국의 디너쇼가 펼쳐진
식당에서 하였다. 각 나라의 춤 꿈들이 모여 특색 있는 민속춤과 묘기를 자랑하는 듯하였다.
9월 7일, 여행 넷째 날, 머물었던 호텔에서 일찍 아침식사를 하고 이과수폭포로 이동하였다.
우선 폭포의 전체적인 규모를 조망하기 위해 숲이 우거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가는 길에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꾸아찌(너구리과)라는 동물을 만났다. 폭포는 소문대로
규모가 대단히 컸다. 폭포를 감상한 후에 보트 투어 장소로 이동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간이 셔틀 차로 갈아타고 정글 속으로 난 길을 20분 정도 달리니 강가에 이르렀다.
구명조끼를 착용한 후 보트를 타고 폭포 아래쪽까지 접근하는 모험을 하였다.
가이드는 이것을 사파리 투어와 보트 투어가 접목된 이른바 마꾸꼬 사파리 투어라하였다.
강의 물길이 순탄한 곳도 있었지만 급격하게 휘몰아치는 곳이 많아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다.
우리나라 강원도 동강에서 하는 래프팅(Rafting)보다 훨씬 더 스릴이 있다고들 하였다.
미리 준비한 방수복을 입고 보트에 탔지만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과 급격히 휘몰아치는 물살에
속옷까지 흠뻑 적셨다. 이렇게 한참 물길 투어를 하다가 갑자기 시야가 흐려 얼굴을 만져보니
안경이 잡히질 않았다. 휘몰아치는 물살이 정면으로 얼굴을 내리쳤을 때 어디론지 사라진
것이다. 틀림없이 강물에 빠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투어를 마치고 내릴 때에 다행히 보트
뒤쪽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얼굴 정면으로 몰아치는 물살을 맞아 안경이 보트 내에 떨어졌다가
물결의 흐름을 타고 뒤쪽으로 밀렸던 것이다.
보트 투어를 마치고 정글 길을 되돌아 나와 점심식사를 한 뒤에 이과수 공항으로 향하는 도중
브라질 특산품인 커피를 선물용으로 구입하였다. 다음 일정은 세계 3대 아름다운 항구 중의
하나인 리오데 자네이로에 가는 것이다. 비행기로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비행기는 제시간에 뜨질 않고 2시간 가량 연착하였다.
공항 내에는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띠었고, 그들의 쇼핑 태도를 관찰하니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인지 다소 억척스럽게 보여 같은 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언제부터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함부로 이것저것 사들이는지
조금 창피스러웠다.
리오 공항에는 연수 둘째 날 꾸리티바에서 만났던 현지 가이드(최영진)가 다시 마중 나왔다.
저녁 8시 20분쯤 도착하였으므로 먼저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도중 이 도시에 대한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리오데 자네이로는 ‘1월의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인구는 550만 명 정도이며,
다른 어느 도시보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고 하였다. 저녁식사는 브라질 현지 음식으로 하였다.
그리고 밤 10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리오 카니발의 진수를 재현한 삼바 쇼를
구경하러 갔다.
극장에 들어가자마자 인디언 복장을 한 탐스러운 미녀 두 명이 내 양쪽에 서서 허락도 받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곧 인화해서 $9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뛰어난 상술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사고 싶지 않았다. 쇼가 시작되자 무희들의 화려한 복장과
현란한 몸짓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낮에 이과수 강물에서 보트 투어를 했던
피로와 한잔 마신 위스키의 술기운이 겹쳐 스르르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서 쇼가 끝나가도 전에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숙소인 Sheraton Rio 호텔은 남대서양
해변에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꼭 당나귀의 귀처럼 생긴 Vidigal 산이 수문장처럼 우뚝
서있었고 호텔 방에서 내다본 해변 풍경은 환상적이고 매우 아름다웠다.
며칠 안 된 브라질 체류기간 중 현저히 눈에 띠어 다소 기이하게 여긴 바가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의 엉덩이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마치 남미 대륙의 브라질 국토 모양처럼 옆면에서
보았을 때 유난히 툭 튀어나온 형상인 것이다. 또 어떤 여자의 큰 엉덩이는 타조의 그것처럼
위쪽으로 치켜 올라간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둥그렇고 풍성하게 컸다. 어찌 보면
매우 탐스러웠다. 보기 흉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나라 여자들에 비해 그렇게 큰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난히 이곳 여자들이 엉덩이를 좌우 상하로 흔들어 대는 삼바 춤을
즐겨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엉덩이를 자주 흔들면 아무래도 그곳 근육이 발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여성들도 그렇게 해서라도 큰 엉덩이를 가질 수만 있다면
나이든 어른들에게 아이 잘 낳겠다는 칭찬 받을 수 있을 것이다.
9월 8일, 여행 다섯째 날,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바로 호텔과 인접해 있는 남대서양
해변을 산책하였다. 아주 가늘고 깨끗한 모래로 뒤덮인 넓은 백사장이 시원스러웠다.
하얀 泡沫을 그리며 철썩거리는 물결소리가 가슴을 확 트이게 하였다. 해변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손바닥만한 크기의 수석 한 점을 주었다. 모양은 둥그스름했다. 아주 특색이 있는
돌은 아니었지만 보는 순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귀국할 때 그것을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고
호텔 방으로 들고 와 비닐봉지에 조심스럽게 싸서 큰 가방에 넣었다. 마치 무슨 큰 보배라도
얻은 듯 기뻤다.
전용버스는 Sheraton 호텔을 출발하여 市內의 코르코바도(Corcovado) 언덕에 서있는
‘예수의 像(Cristo Redentor)’을 감상하기 위해 향하였다. 가는 도중 또 가이드의 유익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방금 지난 이빠네마(Ipanema) 해변은 경관이 수려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인데, 그들 중에는 특히 호모.게이(Gay) 등 동성연애자들이 많다고 하였다.
그리고 브라질은 포르투갈 왕자가 독립을 쟁취하여 처음에는 王政으로 약 40년간
통치하다가 1889년 쿠데타에 의해 共和政이 수립되었다고 한다.
또 브라질은 안데스산맥에 막혀 태평양 쪽으로 진출하지 못한 지형학적인 여건 때문에
국가발전에 커다란 장애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코르코바도 언덕에 오르는 길은 모노네일을 20분 가량 타고 가야 했다. 올라가서 보니
확 트인 전망에 리오데 자네이로 市街地가 한눈에 들어왔다. 과연 시드니․나폴리와 함께
세계 3대 美港 중의 하나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예수의 像은 해발 710m의 언덕에 위치해
있었으며, 높이 30m에 양팔 길이 28m로서 1926-1931년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언덕을 내려와 전용버스는 다시 세계 최대 규모의 마라까나 축구장으로 향하였다.
입구에는 그 유명한 팔레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축구 선수들의 발자국이 새겨진
조형물 있었다. 관중의 수용 규모는 12만 명이라고 한다. 내부 시설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잠실 축구장이나 상암 축구장에 비해 더 나은 것 같지는 않았다.
축구장을 나와 점심 식당으로 가는 도중 삼바 축제를 하는 장소를 지나갔다.
삼바 축제는 매년 2-3월, 부활절 40일 전에 총 4박 5일 동안 열린다고 한다.
점심은 전통 브라질 음식으로 하였다. 소고기.돼지고기.양고기 등 육식동물을 바비큐로
만들어 쇠꼬챙이에 꿰어서 손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돌아다니면 식성에 따라 골라서
먹는 요리였다. 가이드가 미리 꾸삥(소의 혹 부분).꼬뻬니아.갈비 부분은 꼭 챙겨 먹는
것이 좋다고 힌트를 주었다. 지난번 꾸리티바市의 저녁식사 메뉴와 비슷했다.
점심식사 후에는 흑인들의 모습이 많아 보이고 까무잡잡하게 탄 비키니 차림의 여인들이
일광욕과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코빠카바나(Copacabana)해변을 걸어 보고,
성 세바스챤 성당으로 향하였다.
성당은 외형이 특이하였고 기둥과 유리창이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전용버스는 다시 석양 낙조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빵산(890m)이라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과나바라(Guanabara)만 뿐 아니라 리오데 자네이로의 항구․비행장 등 시내의
주요 건물과 오전에 다녀온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의 像이 잘 보이는 곳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리오데 자네이로는 1959년까지 브라질의 수도였고, 인구 550만 명
가운데 백인이 약 60%, 흑인이 40%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빵산에 오르는 길은
두 번에 걸친 케이블카로 이동하였다.
올라가서 보니 사면팔방 시원스레 뚫린 전망에 역시 저녁 노을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저 멀리 남대서양 해변을 따라 야자나무가 가로수로 서있고 바닷물은 하얀 泡沫을 그리고
있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나 혼자 감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슬그머니 가족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젠가 시간적.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꼭 가족을 동반하고 다시 한번 더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저녁 해는 지고 어둠이 짙어질 무렵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두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내려왔다. 저녁식사는 해변에 있는 밤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하였다. 둥그런 보름달이
해변을 비추고 있었다. 모처럼 생선요리가 나왔는데 많이 먹지를 못했다. 아마 입에 맞지
않은 점도 있었지만 그 동안의 피로가 누적된 탓이 아닌가 싶었다.
다음날 연수일정은 아침 일찍 상파울루로 이동해 그곳을 한나절 관광하고 다시 페루의
수도 리마까지 가서 숙박하기로 되어 있다.
9월 9일, 여섯째 날, 리오 공항을 일찍 출발하여 오전 중에 상파울루에 도착하였다.
비행기로 약 1시간의 거리였다. 우리가 내린 꼼모야스 공항은 국내선 전용 비행장이라고
한다. 공항을 빠져 나와 전용버스에 짐을 싣고 본격적인 관광 길에 나섰다. 공항에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루이스 최)는 23년째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우선 점심 때가 가까워 교민이 경영하는 한국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도중
차안에서 가이드의 안내 설명이 시작되었다. 브라질은 1822년 9월 7일에 포르트갈로부터
독립되었고, 상파울루州의 인구는 약 4,000만 명인데 우리 교민은 약 4만 명 정도이며,
대부분 여성 의류업에 종사한다고 하였다.
또 상파울루市는 1554년에 탄생하였는데 지하자원 개발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상파울루라는 도시의 명칭은 사도 바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초기에 포르투갈에서 카톨릭 신도들이 많이 이주하여 터를
닦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1908년, 한국은 1962년에 처음으로 이민을 와서 일본인 촌은 상당히
번성한 편인데 우리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간파했듯이 유럽인들이 그들의 발달된 과학기술로 개발한
무기를 가지고 다른 나라를 점령할 때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음을 알고 있다.
우선 점령하고자 하는 지역에 종교 지도자, 즉 기독교 계통의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가
宣撫공작을 해서 주민들을 안심시키는 조치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찍이
구한말 또는 1950, 60년대에 경험했던 것을 상기하면 곧 이해될 것이다.
이곳 브라질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브라질을 점령할 때 그들 나라의
카톨릭 신부들이 먼저 건너와 우매하다고 생각한 원주민들을 宣撫하였던 것이다.
상파울루라는 도시의 이름이 생겨난 유래만 보아도 여실히 증명된다.
그런 다음 무력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점령하는 순서를 밟는 것이다.
이곳 남미에서도 그들의 교활한 점령 술책을 여기저기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국제사회의 냉엄한 약육강식의 현장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오후에는 상파울루 400주년 기념으로 1954년에 건립된 쎄 성당과 상파울루 탄생지를
관광하였다. 특히 상파울루 탄생지 부근에 있는 성당에서는 우리 집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수산나를 위하여 브라질 석으로 만들어진 묵주를 하나 구입하였다.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본 상파울루 시가지는 지금 비록 벽에 낙서가 많고 시커매서
낙후된 것처럼 보였지만 기차역.오페라 하우스 등 주요 건축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100년 이상 된 고풍스런 것이 많아 옛날의 영화를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것은 지난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를 방문하였을 때에 받은
영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역사의 흥망성쇠는 긴 안목으로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침을 반복하는 것이다.
상파울루도 한때는 우리보다도 형편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 듯하였다.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국가발전에 매진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상파울루 시가지를 누비고 있는 차량행렬에 소형차가 많이 눈에 띠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1,000㏄이하 국민차가 90%이상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검소한 생활을 하는 국민들이 오늘날 어떻게 해서 이 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브라질 여행을 마치면서 남미 사람들이 북미 사람들보다 못사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풍부한 지하자원을 비롯한 좋은 발전여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사람들 보다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나름대로 얻은
답은 브라질과 같은 나라의 경우 기후 탓으로 지나치게 늘어지고 낙천적인 국민성에도
기인하겠지만, 남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주로 한탕주의로 빨리 돈벌어 떠나려고 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북미의 경우 오래 정착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였다. 즉 남미 사람들은 북미 사람들보다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애착심이 적은 것이다.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불안정한 상태로 거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이번 여행의 현지 가이드
중에도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남미에 이민을 가서 살아도 민족적인
차별은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월 10일, 여행 일곱째 날, 전날 밤늦은 시간에 상파울루 공항을 출발하여 약 5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대로 새벽 1시경에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하였다.
현지 가이드(서보현)의 안내로 Sheraton Rima 호텔에 짐을 풀고 잠시 눈을 붙인 뒤
일찍 일어나 다시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남미 대륙 마지막 인디오 왕조였던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Cusco)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무거운 짐은 호텔에 맡겼다가 다시 쿠스코에서 돌아왔을 때 찾을 수 있다고 하여 기내에
반입할 수 있는 작은 가방만을 휴대하였다.
페루는 면적이 한반도의 5.8배나 되고 인구는 2,700만 명 정도인데, 그 중 1,200만 명이
리마에 거주한다. 인종은 인디오가 40%를 차지하고 메스티조(인디오와 스페인의 혼혈)가
50% 기타 10%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성은 순박한 편이고 한국 교민은 약 1,000명 정도
살고 있다고 한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에 도심 차량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대우 자동차인 티코가 눈에
많이 띠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 영업용 택시의 60% 가량이 티코가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제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페루 국민들의 검소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또 페루는 국토의 60% 정도가 아마존 지역이고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며 국민소득은
$2,000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페루 사람은 대부분 눈에 쌍꺼풀이 져있고 매부리코를
지니고 있으며, 엉덩이에 몽골반점도 있어서 어딘지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고 한다.
리마에서 쿠스코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해발 3,500m에 위치한 高原의 도시로서, 페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인구는 약 27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쿠스코는 인디언 말로 ‘붉은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공항 밖으로 나와서 본 시내 풍경은 高原의 도시답게 붉고 메말랐다. 산에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심어져 있지 않고 온통 민둥산이었다. 그리고 지대가 높아서 인지 발걸음이
가볍지를 않았다. 다소 숨이 찬 느낌이었다. 잉카제국은 1,200년대 초에 인디오 중
케추아족이 안데스 고원을 중심으로 건설하여 1,500년대 중반 스페인의 피사로가 이끄는
군대에 멸망되기 전까지 300여 년간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8-9대 왕조, 즉 1,400년대에
가장 융성하였다고 한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 도중 전용버스에서 본 도심지 풍경은 아주 특이했다.
길바닥이 온통 벽돌을 깔아 포장이 되어 있었고, 건물들이 주로 흰색으로 칠해졌으며,
창문의 크기가 작아 외부로 막혀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은 구릿빛으로 검붉었고 키는 작았으며,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인디오의 후손다운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하였다.
점심식사 때에는 코카 잎이 띄워진 茶를 두 잔이나 마셨다. 高山症에 매우 효험이 있는
茶로 알려졌기 때문에 미리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충분히 마셔 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쿠스코 시내를 한바퀴 돌면서 잉카의 정교한 석조 건물이 돋보이는
산토밍고 성당을 관람하였다. 그런 다음 전용차는 외곽으로 빠져 1,500년대 잉카제국의
최후 항전지로 알려진 삭사이와만과 인디오의 제례 장소였던 켄코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결코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해발 3,750m 높이에 위치한
탐보마차이에 들렸다. 인디오들은 이곳을 ‘물의 神殿’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지역에서 흘러나온 물은 인디오들의 생명 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터전을 오래도록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옛 인디오들은 인간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 그리고 신의 세계로 구분하고 각각의 상징 동물을
설정하여 신봉하였데, 인간의 세계에서는 퓨마, 죽음의 세계에서는 뱀, 신의 세계에서는
콘도르(독수리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인간들 세상인 쿠스코의 상징 동물이 퓨마이며, 우리가 흔히 들어온
‘엘 콘도르 파사(독수리는 날아가고)’라는 음악의 고장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갈 때 쿠스코 공항에서 이 음악이 수록된 Andean's Music Tankar라는 음반 한 장을
기념으로 샀다.
오늘은 쿠스코 시내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관광한 다음 전용버스로
우르밤바(Urubamba)라는 곳까지 가서 1박을 하고, 내일은 인디오들이 해발 2,300m의
높이에 건설한 ‘공중 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를 관광하기로 하였다.
우르밤바로 향하는 도중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내다본 바깥 풍경은
평화스러웠으나 매우 이색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3,000m 내외의 高原답게 주변은
온통 황토색이었고, 길 양쪽에는 민둥산이 높이 솟아 좁은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흙산이어서 만일 큰비라도 내린다면 당장 산사태가 일어나서
길이 막힐 듯하였다. 산등성이는 군데군데 계단식으로 개간되어 농작물을 심어 놓은 것
같았다. 마치 우리나라 산간 벽지에서 볼 수 있는 다랑이 논을 연상케 하였다.
가이드에 의하면 이러한 계단식으로 조성된 밭은 농작물 수확 이외에 홍수 피해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一石二鳥의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우르밤바는 인디오 말로 ‘신의 어머니’라는 뜻인데, 협곡 사이로 난 자동차 길 왼쪽에는
우르밤바江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도로는 2차선으로 매우 좁아 반대편 쪽에서
오는 차량과 마주칠 때 겨우 비켜갈 정도였으며 대부분 포장되지 않은 상태였다.
차는 쿠스코 유적지로부터 약 1시간 30분을 달려 저녁 무렵에 하룻밤을 묵어갈
우르밤바의 Casa Andina 호텔에 도착하였다.
전원풍의 넓은 초원에 드문드문 숙소를 배치하여 지은 아름다운 호텔이었다.
지금까지 5星級 호텔에서만 숙박을 해 왔으나, 이곳 호텔은 처음으로 4星級이었다.
그러나 다른 어느 호텔보다도 조용하고 깔끔한 멋이 풍겼다.
건물을 빠져 나와 숙소로 가는 길목에는 이름 모를 예쁜 꽃들이 양쪽에 심어져 반기는
듯하였다. 우리나라 백두산 높이와 비슷한 해발 2,700m가 되는 곳에 지어진 호텔이어서
밤 공기가 약간 차갑고 풀벌레 소리가 애잔하게 들려 왔다.
9월 11일, 여행 여덟째 날,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서둘러 기차역으로
가야만 했다. 마추픽추로 떠나기 전 호텔 숙소 주변을 산책하다가 페루에 온 기념이
될만한 수석 한 점을 주었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고, 모양은 이곳 주민들의
主食物인 감자처럼 생겼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길에서 주었던 수석은 리오데 자네이로
남대서양 해변에서의 한 점과 여기에서 한 점하여 두 점인 것이다. 마음이 흐뭇하였다.
다른 어느 기념품보다도 여행의 추억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전용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는 데에는 약 30분이 소요되었다. 기차(Peru Rail)는
관광 전용열차인 듯하였는데 규모나 시설 면에서 우리나라의 통일호 열차보다도
훨씬 못하였다. 열차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고원 지대라서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어딘지 메마르고 삭막한 모습이었고 가끔 누런 황소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가다보니 만년설이 덮인 높은 산이 나타났다.
가이드한테 물으니 해발 5,700m의 베로니카 산이라고 한다. 기차는 1시간 30분을 달려
어느덧 마추픽추驛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Eclogica라고 쓰여진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높은 산을 약 40분간 지그재그로 달려 공중도시인 마추픽추에 도착하였다.
이 공중도시는 쿠스코 북서쪽 약 80㎞의 지점에 있는데 두 개의 뾰족한 봉우리 사이
말안장 모양의 지역에 건설되었다. 그 뾰족한 두 봉우리의 이름은 원주민어로
‘늙은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마추픽추와 ‘젊은 봉우리’의 의미를 가진 와이나픽추
라고 한다. 올라와서 보니 확 트인 전망에 잉카의 신비스러운 유적지가 전개되었고,
군데군데 라마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해서 이런 정교한 돌담을 쌓았을까하는 궁금증이 앞섰다.
이는 한때 잉카문명이 대단히 번성하였음을 전해주고도 남았다. 이 공중 도시는
1911년 미국 예일대학의 역사학자 하이람빙엄이라는 교수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많은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80%이상이 여자의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여자들만 살았던 女人國이 아니었는가하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까지도 정확한 학설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안데스산맥과 아마존 정글이 시작하는 곳으로서 특히 아마존을 통과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1,300년대에서 1,400년 대 중반 사이에 걸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그 규모를 고려할 때 500명 내지 800명 정도의 잉카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공중 도시가 형성된 배경은 군사적.경제적.종교적 이유일 것이라는 학설이 있다.
군사적으로는 적의 관찰과 방어에 유리한 높은 위치에 건설하였을 것이라는 점이고,
경제적으로는 물이 흐르고 인근에 경작지가 흩어져 있어 자급자족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점이며, 종교적으로는 그들이 태양신을 신봉했음을 감안할 때 하늘과 좀더 가까운
높은 공간에 삶의 터전을 잡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마추픽추에서는 왕녀의 궁전, 신성한 광장, 3개의 창문이 있는 궁전, 해 시계, 콘도르 신전
등 잉카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구축하였던 유물들을 살펴보았다.
약 2시간에 걸친 마추픽추 관람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한 뒤에 안데스산맥에서 흘러내린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우르밤바를 거쳐 다시 쿠스코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호텔 부근 어느 식당에서 페루의 전통 춤을 관람하면서 식사를 하였다
9월 12일, 여행 아홉째 날, 쿠스코의 Jose Antonio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리마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공항 검색 과정에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우르밤바에서 주었던 수석을 휴대용 가방에 넣었더니 검색대에
잡힌 것이다. 그래서 서투른 영어를 구사하여 ‘나는 돌을 좋아하는 수집가인데 이곳을
다녀간 기념으로 갖고 싶다’ 는 뜻의 의사소통 끝에 화물로 부치는 조건으로 겨우 허락을
받았다.
리마는 태평양 연안의 도시로서 경치가 매우 수려했고, 1535년부터 페루의 수도였으며,
스페인으로부터 1821년 7월 28일 독립되었다고 한다. 공항을 나와 식당으로 가는 길에
이곳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 사랑을 고백한다는 ‘사랑해’ 공원에 들렸다. 망망대해의
남태평양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점심식사는 충남 당진에서 10년 전에 이민을 와서
개업했다는 ‘고려정’이라는 식당에서 오랜만에 한식으로 잘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고,
페루의 고산 동물인 알파카(Alpaca)의 털로 짠 머풀러(Muffler) 한 장을 샀다.
오후에는 리마市 미나플로레스 구청에서 관계자로부터 신도시 개발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약 1,200만 명이 거주하는 리마는 구도심인 센트로 지역과 신시가지 지역인 미나플로레스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복합 쇼핑몰인 라르꼬마르 센터(Larcomar Center)는 미라플로레스
해안 절벽에 자리잡고 있었다. 구청을 나와서 아르마스 광장, 리마 대성당, 산마르틴 광장과
고대 페루의 정교한 금세공을 자랑한 황금박물관, 무기박물관, 대통령 궁 등을 견문하였다.
저녁에는 밤을 세워 멕시코까지 가는 지루한 장시간의 비행을 앞두고 피로를 풀기 위해
간단한 사우나를 하였다. 사우나를 마치고 밤늦은 시간에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9월 13일, 여행 열째 날, 이 날의 새벽은 비행기 속에서 보냈다. 리마에서 밤늦은 시간에
항공 체크인 및 출국수속을 마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공항을 이륙하였기 때문이다.
약 6시간의 비행 끝에 멕시코시티 국제공항에 내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왔을 때가
현지시간으로 오전 7시였다. 마야(Maya).아즈텍(Aztecas)을 비롯한 중미 대륙 고대문명의
본 고장에 온 것이다.
마야문명은 북미 대륙의 작은 인디언 부족이 남진하여 기원전 2,500년대 중반에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정착한 이후 서기 300년에서 900년까지 번성하였다. 아즈텍문명은
13-15세기경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인디오에 의해 꽃피웠던 마지막 고대 문명을 말한다.
그들의 문화는 황금에 욕심을 부린 스페인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 유린되고 파괴되었다.
현지 가이드(홍의정)는 9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의 안내로 우리 교민이
경영하는 식당에 들려 한국음식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멕시코는 약 300년 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 서구와 전통이 혼합된
독특한 문화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멕시코시티는 해발 2,240m의 고원지대에 형성된 도시이며, 나라 전체인구의 6분의 1인
약 2,000만 명이 살고 있고, 멕시코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약 20배의 크기라고 한다.
그리고 인종별로는 원주민인 인디오가 30%, 메스티조 60%, 백인 10%로 구성되어 있고,
빈부격차가 심하여 상류층 10%가 이 나라 경제를 좌우하고 있는데 거의 백인이며,
대부분 빈부 차이의 대물림에 체념하고 자신의 삶을 낙천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세계 100대 재벌 중 12명이 멕시코 인이라고 하며, 멕시코 국민은 5천년의 긴 역사와
마야․아즈텍 등 고대문명의 발상지로서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비행기 속에서 밤을 세워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문화체험
현장으로 나섰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3문화 광장이라는 데었는데, 여기는 아즈텍문명,
스페인 통치문명, 현대문명이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즈텍 문명을 상징하는
유적으로는 종교적인 제단으로 쓰였다는 피라미드가 군데군데 산재해 있었고,
스페인 통치문명은 산티아고 성당, 그리고 현대문명과 관련된 것은 1968년 12월
(멕시코 올림픽 개최 직전)에 약 2만 명이 모여 독재에 항거하였다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일종의 민주화운동 기념비였다. 光州민주화운동이 1980년도에 일어났으니
이곳이 시대적으로 앞선 셈이다.
전용버스로 이동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멕시코 사람들은 햇살이 따가운
기후 탓인지 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아서 60대 중반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고,
결혼은 대개 20세 이전에 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또 멕시코시티는 그 면적이 서울의 1.5배 정도이고 약 700년 간 수도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아즈텍 문명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아즈텍문명은 1325년경 멕시코 중남부 지역에서
부족국가로 출발하여 이루어졌으며 1,400년대 중반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통일하여
내려오다가 1519년 적대 부족의 지원을 받은 스페인 꼬르데스에게 정복되었다.
마야나 잉카에는 아직도 그 후손임을 자랑하는 원주민이 남아 있지만 아즈텍은 철저하게
스페인과 혼혈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즈텍 문화유적도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멕시코 국기에는 아즈텍 문명의 건국 신화와 관련된 문양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오후에는 중남미 최대의 카톨릭 聖地인 과달루페 사원을 견문하였다. 본래 이 자리에는
아즈텍 문명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원은 로마 교황청에 의해 3대 기적의 사원으로
인정을 받았고 얼마전 교황도 다녀갔다는 설명이 있었다. 1,700년대 초에 건립되었으나
지진으로 무너졌고 현재의 건물은 1976년에 완공되어 2만 명 정도 수용한다는 것이다.
성당 안에는 검은머리, 갈색머리의 과달루페 성모가 모셔져 있다.
멕시코는 31개 주로 이루어진 연방제 국가이고 양원제 의회를 채택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연임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멕시코에는 마야(Maya)문명, 아즈텍(Aztecas)문명 이외에도 올메까(Olmeca)문명,
테오티와칸(Teotihuacan)문명, 똘때까(Tolteca)문명이 존재했었다. 올메까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에 일어났고 테오티와칸 문명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일어난 문명이라고
한다. 또 테오티와칸 문명은 1,400년경 흙으로 덮인 상태로 발견되었고 아직도 10% 정도만
발굴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테오티와칸이란 ‘神들의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문명 이후에 똘때까 문명이
일어났다고 한다. 테오티와칸 문명의 대표적 유적지라고 할 수 있는 해의 피라미드(71m)와
달의 피라미드(50m)를 견문하였다. 이들 피라미드는 死者의 거리와 연결되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피라미드의 정상은 제단의 역할을 하였다. 300개의 계단을 밟고
해의 피라미드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확 트였다. 정상에서 한참을 머무르다가 내려와
점심식사를 하고 선인장으로 만든 멕시코 전통주인 ‘데깔로’를 시음하였다.
멕시코는 고대문명의 유적지가 많아 특히 고고학 분야가 크게 발달하여 이를 공부하려고
오는 해외유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피곤한 몸으로 문화체험을 대충 마친 다음 예약된 숙소인 Galeria Mexico 호텔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도심 교통의 정체가 극심함을 목격하였다. 가이드 말로는 약 2개월 전에 실시했던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야당 후보 지지자 수천 명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도심에 텐트를 쳐놓고 항의 농성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서울의 경우보다도 훨씬 심각한 상태로 느껴졌다. 이곳 교통행정 관계자들도 며칠 전 우리가
방문했던 브라질 꾸리티바 市에 가서 도심 교통체계를 배워와야 할 것 같았다.
저녁에는 중국 음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이번 연수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날로
사실상 연수가 거의 끝났기 때문이다. 내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 공항으로 이동하여 LA를 거쳐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를 15시간 이상 타야만 한다.
수원 사무실로 무사히 연수가 끝났음을 통보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9월 14일, 여행 열 하루째 날,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호텔 로비에 차려진 음식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4시 30분에 공항으로 출발하여 LA행 비행기 탑승 수속을 밟았다.
비행기는 예정시간인 7시에 이륙하여 약 4시간 비행 끝에 LA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거기에서 다시 환승 절차를 거쳐 대한항공(KE 018편)에 몸을 싣고 약 12시간 30분간의
비행 끝에 한국시간으로 9월 15일 오후 늦은 시간에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지루하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떠날 때에는 솔직히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없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현지에 가서 보니 지난해 유럽여행과 비교되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몸은 피곤하고 체력적으로 다소 무리가 따랐으나 다녀오기를 잘했다.
역사와 철학 공부는 역시 여행을 통해서 하게 되면 얻어지는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올 가을에는 국내여행이라도 부지런히 다녀야겠다.
이번 여행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위정책과정 인솔관으로 참가하여
큰 불편 없이 다녀온 곳에 대해 감사드린다. 우선 잠자리부터 독방을 쓰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저녁에는 마음 편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행일정과 준비에
있어서는 다소 개선할 점이 있었다.
첫째, 인천국제공항에서 LA를 거쳐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중남미 여행이 목적이라면 LA를 거쳐 멕시코에 들려 하루쯤 쉬어가거나
아예 일본으로 가서 상파울루 직항 비행기를 이용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왕복 약 70시간(환승 체류시간 포함) 소요되어 건강한 사람도 몸이 지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브라질 상파울루의 하루 관광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이곳은 특이하게 볼만한
유적지가 많지 않기 때문에 관광을 생략해도 무방할 듯하였다.
셋째, 멕시코는 고대문명의 유적지가 많은데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점이 있다.
페루의 경우처럼 최소한 3일간은 머물면서 문화체험을 해야 중남미 관광의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브라질은 가능한 삼바축제가 열리는 시기에 다녀오는 것이 보다 이곳 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이러한 미비점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서는 매우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는 시점에서 아마도 나의 공직생활 중 마지막 해외출장으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유럽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재단해 놓은 세계역사를
배워왔음을 여실히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중남미 인디오들도 엄연히 그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훌륭한 문화를 이루었다. 다만 그들이 유럽 사람들에 비해 과학기술의 수준이
뒤졌기 때문에 점령을 당해 모진 박해를 받았고 그들의 역사가 왜곡되었을 뿐이다.
지금도 강대국이 자기들의 논리대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세태는 계속되고 있지만,
15, 6세기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남미 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새삼스레
국제사회의 냉엄한 약육강식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그들은 종교를 앞세워 宣撫공작을
하고 무력으로 짓밟는 手順을 거쳤다. 상당히 교활한 심리전을 병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저들의 속셈은 이미 간파된 것이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같은 수법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들의 논리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노력해서 힘을 기르는 방법이외에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2006. 9. 24. 韶 湖
첫댓글 좋은 안내 고맙네. 형규선배, 석규와 함께 중남미를 한번 다녀 오자는 야기가 있던 차에 최회장의 여행기가 많은 도움이 될걸세.
잉카문명의 발상지를 가보신 형님은 행운아란 생각이 듭니다. 저희는 대학 시절 'El Condor Passe' 즉 '철새는 날아가고' 란 5음절의 경쾌한 팝송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철새는 안데스 산맥을 유유히 날으는 '콘도르' 로서, 잉카문명의 마지막 황제 <이박 뚜마루 2세>의 영혼 - 스페인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마지막 군주- 이 담겨있다고 해서 그 곳의 젊은이들이 매우 흠모하는 새 랍니다. 페루의 젊은이들은 이 Condor 를 사로잡아 발목에 소원문구를 메달아 안데스의 푸른 고원에 그 새를 날리며 소원을 빈답니다. 그 역사적이고 낭만적인 지역을 여행하기란 여간 쉽지 않기 때문에 다시한 번 축하를 드립니다.
'엘 콘도르 파사'라는 음악에 얽힌 훌륭한 해설 고맙네. 전용버스로 페루의 쿠스코 지역을 여행하는 중에 pan pipe 연주로 들었던 이 음악이 매우 인상적이었네.
중남미 여행 중에 찍은 기념사진 12매를 기본 앨범에 올려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