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전 동이족과 한족의 대전투
기원전 2700년경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 있었다.
문자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라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 전국시대 이후 각종 사서에 단편적으로 기록됨으로써 후대에 알려졌다. 하지만 1500년간 구전되는 동안 사실이 많이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치우와 황제 캐릭터)
“수 천 년 전 중국의 황하강과 양자강 유역에 많은 씨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황제(黃帝)와 염제는 황하 유역에서 가장 이름난 부락의 수령들이었다. 황제와 염제는 형제였다. 그 무렵 산동반도와 양자강 유역에는 구려 족이 있었는데 그들의 수령 치우(蚩尤)는 매우 용맹했다. 치우에게는 81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모두 힘이 세고 용맹했으며 칼, 화살 등 여러 가지 병기제조에 능했다. 치우는 강한 군대를 이끌고 늘 다른 부락을 침략했다. 어느 날, 치우는 염제의 부락에 침입했다. 염제는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했지만 치우의 적수가 못되었다. 염제는 하는 수 없이 황제 헌원이 있는 탁록으로 도망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는 일찍부터 이 부락의 화근을 제거하려 했던 차에 여러 부락의 수령을 모아놓고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와 대결전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탁록대전”이다.“
* 두 세력권의 충돌
동이족과 화하족(한족, 漢族)의 대결은 필연이었다.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은 정복전쟁을 치르면서 상대적으로 비옥한 황하 하류로 진출했다. 한편 청동무기를 개발한 동이족의 일부는 만주지역에서 산동반도를 거쳐 보다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이들은 하북성 탁록(涿鹿) 인근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탁록은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두 세 시간의 거리에 있다. 두 세력의 만남은 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한족의 조상 ‘황제’(黃帝)와 구리(구려)의 왕 치우가 싸운 ‘탁록대전’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규모 전쟁이다. 5000년 전 탁록의 전투가 벌어질 무렵 동이족의 거주지에서는 이미 구리와 철이 생산되고 활이 있었다.
상고시대 동북아에는 3개 집단이 있었다. 동이족(東夷族), 화하족(華夏族), 묘만족(苗蠻族:묘족)이 그것이다. 동이족은 산동성 일대에, 화하족(한족)은 섬서성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묘만족은 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동이족과 한족이 대륙의 양대 세력이었다.
* 사마천의 '사기', 치우가 구려의 왕
(고조선 영역에서 발견된 청동투구)
동이족과 묘족은 모두 구려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우를 조상으로 추앙한다. 조선 후기 이후로 저술된 우리 야사에서는 치우가 우리 한민족이라고 주장하나 역사학계에는 이러한 야사들은 인정하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사마천의 '사기'는 이를 기록하면서, 치우가 구려의 왕이며 치우집단이 모두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청동투구를 뜻하는 것으로 이미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운급헌원기>를 보면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 라고 쓰여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치우천황 군대들이 최초로 투구와 갑옷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원전에 쓰여 진 ‘사기’에서 화하족보다 빨리 청동기 문명을 사용했던 구리(九黎)라는 민족은 동이족으로 고조선의 선조들이었다.
* 청동과 무쇠(철)로 무장한 치우의 군대
이 시기에 황제의 군대는 일부만 청동기 무기를 소지하고 대부분 돌로 만든 무기를 사용했다. 이들은 청동과 무쇠(철)로 무장한 치우의 군대와 마주치자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이 치우집단의 모습을 ‘동두철액’이라고 묘사한 이유이다. 중국 전설에서도 황제와 탁록 들판에서 패권을 다퉜던 치우가 처음으로 검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칼, 도끼, 화살, 수레와 투석기 등 여러 가지 병기제조에 능숙하고 용맹했다.
하지만 중국 측 신화는 황제가 이끄는 한족의 승리로 마무리 한다.
*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
중국 측 역사서에는 치우를 언급한 기록이 많다. “황제와 치우는 아홉 번 다투어 아홉 번 모두 승부가 나지 않았다”,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치우는 고대의 천자다" 이것이 중국 신화와 역사 속에 등장하는 ‘황제’와 그의 패권에 맞선 ‘치우’에 대한 이야기다.
치우와 환웅, 단군, 해모수, 주몽…. 이들은 모두 우리의 신화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화에서는 제대로 된 대접과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처럼 위서(僞書)로 치부되는 책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치우천왕은 고조선의 전신인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년, 기원전 2707∼2599)이며 도읍을 청구(靑邱·현 중국 산동성)로 옮기고 중국의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통일한 인물이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는 황제와 치우가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 경위,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의 종류와 전투방법, 10년간 73회나 치렀다는 주요전투의 내용, 염제 휘하의 한 군장이었다가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염제로 등극하는 과정, 쇠를 캐 제련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치우는 바로 ‘고조선’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다. 환단고기에서는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자오지 환웅’(치우천왕)이다. 치우천왕은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와 <한서지리지>, <상서>, <운급헌원기> 등에 실려 있다.
조선 숙종1년(1675)에 쓰여진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에는 치우가 단군왕검의 고조선 보다 300여년 앞선 신시(神市)시대의 우리 조상으로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치우는 황하 북쪽에 살면서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을 관망하다가 황하유역을 차지했던 염제 유망씨가 무도해서 제후들이 배반하고 민심이 떠나자 씨족 내 장수 81명과 병사를 이끌고 직접 출전하여 유망의 본거지인 공상을 쳐서 1년 만에 12제후국을 얻고 이곳에서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유망이 패주하고 치우가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헌원이 난을 일으키니 치우와 탁록에서 일전을 벌리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치우는 대승하여 지금의 희수 유역, 산동, 북경, 낙양을 모두 차지하였다. 황제헌원은 그 후 10여 년 간에 70여 회나 치우에게 도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 아예 역사에서 지워진 상고사 연구
인류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작은 부락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부락사회 또는 마을사회 시대라 한다. 그러다 기원전 4000년을 전후하여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전쟁이 일어나고 자기 부락 보호를 위해 서로 연맹을 시도한 부락연맹사회 또는 고을사회가 형성된다. 그 후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기원전 2600년 경 고대국가가 탄생했다. 기록이 있기 이전의 역사는 창세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도 고조선이라는 국가 이전에 마을이나 고을사회 단계가 있었을 것이며, 이와 관련한 신화나 전설이 구전이나 무가(巫歌) 형태, 또는 야사로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는 단군 이전 시대를 역사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그 속에 포함된 치우의 역사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중국, 동이족과 치우의 관계 지우려해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치우를 묘족의 조상이자 중국인의 조상으로 강조하면서 동이족과의 관계를 지우려 하고 있다. 중국 민족 최초의 조상을 기리는 중화삼조당에 그들의 조상인 황제, 신농과 더불어 슬그머니 치우를 끼워 놓았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치우의 활동 위치가 동이족의 지역이다. 그의 무덤 역시 산동성 수장현에 있다고 한다. 동이족의 영내인 것이다.
또 2005년에 출간된 ‘중화 500년 군사 고사’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000년 전후, 중국에는 화하(華夏), 동이(東夷), 묘만(苗蠻) 3개 집단이 있었다. 황하유역에는 황제의 화하 부족과 염제의 묘만 부족이 핵심이었는데 이들이 연맹을 구성하여 치우의 동이구려(東夷九黎)를 탁록에서 격파했다. 이 전투는 화하족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황제와 염제가 중국민족의 선조로 존경받는 계기가 되었다.”
사가들은 동이 구려족 가운데 동이족은 동쪽으로 갔고, 나머지 다른 일파들이 남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중 한 일파가 묘족(苗族)이 되었다 한다. 결국 동이족과 묘족은 형제간인 셈이다. 현재 중국 내 묘족의 인구는 800만에 불과하다.
예부터 이른바 하화족이라 부르는 중국인들의 조상들은 밖으로는 북쪽 흉노의 위협을 받아왔고, 동으로는 동이족과 삶의 터전을 놓고 쟁탈전을 벌여왔다. 이 쟁탈전은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뿌리(시조)로 삼아 온 삼황의 하나인 황제헌원(黃帝軒轅)과 치우(蚩尤)라는 동이족의 호전적인 군장과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황제헌원이 이끄는 하화족은 치우가 이끄는 동이족에게 워낙 크게 혼 줄이 났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그 후손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치우와 동이족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품고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두 위협적인 존재가 하나는 흉노요 또 다른 하나는 동이족이다. 중국은 모든 주변 민족을 복속시킬 수 있었으나 중국 역사에서 이 두 민족은 끝내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켰다.
* 국가의 수호신 치우, 붉은 악마로 다시 태어나다
후에 치우천황은 전쟁의 신, 군사의 신으로 숭배 받아 그 자체로 승리를 상징하는 신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도깨비상이라고 잘못 알고 있던 치우천황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비롯한 역대 왕릉 등에 조각되어있던 이유는 그가 바로 국가를 수호하는 군신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역사학자들에게는 외면당하고 있지만 치우 깃발을 앞세우고 월드컵 축구를 응원하는 우리 젊은이들이 대견할 뿐이다.
('붉은 악마'의 공식 깃발, 치우)
월드컵 당시의 붉은 악마에 전율을 느꼈다는 시인 김지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치우'는 4천 5백 년 전에 살아 있었던 고조선 자오지(慈烏支)천황으로 중국 사람들이 제일 겁내는 '싸움과 전쟁의 신'이다. 당시 중국의 임금인 황제(黃帝)와의 47회에 걸친 전쟁에서 47회를 모두 승리함으로써 중국인들을 압도해 버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 47회에 걸친 고조선과 중국의 전쟁은 당시 새롭게 시작된 농업정착 문명만을 고집하는 중국의 황제와 유목 문명과 농업정착 문명의 공존, 공영으로 현실을 통합하려 했던 고대 한국의 치우천황과의 가치관과 체제의 싸움이었다."
* 동이족,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다
(복희팔궤도)
중국 역사의 양대 지류는 동이족과 한족이다. 한족(漢族)의 시조는 황제헌원이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다.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을 다스렸던 삼황오제 중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태호복희씨가 바로 동이족이다. 중국인 스스로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동이족으로 기록되어 있는 태호복희는 음양오행설과 태극사상으로 대표되는 역철학의 창시자이자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중국 고사변에도 “중국민족의 조상은 바로 동이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족의 발원지는 황하 중류이고 동이족의 발원지는 산동반도와 동북아 일대 그리고 한반도이다.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연 것은 동이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