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특집 │ 고성만
늙은 여자 면도사 외 2편
고성만
뚱뚱한
자루를 연상시키지만
절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그녀는
이발소 의자에 손님을 뉘어놓은 후
칼을 들고 다가온다 나는 가끔
살살 모공 어루만지며 터럭을 깎는
그녀의 섬세한 손길에서
어머니를 느낀다
밥솥 안 뜨겁게 달궈진 수건으로
얼굴 덮인 상태로 둥둥
바람에 나뭇잎 흘러가듯 그렇게
강변 마을에 도착했는데
커다란 가죽부대 같은 몸 어디쯤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것인가
조리 잘된 음식 냄새 또는
숙성된 누룩 비슷한 체취를 맡으며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아무리
잠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해도
그녀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나의 감각은 파르르
쑤욱 들어가는 저수지의 찌처럼
절정을 인내하지 못하고
허우적, 허공에
허우적거린다
빈혈
담장 위의 넝쿨장미가 붉게 탄다
오랜 가뭄 든 오월 목이 긴 네가 꽃 장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머리채를 휘어 잡히지 않도록 조심! 누군가 뒷덜미를 노릴 지 혹시 아는가
나 어릴 적 보리를 베어내는데 도망가지 못 하는 까투리와 알을 팔아 새 운동화를 사려던 어머니 장에 가셨다가 결국 못 팔고 돌아오면서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는 이야기
하얗게 햇볕 마르는 오후
낡은 필통 속 몽당연필 딸랑거리듯 동전 몇 개 짤랑거리면서 귀가하는 길 담장에서 날린 꽃잎이 혓바닥처럼 깔릴 때 피를 보내주세요 뱀파이어같이 흔들리는 가시
하늘은 구름이 부족해 비를 내린다
마른장마
푸른 잉크 번지는 하늘
사발로 소주를 따라 마신 후 통마늘 안주 까 잡수곤 주막에 나서 비는 오지 않고 잔뜩 흐린 저녁 어스름 바락바락 악쓰는 소리 들리면 니 애비다 나가봐라 할머니의 재촉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데 낯모르는 사내가 아버지의 머리를 바닥에 짓찧으면서 퍼붓던 욕, 재취자식 이 후랴들놈아!
모로 처박혀서 다가오지 말라고 손사래 치는 아버지를 볼 때 차라리 내겐 오랑캐의 피가 흘렀다
나날이 바싹 여위어 결코 달콤하지 않은 삶의 쓸개를 핥고 점점 뜨거워지는 불 바퀴 속 번제의 시간을 준비하는 것인가 나도 누군가와 드잡이를 하다가 목줄 잡힌 채 지긋 깨문 이빨 사이 바람이 새듯 나직하게 씹어뱉고 싶은 말, 늬기미씨벌!
그런 날 고구려 여자 화희와 한나라 여자 치희*가 머리카락 휘어잡은 싸움 한판처럼 더욱 진하게 피워 올리는 치자 향기
하늘의 깊이를 재어보았다
*고구려 유리왕은 화희와 치희를 얻었는데 두 여자는 서로 쟁투하여, 치희는 부끄러워하면서 원한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쓴 것과 쓰지 못한 것들
■오월의 기억
오월이다. 꽉 쥐어짜면 주르륵 푸른 물이 흐를 것 같다. 초록색 펜과 종이를 들고 나가 직접 그리기로 한다. 종이 가득 산을 그린 다음 멋지게 휘어져 돌아가는 강을 그린다. 먼저 피었던 하얀 꽃잎 날리던 강은 어느새 산을 닮아간다.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마을 위 소나무 두어 그루 운치 있게 휘어진 황토 언덕 너머 보리밭 길. 개똥지빠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가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그곳.
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실 것이다. 잔칫날 입으시던 옥색 치마, 고운 저고리 차림으로 그곳 언덕에 앉아 나를 부르신다. 나는 보리피리를 분다. 필닐리리. 따라간다. 아아, 잡을 수 없다.
어머니는 알고 계셨다. 모성애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모성애뿐이라는 것을. 갑자기 달아오른 대지에 보리베기를 하던 날, 잘 벼린 낫으로 싹둑 잘라 던진 뱀의 모가지가 꿈틀거릴 때, 벗어나려 할수록 징글징글 돋아나던 가난의 무늬, 횟배 앓던 새끼들 때문에, 한 푼이 새로운 어머니의 눈에 비친 까투리를 외면하지 못한다. 알 품은 까투리는 날아가려다 주저앉고, 제발 그냥 가달라는 애원처럼 까맣게 굴리는 눈.
“까투리야, 미안하다. 우리 새끼 운동화를 사주어야 한단다.”
어미와 알들을 보자기에 싼다. 질끈 묶으며 우는 어머니. 까투리는 조용하다. 뚝뚝 푸른 물 떨어뜨리는 산.
읍내 장날, 결국 팔지 못하고 “내가 죽일 년이지.” 울먹이는 어머니.
날린다. 까투리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알을 들고 들어온 어머니, 얼룩무늬 알을 까서 먹인 나, 도시로 전학을 간다. 혼자 하는 자취·하숙, 주인집 조카가 되기로 한 오월 어느 밤 엠비시MBC 방송국이 불타고, 신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터미널 근처에서 새까맣게 탄 시체를 싣고 시내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삐라처럼 날아다니는 유인물, 집어 든다. ‘투사회보’, 어디선가 우릴 이끄는 사람들이 있다! 깜짝 놀란다. 여고생의 젖가슴을 도려냈다, 임산부의 태아를 꺼내버렸다! 갑자기 해방되는 광주. 버스를 두들기며 시내를 도는 사람들을 따라 도청으로 구경을 나간다. 질끈 태극기 머리띠를 둘러맨 청년이 묻는다.
“몇 학년?”
“고 2요.”
“총 받을래?”
“아니요.”
오전 10시 도청 앞, 공수부대는 앉아있다. 별일 없어 심심한 12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커다란 폭죽 터지는 소리. 탕탕탕 펑펑펑……. 무서워서 구경하러 가지 못한다. 뒤쫓아온 청년, 헐레벌떡 외친다.
“니이미씨벌놈들이, 사람들을 허벌라게 죽여브렀어야.”
가슴이 뛴다. 지금은 어떤 세상인가. 아무 것도 무섭지 않다. 다음 날 또 문짝이 떨어져나간 트럭을 타고 시내구경을 간다. 도청 앞 상무관으로 사람들이 들어간다. 나도 따라들어 간다. 백 몇십 개의 관이 죽 늘어선 풍경, 한 여학생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18세, 춘태여상 3학년 금희, 꽃잎 같은 교복이 예쁘다.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소리내지 않고 우는 모습이 들어온다. 예닐곱 살 정도 되는 소년이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의 사진을 안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비닐로 덮인 관들에서 새어나온 텁텁한 공기가 허파로 파고든다. 메아리치는 울음소리, 건물이 커다란 공명통이다.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운다. 왜 우는가.
서구 월산동 목포로 빠지는 길목 보초를 서던 청년 둘이 집으로 들어온다.
“아주머니, 먹을 것 좀 주세요.”
“아이구메, 몇 살이랴? 을메나 배가 고팠으면…….”
한 상을 맛있게 먹은 청년 중 하나가 화장실로 들어간다. 꽝, 귀를 찢는 총소리.
“오발이었어요!”
상기되어 뛰어나오는 청년의 앳된 얼굴. 조심하라고 타이르는 주인집 아저씨. 시민군 서넛 머리맡에 돌아다니는 장면을 끝으로 잠이 드는 나. 불길한 밤이다. 아스라이 마이크 소리 들린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간신히 눈 뜬 새벽 건물 옥상에 아무도 없다.
유난히 초라한 옷차림으로 사색이 다되어 광주까지 찾아오신 어머니. 차가 끊긴 시내를 송정리부터 걸어서, 와락 내 손을 부여잡으며 우시는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창피하던지. 매정스럽게 손을 뿌리치며 중얼거린다.
“계속 울믄 나도 죽어불라요이.”
축제의 날은 너무 짧았다. 그때 그 앳된 청년은 지금 살아있을까 궁금한 나날 동안 귓전을 맴도는 오월의 노래, 부른다. 목이 멘다.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처자식 사흘 굶으면 담 넘지 않는 사람 없다고 했던가.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모른다고 했던가. 물론 나도 잘 모른다. 일 나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면서 쪼르륵거리는 위장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고, 군대 갔을 때 훈련소에서 그 강렬하던 허기를 기억할 뿐. 위장은 온갖 맛있는 음식의 맛을 저장하고 있다. 여자들은 손으로 남편과 자식들을 길들이는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물론 남자들 중에 요리 잘하는 사람도 똑같은 특권을 누리겠지만.
초여름의 해는 길어서 어린 벼가 자라고, 고추꽃이 핀다. 종일 일을 해도 바쁘기만한 하루, 푸른 그늘이 드리워진다. 잎이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부럽다. 무언가를 따르고 나누어 먹는 모습은 천국의 모서리를 본 것 같다. 아직 유월이 다 가지 않았는데 벌써 여름이 온 것처럼 뜨거운 날씨, 초여름 먹을 것은 대개 풋것이다. 완두콩이 그렇고 감자가 그렇고 앵두, 보리똥, 첫물 매실이 그렇다. 새봄의 가느다란 햇살을 모아 속살 찌워온 새것의 순결함이란.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한낮, 배가 고프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는 개구리 소리 가득하고, 연록의 비단처럼 물이끼 깔린 들판의 끝 가물가물거리는 불빛을 따라 걷노라면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나이가 들면서 정말 먹고 싶은 것은 모두 어릴 적 고향에서 먹어본 것들이다. 꽃게장, 장어구이, 갈치조림…….
이미 가버린 봄을 그리워하는 것은 다가올 여름이 두렵기 때문이다. 붉게 피었던 넝쿨장미의 꽃잎이 지면서 찾아오는 여름은 끊임없는 인내를 요구한다. 머리가 벗겨질 것처럼 뜨거운 햇살과 삐질삐질 솟아나는 땀, 어떤 사람은 정열을 발산하기 좋은 계절이라 하지만 나는 여름이 싫다. 땡볕 속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의 머리 위로 해바라기가 피어난다.
나를 맛있는 손으로 길들이셨던 어머니는 세상에 계시지 않는데, 입맛은 남아 시장을 뱅뱅 돌면서 그 때 먹었던 음식을 찾는 나의 눈에 서글픔이 가득하다. 모기, 파리, 옥수수, 수박의 계절, 여름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나는 하얗게 질린다. 그러나 나는 비 오는 날 설설 껍질이 벗겨지는 찐 감자가 먹고 싶고, 햇빛 눈부신 날 시면서도 달콤한 자두가 먹고 싶고, 저녁 밥상에서 풋풋하며 고소한 콩이 먹고 싶다. 한없는 허기에 시달린다. 위장은 이성으로 통제가 안 된다.
이래저래 배가 고프다.
고성만 / 1963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가 있고 현재 국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