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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3)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강은 드디어 바다가 되어 하늘과 만나게 되나니!
☆ [종주순례(연 4일째)] * 제5구간 - ③ (퇴계묘소→ 퇴계종택) ☆
▶ 2020년 08월 17일 (월요일)
* [ 수졸당고택(守拙堂宗宅)] — 퇴계의 후손 수졸당의 고택, 그리고 건진국수
☆… 원천마을 이육사문학관 앞을 지나 아스팔트 도로의 고개를 넘었다. 다리가 무겁고 아프다. 산자락 고개를 넘으면 하계마을이다. 고개 너머 도로의 오른쪽에 ‘수졸당고택’이 있다. … 수졸당(守拙堂)은 400여년 된 고택으로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의 장자, 수졸당 이기(李技, 1591~1654)의 호를 따서 지은 종택이다.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이곳으로 옮겼다.
이곳 수졸당에는 윤은숙 종부가 있다. 수졸당의 대표음식은 ‘건진국수’인데, 종부는 50년 넘게 건진국수를 만들어 왔다. 그 이전에도 건진국수는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가문의 시제상에 오르는 대표적인 내림음식이다. 음력 유두절에 지내는 유두차사 때는 밥 대신 건진국수를 올린다고 한다. 안동을 대표하는 음식인, 이 건진국수는 KBS 다큐멘터리 '누들로드(Noodle Road)'를 통해 온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오늘은 인적이 없이 정적만 흐른다.
수졸당종택
* [퇴계 선생의 묘소] — 건지산 산줄기의 끝자락, 수졸당 뒷산
☆… ‘퇴계 선생의 묘소(墓所)’는 수졸당 바로 뒷산에 있다. 건지산 산줄기기가 길게 내려온 산맥의 끝에 위치해 있다. 토계천과 낙동강 사이에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끝, 정기가 머문 곳이다. 묘소는 큰길 들머리에서 150m 가파른 계단의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산길 중턱에 묘가 하나 있다. 퇴계 선생의 맏며느리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묘소이다. 선생 묘소 아래 며느리의 묘가 있다. 사연이 있다.
퇴계 선생의 며느님, 봉화 금씨 묘소
* [며느리 봉화 금씨의 묘소] —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모시는 며느리 … 이야기
☆…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퇴계 선생의 맏아들 이준의 아내이다. … 퇴계 선생이 맏며느리를 맞을 때 상객(上客)으로 사돈댁에 갔는데, 사돈댁 집안사람들로부터 미천한 가문이라며 심한 홀대를 받았다. 당시 봉화 금씨 집안은 5대에 걸쳐 벼슬을 한, 기세가 등등한 집안이었다. 퇴계 선생이 맏아들의 혼례를 끝내고 사돈댁을 떠나자, 봉화 금씨 일가친척들이 몰려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가문의 규수는 어느 명문가에라도 시집을 보낼 수 있는데, 하필이면 진성 이씨 같은 한미한 집안에 시집을 보낸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이 집안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을 더럽힌 셈이오.” 그러면서 퇴계가 앉았던 대청마루를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밀어버렸다고 한다.
후에 그 이야기가 퇴계 집안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모욕감을 느낀 퇴계 문중에서 들고 일어나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며 야단이었다. 그때 퇴계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 “사돈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가문의 명예는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도, 남들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도 예를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형편없는 가문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며느리를 맞았으니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새 며느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니 그만두시지요.”
퇴계는 사돈댁의 괄시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새로 맞이한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금씨 며느리는 시아버님의 넓은 도량과 덕에 크게 감동하여 한평생 높이 받들어 모시다가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 시아버님 묘소 아래에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며느리 금씨의 묘는 지금도 이곳 퇴계 선생의 묘소 아래에 묻혀있다. 죽어서도 며느리의 극진한 부양을 받는 자애로운 시아버지 퇴계선생의 인품이 그려진다.
이처럼 사돈댁의 괄시를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아껴주시는 시아버지의 인품에 감복한 봉화 금씨는 내조의 덕을 쌓고 지극한 효행으로 한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했다. 훗날 퇴계 선생의 비문은 당시 선성삼필(宣城三畢)로 이름 높았던 봉화 금씨 집안의 금보(琴輔, 퇴계 선생의 백형 잠(潛)의 손녀사위)가 쓰는 등 두 가문의 정리(情理)는 그 후 더욱 돈독해졌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사돈인 훈도 금재(琴梓)의 두 아들도 퇴계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 [퇴계 선생의 인품과 죽음] — 장례와 묘소 조성에 관한 이야기, 기대승의 묘갈명
☆… ‘퇴계 선생의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다. 건지산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 오른쪽에서 토계천이 내려오는 하계마을의 뒷산이다. (퇴계종택은 상계에 있다) 묘소의 주위는 장대한 거송(巨松)들이 선생의 유택을 보위하고 있었다.
퇴계선생 묘소
선생은 생전에 소박함과 검소함을 중시하여 자신이 죽으면 비석도 놓지 말라는 말씀을 남겼다. 퇴계 선생은 별세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 4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카 영(寗)[온계 형님의 차자]을 불러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나의 유언이라 칭하고 사양하라.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앞면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세계와 행실을 간략히 서술하여 가례에 맞게 하라. … 이 일을 남에게 부탁하면 내가 아는 기고봉(奇高峰) 같은 이는 장황한 내용을 기록하여 세상에 비웃음을 살 것이니 난고(亂稿) 가운데서 내가 초(草)를 잡아둔 자명(自銘)을 쓰도록 하라.”
당시 퇴계선생은 종1품 정승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존하고, 예조에서 도감(都監)을 설치해 예(禮)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그럼에도 유언을 남겨 이를 굳이 사양한 것이다. 그리고 단지 4언 24구의 91자 자명(自銘)으로 자신의 삶을 압축·정리했다.
☞ (퇴계종택 바깥마당에 선생의 ‘自銘’을 새긴 碑가 있다)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그 유지(遺志)에 따라 석물(石物) 장식을 사양하였으나, 나라에서 최소한의 격식으로 만든 석물만 권하여 설치하였다. 비석도 선조 임금으로부터 추증(追贈)된 영의정 등 관직을 넣지 않고 생전의 유언대로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쓰여 있다. ‘도산에 물러나 만년에 은둔한 진성 이공의 묘’라는 뜻이다. 퇴계의 비석은 봉분의 정면에 있지 않고 왼쪽 옆에 비껴서 측면을 향해 있다, 비석 뒤쪽에 기대승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황의 묘비명은 처음에 대제학 박순이 지었다. 그런데 그 사연이 정확하지 못하여, 결국 고봉 기대승이 비문을 다시 쓰게 된다.
* [박순(朴淳)] ☞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朴淳)은 1568년에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황은 제학이 되었다. 이황을 스승처럼 모시는 박순이 진언을 했다. 학덕이 높은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리를 바꾸어 줄 것을 청했다. 졸지에 대제학의 직을 받은 이황은 이를 끝까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박순은 후대까지 겸양의 극치로 남아 있다. (이익(李瀷)의『성호사설』)
*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 이황은 1569년(선조 2년) 3월4일 밤에 선조를 면담하고 사직을 허락 받았다. 선조는 마지못하여 퇴계의 낙향을 허락하면서 조정 신하 중에서 학문하는 인재 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했다. 퇴계는 처음에는 추천을 하지 않았다. 선조가 세 번까지 묻자 고봉 기대승을 추천하였다. 기대승(奇大升)이 누구인가? 퇴계보다 26살 아래인 기대승은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간 퇴계와 격렬하면서도 심오한 ‘사단칠정논변’을 벌였던, 학문적으로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다. 퇴계는 학문적으로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젊은 선비를 나라의 인재로 천거했다. 고봉은 죽을 때까지 퇴계 선생의 학덕을 흠숭했다. 다음은 기대승이 쓴 퇴계 선생 묘갈명의 일부분이다.
“… 아! 슬프다. …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 으뜸임은 당세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후세의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장차 반드시 감발(感發)되고 묵계(默契)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명문(銘文, 퇴계의 ‘自銘’) 중에 서술하신 것은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활(迂闊)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는 선생의 장려를 받아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한데, (선생이 별세하시니), 태산이 무너진 듯 대들보가 꺾인 듯하여 의탁하여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
嗚呼! 先生盛德大業卓冠 吾東者當世之人亦旣知之矣後之學者 觀於先生所論著 將必有感發默契焉者 而銘中所敍尤足以想見其微意也 迂愚無狀蒙先生奬厲成就 不啻如父母天地之恩 而山頹樑壞無所依歸 —* 退溪先生墓碣銘 退溪先生 自銘 竝書 奇大升 撰 [原文] 退溪先生年譜 卷之三
[묘비 뒷면] ― 고봉 기대승이 지었다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928번 도로] — 다시 만난 탈탈탈탈 경운기 아저씨
☆… 선생의 묘소에서 내려와 다시 928번 도로에 들어섰다. 작열하는 태양의 화살이 온 몸에 쏟아졌다. 따가운 햇살이 얼굴을 찌르지만 바람결은 서늘하다. 전화가 왔다. 아침에 통화했던 이봉원 님이 퇴계 종택에 거의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토계천을 따라 올라가는 도로이다. 도로 주변에는 과수원과 포도밭이 많았다. 청포도! 특별히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청포도가 알알이 영글어가고 있다. 토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 쪽 산 밑에는 ‘계상서당’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퇴계종택’이 있다.
퇴계묘소(하계)에서 퇴계종택(상계)으로 가는 928도로
계상서당
퇴계종택
☆… 이봉원 님이 예의 경운기를 몰고 도착해 있었다. 반가웠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나의 스틱만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었다. 목이 마르다 하니 물병을 건네주며 고생하신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잠시 그늘에서 숨을 고른 후, 나는 ‘퇴계종택’으로 들어갔다. 내 마음으로 흠숭하는 퇴계 선생 고택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종택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봉원 님과는 산 너머 도산서원 입구의 주차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종택에서 도산의 산길로 넘어가고 이봉원 님은 경운기를 몰고 큰 도로를 돌아서 오는 것이다. 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내심 도산서원 입구에서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인사를 하고 종택으로 들어갔다.
퇴계종택(退溪宗宅)
* [퇴계종택] ― 13대 후손 하정공(霞汀公)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
☞ ‘퇴계종택’은 내 공경해 마지않는 퇴계 이황 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택이다. 원래의 가옥은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의 가옥은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霞汀公)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의 크기는 총 34칸으로 ‘ㅁ’자형이며, 전체 면적은 2,119㎡이다. 종택 오른쪽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별채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다. 추월한수(秋月寒水)는 “가을 달이 찬 강물에 비치듯이 한 점 사욕이 없는 깨끗한 성현의 마음”에 비유한다. 소슬대문은 ‘열녀정려문’이다. 퇴계 선생의 손자 이안도의 아내인 귄씨 부인에게 내린 정려이다. 권씨 부인은 효심이 지극하고 집안의 모든 일에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퇴계 선생의 저작물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퇴계종택은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1982년12월1일)로 지정되어 있다.
[종택의 대문] ― 열녀문
퇴계 선생 구택
[열녀 통덕랑행사온서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 권씨를 기리는 집] ― '이안도' 퇴계선생 손자
사랑채
[별채] ― '秋月寒水亭'
* [퇴계종택, 뜻밖에 만난 이치억 박사] ― 퇴계 선생의 음복을 받다!
☆… 낙동강 물길 따라 홀로 걸어온 길 … 청량산에서 단천교까지 험난한 물길을 따라 내려와, 시인 이육사의 원천마을을 지나, 퇴계선생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드디어 퇴계종택에 도착한 것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그런데 아, 누구인가, 종택에는 퇴계 선생의 차종손 이치억 박사가 와 있는 게 아닌가. 이 박사는 퇴계 선생의 17세손으로 공주에 있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8·15 연휴를 맞아 귀향해 있는 것이었다. 우연이지만, 약속이나 한 듯이 절묘한 만남이었다.
이치억 박사는 이기동 박사가 주도하고 있는 우리 동원문화원(同人文化院)에서 강의도 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인문화원의 운영위원인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낙동강 종주 여정’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이 박사는 반색을 하며, 퇴계 선생을 찾아온 목마른 길손에게 수정처럼 맑고 차가운 냉수와 시원한 오미자차까지 대접해 주었다. ‘아, 고매한 선생의 음복(飮福)이로구나!’ … 속으로 뭉클 감동이 솟았다! 잠시 동안이지만 안부와 낙동강 순례 이야기를 나누며 환담했다.
☆… 그리고 안채의 동쪽에 있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뜰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치억 박사는 작년(2019) 9월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퇴계에게 묻는 삶의 철학』을 기념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이치억 박사를 통해 500여녀 전의 선생을 만나 뵈었다. 선생은 외로운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주셨다. 그 동안 몇 차례 방문했지만, 선생의 숨결을 직접 느끼게 된 오늘은 특별히 감회가 깊었다.
이치억 박사는 2013년 2월 성균관대학교에서 이기동 교수의 지도를 받아 「퇴계철학의 주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퇴계철학 연구의 전문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박사는 퇴계 선생의 17대 차종손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학덕을 지닌 퇴계 선생의 인품과 가풍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이 박사의 부친인 16대 종손 이근필 옹은 90 가까운 연세에도 수많은 내방객을 기꺼이 응대하시며 '무릎 꿇는 삶'으로써 '경(敬)'을 몸소 실천하고 계신다. …
☆… 오늘 나에게 선물로 준 『퇴계에게 묻는 삶의 철학』(2019.9., 영남퇴계학연구원)은 일반 사람들이 어렵게만 생각하는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아주 쉬운 문장으로 최대한 압축적으로 요약한 저서이다. 퇴계라는 인물과 삶, 그리고 이기론과 사단칠정론 등을 현대 사회의 문제와 연계하여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 퇴계의 사상과 철학은, ‘조선시대 유학’이라는 어려운 철학의 범주로 생각하고, 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성인은 물론 청소년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쉬운 문장으로 풀어써서, 퇴계의 사상을 오늘날 우리의 삶과 현실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고귀한 가르침을 제공해 주고 있다. 퇴계 선생의 사상과 철학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마음의 길잡이가 되고, 나아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의미에서, 이 책의 의의는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 [퇴계종택 바깥마당] ― 「退溪」와 「自銘」을 새긴 자연석
☆… 퇴계종택 앞 바깥마당의 가장자리에는, 퇴계 선생이 이곳[토계]에 거처를 정하시고 쓴 시「退溪」와 돌아가시기 전 남긴 「自銘」이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원문은 모두 한시이다. 여기에 풀어써 본다. 이 두 편의 시는 선생의 삶과 철학을 시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退溪 (퇴계)
身退安愚分 몸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 편안하고
學退憂暮境 학문이 퇴보하니 늘그막이 걱정스럽네.
溪上始定居 토계의 냇가에 거처를 정하고
臨流日有省 시냇물 굽어보며 날마다 반성하노라.
‘退溪’(퇴계)라는 호는 이렇게 선생이 살던 고향의 시냇물에 온 것이다. 원래의 시내의 이름은 토계(兎溪)였다.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기를 마음먹고 고향인 토계의 시냇가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그 소회를 읊으면서 이[退溪]를 자호로 삼은 것이다. 그로 하여 시내의 이름도 ‘退溪(퇴계)’가 되었다. 이 시는 선생의 46세 때 쓴 시이지만 이러한 성향은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15세 때 지었다는 ‘石蟹’(석해, 가재)라는 시가 있다. 곁들어 소개해 본다.
負石穿沙自有家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고
前行却走足偏多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발도 많구나.
生涯一掬山泉裏 일평생 한 줌 샘물 속에 족하니
不問江湖水幾何 강호의 물이 그 얼마인지 묻지를 않겠노라.
自銘(자명)
生而大癡 壯而多疾 나면서는 크게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았네.
中何耆學 晩何叨爵 중년에는 어쩌다 학문을 했고 만년에는 어쩌다 벼슬까지 받았던가?
學求猶邈 爵辭愈嬰 학문은 구할수록 아득한데도 벼슬은 사양해도 더욱 주어졌으니
進行之跲 退藏之貞 나아가서 잘못하였으니 물러나서 곧게 하나니
深慙國恩 亶畏聖言 나라의 은혜에 심히 부끄럽고 성현 말씀 더욱 두렵도다.
有山嶷嶷 有水源源 산은 높고 높이 솟아있고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네.
婆娑初服 脫略衆訕 관복을 벗어버리니 온갖 비방도 다 벗었네.
我懷伊阻 我佩誰玩 내 생각 막혔으니 누가 내 뜻 알아주리.
我思古人 實獲我心 옛 사람을 생각하니 진실로 내 마음을 알겠거늘
寧知來世 不獲今兮 어찌 내세를 알겠는가, 지금 세상도 거두지 못하는데.
憂中有樂 樂中有憂 근심 속에 낙(樂)이 있고 낙(樂) 가운데 근심 있네.
乘化歸盡 復何求兮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니 또 바랄 것이 무엇이랴.
퇴계 선생의 이 ‘自銘’(자명)은 퇴계선생 묘비에도 적혀 있다. 묘갈명의 앞부분에 선생의 자명을 적고 그 다음에 기대승이 쓴 글이 병기되어 있다. —* 退溪先生墓碣銘 退溪先生 自銘 竝書 奇大升 撰
* [퇴계 이황의 생애와 저술] — 1974년 이유태(李惟台) 화백이 그린 이황(李滉) 표준영정
☆…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연산군 7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溫溪; 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1여 중 막내로 태어나, 선조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격한 교훈을 받고 자랐다. 그는 1528년(중종 23) 경상도 향시(진사)에 급제하였고 32세 때(1533년 중종28)에 성균관에 들어가 그 이듬해에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승정원부정자(承政院副正字)에 취임하였다. 그 후 그는 10여 년 동안 여러 직책을 맡았다.
43세에서 53세까지 그는 조정에서 내리는 여러 직책을 때로는 사양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직을 자청하기도 하였다. 53세 때부터는 조정에서 예조판서 등 고위직을 몇 차례 제수하였지만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학문에만 전심했다. 그의 나이 59세 때 33세의 기대승과 8년에 걸친 사단칠정 논쟁에서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 내지 리동설(理動說)을 주장하여 확립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주자(朱子)를 추종하면서도 독자적인 성리학(性理學)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의 중요한 저서로서는「논사단칠정서변(論四端七情書辨)」,「천명도설(天命圖說)」및 후서,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게몽전의(啓蒙傳疑)」,「자성록(自省錄)」,「심경석의(心經釋疑)」,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성학십도(聖學十圖)」등이 있다.
퇴계의 이들 저서는 우리나라에만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임란이후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일본 퇴계학파(退溪學派)가 형성되었고 특히 그의 「자성록」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등은 일본의 유학자들 간에 많이 읽혀졌다. 그리고 그들은 명치유신 때 저들 교육이념의 기본정신을 형성하기 위하여 그들이 교육칙어를 만들 때 퇴계의 「성학십도」를 원형으로 삼기도 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이황은 명종10년(1555) 고향으로 돌아가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거기에서 학문과 사색의 생활을 함으로써 많은 저서를 남겼고 많은 제자를 길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성학십도」나 ‘사직소’에는 그의 정통유가의 경세사상을 드러나 있다. 그의 실천사상의 핵심인 ‘경(敬)’이었다. 「성학십도」를 통하여 성군정치에 반영하려 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도산서당 뒤의 산록에 상덕사(尙德司)와 전교당(典敎堂)을 지어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황의 성학이념과 보수적 경세사상」 (한국사상사, 2002.02.28., 이진표)
* [퇴계 이황의 핵심철학] — [主理論]▶ 이(理)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진리이다!
이황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서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것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법칙인 ‘리(理)’를 ‘기(氣)’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황의 제자인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은 주리론을 계승해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한 영남학파는 중부 지방의 기호학파와 경쟁하며 주리론(主理論)을 더욱 발전시켰다. 기호학파는 이황과 함께 대학자로 일컬어지는 이이(李珥)의 주기론(主氣論)을 계승한 사람들이다.
* [퇴계 선생의 일상생활과 철학]
☆… 선생은 21세에 부인 허씨(許氏)를 맞아서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였다. 부인 사랑이 지극한 분이셨다. … 그리고 혹자가 묻기를 “형제간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지적해 주어도 됩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시기를 “우선 나의 성의(誠意)를 다하여 상대방을 감동하도록 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서로간의 의리(義理)를 해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만일 서로 간에 성의(誠意)로 부합함이 없이 대뜸 직설적인 말로 나무란다면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고 하셨다.
여기서 인용한 것은 일상의 수많은 상황과 관계 중에서 제자와 부인 그리고 형제에 대한 퇴계의 태도와 처신을 말한 것이지만, 그 외에도 어버이, 친척, 이웃은 물론이고 집안의 노복이나 아랫사람 등에 관한 내용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다양한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보여준 퇴계의 그러한 마음과 몸을 쓰는 태도에서 일관된 것은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만나는 대상에 대해 베푸는 인애(仁愛)의 마음이다. 그러한 인애(仁愛)를 바탕으로 한 퇴계의 태도는 그와 만나는 모든 이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었을 것이고, 그러한 베풂을 받은 상대의 마음은 다시 퇴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몸짓으로 돌아와 퇴계를 행복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 실현의 핵심적인 열쇠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사회 전체에서도 적용이 가능하고 실효성 있는 결과를 가져올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탈것과 먹는 음식, 입는 옷, 자는 집 등 생활의 조건과 환경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사람 관계에서 느끼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과 그러한 감정의 반응을 가져오게 하는 근본적인 이치(理致)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 [고즈넉한 도산의 산길] ― 그리고「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시비(詩碑)’
☆… ‘퇴계종택’을 나오면, 그 주위에 ‘퇴계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001년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공원이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소나무와 잔디로 잘 조성된 녹지에, 퇴계의 시(詩)들을 자연석에 새겨 곳곳에 세워놓았다. 즐비한 시비 사이의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김병일 원장)이 있다. 전통적인 한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자인한 날렵하고 웅장한 2층 건물이다. 그 뒤쪽 위에도 또 큰 건물이 있다.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강의하고 수련시키는 곳이다.
‘선비문화수련원’ 앞을 지나 도산서원 입구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도산(陶山)’으로 올라갔다. 도산서원은 이 도산의 남쪽 품안에 있다. 도산서원의 앞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도산’은 지역이나 행정 구역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이 산을 가리킨다. 울창한 숲속에 널찍한 길이 나 있다. 도산서원 입구의 주차장으로 가는 산길이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한적하고 고즈넉한 숲길이다. 생전 퇴계 선생은 낙동강 강안의 길을 따라 집(종택)과 도산서당을 왕래하셨다. 지금은 원래의 길이 안동댐 담수로 인해 수몰되어 이 산길이 만들어졌다. 지금 사람들은 이 길을 잘 모른다. 오늘도 산길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주로 차를 이용하여 퇴계종택에서 우회하는 도로를 이용하여 서원 입구 주차장으로 오기 때문이다.
☆… 나는 오늘, 혼자서 조용히 도산을 넘어 큰 길로 나왔다. 서원 입구의 주차장이 저만큼 내려다보이는 지점이다. 길 건너편 잔디밭에「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시비(詩碑)’가 있다. 두 개의 자연석에 ‘전6곡’, ‘후6곡’ 둘로 나누어 새겨 놓았다. 제목 그대로 12수의 연시조인데, 대부분 학문 정진과 인격 수양의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대표적인 시 두 수를 소개한다.
고인(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몯 뵈
고인(古人)을 몯 봐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제9수>
여기에서 고인은 학문과 덕이 높은 성현을 말한다. 성현들의 학문과 가르침을 통해 그분들이 가던 길[녀던 길], 즉 학문 수양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를 노래한 것이다.
청산(靑山)은 엇뎨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뎨하야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티지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 호리라 ―<제11수>
변함없는 청산의 모습(불변성)과 영원한 유수의 모습(영원성)을 예찬하면서, 변치 않는, 늘 푸른 산처럼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겠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 [고마운 경운기 아저씨] ― 잠시나마 외로운 나그네의 벗이 되어 준 …
☆… 맑은 햇살이 내리는 시비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경운기 아저씨 이봉원 님이 환하게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 잠시나마 외로운 나그네의 벗이 되어 준 분이다.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매점의 식당에서 콩국수와 막걸리 한 병을 주문하여 함께 식사를 했다. 매점 뒤쪽의 숲속, 야외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진성 이 씨 퇴계 선생의 집안, 이봉원 님은 도산서원과 지역의 문화전통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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