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8월 선생은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하면서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조선어 사전 편찬 활동에 참여하여 갔다. 조선어연구회는 한말 학부대신 이재곤의 발의로 1907년 7월 학부 안에 설치되어 1909년 12월까지 활동하였던 국문연구소를 그 연원으로 한다. 국문연구소는 위원장 윤치오와 위원 주시경, 어윤적, 이능화, 권보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주시경의 역할이 특히 눈부셨다. 주시경은 한말 국망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권회복을 달성하려 했던 분이었다. 따라서 애당초 조선어의 연구와 그 성과의 보급은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우리나라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어 식민교육이 본격화함에 따라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보급은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1914년 주시경의 급서는 그 의지마저 꺾는 것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와 주시경의 제자들인 장지영, 권덕규, 이병기, 김윤경 등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함으로써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이 연구회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法理)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말과 글의 보급을 통한 민족독립의 달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연구회는 1927년 2월 <한글>이라고 하는 기관지를 창간하여 조선어 연구의 대중적 전파와 보급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사전 편찬 사업은 일찍이 1910년대 초 주시경과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선광문회에서 착수했다가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 때에 와서 다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선생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후 동지들과 더불어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 동참하여 갔다. 이 사업은 1929년 1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새로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이극로와 선생을 비롯한 기존 회원들의 활약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 즉 선생을 비롯한 회원들의 노력으로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조선말이 곧 조선 겨레이다”고 하는 어문 민족주의적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에 기반하여 “조선문화의 쇠퇴와 민족의 낙오는 무엇보다도 조선어문의 불통일에서 기인되었다”고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져 갔다. 그리하여 1929년 10월 각계의 저명 인사 108명은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우리말과 글의 정리와 통일은 단순한 어문의 통일만이 아니라 장래 민족의 독립을 기약하는 일이라는 인식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이 위원회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으로 사전 편찬작업은 더욱 활기를 띠어 갔다. 이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 데는 1927년 10월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선생의 [세종과 훈민정음], 그리고 1928년 5월 <별건곤>에 발표한 [세종성대의 문화] 등도 크게 작용하였다. 더구나 “조선 얼굴의 거울, 조선 마음의 거름”을 표방하면서 1928년 선생이 창간한 잡지 <한빛>의 영향도 도움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