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의 물 상태를 시간별로 기록 남겨, 문화유산이자 소중한 자원
» 대청호의 물 상태를 시간별로 기록한 20여 년의 기록 일부. 대청호 뱃사공 박수성씨가 남긴 일지이다.
대청호로 인해 오지가 된 마을이 많다. 1981년 댐이 생기고, 호수에 물이 차오르자 사람들이 떠난 지 벌써 40년이 되어 가니, 대청호가 불혹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옥천군 군북면의 오지마을들은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도 강을 건너다녔으므로 정기선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주민이 줄다 보니, 정기선 대신 마을마다 도선이 운영되고 있다.
» 대청호 섬마을을 운행하는 마을 도선.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 마을은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산간 비포장 임도를 따라 자동차로 30분을 가야 닿는다. 여느 오지 마을도 임도가 포장이 되어 있는데, 비포장도로인 용호리는 진짜 오지다.
» 용호리 마을로 들어가는 비포장 임도.
이 마을은 수려한 산세 사이로 맑게 흐르는 금강이 서대산에서 흘러오는 소옥천과 만나 삼각호 섬을 만들어 냈는데, 그 광경이 가히 절경이다. 한편으로는 천연의 요새 같은 지형이어서 한국전쟁을 비롯한 온갖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했다.
»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의 위성 지도.
마을 앞에서 소옥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옥천을 뱀같이 굽이쳐 흐르게 하는 부소담악이라는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얼마나 경관이 빼어났으면,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이곳을 소금강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옥천 8경 가운데 1경이다.
» 옥천 8경 중 1경인 부소담악.
마을에는 아주 영험하다고 여기는 용호소라는 늪이 있다. 가뭄이 들 때는 옥천 군수까지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기우제를 지내면 당일에 바로 단비가 왔다고 마을 비에 기록하고 있다. 기름진 땅은 보리, 콩, 감자, 담배, 누에에 이르기까지 특산물의 보고였다.
그러나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마을 어귀에 실향민들이 세워둔 비석의 구절구절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평화롭고 알뜰하던 삶의 보금자리를 송두리째 푸른 물에 묻어두고, 1978년 한 많은 타향살이에 들어섰으나 두메산골 강촌 마을 내 고향 그윽한 향기들을 꿈엔들 잊으리오”.
» 용호리 마을비 뒷면.
용호리는 고작 다섯 가구만 남았다. 물론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는 백여 호가 살았던 아주 큰 마을이었다. 지금 다섯 가구도 호수가 생기면서 강 아래에서 위로 올라온 집들이다. 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돈 없는 사람만 고향을 지키는 꼴이다. 그나마 세 가구는 대전에 적을 두고 농사 지으러 왔다 갔다 하는 세컨하우스다.
» 용호리 마을 전경.
다섯 가구 가운데 한 집이 용호리 사공의 집이다. 가구 수가 현저히 줄어도,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도, 사공 일은 박수성 할아버지의 오랜 직업이다. 그가 고향인 부산에서 올라와 공기 좋은 용호리에 정착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부산 외지 사람이 사공을 하니, 마도로스였을까 싶다. 박수성씨는 재일동포로 일본에서 40여년을 살았다. 마흔에 부산 한일무역회사 임원으로 근무할 때, 정년을 공기 좋은 곳에서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솔깃해 인연을 맺은 것이 가두리양식업이었고, 대청호까지 오게 되었다.
1930년 생이니 올해 89살이다. 어르신이 처음 물고기 양식을 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아직 이 분야에 무지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가두리양식이 앞서 있던 일본 서적을 보며, 양식 방법을 익혀나갔다.
당연히 양식업을 잘 할 수밖에 없었다. 충남 부여 송정리 가두리양식장에서 대전 방아실 가두리양식장으로, 또 다시 충북 옥천 용호리 앞 가두리양식장으로 스카우트된 셈이다.
» 대청호 취수탑 인근 수초섬.
대청호 초기에는 상수원 보호구역임에도 가두리양식을 했다. 당시는 물 자원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안 되던 시기였다. 호수를 기반으로 어민이 증가하자, 정부는 이들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빙어 수정란을 부화시켜 방류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매년 하절기 온도가 높아질 때마다 대청호는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청호 인근 지역에서 흘러드는 축산폐수, 생활하수, 공장폐수와 호수의 퇴적물 등이 배출하는 인 성분이 녹조를 일으킨다. 특히 가두리양식장의 물고기 사료나 물고기 배설물 등은 대청호 바닥에 인 농도를 증가 시켰다. 정체수역에서 가두리양식업은 애초에 못하게 관리했어야 했다. 대청호는 태생부터 가두리양식으로 인해 부영양화를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
» 여름철 대청호 녹조.
정부는 1996년부터 수질보전 차원에서 가두리양식이나 낚시 등을 엄격하게 규제하기 시작했고, 저수지나 댐의 가두리양식장이 다 철거되었다. 박씨는 다시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 가려 했으나 지금은 고인이 된 파주 염 씨 회장의 "고향에 가지말고 이곳에 남아 이 땅을 지켜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 비포장이던 마을 길을 면사무소를 찾아다니며 전부 포장하는 등 행정일을 빠르게 처리했으니 마을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997년에 정식으로 용호리에 입적을 했고, 마을 이장 일과 사공 일을 시작했다. 2016년 3월, 20여 년 해온 이장 일을 젊은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귀도 어둡고 육체도 말을 안 들어”라고 하지만, 구순을 앞둔 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모습도 체력도 단단하다. 건강 비결을 물으니, “마음을 비우고 살아서”란다.
» 멀리서 인기척이 나면 옷매무새부터 고치는 박수성씨의 자택.
박씨의 세간은 최소한이며 매우 정갈하다. 빨랫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묶어 매단 옷걸이에서 성격이 자로 잰 듯 반듯함을 알 수 있다.
» 빨랫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매단 옷걸이.
장마철에 대청호로 떠내려 온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일일이 거둬 올려, 쓸만한 것은 손수 생활용품으로 사용하는 데서도 근면 절약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평생 홀몸이다 보니, 마치 선방에서 혼자 도 닦는 스님 같다.
» 버려진 냉장고를 주워 신발장 등 수납공간으로 재활용했다.
재일동포인 그는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아직 편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텔레비전의 일본 방송이 편하다고 했다. 자연환경국민신탁 회원들이 박씨를 방문했을 때였다. 일행 가운데 일본 사가대학교에서 20년을 재직한 이응철 교수가 일본어로 말문을 열었다. 이에 박씨는 만면에 화색을 띄며 귀가 안 들린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왔고, 이 교수는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번역해 해설해 주었다.
» 이응철 교수와 대화하는 박수성씨.
일기장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2013년 9월 14일 (기온 26도)
"아침 6시에 일어나 건강관리를 위하여 유연체조에 전념하다. 선착장을 점검했더니 이상이 없었다“
2018년 7월 1일 (비가 옴)
오전 오후에 선착장에 나가 배를 점검을 하니 이상이 없다. 다시 돌아와 집에서 10분간 휴식을 한 후, 장마 수위가 급격히 내려가기 때문에 다시 선착장으로 가 배를 밑으로 이동시켰다.
오후 4시 앞집에 병렬이 부인이 닭을 삶아서 가져왔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올라오고, 비가 안 오고 가물면 물이 빠지니까, 하루 두 번은 꼭 내려가서 배를 이동시켜야 해요” 하고 박씨는 부연 설명을 했다.
» 달력을 찢어 뒷면을 모아 만든 수첩.
이응철 교수의 번역으로 드러난 박씨의 기록 역사는 참으로 방대했다. 대청호 가두리양식장 시절부터 빠지지 않는 두시간 단위의 20년 기록이 방안에 빽빽이 쌓여 있었다. 노트부터 숫자 달력, 이면지를 절개해 만든 수첩까지 다양했고, 단정한 문단과 문체에 감탄할 지경이었다. 대청호에 이런 모니터링 기록이 또 있을까? 대청호 사공이 20여 년간 기록한 대청호 물 일지는 아마도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다.
함께 간 전재경 박사가 이렇게 설명했다. “생태인류학에서 생애사, 향토사는 인간의 진화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일반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자원을 이용해 어떻게 적응하며 삶을 영위해 왔는지를 개인의 생활사를 중심으로, 또는 자원을 중심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용호리 박수성씨는, 우선 재일동포라는 특이성과 고령이라는 점, 도선 연락선이라고 하는 사라져 가는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 충북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 박수성씨를 방문한 자연환경국민신탁 회원들.
대청호는 한정된 물 자원에 수도꼭지는 늘어가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비점오염원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환경부는 수량과 수질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박씨의 방대한 기록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대청호의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그가 아직 건강할 때, 그 역사를 다시 드러내, 지금 대청호의 위기를 풀어낼 해법을 찾아야 한다.
» 용호리 임도를 따라 걸어 들어와 도선으로 부소담악으로 향하는 방문자들.
“어르신, 배는 얼마나 자주 운행해요?”
“그야 손님이 전화로 연락이 오면 뜨지, 근디 없어….”
어르신이 살아계시는 동안 사공으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좋은 사람들과 자주 용호리를 찾아야겠다.
» 박수성씨가 모는 도선을 탄 방문자들.
글·사진 최수경/ 금강생태문화연구소 ‘숨결’ 소장, 이학박사,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