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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인성 그림 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정인성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JMA 스페이스
2013. 7. 24(수) ▶ 2013. 7. 30(화) Opening 2013. 7. 24(수) 6:00 p.m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인사아트센터 |
전주 서신갤러리
2013. 8. 1(목) ▶ 2013. 8. 10(토) Opening 2013. 08. 01 6:30 p.m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신로 38 새터빌딩 B1 |
In the shade-mercy_240.9×116.8cm_Acrylic on canvas_2011
양순실의 세상을 들여다보다
조 은 영 (원광대학교 교수/미술사)
작가 양순실의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상념에 잠길만한 연배의 사람이면 누구나 알 것이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이는 작가나 평자나 관람자나 마찬가지이다. 양순실의 세상을 바라보자면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만일 열 사람이, 스무 사람이 그네와 똑같은 환경 속에서 똑같은 삶을 살았다 해도 과연 몇 명이나 이와 흡사한 감정을 느끼고 유사한 사연을 하소연할까? 보편성을 거부하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독자적인 세상-이것이 어쩌면 양순실의 세상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일 수 있다.
작가로서 첫 그룹전 이래 20년, 첫 개인전 이후 15년 만에 올해 일곱 번째 개인전에 이른 양순실은 유난히 독특한 감성과 유별난 방식으로 삶을 표현해 왔다. 단적으로 말해서 양순실은 다수의 취향에 자신의 경험을 공명시키거나 타인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보편화하지 않는다. 자신을 널리 알리고 애호받기 위해 대중취향적 사탕발림 따위로 표현방식을 포장하지 않는다. 잘 꾸며놓은 실내에 포스터 거느니 괜찮은 그림 걸겠다며 몰려드는 유한계급 컬렉터들의 기호에 부응하여, 세련된 은유적 화법이나 ‘거실취향’으로 자신의 작품을 꾸밀 줄 아는 ‘주변머리’나 ‘잔머리’와도 거리가 멀다.
In the shade-mercy_116.8×80.3cm_Acrylic on canvas_2012
국내외 미술계 도처에서 요즘같이 인기지상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작가적 소신을 장악하고 있는 세태에 매우 보기 드문, 용기있는 작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작가는 스스로를 “미련하고 고지식하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자신의 일부가 된 “가벼움에 대한 거부감,” “진지함과 고요함”에 대한 집착을 양순실은 자신의 “촌스러움,” “불치병과 같은” 증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수백 년의 예술사를 통해 목격해왔다. 한 문화권 내의 거실 벽에 걸릴 수 있는 작품을 양산하기에 급급했던 무수한 작가들이 결국 일시적 ‘인기’에 편승하다가 제2의 앤디 워홀이 되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전지구적 작가가 될 수 있는 재능도 소모해 버린 채 동네 작가들로 전락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양순실은 이러한 유의 성공과 명성에 대한 고질병과 거리가 있다. 국내보다도 오히려 유럽 등 해외 전시에서 최근 보여준 그에 대한 관심은 국내외의 아방가르드나 대중취향과 무관하게 작업해 온 독자적인 작가정신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양순실은 요즈음 확산되는 ‘느림의 미학’을 오래전부터 추구해온 작가이다. 1998년 첫 개인전 타이틀이 <느린 호흡>이었고, 이듬해 두 번째 개인전은 <들뜨지 말며, 깊게 추락하지도 말고>였다.이어진<깊은 하루>등 전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작가는 결혼,가사,육아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적어도 예닐곱 시간씩을 오랜 시간과 묵상을 요하는 작업에 치열한 성실성으로 진지하고, 고요하고, 느리게 몰두해왔다.
In the shade-mercy_116.7x90.9cm_Acrylic on canvas_2013
캔버스에 아크릴로 정교하게 묘사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은 스토리텔링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상당수가 작가가 뿌리내린 현실과 곤경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이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부단히 갈구하는 작가의 집착 혹은 사투에 가까운 열망을 시사한다. 초기 작업에서 거듭 나타나는 사물 중 통상 행복한 거처이어야 할 집은 출구도 없이 허공에서 부유하거나 대롱거리거나 테이블에 놓여 있어서 탈출구 없는 감옥과 같은 상황을 제시한다. 함께 등장하는 계단과 길은 끝을 알 수 없게 전개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한다. 자가증식적인 나뭇잎, 꽃, 나무와 더불어 기이하게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묘사된 식탁, 옷장, 침대, 소파, 의자, 목마와 새집 등 가구와 사물은 흔히 평온한 가정 및 여성을 연상시키는 소재이지만 여기에서는 결혼과 육아를 거치면서 현실과 이상, 좌절과 희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작가의 자화상적 이미지를 그려낸다.
근작에서는 보다 새로운 소재와 강력한 색채를 통해 이전에 고아한 파스텔톤으로 “장식하고 위장하려했던” 자신의 세계를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작가가 어릴 때부터 줄곧 느껴온 인간관계 및 소통의 어려움과 파장을 직설화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례로 갖가지 모양과 색채의 여성 드레스 혹은 얼굴 없는 마네킹 형상은 결혼식 때 입은 웨딩드레스를 단순화시킨 것으로 익명의 여성 내지 작가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마치 새장, 꽃병, 어항 형상을 닮았으면서 때로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액체를 뿜어내는 이들 드레스는 꽃잎, 나뭇잎, 물고기 비늘 등 형태로 각각 변성(metamorphosis)되면서 아름다운 시절임에도 꽃잎처럼 흩어져 스러지는 자아, 여성이 감내하는 가사와 노동으로 땀 같은 붉은 물방울 혹은 피를 흘리는 자아를 나타낸다.
In the shade-mercy_224.2×162.cm_Acrylic on canvas_2012
꽃과 나뭇잎이 서구 문화권에서 죽음과 인생무상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나 바니타스(Vanitas)의 도상과 맞물리는 맥락에서 사용된 점에서 어쩌면 역설적으로 양순실은 작가로서 동과 서의 ‘소통’에 성공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드레스가 새장, 꽃병, 어항 형상을 표방한 것도 이들이 서구에서 ‘집안에 갇힌 존재로서의 여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같은 문맥으로 볼 수 있다. 면사포 같은 긴 천을 쓰고 걷는 여성의 곁에 나부끼는 버드나무는 고려청자의 문양에서 기인하지만, 루돌프 아른하임의 게스탈트(gestalt) 심리학이 지적하는 바 버드나무의 본래의 처연한 속성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붉은 액체를 흘리는 상처입은 꽃이나 미지의 공포를 간직한 숲 속 붕대감은 나무들 역시 작가의 자아이다. 여기에서 자화상적인 여성 드레스, 꽃, 나무를 쪼아대며 상처 입히는 아름다운 눈먼 새와 나비, 홍학 무리와 공작새 등은 아름답게 위장하고 접근하지만 결국에 그를 공격하고 상처 입히는 존재,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안락을 꾀하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양순실의 작업은 때로 전례의 도상과 주제를 연상시킨다. 20세기 초엽 이탈리아 형이상학파(Metaphysical School)의 신체부분이 절단된 마네킹과 기이한 형상들, 레어노라 캐링턴의 목마와 새와 여성이미지를 비롯하여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방법론,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적 주제와 이미지들, 조엘 샤피로의 미니멀리즘적인 작은 집, 의자, 형상들, 데미안 허스트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해골의 조화, 그리고 우리의 전통화와 민화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미지와 콘텐츠를 아우른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미 ‘한물 간’ 그래서 별로 주목받지 않는 양식에서부터 최근의 동서미학까지 아우르면서도 양순실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조성해 낸다. 양순실의 그림은 자신이 살아온 삶 자체보다는 그 삶을 체휼한 작가의 감성과 정신과 영혼을 훨씬 더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참으로 철저히 자의식과 내면세계 안에서,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써온 렌즈를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작가이다. 감정을 걸러내고 표현하는 과정을 통한 보편성을 갖는다면 그의 그림이 훨씬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고지식할 정도로 타협할 줄 모르기에 양순실은 유행과 인기몰이와 물질만능이 만연화된 이 시대의 우리 사회에서 계속 정진하여 종국에 보기 드문 작가로서 독자적인 자리를 굳힐 것을 기대한다.
(각)In the shade_40,9×31.8㎝_Acrylic on canvas_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