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명 |
올림푸스 산의 12신 |
로마명 |
Zeus |
주신, 신중의 신 |
Jupiter |
Hera |
Zeus의 아내 신, 결혼의 신 |
Juno |
Apollon |
이성, 예술, 지혜, 율법의 신 |
Apollon |
Athene |
지식, 교육, 전쟁, 승리, 평화의 신 |
Minerva |
Poseidon |
바다의 신 |
Neptunus |
Dionysos |
술, 축제의 신 |
Bacchus |
Demeter |
대지, 농경의 신 |
Ceres |
Artemis |
사냥, 추격의 신 |
Diana |
Hermes |
신의 사자, 교역의 신 |
Mercurius |
Aphrodites |
사랑, 아름다움의 신 |
Venus |
Hephaistos |
화염, 제련, 기술의 신 |
Vulcan |
Ares |
전쟁의 신 |
Mars |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전설로 인한 신앙은 초인간적임에도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보편성과 결합되어져서 신과 인간이 같은 것, 즉 Anthropomorphism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장 신적인 종교성을 가진 나라이면서 인본주의 사상의 뿌리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신이 인간이 만들어낸 피조된 신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거짓 신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의 창시자인 헬라인은 철학은 있어도 역사 철학이 없다.
그들이 볼 때 우주는 자연 질서가 있는데 역사는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에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인간의 인성이나 경험만을 통한 지식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사고에 개입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소피스트(sophist)의 시조인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그리스인의 견해를 함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인본주의는 ‘스스로’ 인간의 힘에 의한 구원을 부르짖는다(단 8:8, 11). 인본주의는 휴머니즘 사상과 연계되어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력으로 인간들에게 작용하고 있다. 인본주의도 하나님이 없다는 신앙이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출생을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으로 연결되게 되어있다.
헬레니즘의 정신은 세계의 문화의 균질화를 시작하게 하는데 사람이 보기에 ‘보다 매력적이고, 기분이 좋고, 관대한 것’을 추구하는 미의 표준을 제시한다. 이러한 사상은 알렉산더 대왕의 혼합주의적 사상에서도 잘 나타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의 신전은 Serapium이었다. 이것은 이집트의 암몬신과 그리스의 제우스신이 절충된 것으로 Serapis신으로 혼합된다. 이 세라피스 신관은 쥬피터 - 세라피스로 발전되어 로마에 들어간다. 세라피스는 이집트의 이시스신과도 융합되어 「이시스 모자상」, 인도의 보살신과 결부되어 「아기를 안은 관음보살상」으로 발전하여 로마 카톨릭의 「성 모자상」과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알렉산더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단 11:6 남방왕)와 안티옥의 세레우코스 왕조(단 11:6 북방왕)에서 그리스 미술은 이어졌다
∘조각
그리스의 조각은 남, 여 인체를 주로 조각하였다. 그들의 척도의 기준이자 표현의 주체가 되고 질서의 중심이 된 것은 인간이고 인체였다.
아스타르테 여신상에서 유래된 여성입상(코레)은 쿠로스(남성)와는 달리 항상 옷을 입은 상으로 표현되었고 의복의 옷 주름의 표현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폴리클레이토스는 콘트라포스트에 의해 신체의 선을 S자형으로 만들어 인체의 대칭, 리듬, 하모니의 상승관계를 부가하여 정지된 조각상에 역동적 생명감을 나타내는데 성공한다.
클래식 후기(BC 380~330)는 개인주의가 대두되는 사회를 배경으로 프락시텔레스, 스코파스, 리시포스 등의 3대 거장이 배출되는데 프락시텔레스는 신과 인간의 내면적 표정까지 섬세하고 우아하게 표현했으며 스코파스는 파토스(비극성)의 표현에 뛰어났다. 그리고 리시포스는 폴리클레이토스의 캐논(규범)을 고쳐 8등신이라는 새로운 인체 비례를 창안하였다(단 8:21). 또한 그는 알렉산더대왕의 궁정 조각가이기도 했다.
∘신전
기원전 6세기에 들어오면 사모스의 헬라신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행 9:24~28) 등 이오니아식 기둥형식에 의한 거대한 신전이 건립되면서 더불어 건축 장식의 부조조각이 발달한다. 특히 기둥 위와 지붕 아래의 박공(페디멘트)에는 신화의 장면이 좌상, 와상 등 여러 가지 동작으로 표현된다.
그리스 미술의 황금기인 클래식 시대에는 아테네의 최전성기이기도 하다. 최대 강적 페르시아를 격퇴하여 그리스 전 지역 패권을 획득한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에 의해 아크로폴리스의 정비가 추진되었다. 일찍이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전과 파에스돔의 포세이돈 신전에서 보듯이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도리스식 기둥양식은 이오니아식 우아함이 추가되어 파르테논신전에서 절정을 이룬다. 파르테논(Parthenon)은 ‘처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의 아폴론신전의 ‘신탁(Oracle)’을 하는 Pythya(무녀)는 정치, 경제, 군사, 통상 등의 길흉을 신으로부터 받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녀는 처녀성을 지켜야했고 신전 사당을 벗어날 수 없었다. 델포이가 신탁소가 된 데에는 제우스가 그곳을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하여 성석 ‘옴파로스(Omphalos)’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페르가몬은 성경의 버가모 지역으로 ‘결혼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인데 황제 숭배와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대제단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는 사탄의 위가 있는 데라’(계 2:13)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헬레니즘 BC 184년 시리아의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Zeus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가증한 것으로 여기는 돼지피를 뿌렸다(단 9:27, 11:31, 12:11).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라코티스(BC 332~AD 1975)
알렉산더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라코티스의 신도시 계획령을 내린 것은 BC 332년 1월 20일이었다. 이탈리아의 로마가 창건(BC 750)된지 421년만의 일이요 바벨론이 멸망(BC 539)된지 207년만의 일인데 이탈리아에서 사상 최초의 고속도로이던 Via Appia가 착공 된지 20년 전의 일이며 그리스에서 제 112회(BC 332) 올림픽 경기 대회가 개최되던 해의 일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리아, 라코티스는 투트모세 1세 때부터 왕실 소속의 항구도시였던 라코티스에다 서쪽에 인접한 작은 항구 네아폴리스(Neapolis)를 신축 성벽으로 결합시켜 계획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지중해 함대에 맞선 마케도니아의 남 지중해 함대가 정박할 군사적 항구이자 나일강의 곡물이 반출될 상업항구로 건설된 것이기도 했다. 알렉산더대왕의 큰 꿈을 담당할 설계자는 에베소의 Artemis신전 재건축을 위촉받았던 건축가들 중의 거장 Deinokrates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종교적 통합 정책을 시도했었는데 그가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을 때 룩소스의 Khons 신전에다 Ammon의 기둥이 많은 성소를 첨가하여 건축케 했으며 그 벽면에는 Pharaoh의 복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새겨 넣게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아버지 Ammon을 찬양하기 위하여 건조한 흰 석조물에다 아카시아 나무를 재료로 한 대문을 달고 황금으로 장식하나이다…’라고 명문을 남겼다. 또한 대왕이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는 바벨론의 전통적 종교와 풍습을 존중하여 신전을 비롯하여 Babel탑을 보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알렉산드리아, 라코티스는 이후에 이 지역을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2,800여년의 전통 문화를 지녀온 이집트를 그리스에 융합시켜 Hellenism 문화화 시킨다.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는 아스완 산 화강석 석조로 135m 높이의 Pharos(등대)를 건설했다. 이것은 인류사상 최초의 등대로 알려지고 있다. 그 등대의 꼭대기에는 그리스의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 상을 그 도시 일대가 굽어보이도록 배치하여 세웠다. 시는 동북쪽 제 1구역은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서남쪽 제 2구역은 이집트인 거주 지역, 이 두 구역 중간에 제 3구역을 정하고 마게도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삼았다.
따라서 제 3구역에는 왕궁, 뮤세움(Museum, 박물관)과 뮤사이온(Musaion, 학원)도 건설했다. 이 두 명칭은 그리스의 문예의 신 뮤즈(Muse)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왕궁에는 왕족을 위시해서 재상, 시종, 신관, 학자, 의사 그리고 예술가, 기술자, 기업가 또는 공업인, 상인, 무희, 악사 등이 드나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중에는 청운의 꿈을 품고 모여든 청년들이 들끓었으므로 여관업이 성행했다.
옛날부터 파피루스에다 기록한 종교, 천문, 의학, 수학 등의 기록들이 신관을 통해 전승되어온 것이 이집트의 전통이었듯이 신전의 서고는 국립도서실과도 같았다. 이 서고를 통해서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은 많은 정보들을 얻었고 Eukleides,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포파스, 헤론 등과 같은 학자도 배출될 수 있었다.
뮤사이온 학당의 도서관에서는 이집트어, 앗시리아어, 아랍어, 헤브라이어로 저술된 옛날 두루마리식 서적을 그리스의 아티카어(Attia, 아테네의 표준어)로 번역하여 오늘날의 책의 형식을 갖춘 서적으로 만들었다. BC 142년에는 히브리어의 구약성경이 아티카어로 번역되었다.
인도의 아소카 왕조로부터 불교가 알렉산드리아에 전파되자 이곳에 불교 교구가 설치되었고 BC 3세기 이후 불교문화와 그리스 문화는 많은 교류가 있었다. 현재의 불상 대좌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대 이집트의 연꽃을 신성시한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 석굴암의 본존불상의 양식은 그리스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의 신전은 Serapium이었다. 이것은 이집트의 암몬신과 그리스의 제우스신이 절충된 것이다. 세라피스(Serapis) 신화는 이와 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다. 세라피스는 쥬피터 - 세라피스로 발전되어 로마에도 퍼져갔다. 세라피스는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과도 융합되어 「아기를 안은 관음 보살상」으로 표현되어진다. 이러한 변천은 나중에 로마 카톨릭에 들어가 「성 모자상」으로 자리 잡는다. 나중에 알렉산드리아는 신학과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
알렉산더는 비록 33살의 나이로 죽었지만 그가 남긴 종교적인 통합의 의미는 매우 크다. 그는 모든 종교의 신들에게서 유사점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여러 나라의 특유한 신들을 서로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고 섬겼다. 이시스와 테메테르, 호루스와 아폴로, 토트와 헤르메스, 아문과 제우스가 그러하다. 박트리아와 인도의 그리스인들도 크리슈나와 헤라클레스를 동일시했고, 시바를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하였다.
알렉산더 이전에도 종교적인 통합운동이 있었으나 알렉산더는 체계적인 문화를 초월한 통합운동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 자체의 경계를 넘어서기까지 각 국가들을 존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압제의 제국이 아니라 cosmopolis의 이상을 추구하였다. 사람이 사는 세상 전체를 가리키는 에큐메네(oecumene)는 문명화를 추구하는 인류의 공동이상으로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호와와 제우스와 암몬과 마르둑과 바알과 그모스를 하나로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서양신화).
비록 알렉산더가 반(反)성경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이지만 이러한 종교일반을 통합하려는 의지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행 17:26)는 사실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5) 로마미술
로마는 아붼티누스, 카엘리아누스, 팔라티누스, 카피톨리누스, 에스쿠알리누스, 붸미날루스, 쿠일리날누스의 7개의 언덕(계 17:9)으로 구성된 도시이다. 이들 언덕들은 그 정상에다가 신전을 세웠는데 카피톨리누스 언덕에는 Jupiter 신전(BC 509)이 세워졌고 BC 3세기경에는 에스쿠일리누스 언덕 위에 쥬피터의 아내 신이자 미의 여신 Venus의 모신이며 결혼의 신 Juno의 신전이 세워졌다.
기원전 6세기 말까지의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의 한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고, 정치적으로는 에트루리아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기원전 509년 공화정부를 수립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에트루리아를 로마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스와의 전쟁과 제 1차 포에니전쟁을 거치면서 그리스미술의 걸작들을 접한 로마인은 눈부신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제 2차 포에니전쟁 이후에는 경쟁하듯이 그리스 미술품 수집에 집착했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빈약했던 로마는 그리스미술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스풍으로 산다’라는 사회 전체적 분위기는 그리스의 조각품들뿐만 아니라 아테네에서 조각가들을 직접 데려오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미술과 로마미술은 경계를 가지기가 어렵게 된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눅 2:1)는 헬레니즘 양식의 조각 등을 주문에 맞춰서 제작하는 신 아티카 파의 미술을 공적 미술로 채용한다.
원래 그리스 아테네의 Agora(시장)에서 유래되었다는 로마의 Forum은 로마의 7언덕 중에서도 카피톨리누스, 팔라티누스, 쿠일리날루스의 3언덕이 있는 3각 계곡 일대에다 건설되었다.
Forum Romana의 성화신전(Templum Vesta)은 Vesta 여신을 숭상하는 것이었는데 성화는 3월 1일(설날)에 새로이 지펴서 1년 내 꺼지지 않게 했다. 이것을 돌보는 것이 Vestal Virgins(성화 처녀)였다. 그 ‘꺼지지 않는 불’을 지피기 위해 Vesta 신전이 건설되었다. 성화 처녀는 귀족신분만의 10세 소녀를 뽑아 30세까지 미혼으로 순결을 지키게 했고 성화를 밤낮 지키는 일을 했으며 이를 범하면 생매장 당했다. 이들의 기숙사가 Casa Vestal Virgin이다. 처녀 숭배의 종교적 관행은 세상의 여러 종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로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티투스 개선문
유다 반란 진압 사령관 티투스 장군은 친 로마 성향의 유다 왕 Herodes Agrippas Ⅱ와 로마 총독의 협조로 AD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눅 19:41~44, 마 23:36~ 24:2). 「맛사다의 비극」이 이 무렵의 사건이었다.
그 후 티투스는 원로원에 의해 로마 황제가 되었다(AD 79). 이 해 8월 24일에 저 유명한 베수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매장 되었다. 티투스의 개선문은 단아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중앙에 티투스의 전차를 타고 있는 상 4각에다 각각 전쟁승리의 날개 달린 Diana 여신상을 안치한 구상이었다. 이 개선문에는 유대인의 포로 행렬이 부조로 새겨져 있어 예루살렘 멸망의 기사가 생생히 느껴진다.
원로원이 기증한 Frieze의 명문에는 「로마의 원로원 및 민중의 신이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신인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 어거스투스에게」라고 찬양되어 있다.
∘비너스, 로마나 신전
주피터와 다이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 Venus는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크퓨로스의 아도니스, 앗시리아의 아스타르테이고 이를 더 세분하여 수메르의 Nanna, 바벨론의 이쉬타르, 팔레스틴의 아스다롯과 연관되어 진다.
비너스가 가지는 영향력은 로마의 시조격인 로물루스와 J. Caesar가 비너스의 후손이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비너스는 로마의 민족 모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비너스 신전
고대 로마 회화는 헬레니즘 세계의 각지에서 발견되는 실내모습의 모방에서 시작된다. 회반죽벽에 대리석 모양과 도시 풍경이 그려지는 ‘폼페이 양식’으로 시작된 로마회화는 점차 건국 모티브를 벽면 가득히 그린 장식과 신화가 등장한다. 메카로그라피아 라고 불리우는 대화면도 로마회화의 특징이다. 폼페이 비의장(Villa dei Misteri) 벽화 「디오니소스의 비밀의식」은 Orpheus를 시조로 하는 Dionysos 숭배 종교로써 신비종교의 의식을 그린 것이다.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왕 누마는 고대 로마 주교회의 의장(Pontifex Maximus)을 맡으면서 로마종교의 비밀스럽고 공공적인 의전을 조직한 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직업별 단체들로 구성된 협회들에 자기들의 의전과 비밀을 엄격하게 지키는 입문적 형제애로 뭉친 단체를 조직케 하여 로마의 신비종교인 ‘밀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 로마에서 발견되는 벽화들은 당시의 신비종교 의식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로마의 기독교 공인에 콘스탄티누스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를 보는 시각은 교회사가들에 따라 크게 다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AD 274~337)는 로마 황제로서 약 30년간 재위 하였다. AD 312년 막센티우스를 티베르강의 물비우스 다리에서 물리치고 다음해 313년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했다. 로마의 번영과 권위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차차 쇠퇴일로로 기울어지는 이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단연 나라의 부흥을 결심하고 그 이념을 조형화한 것이 바로 이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에 장식한 수많은 부조는 과거의 여러 황제가 영광을 누리던 시기의 건물에서 취하여 다시 구성한 것들이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나라의 쇠퇴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치 위 전면에는 황제가 연설하는 모습이 조각되고 다시 그 위에 역대 황제들의 모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선제들의 사적은 부조로 만들었고 승전을 기념하면서 그의 즉위 10주년을 축하하며 로마의 위력을 과시하는 기념행사에 맞추어 이 개선문을 만들었다. 개선문의 대부분은 대리석이며 부분적으로 색대리석을 사용하기도 했다. 전체가 호화로운 이 개선문을 본 따 파리의 개선문을 비롯하여 근대 유럽 각지에서 많은 개선문들이 만들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세계사의 도도한 물결을 바꾸는 큰 역할을 한 그는 과연 누구인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당시에 신흥종교로써 세력이 점차 커져가는 이 집단을 역사의 영웅들 가운데 포용의 정책으로 수용하여 그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통합시켜버렸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 그리고 그의 계승자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답게 정치적 고도의 술수의 한 방편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는가? 아니면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 역사하셨던가? 일반적인 역사가들은 그를 기독교의 은인으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성경에 의한 교회의 순수성의 역사를 참 교회라고 보는 쪽에서는 그의 시대로부터 배교의 시대가 도래 했는데 이전에는 핍박에 의했지만 여기서는 환대 속에 이루어지는 것의 차이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역대로 이 황제들과는 달리 그의 부친 콘스탄티우스 1세와 같이 기독교 박해를 확고하게 반대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널리 퍼뜨렸던 태양유일신을 섬기고 있었다. 그는 이교적인 직책이었던 대사제(Pontifex Maximus)라는 명칭을 받아들였고 동전에는 여전히 태양신(Sun-God)의 표상을 새겼다. 321년 교회들에게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그로써 합법적인 법인 자격을 부여하였다. 태양의 날(Sunday)이자 기독교의 ‘첫날’을 주간 휴일로 정하고 그날은 노동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적어도 초기에는 기독교의 유일신론과 일찍이 아우렐리우스(Aurelius)가 장려하였고 그의 아버지와 그가 의식적으로 신봉한 태양교의 유일신론 간에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두 종교는 각각 우주의 종속된 ‘세력들’을 통치하는 유일한 초월신의 지상권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양종교가 내놓은 세계 질서사상은 콘스탄티누스가 황제로서 지닌 사명감, 즉 지상의 인간 사회를 통합 및 통일할 보편 군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일치하였다.
그는 당대의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형 조각상과 개선문을 세웠으며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겨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불렀다. 그는 첩보정치를 폈으며 자기의 부인과 아들을 죽이는 것을 포함하여 잔학한 통치를 펴기는 했다. 저명한 역사가 듀란트는 콘스탄틴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개종은 진실 된 것이었는가? 그것은 신앙적 신조의 행동이었는가? 아니면 노숙한 정치적 지혜의 발로였는가? 후자일 공산이 크다. 그는 그리스도인 예배의 의식적이 요구에 거의 따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 주교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그는 비록 제국의 단합에 관심을 두어 반대자들을 억압하고자 한다 해도 그리스도계를 휘젓는 신학적인 이견들에 관하여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통치기간 중 그는 주교들을 정치적 조력자들로 취급해서 그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주재하고 대다수가 지지하는 의견들에 동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참 신자는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고 후에 정치가가 되어야 하는데 콘스탄틴에게 있어서는 그 반대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수단이 될 뿐이지 목적이 아니었다”(듀란트/ Durant, 문명이야기, The story of Civilization: Caeser and Christ, p.655~656)
북아프리카의 기성 기독교는 터툴리안(Tertullian)과 키프리안의 전승을 따라 순교자 소명과 그것이 구현하는 세상에 대한 배척정신을 계속해서 드높였다. 콘스탄틴 이전의 여러 차례 박해를 당했을 때 핍박을 받은 무리들과 그렇지 않았던 무리들과의 관계에 분열이 점점 커져갔다.
로마 세계에서 다른 지역교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에서 ‘카톨릭’이라 불리우던 집단은 카이킬리아누스가 이끌었고 ‘순교자들의 교회’를 이끈 자는 도나투스(Donatus the Great)라는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사실상 카이킬리아누스 집단을 아프리카의 정식 교회로 인정하였을 때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합법적인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정식 재판을 요청하였다. 도덕적으로 무자격한 성직자는 유효한 교회적인 행위를 이룰 수 없다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은 신학적인 이견에는 관심이 없고 콘스탄티누스의 통치에 순응적이었던 카이킬리아누스 집단을 콘스탄티누스가 지지하므로 분쟁은 더욱 커졌다. 콘스탄티누스는 잠시 무력으로 도나투스주의를 진압해 보려고 하다가 곧 포기하였다. 도나투스 진영(Pars Donati)은 스스로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고 실제로 권위 있는 아프리카 기독교의 전통적인 정신을 상당히 구현하면서 제도권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3. 중세시대
우리는 앞에서 콘스탄티누스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것은 이어지는 중세시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미술은 약 300여 년 동안 걸쳐 진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아있는 것들은 미미하다. 초기 기독교적 상징으로써 양, 포도나무, 선한목자, 물고기 등을 주제로 한 아마추어적 그림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은 이때까지 기독교가 로마에서 소수적인 종교였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승인을 받기는커녕 10차례에 걸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미술적인 것을 만들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능케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성립이 되어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 폭발적인 증가로 인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4세기 초반에는 로마의 행정부 내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정도로(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미 확산되어 있었다. 초기 기독교시대에 미술적 조형물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그때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좇았다.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좇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시대가 더 많았다. 기독교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제 2계명을 통하여 형상을 만들거나, 세기거나 숭배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형상숭배는 곧 우상숭배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들은 반드시 형상을 만들어 숭배했다. 시내산에서 아론이 그러했고, 고라, 여로보암, 아합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개혁자들과 선지자들은 이러한 형상을 파괴하고 잘못을 지적했다.
기독교와 미술의 관계를 살피는데 있어서 성경적 가르침이 우선하지 않으면 이러한 형상제작에 관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사람의 생각에 의하거나 종교일반에서 행해지는 관습에 의해 다루어지기 쉽다. 기독교에서 형상의 문제는 다른 종교와는 반대되는 내적인 법에 의해 다루어 질 수가 있다. 단 한 가지 예외는 성막과 성전 건축에서 볼 수 있지만 이것들도 엄밀히 보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출 40:32) 만들어졌다.
기독교에서 미술의 문제는 중세시대 교회가 동, 서로 분열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예민한 문제였다. 성상 논쟁(Icon controversy)을 통해 미술에 관한 많은 기독교적 변증이 있었으나 성상반대론자나 성상옹호론자나 나중에는 성상숭배로 나아갔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2~3세기 신학자)는 모세의 제 2계명은 모든 종류의 조형예술품을 금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초대교회 및 교부들의 기본입장이었다. 3세기까지도 Eusebius는 예수를 조형예술의 소재로 삼는 것은 성서에 대한 위반이고 우상 숭배적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예수만을 그린 작품은 4세기까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작품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5세기에 들어서부터였다. 그리스도의 상은 종교적 그림의 표본처럼 되어 마침내 일종의 부적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E. J Martin, A History of Iconoclastic Controversy). 초기 그리스도교의 미술에 관한 견해는 아마시아의 아스테리우스의 글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그림으로는 아무리 해도 대상의 물질적 부분, 시각에 호소하는 부분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예수를 그리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예수를 그림으로 그리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한 번의 수모로써 족한 것이다. 더 이상 그를 사람의 모습에 담아두기 보다 오히려 그의 무형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확실히 새겨두도록 하자”
성화나 성상에 대한 존중이 동로마제국에서 우상숭배에 까지 이르러 그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는 데에는 역사적으로 단순히 교리적인 이유 이상의 의미들이 산재했다는 유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레오 3세 시대에 성상숭배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미카엘 3세(Michael Ⅲ, 842~867)가 어릴 적에 그의 배후에서 다스린 여제 테오도라(Theodora)는 843년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화상숭배를 부활시킴으로써 성상파괴운동을 최종적으로 종결지었다.
성상숭배는 4세기와 그 이후에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들과 지도자들에게 늘 반대를 받았으며, 동방의 특정지역들에서는 그 관습을 이교도로의 복귀로 보았다는 데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성상파괴주의는 기독교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대중신앙의 큰 무리들을 몰고 가는 대세에 말씀을 기준으로 맞선 행위이다.
성상숭배가 가장 크게 배척이 된 시대는 종교개혁시대이다. 루터, 칼빈 등 개혁자들은 성상파괴를 종교개혁시대 말씀을 기준으로 시행했다.
성상숭배가 반대 없이 수용이 되자 성경말씀에 의해 굳게 닫혔던 빗장이 풀어진 듯이 중세의 종교는 건물의 안, 밖 제단과 천장과 바닥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거룩한 미술적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성당은 신의 집으로 인식되었다. 성인숭배가 이어졌으며 그들은 조각상이나 그림으로 그려 장식하고 숭배했으며, 성 유물숭배가 행해졌다. 그 성 유물들과 성상들은 수도원들이나 성당의 무궁무진한 물질과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수많은 일반 민중들이 오늘날 갓바위에 몰리듯이 몰려왔다. 영험한 성상, 영험한 성유물의 신화는 거짓으로 부풀려졌고 그것들로 인해 그것을 소장한 건축물은 성소가 되었다. 성 베드로의 쇠사슬 교회당(The church of St. Peter's chain)도 베드로를 묶었던 전설적인 쇠사슬을 보존 숭배해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교회의 의미와 성전의 개념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을 하고 중세미술을 보아야 그 미술품들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중세를 암흑시대(Black Age)라고 말한다. 참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빛’(창 1:3, 요 1:9, 요일 2:8)에 속한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요 1:9)이시요 기독신앙은 그분께 속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중세가 ‘암흑시대’였다는 것은 중세의 기독교가 거짓 기독교요 많은 신앙적 형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유사’한 것들이지 참된 기독교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거짓 어두움의 영들이 중세를 표리부동한 시대로 만들었다.
∘신약성경에서의 교회와 성전의 뜻
교회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시는 데서부터 나타난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이 와서 다스리는 시대를 예언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졌다(마 27:5). 이 사건을 들어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간”(히 9:12) 것이며 이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이 하신”(히 10:18) 사건인 것이다. 이제 성전에서의 제사는 예수님 때문에 모형으로써의 역할이 끝이 난 것이다(히 9장, 10장).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 오실 성령님에 의한 교회의 탄생을 약속하시면서 승천하시기전 다시 한 번 제자들의 기억을 상기시키셨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그 약속을 믿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 오순절날 성령강림의 체험을 가지고 교회가 힘 있게 세워져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행 2장).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시고 성전정화사건을 일으키신다. 그러신 후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20)라고 말하시니 유대인들은 그 당시의 건물로서의 헤롯성전을 생각하고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요 2:20)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공격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건축물로서의 예루살렘 헤롯성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말하시면서 죽으심 후에 일어날 성전의 개념의 변화를 시사 하셨다.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성전모독죄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신약성경에서 성전의 개념변화를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스데반 집사였다. 그는 구약성경의 전체를 요약한 놀라운 설교를 한 마지막에 성전의 개념에 대한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에 의미에 대해 말하였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 7:47~48)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이 가장 귀히 여기는 성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한 것이다. 이 새로운 해석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해석이었다. 그들은 돌로 스데반 쳐 죽였다(행 7장).
하나님의 집으로써 성전에 대한 신약시대 점진적인 해석의 변화는 바울에게서 뚜렷이 자리 잡는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말했다. 그의 성전에 대한 견해는 계속되어 지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며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스데반의 암시가 바울에게서 분명해졌다. 이제 성전은 손으로 지은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성령이 거하실 그곳이 성전인 것이다.
이제 성전은 더 이상 외부(外部)에 있는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속에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위치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성전개념의 변화에 대한 암시를 하셨던 것이며 개개의 성전을 모신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가 죽으심에서 부활하심은 교회를 일으키심이며 ‘그 뜻의 비밀’(엡 1:9)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오이코노미아)이다.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었던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그 머리를 두신 것이다. “그를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구약시대의 성전제도는 예수님이 오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주심으로써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히 9:10)이며 ‘참 것의 그림자’로써의 역할이 끝난 것이다. 새 언약 즉 신약의 성전은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히 10:16)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에클라시아’에서 온 말로 ‘불러냄을 받은 무리나 모임’을 의미한다. 교회는 절대로 건물의 개념이 아니다. 건물이 없이도 교회는 가능하다. 교회의 목적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할 때보다 먼저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교회를 택하셨다(엡 1:4~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각 사람이 서로의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교회가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이다.
하나님의 성전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의 여러 지체로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비밀인 것이다. 신약시대의 성전과 교회는 더 이상 외부적인 건축물을 상징할 근거가 전혀 없어진 것이다.
실제로 AD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괴는 이 땅위에 구약의 성전을 없애 버렸다. 그래서 말씀에 충실히 따랐던 4세기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공간적인 제한이 없이 가정과 지하묘실, 회당(synagogue) 등에서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모이는 장소는 ‘집회소’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관용의 칙령(the Edict of Toleration, 313)이 시작된 이후로 사도 시대부터 이어져온 성경적 교회의 원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령이 지도하시던 자리를 인간적 법칙이 대신하게 되면서 교회는 급격히 국가권력과 결탁화게 되었고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계급이 생겨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성경적 모습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박해받던 시대에 교회의 순수성이 세상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외형적으로 큰 ‘성당’들이 마치 기독교의 승리의 시대를 상징하는 표상인 듯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성당건축
1세기의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로서 이 땅에 신약 성경적 교회를 탄생시킨 후 그리스 철학사상을 가진 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와 그리스 철학을 혼합하게 되고 4세기에 교회가 나라의 비호를 받게 되고 더 나아가 크게 건축된 건물들을 하사받은 종교적 집단이 되자 초대교회의 공동체성과 성도의 모임과 교제(Koinonia)는 점점 없어지고 마치 이교신전에서 일정한 때에 제사를 드리는 것과 비슷하게 일요일 정해진 시간에 모여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식으로 변해갔다.
교회에 들어온 그리스 사상의 영향은 교회의 본질을 모호하게 해 버리고 신학적 체계를 중요시하면서 성령의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다. 교회에 들어온 수많은 그리스 사상 가운데서 특별히 이 한 사람의 영향은 미술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1세기경 그리스에 진짜 디오니소스가 살았었다. 다소 출신 바울이 그를 전도해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을 디오니시우스라고 부른 이 사람은 5세기경 시리아에 살았던 수도사였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문헌을 1세기경의 저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기꾼이었다. 이 사람은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1세기경에 살았던 것처럼 문헌을 작성했다. 더욱이 그는 디모데가 자신에게 배웠다고 말했다(그가 이런 주장을 할 때 디모데는 이미 죽은 지 400년이나 되었다).
그의 저작을 읽던 사람들은 실제가 그가 바울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심오한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신플라톤주의를 신봉했던 기독교 사상가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거짓말이 드러나는 데는 무려 천년이 걸렸다. 그로인해 그의 사상이 기독교 신앙 안에 깊숙이 침투해 버렸다.
그가 끼친 영향 가운데 한 가지가 성당건축에 반영되었다. 성당의 첨탑이나 채색유리, 예배당의 높이 솟은 둥근 천장에서 그의 철학이 끼친 영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은 색, 빛, 공간, 아름다움이 사람으로 하여금 초월적인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고 가르쳤다. 즉, 그런 것들을 통해 ‘숭고한 것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웅장한 성당을 짓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친구라고 주장했던 디오니시우스의 말을 인용했다. 그들은 그의 저서를 높은 첨탑과 둥근 천장과 채색유리(Stained glass)가 성경의 근거를 입증해 주는 1세기의 ‘증거문헌’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들이 인용했던 것은 플라톤 철학을 개작한 5세기경의 사기꾼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했다. 오늘날 그를 가리켜 위(爲) 디오니시우스라고 부른다. 그의 거짓 문서들은 기독교 용어로 표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교철학사상으로 가득하다. 플라톤 철학을 개작한 사상이 그의 문서들을 지배하고 있다. 학식을 갖춘 신학자들이 그를 1세기경의 그리스도인인줄 알고 거의 천년동안이나 그의 글들을 인용하여 교회 속에 이교적인 전통들을 유입시켰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신학체계를 세우면서 위(爲) 디오니시우스를 백번이상 인용했다.
로마의 성 바울 성당(319~386)의 첫 삽을 뜨게 된 것도 이 때이다. 박해시대가 종결된 지 5년만인 318년에 당시의 교황 Sylvester(314~395)가 바울의 유해를 Via Appia의 Catacombe에서 옮겨와서 로마의 아벤티누스 언덕에 재매장하고 이 위치에다가 그의 기념성당을 건설코자 콘스탄틴 대제에게 요청하여 319년에 착공하게 된다.
성당 안에 유해를 안치하고 그들을 기념한다는 것은 바울사도의 뜻을 기리고 그를 기념하는 것 같지만 사도바울의 성전에 대한 사상들을 묻어버리는 행위의 신호탄이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라는 성경 말씀이 교회시대에 시작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유해를 성당 안에 안치하는 것도 이때부터 성인숭배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바티카누스 언덕에 세워졌다.
이때 성 베드로 성당(319~330)도 건축되었다. 이 시대의 정신은 성당건축을 왕성케 했으나 일반건축의 건설은 상대적으로 부진하게 만들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이를 이어서 재건, 증축한 것이다. 성 바울 성당과 마찬가지로 교황은 콘스탄틴의 재가를 얻어냈으며 베드로의 유해를 매장했다. 콘스탄틴 대제가 이 건축에 참석하며 손수 열두 번의 삽질을 한 후 324년에 기공하였다.
본인들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대사도들의 이름이 빙자되어 대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하는데 전혀 뜻밖의 인물의 이름을 딴 성당이 세워졌는데 그것이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성모 마리아! 그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핵심 숭배인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출발이 된 건축이 에스쿠일리누스 언덕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t. Maria Maggiore At Monte Esquilinus, Roma)이다.
∘에스쿠일리누스 언덕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t. Maria Maggiore At Monte Esquilinus, Roma, 353~432)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있는 에스쿠일리누스 언덕은 원래 Juno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Juno는 로마의 주신 쥬피터의 부인 신이자 미의 여신 비너스의 모신이다. 그는 결혼의 신이고 그리스의 Hera신에 해당한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건축 동기는 그 당시의 중요한 기독교 논쟁을 알아야 이해할 수가 있으며, 이후의 로마 카톨릭의 성모 마리아 숭배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대영백과사전은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 교리는 적어도 300년까지는 가르쳐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교리는 451년 칼케돈 회의를 거치면서부터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그러했다. 안디옥의 수도사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에 428년 즉위함에 따라 동정녀 마리아에게 적용되던 테오토코스라는 말 대신에 ‘크리스토코스’(chris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란 용어가 적합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네스토리우스의 생각들은 ‘Theotokos’의 사상에 강력한 옹호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키릴(Cyril)에 의해 크게 반발을 당했다. 그는 크리소스톰을 유배시킨 테오필루스의 조카였다. 그는 412년 삼촌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신앙적인 인물이 아니라, 권력 추구형 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술수를 동원하여 자기측 주교들과 소아시아 출신 주교들의 지지를 미리 받아서 431년 에베소 공의회를 소집하여 ‘Theotokos’사상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에베소는 4세기 말까지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가 이루어졌다. 이 여신은 헬라어로 '위대한'(megale)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마그나 마테르’ 즉 위대한 어머니 여신으로 숭배받았다.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일찌감치 그곳에 도착하였고 네스토리우스도 그러하였으나,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인 안디옥과 동방의 주교들은 급박하게 치러진 공의회 개회일에 맞춰 도착하지 못했다. 공의회가 반대파 일색으로 구성되자 네스토리우스는 절차상의 부조리를 들어 참석을 거부했다. 이를 기회로 공의회는 단 하루의 회기에 니케아신조의 유일한 권위를 추인하고 그에 대한 키릴의 해석을 인정한 다음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폐위하였다. 며칠 뒤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이 도착하여 회의를 열었고 이번에는 그들 편에서 키릴과 에베소 주교를 정죄하였다. 이렇게 혼란이 일어나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정치적 수완가인 키릴의 적극적인 교섭에 설득되어 결국 네스토리우스를 폐위시키고 안디옥 근처에 있던 그의 수도원에 유배시켰다.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이 공의회로 말미암아 마리아를 숭배하는 사상이 로마 카톨릭에 공식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는 곧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애매한 삼단논법에 의하여 신격화되었다. 마리아가 결국 서양세계의 어머니 - 여신의 모든 이름과 형태, 슬픔, 기쁨, 위로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서 오늘날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마리아는 지혜의 자리… 명예의 그릇… 신비한 정미… 황금의 집… 천국의 문… 샛별… 죄인들의 피난처… 천사들의 여왕… 평화의 여왕이 된 것이다”(로레토의 연도에 나오는 갈망, 1587년에 인정받음)
이와 같은 마리아에 대한 카톨릭의 견해가 일단 설정되자 곧이어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마리아 숭배 성당이 만들어진다. 에베소회의가 끝난 이듬해인 432년에 유명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한다. 이 성당을 교황 리베리우스(352~366)가 꿈에 Maria 성당을 착공하라는 마리아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이 성당을 마리아를 숭배함으로서 착공할 수 있는 공식적인 결의를 해준 회의는 에베소에서 열렸는데, 에베소는 아르테미스(아데미)여신 숭배와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유명한 곳이다(행 19:23~41).
이로써 마리아를 기념하는 최초의 성당이 건립되기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마리아 기념 성당이 많이 있다.
교회는 많은 이방 사상과 상징을 받아들였다. 5세기 중엽에 교황 레오 1세는 베드로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태양에게 절하기 위해 돌아섰던 숭배자들을 비난하였다. 기독교화 된 몇몇 이교적 풍습들, 즉 초나 향, 화관 같은 것을 사용하는 풍습은 이방 종교를 상징한다고 해서 초기에 교회 내에서 금했었다. 성모 마리아 숭배는 이방 종교의 유사한 것들 때문에 자극을 받은 듯하다. 몇몇 학자들은 아데미(다이아나) 숭배가 마리아 숭배로 바뀌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본래 아데미를 숭배했던 에베소 사람들은 초기부터 마리아를 숭배하였다. 마리아 숭배를 애굽의 여신 이시스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시스를 열정적으로 숭배하는 자들은 그 여신을 ‘대동정녀’(the Great Virgin) 혹은 ‘신의 어머니’라 불렀다.
1) 비잔틴(Byzantine) 미술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자기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것에 의해 제국 내의 정치와 문화 활동의 중심은 점차로 동방으로 옮겨졌다. 동로마제국은 동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과 그 내륙부는 물론 이탈리아 반도에서 슬라브 제국까지 걸친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해 간다.
비잔틴이라는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유래된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당시의 로마를 능가하는 계획된 대도시로써 Cosmopolitan 사상과 가지각색의 인종, 공업과 수출의 중심지로서 외국무역 및 원거리 교통, 통신의 요충지였다.
비잔틴 미술은 동방의 초기 기독교 미술과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 그리고 고대 아시아와 페르시아의 사산조 미술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수도는 드디어 거대한 제국으로 실질적인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이것이 미술로 직접 반영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527~565) 때이다. 소위 1차 황금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건축했다. 이 건축은 Dome식 바실리카라는 새로운 건축 유형을 출현시켰는데 하늘을 느끼게 하는 장려한 큰 돔은 거기서 비춰지는 빛의 효과로 종교의식의 장소인 동시에 신의 집이기도 했던 것을 강조하였다.
성 비탈레 성당에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신하들과 테오도라 황후와 그 시녀들의 모습이 라벤나의 좌우대칭을 중시한 화면구성과 정면성이 장엄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성당에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 성화적 의미를 갖고 그려진 것은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대표자로서 황제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당대인들이 그를 가리켜 ‘The Emperor who never sleeps’(잠자지 않는 황제)라고 불렀듯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원래 비잔틴 미술에는 환조조각과 같은 3차원적인 실체를 갖는 것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8세기의 성상 논쟁도 이 같은 견해의 노출이다. 성상 논쟁(Icon controversy)은 730년 동로마 황제인 레오 3세가 성상금지령을 내린 것으로 시작하였다. 동방교회는 예수님이나 성모 그리고 성인들의 상을 만들어 배례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있어 4세기 이후부터 성상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성상은 우상숭배로 통하는 위험을 그 자체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성상금지령 이후 성상 부정파에 속한 신학자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성상 긍정파를 탄압하고 성상 파괴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후 8세기에 서로마에서는 성상 긍정파가 반격에 성공하고 843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동로마 즉 비잔틴 미술은 성상 부정사상의 영향으로 미술적 발전이 정체되었지만 서방미술은 커다란 발전을 이루게 된다. 동로마에 있던 성상 긍정파들이 대거 그들의 활동이 옹호되는 서유럽의 라틴교회로 몰려오게 되어 많은 수의 동방 수도사와 화공들에 의해 동방 미술적 영향이 서방으로 전해지게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그리스교회의 균열도 또한 심화되어 갔다. 그러나 동방의 성상 부정적 입장은 현재에는 평면회화인 성화(Icon)는 옹호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
‘교권 위에 왕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열광적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손수 공사를 지휘하면서까지 대성당 건축에 관심을 가졌다. 537년 준공, 헌당식에서 대제는 ‘오호! 솔로몬, 짐은 그대를 능가 했도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을 상징하는 건축물로써 그 나라 사람들이 신성시한 성당이다. 1453년 투르크족이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2만 여명의 시민이 이 사원 안으로 피난을 갔다.
성벽이 파괴되자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여러 곳에서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몰려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떠돈 예언이 있었는데 침입한 투르크 군대에게 대성당 앞 광장까지 빼앗기더라도 어떤 구원자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서 받아 쥔 정의의 칼로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의 적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들어와 대성당의 대문을 도끼로 부수고 당내에 침입 황녀, 궁녀, 수녀들마저 노예처럼 포박하여 포악하게 다루면서 시가지를 누볐다.
비잔틴은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고 있으나 온갖 신비주의적 운명론과 기적관 때문에 오히려 자살적인 망국을 자초하였다. 이들은 대성당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신의 집으로 보고 그 영험함을 믿었다가 당한 일화이기도 하다.
이 당시 국제적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거주하던 그리스 계통의 철학자, 문학가, 기술자, 예술가 등이 이탈리아의 북부와 중부에 피난 와서 이주함으로써 르네상스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성 소피아 성당은 이후 투르크인들에 의해 Mosque로 전용되어 이슬람 양식의 탑을 세웠으며 Hagia Sophia라고 부른다.
2) 로마네스크 미술
Roman+Esque의 합성어인 로마네스크는 기독교의 이념과 고대 로마제국의 기성문화를 재건한다는 국시로 시작되었다. 미술사에서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는 일반적으로 ‘로마네스크’라 불린다. 이 시대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사회적 변화를 경험한다. 안정된 농촌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수도원 부흥과 팔레스타인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파견, 성 유물 숭배의 고양으로 잦은 성지순례, 건축의 공법에 관한 기술적인 혁신 등이 그것이다.
로마네스크 시대에는 수도원이 학문과 미술의 중심이었다. 11세기 이후 수도회 내부에서 개혁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 수도원 건설이 잇달았다. 이 운동의 추진력은 베네딕트 수도원계의 크류니회와 베르나르두스에 의해 창설된 시토회의 2대 세력이다. 크류니회는 절정기에 2천 이상의 교회를 두었고 본당은 유럽 제일의 크기를 자랑했다. 두 세력은 미술을 신앙을 보급하는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실천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시토파는 사람의 손으로 하는 노동을 기도의 일종으로 보았다. ‘노동은 기도이다’라는 모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신성한 것’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시종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미술도 일반적으로 검소하였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보다 지적인 삶을 추구했던 베네딕트파는 여러 가지 도상을 구사해서 화려한 색채와 금, 은 보석 등 호화로운 소재를 사용하여 미술을 통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치중하였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석조 천정의 무거운 중량을 지탱하기 위해 벽체를 두껍게 하였고 창을 적게 하였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의 규범을 받아들인 점도 있지만 이교도의 신전의 모양을 성당건축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피사의 대성당이 대표적인 것이다. 회화에서 이 시대의 특징은 예수님을 엄숙한 신의 모양으로, 마리아를 숭고한 신의 모양으로 표현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로마 카톨릭의 두 신에 대한 표현상의 변화를 암시하기도 한다.
∘ 중세 수도원과 미술
로마네스크 시대에는 수도원이 학문과 미술의 중심이었다. 기원후 천년이 지나면서 수도회 내부에서 개혁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 수도원 건설이 잇달았다.
이운동의 추진역은 베네딕트 수도원계 크류니회와 베르나르두스에 의해 창설된 시토회의 2대 세력이다. 크류니회는 절정기에 2천 이상의 교회를 두었고 본당은 유럽 제일의 크기를 자랑했다. 그 어느 회파도 미술을 신앙의 보급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실천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시토파는 ‘신성한 것’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시종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미술도 일반적으로는 검소하였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베네딕트파는 여러 가지 도상을 구사해서 화려한 색채와 금, 은, 보석 등 호화로운 소재를 사용하여 미술의 ‘장엄화’에 힘을 The았다.
수도원은 당대 모든 학문의 산실이 되며 문화예술의 중심이 된 교육기관으로도 많은 역할을 하여 후일의 소르본느(프), 옥스퍼드(영) 등의 대학으로 발전된다.
3) 고딕미술
서서히 로마제국을 잠식해 온 게르만 민족인 고트족의 명칭에서 따온 고딕미술은 로마네스크 문화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성격은 많은 점에서 전 시대와는 대조적이다. 고딕시대는 위엄에 넘친 신의 상으로 표현된 예수상 보다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마리아상이 선호된다. 각지의 주교와 도시에는 성모(Notre Dame, 우리의 성모)에게 바쳐지는 대성당이 연이어 경쟁적으로 건축된다.
로마네스크 시대에는 문화의 담당자로서 수도사와 성직자 등 한정된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는데 고딕시대가 되면 종래의 성직자와 봉건 영주를 비롯하여 도시에 사는 유복한 평신도와 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지식인 등 광범위한 사회층이 참여하기 때문이었다.
12세기 중반경부터 프랑스에서는 파리를 중심으로 각 주교 도시에서 대성당 건립사업이 연이어 시작되었다. ‘신의 집’을 가능한 한 호화롭게 장식하는 일로 신의 영광을 찬미하려 한 이 시대의 건축은 수직적인 구조를 강조하다보니 창문이 강조되게 되고 그 창문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여 실내의 빛이 강조되었다.
중세의 조각은 평면적인 장식부조로부터 등신대 입체 조각상으로 이행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중세 조각은 이 둥근기둥 인물상의 출현에 의해 고대 말기 이래 끊어졌던 입체성을 다시 회복하고 결국 자연스런 볼륨을 갖춘 인물조각이 만들어진다.
12세기 말이 되면 대성당의 시대가 열린다. 성모에게 바쳐진 본격적인 고딕성당이 각지에서 건축되어지는데 전성기 고딕의 대표적 성당건축으로서는 프랑스 파리의 노틀담 성당을 비롯하여 부르주, 샤르트르, 랭스, 아미앵과 영국의 솔즈베리 대성당, 쾰른의 장크토 피에타 대성당 등을 들 수 있다.
아미앵의 노틀담 대성당은 전장이 145m에 달하기까지 한다. 전성기 고딕의 색채예술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커다란 창을 세세하게 분할해서 높은 창에는 주로 성모상과 사도 등의 대형입상 등이 나타나고 문 입구 상부의 장미의 창 등 복잡한 원형구도를 각각 배치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Cathedral St. Marcus Venezia)
비잔틴 미술은 11세기 중엽 이후 로마, 베네치아, 라벤나, 시실리아 등 비잔틴 제국의 거점도시를 통해 서구의 중세 후기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것들 중의 대표적인 것이 성 마르코 성당이다. 이 성당의 건축에 관한 자료들을 잘 살펴보면 중세 후기의 종교적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마르쿠스는 신약성경의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네로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70년경 로마에서 별세했다고 한다. 당시의 교인들은 마가의 유해를 그가 세웠던 알렉산드리아 교회당에 옮겨와 그곳에 안치하였는데 이 유해를 829년 베네치아의 상인이었던 성도가 베네치아로 옮겨와 그의 명복을 빌고자 건설한 것이 성 마르쿠스 대성당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당시의 성당건축과 무덤의 연관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연관성은 기독교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교적인 것이며 바벨론의 문화인 것이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계 18:2)
소위 성인들의 사체숭배는 트렌트 회의에서 결정되었는바, 이 회의에서 “충성된 자들은 거룩한 순교자들의 거룩한 몸들을 숭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몸들을 통해 사람에게 많은 축복을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도들의 유물에 합당한 경배와 존귀를 돌리지 않는 자들은 교회가 오래전부터 정죄하였고 현대도 또한 정죄하고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단죄되어야 마땅하다”(카톨릭 백과사전 12권, p.734, ‘유물’ 항)
이때부터 성 유물숭배가 본격적으로 성행케 되었는데 이것의 이면에는 상업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교황 보니 파시오 4세가 609년쯤 만신전(Pantheon)을 교회당으로 바꾸었을 때 “28대의 마차 분의 뼈들을 카타콤에서 옮겨 주제단 밑인 프로피리(Prophyry)에 두도록 했다고 한다.”(카톨릭 백과사전 2권 p.661, ‘보니파시오 4세’ 항)
787년에 니케아(Nicaean)회의는 주교들에게 유물이 없는 채로 건물 헌당을 금지하였다. 그러므로 성당은 누구의 무덤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엄청난 종교적 영향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권위가 가장 큰 것도 그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수제자였기 때문이다. 상업도시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던 베네치아는 신앙의 순수성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그 격이 맞지 않는 지역이다. 그들은 그 당시 제국의 일반적인 종교 현상으로 기독교를 수용하였으며 다른 나라들을 압도할 종교적 상징물이 필요하였는데 이미 당시의 많은 도시에서 성인들의 유해를 앞세웠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마가의 유해는 그들의 종교적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유해이기도 했다. 그들은 마가를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섬기며 야심차게 대성당을 건축하였다. 이른 바 ‘베네치아의 성 마가 성당이냐 성 마가 성당의 베네치아냐’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베네치아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비해 지명도가 비교가 될 수 없이 낮았기에 장사술에 뛰어난 베네치아인들은 이 성당 건축을 통해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할 만한 건축을 짓고자 노력한 것이다.
베네치아인들은 종교를 자신들의 삶을 살찌우기 위한 부속적인 행위의 차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국가의 정치적 협상에서 종교나 명예와 명분에는 항상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으나 개인의 상업적 이익과 사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데는 일보의 양보도 하지 않는 장사꾼다운 기질이 강하였다. 이러한 베네치아인들의 기질은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을 통해서도 잘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에서도 교권 수호의 성전으로 여겼던 주위의 나라들과는 달리 군수품 제공과 수송에 관한 대가를 계산하기에 바빴다. 그러므로 이웃 나라들과도 그들의 이익에 손해가 오면 약속을 어기거나 말을 바꾸기도 많이 했다. 그래서 당시의 로마 카톨릭교에서는 베네치아의 비종교적인 처사를 공격하였고 베네치아도 이에 그들의 물질적인 부를 이용하여 반항하였다. 이러한 긴장관계가 깊어질수록 베네치아인들은 더욱 성 마가 성당을 크게 증축하여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능가하여 그들의 종교적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성 마가 사원에는 독특한 건축양식이 혼합되게 되고 외양에 있어서도 화려함의 극치를 추구하게 된다. 이들의 종교적 내면세계는 건축에서 잘 드러나는데 기존의 Dome에다가 이슬람교의 사라센 양식의 Cupola를 덧씌우고 14세기에는 고딕식 첨탑을 첨가하였다. 이것들은 건축의 기본을 무시한 욕심을 덧붙인 것이며 평면도의 계획성과 공간의 구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이들은 같은 동맹국들인 비잔틴 제국을 자기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궁지로 몰아넣어 버렸듯이 이교적인 사라센 건축양식(Mosque style)을 성당에 덧붙이는 데에도 아무런 내면적 갈등이 없었던 듯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페니키아(Phoenicia)와 비잔틴의 베네치아(Venezia)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십자군 전쟁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카톨릭 신자들과 모슬렘들 그리고 서로마 라틴교회와 동 비잔틴 교회 사이의 증오와 적대심은 깊어갔다. 십자군 원정의 사건들과 이 때문에 발생했던 유혈극은 쉽게 잊혀 질 수 없었다.
서부유럽에서 십자군 원정과 스페인 재정복은 교황의 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자군 원정을 주도하고 그 지도자들을 임명한 것은 교황들이었다. 이노센트 3세 당시 제 3차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을 때에 교황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십자군 원정은 당시의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지 순례는 일생의 신자들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성 유물들(relics)이 유럽에 들어옴에 따라 성 유물숭배 역시 가열되었다. 수많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을 가진 유물들이 쏟아졌다.
군사적 수도회의 설립에 따라 수도원의 이상도 새로운 방향, 즉 성 십자가 숭배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청빈, 순명, 순결 등 전통적 서약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명상 혹은 성경연구에 시간을 보내는 대신 전투를 위주로 하는 투사들이었다. 예루살렘의 성 요한 수도회(후일 말타로 본부를 옮김), 템플(Templars) 기사 수도회 그리고 기타 수도회들이 성지에서 창립되었다. 스페인에도 이와 비슷한 칼타트라바, 알칸타라, 산티아고 등의 수도회들이 존재하였다. 십자군 원정이 종식된 오랜 후에도 이러한 수도회들은 계속 존재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였다.
십자군들은 또한 카톨릭 교회가 명명한 이단들에 대한 대항에 이용되었다. 남부 프랑스 및 이탈리아 일부지역에서 일어난 카타리파(Cathars), 알비파(Albigensians)등으로 불린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회사에서 흔히 마니교도로 단정하여 버리기를 잘하는데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주장한 무리들이다. 그들의 지도자 가운데 특출한 사람이 피에르 드 부르에이스(Pierre de Brueys)였다. 그는 20년 동안 모든 위험에 용감하게 대처한 능력 있고 근면한 설교자로서 마지막에는 화형을 당해 죽었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이성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연령까지는 어느 누구도 침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어디에서든지 진실된 예배를 받으심으로 애써 교회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십자가는 주께서 고통당하신 도구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것을 숭배하여서는 안 되고 오히려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과 또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이라는 사실과 기도나 선한 행실 등이 죽은 자를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 등을 제시해 보였다.
클루니 수도원의 수도사 앙리(Henri)가 그와 연합하였고 많은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죄악에 대해 절규하는 그의 선포와 설득력 있는 성경주석, 하나님께 대한 정열과 헌신 등은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고 믿음을 갖도록 하였다. 회개하고 변화된 그들 중에는 악명 높았던 자들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자주 ‘선한 사람들’(Good man)이라고 불렸는데, 사실 그들의 생활태도가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특히 그들의 순수성과 경건은 성직자들의 거만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이들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이단으로 명하고 십자군으로 양성된 기사단에게 성전(聖戰)을 선언하였다. 이 기사단들에게는 면제부가 제공되었고 전리품과 많은 특혜를 보장해 주었다. 고위 성직자들의 주도아래 그리고 무한한 야심과 말할 수 없는 잔인함을 소유한 기사 시모드 몽포르의 지휘아래 이들은 죽음을 당했다. 기사들은 그들에게 카톨릭 신앙으로 개종을 하든지 화형을 처하기 위한 장적더미 위에 올라가든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때 그들은 ‘우리는 교황이나 사제의 권위는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 불더미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이 지역에 그 후 도미니크단의 종교재판소가 설립되었다(1210). 그때 뚜루즈회의(1229)에서 라틴어 시편을 제외한 성경은 평신도들에게 금한다는 영구적인 계율과 그리고 성경의 어떠한 부분도 그들 자신의 언어로 번역되어질 수 없다는 교령이 내려졌다. 종교재판소는 악명 높은 소위 이단박멸정책을 펼쳤다.
십자군 전쟁의 산물인 기사단(Knights)은 군대가 가지는 절대적 복종의 정신으로 적을 무찌르기도 했지만 참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데도 앞장서게 되었다. 그들의 충성의 대상이 사악한 지도부일 때 그들은 가장 잔인한 악의 도구가 되면서도 그들의 체제 속에서는 가장 충성스러운 군대가 되는 것이다.
무기를 든 수도사들의 수도회로서 십자군은 카톨릭 교회의 이상과 호전적 이상의 혼합을 상징하였다. 십자군 운동의 주된 수혜자는 중세 교황이었다. 교황의 권위와 위험은 이런 원정들에 의하여 크게 강화되었다. 교황들은 카톨릭 세계의 수호자로서 이교도들에 대항하는 통일된 카톨릭 세계의 주창자로서, 십자군의 보호자로서, 그리고 서방의 군사적 자원을 조직하는 사람으로서 돋보이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은 또한 면죄부의 이론과 실행에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그러면서 십자군 기사단들도 큰 부와 세력을 가진 집단이 되었다.
교황 클레멘트 5세(1305~1314)는 재위기간 중 템플기사단과 충돌이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템플기사단은 십자군 원정기간 중 창립된 기사 수도회였으므로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수도회였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막대한 전쟁의 대가로 받은 재산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이 전통적 귀족들보다 강력하게 통치하고자 하였을 때 템플기사단의 부와 세력은 중앙집권화 정책에 거슬리는 장애물이었다. 템플기사단은 직접 세속권력의 명령계통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이들을 이단으로 몰기로 계획하고 교황 클레멘트에게 압력을 가해 기사단의 재산을 프랑스 국고에 귀속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프랑스 국내에 있던 모든 템플기사단원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고문을 이기지 못한 몇 사람은 사실은 자기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적하는 비밀결사로서 예배 중에 우상숭배를 하며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을 뿐만 아니라 동성연애자들이라고 고백하였다. 대부분은 고문과 악형에도 굴하지 않았으나 이를 이기지 못했던 몇 회원들의 자백을 기초로 재판을 수행했다. 템플기사단원들은 교황이야말로 자기들을 보호하고 자기들에게 가해지는 불의를 응징해줄 인물로 믿었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정반대로 행했다.
템플기사단은 그리스도의 가난한 군사들(Poor Fellow Soldiers of Christ)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기사단은 1119년 아홉 명의 프랑스 기사들이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데 헌신하기로 맹세하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이 가담하였고, 그들은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 위협을 느낀 필립 4세는 14C 초에 그 기사단을 해체하고자 하였다. 교황 클레멘트 5세 역시 그 기사단을 반대하였고 1314년 그들의 최고 통솔자인 자크 드몰레이가 화형에 처해졌다.
대부분의 템플기사단원들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 후 소위 자기들의 죄악상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이 사건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여러 인사들의 입을 막는다는 구실로 Notre Dame 성당으로 이송되었던 기사단원들은 그들의 자백들을 취소하고 일체의 고발혐의는 허위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날 이들은 화형을 당했다. 기사단과 교황의 관계를 여기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은 이후에 재현되는 기사단과 연관되는 인물 로욜라와 반종교개혁의 연관성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은 극에 달하는데 모든 세상의 권력과 종교적 권력을 소유한 교황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 같은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서 성직매매, 면죄부 발행, 성적타락, 물질숭배 등의 추악한 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로마 교향은 지상에서 있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선언했으며 교황 보나바키우스 8세(1294~1303)는 ‘Unam Sanctam’이라는 유명한 대칙서를 발표하면서 모든 인간의 구원은 교황으로부터 나오고 세속권세의 뿌리는 교회이다… 모든 피조 된 인간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구원에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13세기는 중세 문명의 전성기였다. 이노센트 3세 때에 교황의 권력은 최정상에 달하였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가장 암흑의 시기이기도 했다. 교황의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특성을 보여주는 현저한 실례는 독일 황제 하인리히 14세에게 행한 조치였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권위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파문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폐위의 선고까지 받았다. 그는 교황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자 황후와 충실한 한 시종을 데리고 한 겨울에 험한 알프스산을 넘어 갔다. 그리하여 당시 교황이 거하던 성에 도착하자 호위병 하나 없이 궁전의 바깥뜰에 이끌려 나아가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몸에는 변변치 못한 옷을 입은 채 맨발로 추위에 떨면서 교황의 면회가 허락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일 동안 금식과 자복이 있은 후에야 교황은 그를 사면하였다. 이에 교황은 의기양양하여 군주들의 교만을 꺾어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자랑하였다.
이처럼 오만불손한 교황의 태도를 마음문 밖에 서서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고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태도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대조적인가?
국가주의(Nationalism), 전쟁, 대 역병, 부정부패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침략 등이 13세기가 이룩하였던 꿈을 무너뜨리면서 근대에 이르는 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중세를 되돌아보면 중세인들은 큰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심의 열심히 그들을 지배하였다. 인간의 이익과 안녕을 위하여 신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용하는 것이었다. 참 기독신앙은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의 뜻에 인간의 의지를 내려놓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성경이다. 말씀을 떠나서 종교적 열심을 낼 때 그것은 신앙이 아닌 종교적 열성을 가장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롬 10:2~3).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듯하나 사람의 기준과 방식으로 자기가 정의한 대로 자기의 취향을 따라 자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는 많은 경우 위와 같은 오류에 빠져있었다.
4. 진리의 여명
로마 카톨릭이 장기간에 걸쳐 지배하고 있는 동안 이 세상은 암흑으로 덮여 있었지만은 진리의 빛은 아주 소멸되지 않았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증인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성경을 인생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소수이지만 남아 있었다. 남은 자들! 좁고 협착한 길을 걷는 사람들 이들이 또한 ‘이기는 자’(계2:26)들이기도 하다.
이들 중의 대표적인 한 무리가 왈덴스인들이다. 왈덴스인들의 신앙은 몇 세기 동안 로마교에서 나온 교리와 현저히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의 신앙의 지침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었다. 그들은 유럽의 여러 백성들 중에서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수백 년 전에 벌써 자국어로 필사한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로마 교회를 요한계시록에 있는 타락한 바벨론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서 첩첩이 쌓인 산간지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진리를 위해 압박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된 산간지대에서 그들은 은신처를 얻었으며 이곳에서 중세의 암흑을 뚫고 진리의 빛을 비추어나갔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환난을 견디고 통제에 복종하고 진리를 위하여 세속적 번영과 유익을 다 버리고 꾸준한 인내로써 자급자족하기를 배웠다. 그들의 궁핍은 수고롭고 고달팠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가장 좋은 영적훈련소를 제공했다. 그들은 모두가 깊이 있게 성경을 연구하였고 그 속에서 발견한 진리들로 더 이상 그들의 생활을 한탄하지 않았다. 로마교는 그들의 삶과 신앙이 자신들과 너무나 대조되었으므로 더욱더 그들을 박해했다.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들이 파견되었다. 그들을 접해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온유하고 조용하고 아무런 책잡을 것이 없는 경건한 백성들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도 귀중한 진리를 선포하였고 전도자들을 파송하였다. 그들은 잡혀서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들의 피는 도리어 이미 뿌린 씨에 물을 주게 되어 결실을 가져다주었다.
루터가 나기 수세기 전에 그들은 종교개혁의 토양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핍박 때문에 여러 나라로 흩어진 그들의(행 8:1) 가는 곳곳에서 진리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이미 진행 중에 있었던 것이다.
1) 존 위클리프(John Wicliff, 1324~1384)
위클리프에 의하면 일체의 합법적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권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른 특성을 지녀야 한다.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일체의 통치형태는 진정한 통치가 아니라 차라리 반역이다. 또한 아무리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그 권위의 한계를 벗어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지배형태에 관해서도 동일한 비판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나 혹은 영적문제의 한계를 벗어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교회의 권력도 비합법적인 것이다.
교황제도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시대에 제도권 내에서 이러한 소리를 지를 수 있었던 자가 위클리프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황 및 그의 눈에 보이는 유형적 계급제도가 아니라, 미리 구원받도록 택정함을 받은 자들로 이루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몸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 말기에는 교황마저도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 가운데 포함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성경은 교회의 소유이며,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성경을 소유한 교회는 모든 택정함을 입은 자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이며 따라서 성경은 바로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되어 그들의 손에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론에 의하여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그가 사망한 후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제도권 안에서 이와 같이 교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를 없애고 싶었으나 그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40여년 후에 열린 콘스탄스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에 던져 버렸다.
그 사실에 대하여 옛날의 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냇물은 그 재를 아본시내로, 아본시내는 세버언강으로, 세버언강은 영국해협으로, 영국해협은 대양으로 옮겨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있는 그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있다. 로마교는 그들의 행위로 인해 이 염병이 끊어질 줄 알았으나”
보헤미아의 존 후스(John Huss)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버리고 개혁에 동참한 것이 위클리프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2) 존 후스(John Huss, 1369~1415)와 보헤미아의 개혁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 지방인 보헤미아 지방에서 발생한 개혁 운동의 불길을 결코 로마교는 진압할 수 없었다. 그 지도자는 유명한 설교가요 학자로서 1402년에 프라하대학교 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존 후스였다.
그는 교황들이 교회의 복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사리(私利)를 위해 행동할 때에도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지니는가 의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성경이야말로 교황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궁극적 권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후스의 입장은 다소 강경한 종교회의주의자들의 입장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교황 요한 23세는 주로 이탈리아 정치에 관련된 문제 때문에 나폴리를 공략할 것을 선언했으며 이를 위한 군자금을 면죄부 판매를 통해 지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뒤였다. 따라서 면죄부 발행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그는 보았다. 당시 교황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국왕은 후스에게 침묵을 명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그의 입장은 널리 알려졌으므로 많은 군중들은 교황청의 착취에 대해 반대하는 공개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요한 23세는 재차 후스를 파문했다. 그는 그의 조국 전체를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프라하와 강단을 떠나 시골에 은거하면서 시급한 개혁을 위해 필요한 저술을 계속했다.
1415년 후스는 공의회 앞에 불려갔다. 공의회 지도자들은 그가 이단사상을 철회하기만 한다면 방면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만약 누군가가 자기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길가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자기의 저술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기둥에 묶였을 때 이들은 그에게 그의 견해를 철회할 마지막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주 예수님 당신을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불평 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라고 큰 소리로 기도했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시편을 낭송하는 것을 주위 사람들은 들을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보헤미아에서 가장 유명한 위클리프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콘스탄스에서 후스와 합류했던 그의 동료 프라하의 제롬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사형집행관들은 재를 모아 호수에 뿌려 버림으로서 이들의 흔적이 일체 남지 못하도록 하였다. 보헤미아인들은 분노에 떨었으며 거의 만장일치로 공의회를 부인했다. 452명의 귀족들이 모여 자기들은 후스의 신념에 동조함을 엄숙히 맹세했으며 자격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소란과 투쟁과 유혈사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끝까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한 사람들은 지독한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기존 로마교회를 떠나 유니타스 플라트룸(Unitas Fratrum), 즉 연합된 형제들(Union of Brethren)이라는 동굴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드리기 위해 함께 모였다.
이들의 숫자는 보헤미아에서 뿐만 아니라 인근 모라비아 지방에서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또한 알프스산중에 있었던 왈덴스인들과도 교통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 후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들과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 직후 로마 카톨릭주의의 강력한 지지자들이었던 합스부르그 출신 황제들이 이들을 박해하였다.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들을 영도했던 코메니우스(1592~1670)는 유배지에서도 계속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며 진리의 빛이 확산되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그의 소망은 결국 그가 사망한 후 달성되었다. 유니타스 플라트룸의 잔류세력은 그 후 교회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모라비아파’(Moravians)로서 계속 생존하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잔류세력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게 되었다.
5. 르네상스
1)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미술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을 의미하는데 그 재생의 목표는 Greece, Rome 즉 고전문화였다. 중세라는 거짓으로 뒤덮였던 로마 카톨릭교의 종교적 억압은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러한 거부감은 인본주의에 뿌리를 둔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을 그 탈출구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타락된 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떠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고대 고전(Classic) 문화의 전면적인 부활은 15세기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미술은 단순히 그리스, 로마 미술의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성 회복’을 구했으며 사실성과 이상성이 합치된 고대 조각에 대한 관심도 인간의 존엄을 재인식하려는 현상이었다.
직공의 지위로부터 벗어나려는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학문적 노력과 예술이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알베르티(1402~1472)의‘의지만 있으면 인간은 뭐든지 얻을 수 있다’라는 말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의 세계관은 시민계급이 급성장했던 중부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피렌체에서 가장 먼저 싹이 텄다.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은 많은 미술적 발전을 가져왔으나 그로인해 사람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에 관심을 집중해갔다. 인본주의와 물질주의는 쌍둥이처럼 나란히 성장하게 되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본주의 사상의 배후에 사탄의 영적인 음모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겔 28:1~26, 사 14:12~14, 살후 2:4).
공화국이던 피렌체는 금욕적이고 견실한 공화정의 이상이 사라지고 부유한 상인이 도시의 권력을 독점해간다. 피렌체의 최대부호인 메디치가(家)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져갔다. 메디치가는 몇 대에 걸쳐 피렌체를 통치하는데 피에르 드 메디치, 로렌쪼 레 메디치(the Magnificent)의 아들 조반니 메디치는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왕비 카테리나 메디치와 마리 메디치도 이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교권과 왕권과 상권을 모두 거머쥔 이 부유한 가문의 예술적 취향은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은 대부분 예술의 열렬한 후원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최고의 예술가들을 로마로 끌어들여 장려하고 아름다운 저택과 성당과 기념물들로 도시를 장식함으로써 가히 기독교권의 수도다운 모습을 이루는 것을 커다란 목표로 생각하였다. 미술사적으로만 보면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 작품들이 생산된 시기가 르네상스 시대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작케 하고 후원한 교황들의 면면을 보면 가장 타락된 종교의 시대가 이 시기이기도 하다. 신앙과 미술의 관계가 이와 같이 어려운 자체적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2)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
니콜라스 5세(1447~1455)는 재위 기간 동안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보다 로마가 정치적으로 보다 우세한 위치를 점유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로마가 유럽 전체의 지적인 수도가 될 수 있도록 당대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과 저술가들을 초청하였다.
그의 계승자는 칼릭스투스 3세(1455~1458)로서 스페인의 보르야 가문에서 배출된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는 르네상스의 이상으로부터 위대한 세속적 군주가 되고자 하는 야망만을 이어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군사작전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재위기간에 족벌주의가 극치에 달하였다. 그가 고위관직에 등용한 많은 가족들 가운데는 그의 손자 로드리고도 있었으니, 이 사람은 그 후 악명 높은 알렉산더 6세로서 교황직에 오르게 된다.
교황 피우스 2세(Pius Ⅱ, 1458~1464)는 자기의 직분에 충실하고자 애쓴 흔적을 보여준 마지막 르네상스의 교황이었다. 그는 비록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으나 최소한 교황직을 자기나 가족들의 세력을 증가시키는데 사용하지는 않았다.
바울 2세(1464~1471)는 삼촌이 교황(유게네 4세)으로 즉위하자 교회를 통해 출세하는 것이 쉬울 것을 깨닫고 생업이던 상업을 버린 후 성직의 길을 택한 기회주의자였다. 그의 관심은 예술품, 특히 보석들과 금, 은 공예품을 수집하는데 있었다. 그의 사치와 향락은 거의 전설적인 경지에 달했으며 그의 첩들은 공공연히 교황청을 드나들었다. 그는 고대 이교 로마의 기념물들을 복고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당시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지나치게 색을 탐한 나머지 중풍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식스투스 4세(Sixtus Ⅳ, 1471~1484)는 추기경들에게 막대한 금품을 주고 교황직을 매수한 자였다. 그의 재위기간동안 부정부패와 족벌주의는 전대미문의 경지에 달하였다. 그는 자기 일족, 특히 다섯 명의 조카들의 재산을 증식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 조카들 가운데 하나가 그 후 율리우스 2세라는 이름으로 역시 교황직을 차지하게 된다.
식스투스 아래서 교회는 사유기업화 되었으며 전체 이탈리아는 교황의 조카들이 벌이는 끊임없는 전쟁과 음모들 속에 말려 들어갔다. 그가 가장 총애했던 조카 피에트로 리아리오는 겨우 26세에 추기경직,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직, 그리고 피렌체 대주교직을 한꺼번에 차지하였다. 또 다른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메디치 가문의 한 사람을 미사 도중 성당 안에서 살해할 정도였다. 살해당한 메디치가의 친척들이 하수인이었던 사제 하나를 교수형에 처하여 복수하자 교황은 피렌체시 전체를 파문시키고 이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는 자기의 조카들과 그 추종자들의 막대한 경비를 염출하기 위해 밀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최상급 곡식들을 팔아서 교황 일족이 치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로마 시민 전체가 굶주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람들은 식스투스를 그의 이름을 본 따 명명된 시스틴 성당(Sistine Chapel)을 건축한 이로 기억하고 있다.
이노센트 8세(Innocent Ⅷ, 1484~1492)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자기의 친족들 가운데 한 명 이상을 고위 성직에 임명하지 않을 것과 로마시의 질서를 회복할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황에 오르자 교황의 권력이야말로 지존한 것이므로 그 어떤 서약에도 얽매이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기의 사생아들을 공공연히 알리고 이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관직들을 하사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의 아들 중 하나가 관리하는 가운데 면죄부의 판매는 창피한 줄 모르는 수입원이 되었다. 그는 1484년 기독교권 내에서 모든 마녀들을 제거하겠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는데 이 때문에 수백 명의 무죄한 여인들이 살해당하였다.
이노센트가 죽은 후 로드니고 보르지아가 추기경들의 표를 매수하여 알렉산더 6세(Alexander Ⅵ, 1492~1503)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었다. 그의 시대의 교황청의 부패는 극에 달하였다. 그는 탐욕과 정욕으로 가득 찬 인물로서 성경에서 금하는 모든 죄들을 공공연히 자행하였는데 단지 탐식만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그는 소화불량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시민들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알렉산더는 천국에의 열쇠나 제단, 심지어 그리스도까지도 기꺼이 돈을 받고 팔아넘길 것이다. 이는 그의 당연한 권리이다. 왜냐하면 그는 돈을 주고 이들을 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6세는 예기치 않게 급사함으로 그의 후계자는 이탈리아에 평화를 가져오고자 하는 개혁의지를 지녔던 인물 피우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겨우 26일 만에 병명 미상으로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가히 알렉산더 6세의 후계자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삼촌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었던 율리우스 2세(Julius Ⅱ, 1503~1513)는 기독교 성자가 아니라 줄리우스 시저를 모형으로 하겠다는 의미에서 그 칭호를 택하였다. 당시의 많은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예술의 후견인이었다. 그의 교황 재위 기간 동안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성당의 그림들을 완성하였으며 라파엘은 뛰어난 프레스코화들로 바티칸 성당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율리우스가 무엇보다도 즐긴 것은 전쟁과 약탈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고 전해지는 화려한 복장으로 교황 친위대를 옷 입힌 후 전쟁터로 이끌고 갔다. 그는 외교적 수단과 병법에 뛰어난 인물로서 어떤 이들은 율리우스가 마침내 이탈리아를 통일시킬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율리우스는 외교와 전투를 통해 이들 모두를 패배시켰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폭군(Terrible)’이라고 불렀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유명한 로렌쪼(Magnificent)의 아들, 지오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로서 그는 레오 10세(Leo Ⅹ, 1513~1521)라는 칭호를 택하였다. 그가 재위한 시기는 종교개혁의 시기와 겹쳐진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레오 역시 예술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그는 또한 율리우스 2세가 이룩한 정치적, 군사적 유익들을 보다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실패하여 1516년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레오 10세의 관심은 교회에 관한 것보다도 예술과 사치에 있었다. 그는 특히 로마에 소재한 거대한 성 베드로성당을 완성하고자 하는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자금의 조달을 위한 무분별한 면죄부 판매는 결국 그 후 루터(Luther)에 의해 저항을 맞게 된다.
그는 문예부흥운동을 실질적으로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 미술, 연극, 건축 등 모든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여 로마를 서방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여러 가지 문제와 음모로 시달리자 족벌주의 정책을 펴나갔다. 피렌체의 대주교 쥴리오 데 메디치를, 동생 쥴리아노와 조카 로렌쪼는 로마의 귀족 가문(Partricia Romana)에 임명하였다.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쥴리앙상은 이들의 무덤을 장식한 것이었다.
성 베드로성당의 신축과 문예부흥 증진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요한 테첼 신부를 내세워 자금을 모았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는 직접적으로 테첼의 강론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95개조의 요약이 1518년 초에 로마에 보고되었다. 교황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총장에게 루터를 잠잠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루터에게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왕이 있었다. 요한에크와 루터의 토론이 있은 후 교황이 칙서로써 루터의 95개조 중 41개조를 단죄하자 루터는 그 해 12월 그 칙서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1521년 교황은 그를 파문하였다. 교황은 루터를 반박하여 7성사를 쓴 영국의 헨리 8세에게 평화의 수호자(Pefensor Pacis)란 칭호를 내렸다.
3) 르네상스의 파급과 전개
15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 피렌체에서 꽃핀 르네상스운동은 이탈리아 여러 도시로 파급되어간다. 특히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만토바의 테스테 등 인문주의적 교양을 갖춘 군주의 정치로 풍부하고 결실 있는 문화예술 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된다.
특히 페데리코는 자신을 그림 속에 등장시키는 많은 작품들을 오늘날에도 남기고 있다. 현재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몬테펠트로 제단화에는 마리아와 성인들 앞에 갑옷을 입고 무릎을 꿇고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페데리코가 그려져 있다.
중세 이래 마리아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이 교회를 상징하였다. 그래서 당시 성당 안에는 거대한 마리아를 많이 그렸다. 이 그림에는 교황에게 충성함으로써 그는 공작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게 되고 외교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우방 세력이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교회를 상징하는 마리아 앞에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 페데리코를 봉헌 자세로 배치함으로써 로마 교회 즉 교황을 기사도로써 수호하는 페데리코의 충성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이 그림 속에 깔려있다.
현재 우르비노의 마르케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또 다른 그림 「페데리코와 아들 구이도발로의 초상」이 한 그림 속에 그의 모든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위의 그림에서 마리아의 머리 위에 있는 알은 그에게 아주 귀한 외동아들인 구이도발도의 출생을 상징하기도 했는데 갑옷, 책, 아들의 홀, 미트라 모자 등이 이 초상화가 특별한 목적 하에 그려졌음을 짐작케 한다.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용병 집안출신인 페데리코는 책과 갑옷을 그림 속에 등장시켜 문무를 겸비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자신을 후세에 기억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왼쪽 선반 위의 보석이 빽빽이 박힌 미트라(Mithras) 모자는 페르시아의 미트라 신과 연관된 것으로 페르시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나타내며 털가죽 스롤은 페데리코가 나폴리 아라곤 가의 허락 하에 입단한 에르몰린 기사단의 상징이며 또한 긴 망토의 왼쪽 다리 부분만 걷음으로써 갑옷의 무릎 장식을 보여주고 있다. 무릎 아래에는 금으로 수놓고 보석이 박힌 파란 띠가 보이는데 이는 페데리코가 영국의 에드워드 4세의 권유에 입단한 자에티에라 기사단의 상징이다. 두 기사단의 상징과 미트라를 그려놓음으로써 페데리코는 자신의 외교범위가 전 유럽과 동방에까지 걸쳐 있음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의 주문자의 요구와 작가의 창의력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 그리스 문화와 로마 카톨릭
초기 르네상스시기를 대표할 만한 대작은 고대 신화에서 주제를 취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비너스는 그리스의 아프로디테와 같은 로마의 여신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에 전면에 다시 부활한다.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신화의 공존은 르네상스 미술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앞으로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데에 가장 앞장섰던 메디치 가문은 고대 그리스 조각품 수집과 신플라톤주의 철학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교황 식스투스 4세 때 만들어진 시스틴 성당의 교황서명실의 벽화에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조로아스터까지 묘사되어 있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그려진 것과 똑같이 대칭되게 삼위일체와 사도들이 그려진 「성체논의」가 대형화면에 그려진다. 피렌체 시청사 입구에는 「다윗」과 「헤라클레스」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다신교이면서 인본주의 사상의 발원지인 그리스의 문화와 일신교이면서 신본주의 사상의 발원지인 기독교가 통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헬라사상과 기독교의 혼합주의 사상을 일찍이 예견한 터툴리안은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이들의 분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은 이들이 통합되어 가는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그 결과 가장 외형적인 종교국가이나 가장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의 문화가 창궐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바벨론화가 이루어져서 참 진리의 맛을 잃게 된 것이다.
5)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vs 메디치
1490년 피렌체의 주인 로렌쪼 메디치의 초청을 받고 도미니크회 수도사 사보나롤라는 33세에 피렌체를 방문한다. 사보나롤라는 성 마가 수도원에 가입한 후 동료 수도사들에게 성경을 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많은 사람들의 강해 요구를 받았으며 그의 강연은 설교로 변하기 시작했다. 1491년 사순절에는 피렌체의 가장 큰 성당에서 설교를 부탁받을 정도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서 행하였던 당시의 사회악에 대한 비판,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의 생활과 향락에 찬 사치의 대조 등은 많은 유력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 특히 로렌쪼 데 메디치는 이에 분노하여 사보나롤라를 공격할 설교가를 고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피렌체 시민들이 사보나롤라를 옹호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사보나롤라가 성 마가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일부 수도사들은 이러한 경우 로렌쪼를 찾아가야 한다고 귀띔을 해주었으나 그는 로렌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직책을 맡았다고 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는 수도원의 재산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또한 수도원 내의 생활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시민들은 곧 수도사들의 변화한 경건한 모습과 봉사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다른 수도원들도 곧 개혁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로렌쪼 마저도 임종 시에 사보나롤라에게 최후를 지켜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나 로렌쪼의 뒤를 계승하였던 피에트로 데 메디치는 피렌체인들의 신망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찰스 8세는 나폴리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남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찰스의 진로에 위치하였던 피렌체의 방어에 자신이 없었던 피에트로는 뇌물을 주려고 작정하였다. 이에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가 이끄는 일단의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피에트로를 시에서 추방하였다. 찰스가 피렌체에 입성하여 터무니없는 보상을 요구하였을 때에 사보나롤라가 중재에 나서서 이를 해결함으로써 피렌체의 시민들은 프랑스의 동맹자가 되었다.
당시 사보나롤라의 신망은 찰스와 그의 군대들이 떠난 후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정부 형태에 대한 자문을 받을 정도였다. 그가 추천한대로 이들은 공화정제를 수립하고 침체상태에 빠졌던 경제 부흥에 열을 올렸다. 그는 또 교회들이 소유한 금과 은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때가 사보나롤라가 주창하였던 개혁운동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흔히 그는 열광적이고 무지한 수도사로 묘사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학문 연구야말로 필요한 개혁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지도 아래 성 마가의 수도사들은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고 갈대아어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당시의 부유한 자들이 추구하였던 사치와 향락이 허영이라고 생각하고 물질을 향한 탐욕이야말로 그가 비난하였던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따라 그의 영도 아래 정기적으로 ‘허영의 화형식’(Burning of Vanities)이 거행되었다. 중앙 광장에 화약을 친 짚단과 장작들이 모아지고 그 위에 시민들은 그들의 허영들 즉 사치스러운 의복, 보석, 가발 그리고 값비싼 가구 등이 버려졌다. 그 후 찬양과 행진 등이 행해지는 가운데 이것들을 불살라 버렸다. 개혁운동을 통해 금지되었던 카니발 대신에 이러한 불꽃이 피렌체를 정화했다.
때때로 역사학자들은 사보나롤라가 그림과 조각상들을 죄를 유발하는 물건이라 하면서 태워 없앴다는 사실이 곧 그의 전반적인 예술에 대한 견해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의 ‘설교(sermons)’에서 나오는 구절들을 보면 사보나롤라가 비록 그릇된 종류의 예술이 나쁜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지만 올바른 예술이라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글과 가르침을 통해 알렉산더 6세의 세속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교황권을 공박했고 중세의 생활방식 및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순수성을 부분적으로나마 부흥시켜보려는 의도를 과감히 표명했다. 그에 의하면 그림은 관객에게 좋든 나쁘든 그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므로 모든 불경스럽고 세속적인 그림들은 마땅히 교회 안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보나롤라는 이러한 요구를 하면서 재미있는 추가 사항을 하나 덧붙였다. 즉 관객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만한 못 그린 그림 또한 모두 교회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대가들만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그들의 주제는 적절해야 한다. 이 구절에서 사보나롤라는 예술적인 자질을 크게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사보나롤라의 몰락은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상 최악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더 6세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피렌체의 입장으로는 교황 측에 가담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찰스 8세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교황은 우선은 사보나롤라 개인, 그리고는 전체 도시에 대항한 조처들을 취하였다. 얼마 안 되어 피렌체 사람들은 사보나롤라가 주장하는 신의 때문에 자기들의 교역에 막대한 피해가 올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피렌체 시민들의 이기주의적 근성들은 신의보다도 실리를 추구하면서 마침내는 사보나롤라를 대적하는 집단으로 변했다. 교황은 이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사보나롤라를 이단이요 분파주의자로 몰아 사보나롤라와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의 추종자를 교수형에 처한 후 화형 시켰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제도권 안에서 개혁을 이루어보려고 일어섰던 개혁자는 이렇게 최후를 맞고 말았다.
∘마리아 숭배
르네상스시대 회화의 주된 주제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중세시대 Icon으로 그려졌던 마리아상은 이 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전개되는데, 특히 주문자의 초상화가 마리아 앞에 경배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성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마리아는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성 모자상의 경우 아기는 발가벗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어머니는 근엄한 모습으로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서 마리아가 중심이 되는 신앙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아기는 아직 어머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젖먹이 수준으로 나타냈기 때문에 자신을 몸을 가누기도 벅찰 정도의 아기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뒷모습만 보이는 경우도 있다.
자애로운 어머니와 아기의 모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종교들에서 이어져오는 모자상 숭배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로마 카톨릭은 종교 혼합주의적 특징들이 성 모자상 숭배에서 또 한 가지가 발견된다. 모자상 숭배는 고대 바벨론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하나의 국교적 경배로 발전되었다. 바벨론의 수많은 기념비들에서 어머니 여신 세미라미스(Semiramis)가 그 아들 담무스를 팔에 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담무스는 에스겔 8:14에 나오는 이방신이다. 중국에서도 어머니 여신은 싱무(Shingmoo) 혹은 성모(聖母)라고 부르는데 이 성모는 아이를 팔에 안고 머리 둘레에 영광의 광채를 내고 있는 모습이다. 드루이교(Druids) 단원들은 ‘비르고-파티두리’를 ‘하나님의 어머니’로써 경배하였다. 인도에서는 이 여신이 인드라니라고 알려져 있는데 역시 아이를 팔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도에 빠지자 이들 역시 이 어머니신(神) 경배를 하였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삿 2:3) 아스다롯 혹은 아쉬토렛(Ashtoreth)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진 여신이다. 참 하나님을 섬긴다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이교 어머니를 경배했다. 그것도 여러 번 반복했다(삿 10:6, 삼상 7:3~4, 12:10, 왕상 11:5, 왕하 23:13). 그들 가운데 알려진 여신의 호칭 중 하나는 ‘하늘 여신(황후)’이었다(렘 44:17~19).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하늘황후를 경배하는 것을 책망하였으나 백성들은 이 경고에 반항하였다.
에베소에서는 큰 여신 아르테미스(아데미) 숭배가 있었다. 그 도시에서 봉헌된 신전은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행 19:27). 이집트에서는 어머니가 이시스, 그 아이는 호루스였다.
마리아 경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초적인 한 부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훌륭하고 헌신적이고 경건한 여성이었다는 것이 특히 우리 구주의 몸을 잉태하였다는 점에서는 분명하였으나 사도 중 누구도, 또한 예수님도 마리아 경배사상을 제시하지 않았다. The Encyclopedia Britannica에는 ‘처음 1세기 동안에는 마리아에 대한 어떤 강조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431년 에베소 회의 이후에 마리아 숭배의 길이 열렸던 것이다.
마리아 경배가 고대 어머니 여신 경배에서 유래되어 발전되었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근거는 그 여신에게 붙여진 칭호에 나타나있다. 마리아는 자주 ‘마돈나(The Madonna)’라고 불리어졌다. 이는 영어로 ‘나의 부인’을 뜻하고 라틴어로 ‘메아 도미나(Mea Domina)’이고 이탈리아어로 ‘마돈나’이다. 이시스(Isis)에게 붙여진 칭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어머니’였다. 세계적인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샤르트르 노틀담 성당은 갈리아-로마의 베누스 신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것에 대한 증거는 이 성당(12~16세기에 까지 걸쳐 완공됨) 지하실에서 이루어지던 ‘검은 마돈나’ 숭배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보았다. 서기 150년경 이시스 여신이 그녀의 신자인 아폴레이우스에게 한 말에서 마리아와 이시스여신의 연결점을 알 수 있다.
“나는 만물의 친어머니이며, 모든 원소의 여주인이자 통치자이며, 온갖 세상의 첫 자손이며, 신성한 힘의 우두머리이며,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의 여왕이며, 하늘에 거하는 모든 것의 으뜸이며, 모든 신과 여신을 단 하나의 형태로 표현한 그녀(she)이다. 하늘의 행성들, 바다의 모든 바람들, 지옥의 개탄할 만한 침묵들이 나의 의지에 달려있다.
나의 이름, 나의 신성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양한 관습으로, 많은 이름들로 온 세상으로부터 숭배된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인 프리기아 사람들은 나를 페시누스의 신들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들 자신의 땅에서 나온 아테네 사람들은 나를 케크롭스의 미네르바라고 부른다. 바다가 띠처럼 두르고 있는 키프로스 사람들은 파포스의 베누스라고 부른다. 활을 가지고 있는 크레타 사람들은 딕테산의 디아나라고 부른다. 3가지 말을 하는 시칠리아 사람들은 지옥의 프로세르피나라고 부른다. 엘레우시스 사람들은 그들의 옛 여신 케레스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유노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벨로나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헤카테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랍누시에라고 부른다. 주로 동양에 살면서 태양의 아침햇살에서 밝음을 얻는 에티오피아 사람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고대 교리에 탁월하며 제대로 나를 숭배할 줄 아는 이집트 사람들, 이 둘은 나를 나의 진정한 이름인 이시스 여왕이라고 부른다.”
-Apuleius, The Golden Ass, W. Adlington 역, Book Ⅺ-
이시스와 그 어린아이 초상화는 종종 꽃으로 된 틀로 둘러싸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은 마리아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마리아에 대한 숭배와 종교 혼합주의의 적용은 지금까지도 계속 진화하면서 강화되고 있다. 그 부분들은 그 시기적 배경과 연결되는 시대에서 이어지게 다루어 보겠다. 장미꽃은 동정녀 마리아와 동시에 비너스 여신의 상징인데 현대에도 마리아는 ‘신비로운 장미’로 불려진다.
6)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관해서 말할 때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친 시기를 전성기 르네상스라고 부르며 전후를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시기는 겨우 30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지만 고대 그리스, 로마에 견줄만한 서양미술의 완성기로 간주되어 왔다. 그 때문에 그 이전 ‘초기 르네상스’를 전성기 르네상스의 준비단계로서 구분하는 한편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을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과 함께 후대의 표본으로써 절대시하는 사고방식이 19세기 중반에까지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전성기 르네상스는 거장들의 시대였다. 전 시대의 예술가들은 고전 예술의 표준을 재현하고자 했다고 보면 이들은 자신들의 천부적 재능에 대한 확신을 갖고 개성에 의해 고대의 것들을 능가하는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창조했다. 이러한 그들의 탁월성은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위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원자였던 교황과 황제 등 최고의 권위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눈으로 이러한 예술가들과 작품들이 생성되는 것들의 배후에는 인본주의적 가치가 바탕이 되어 있어서 가장 영적으로 타락된 시대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대규모의 작품을 제작케 했고 예술가들의 가치를 발견해준 사람들은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교황청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폭군’으로 불린 율리우스 2세를 비롯하여 악명 높은 알렉산더 6세와 같은 최악의 영적인 상태를 가졌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부패는 상처로 비유하면 곪아서 더 이상 부풀어 오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온 시기였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회복코자 했던 개혁적 세력의 힘이 터져 나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눈에 보이는 미술품들이 부패한 로마 카톨릭의 내면세계를 일반인들에게 가리어 주는 역할을 한 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위대한 인간의 능력이 발휘된 시대의 내면적 상태는 그 인간의 능력을 거짓된 종교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엄청난 위용과 천재적 재능들이 결집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의 극치의 시대에 아무런 눈에 보이는 것 없는 믿음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세력들은 이후로 많은 지지를 얻어 여러 나라로 뻗어 나가게 되었지만 눈에 보이는 종교적 상징물들을 이전시대에 비해 거의 남기고 있지 않다는 것은 기독교 정신의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단지 많이 남긴 것은 인쇄된 성경과 말씀에 대한 연구를 한 책들이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주요한 무대는 율리우스 2세 교황으로 인해 활기를 되찾은 로마와 동방과 유럽 여러 나라를 잇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베네치아이다(겔 28).
로마는 무력과 종교력이 동시에 집중된 나라였고 베네치아는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나라이다.
7) 거장들의 작품 속에 나타난 영적인 혼합주의
최초의 미술사가인 바자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를 새로운 양식의 창시자로 말하고 있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사람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스승 베로키오와 공동 제작한 「세례 받는 예수」, 「최후의 만찬」, 「세례 요한과 성 모자」 등 많은 기독교적 주제의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비교적 성경 말씀과 그 내용에 충실하고자 하는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인간의 영혼을 육체의 움직임 속에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추구했다.
미켈란젤로(1475~1564)는 메디치가의 수집품인 고대 조각연구를 통해 자기 양식을 형성했다. 또한 그는 메디치가의 보호 하에 있었던 신플라톤주의의 학자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조각 작품을 대리석이라는 물질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보는 그의 생각은 육체를 혼의 감옥이라고 보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다.
피렌체 시청 앞 광장에 영웅적 거상 「다윗」상을 완성시킨 후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묘비 건축의 주문을 받아 로마에 왔는데 장대한 스케일로 계획된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결국 당초의 구상대로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의 유명한 조각상 「모세」는 이 묘비의 주인의 종교적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제작된 묘비의 일부이다.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그리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표현력과 앞에서 살펴본 율리우스 2세의 군사적인 성격은 깊은 일치감을 갖게 되어서인지 그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작품들의 원인자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시스틴 성당의 천정화는 창세기의 장면들과 그 천정의 가장자리에는 6명의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스가랴, 요엘, 다니엘, 에스겔을 그렸다. 그런데 이 천정화에는 대각선으로 이 선지자들 사이에 5명의 여자 무당들을 그려놓았다. 그것들은 델포이의 아폴로의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의 무당과 에트르리아의 무당, 쿠마에의 무당, 페르시아의 무당, 리비아의 무당이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이 천정화가 지니고 있는 영적 혼합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선지자와 무당은 동격의 사역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누구나 받게 된다. 무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단호하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찌니라”(출 22:18), “무당이나 … 너희에게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 레 20:27) 등과 같이 성경은 무당을 철저히 신앙의 공동체 중에서 분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가장 유명한 미술품 중의 대표적인 작품 속에 한 그림 속에서 성경 말씀을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천정화 곳곳에 사탄의 상징인 숫염소의 두상이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천정화로서 무당 종교와 기독교를 혼합시키는 일을 교황의 의도를 따라 행하던 같은 시기에 바티칸 궁전 내에서는 라파엘로(1483~1520)가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에서 그리스 철학자들과 기독교를 혼합시키는 작업을 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라파엘로는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화풍으로 헬라 신화에서 주제를 택해 ‘파르낫소스’적 바티칸을 장식했다. 또한 「아담과 이브의 원죄」, 「솔로몬의 심판」 등과 같은 성경적 주제의 그림과 동시에 「철학의 우의상」 같은 그림에서는 자연학과 도덕철학을 나타내는 2권의 책을 들고 있는 여신상을 에베소의 여신 아르테미스 상이 받치고 있는 왕좌에 앉는 모습으로 나타내었다(행 19:23~41). 사도바울은 이 여신 우상 때문에 고난을 받았는데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당 안에 높은 자리에 이 여신을 모셔놓았다.
라파엘로는 날개달린 아기 천사들을 많이 그렸는데 성경에는 아기천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큐피드)와 연관이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천사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림을 통해서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분별없이 많이 보아왔다.
성모가 아기예수와 떨어져 혼자 있는 예는 많지 않은데 라파엘로는 「유니콘과 함께 있는 젊은 여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일평생 동정녀로서의 마리아를 나타내고자 하고 있다. 성경은 마태복음 13:55~56, 마가복음 6:3을 통해 예수님이 마리아의 독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영원한 동정녀로서의 마리아 상을 만들어 내었다. 대영백과사전이 설명하듯이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 교리는 그리스도의 승천 후 약 300년까지는 가르쳐지지 않았다. 이 가르침이 공식적 인정을 받은 것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였다.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녀성을 강조하기 위해 백합, 초승달, 유니콘, 흰 장미 등이 마리아 그림에 함께 상징으로 그려진다. 백합은 수태고지 장면, 초승달은 그리스 신화의 처녀신 아르테미스, 유니콘은 처녀만이 그 뿔을 잡을 수 있는 짐승이라는 이교전설에 따라 동정녀의 상징이 되었다.
8) 성 베드로 성당
∘초기 베드로성당
성 베드로 성당은 로마 카톨릭의 어머니 교회로써 대성당 건축의 초기부터 중요하게 다루어져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성 베드로 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후 대성당의 골격을 이루는 벽, 바닥, 통로 등 기초부분이 기울어지면서 붕괴의 위험이 생겨났다. 때문에 교황 니콜라우스 5세(1447~1455)는 대성당의 대대적인 신축공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1506년에 이르러 다시 옛 터 위에 대규모 신축 공사를 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1546년에 대성당 신축공사의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대성당의 완성은 17세기까지 이루어졌다. 앞에서 살펴본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 대성당과 연관되어 있다.
로마의 7언덕(계 17:9) 중 바티카누스 언덕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로마 카톨릭의 중심 성당으로 교황청이 있다. 율리우스 2세는 역대의 교황 중에 정치적 야심과 예술에 관한 한 가장 정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위세를 상징할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을 ‘만방을 굽어 볼 수 있는 거대한 규모’와 ‘교황의 권위를 상징할 건축이 되도록 하늘 높이 치솟을 Cupola가 얹어져야한다’는 구상을 하였다. 그는 이 뜻을 펼치기 위해 62세의 브라만테에게 총감독을 맡겼다. 엄청난 노력과 예산이 요구되는 이 건축 공사는 여러 번 자금 부족으로 진행이 중단 되었는데 교황 바오로 3세는 면죄부 발행을 통해 자금을 충당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성당의 Cupola는 미켈란젤로가 완성하였다. 이 대성당의 건축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미술가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이 대를 이어서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나이 일흔한 살에 대성당의 총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의 교황 바오로 3세는 그를 ‘신이 보내준 사람’이라고까지 격찬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노년의 마지막 생을 대성당 건축에 헌신하였다. 그는 대성당의 상징적인 Dome을 설계하고 그 기초 작업을 마치고 완공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후계자였던 자코모델라 포르타에 의해 이 거대한 돔이 완성되었다.
이 대성당은 그 이후 베르니니에 의해 더욱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갔다. 그는 대성당 앞 광장을 꾸몄다. 광장은 그 폭이 246m, 광장 입구에서 대성당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여m나 되며 전체 회랑에 세워진 원주형 기둥이 284개, 회랑 바닥에서 천정까지 높이는 16m나 된다. 그 위에 140개의 대리석 조각상(주로 성인, 교황들의 모습, 높이 13.24m)이 세워져 있다. 이렇듯 거대한 회랑을 광장 양 옆에 나란히 세운 까닭은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 양쪽 회랑은 그리스도의 양팔을 상징했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의 종교 미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은 그럴듯하게 되어 있지만 실상은 거짓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 양팔로 비유된 회랑의 중앙에 obelisk를 세우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 obelisk는 1586년 세워진 것인데 로마 제정 초기 칼리큘라 황제가 이집트 헬리오 폴리스의 태양신 Ra 신전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 탑은 네로 황제가 권력의 상징으로써 좋아했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 종교는 내면뿐만 아니라 외적인 면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혼합주의 종교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고 있다.
∘대성당의 내부
“바티칸의 대성당 안에 계시는 성 베드로여! 우리가 이제 여기 왔나이다. 세계의 어느 교회가 이만치 아름다울 수가 있으리… 세계의 어느 종교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가 있으리… 종교의 무한한 위대성으로 이 아름다운 세계를 펼쳐 놓았으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
이는 스탕달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벅찬 감동으로 말할 첫 표현이다. 누구든지 이 대성당 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장려한 모습에 한 순간 압도당하리라. 성 베드로 대성당은 많은 역대 교황들의 무덤이기도 하다. 그 무덤위에 교황들의 모습을 조각한 상으로 세우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당시의 북유럽 지방, 특히 독일과 폴란드 지역에서 거세게 일던 프로테스탄티즘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막았다. 그는 재위 기간 중 인도, 일본, 남미의 브라질 등과 같은 나라의 선교를 위해 예수회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특히 그는 당시 종교음악 분야와 문학, 미술 등 교회 예술 분야의 활성화에 앞장섰던 로마 카톨릭의 존경받는 교황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로마 카톨릭의 신실한 교황은 프로테스탄트의 적이요 종교예술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는 복음의 적이다’라는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 베드로를 기념하는 작품 베드로의 성좌는 4명의 로마 카톨릭의 대표적 교부에 의해 청동으로 된 의자가 들려져있는 모습인데, 이들의 종교에서 흔히 발견되듯이 베드로가 로마에서 사역할 때 앉았던 의자에 의미를 부여한 성 유물 숭배의 일종이다.
이 유명한 베드로의 성좌, 또는 옥좌라고 불리는 조각상 위에는 베르니니가 풍부하게 장식한 황금빛 나는 태양과 같은 형상에 보는 이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마치 빛이 퍼져나가는 듯 하는 조각을 덧붙여서 태양상 숭배의 종교적 전통이 여기에서 찬란하게 영광을 받고 있다. 베르니니의 이러한 기법은 그의 다른 작품 「성 테레사의 무아경」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 조각에서는 로마의 신화의 큐피드가 화살을 종교적 환희에 취한 여인에게 꽂고 있는 모습이 뛰어난 예술성과 종교적 혼합주의를 대표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들 교부들이 쓰고 있는 모자는 미트라인데 주교들이 미사 중에 쓰는 모자이다. 미트라는 페르시아의 신이다. 그는 프리기아라는 모자를 쓰고 있다. 훗날 프랑스 혁명 시대 이성의 신봉자들이 프리기아 모자를 그들의 상징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던 이교적이고 인본주의 사상의 상징이다. 이 모자들은 또한 고대의 이교적 신앙을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은 로마 카톨릭이 4명의 교부들을 교회의 박사로서 숭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박사들이 의자를 치켜들고 있는 것은 사도 베드로의 뒤를 로마 카톨릭이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베르니니의 천개
이 천개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1568~1644)의 명에 의해 제작된 베르니니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것은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대 예술 양식 중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천개를 장식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청동 금속이 필요했다. 그래서 Rome의 기원전 1세기 때의 만신전(Pantheon)의 내부 천장의 청동을 가져와서 짓는데 사용했다는 것은 단순한 재료 조달의 차원이 아니라 이를 짓게 한 종교혼합주의 정신의 발로인 것이다. 이곳에는 4개의 청동으로 만들어 섬세한 장식이 부가된 소위 솔로몬식 기둥이 천개를 받쳐주고 있다. 솔로몬식의 기둥이란 건축학적으로는 뱀처럼 비틀린 기둥 모양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천개 아래에 로마 카톨릭이 그들의 뿌리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근거 없는 거짓에 불과하다).
∘성 베드로 성당 지하무덤
이곳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지었던 기념 대성당의 일부분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역대 교황들의 무덤이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며 작은 경당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곳에 순례 온 이들이 그 안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되고 있다. 이 지하무덤 안에서 금세기의 교황들 요한 23세, 비오 12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의 무덤이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이와 같이 무덤 위에 서 있다(계 18:2).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 카톨릭의 역사와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건축과 미술품들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내용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1929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1883~1945)와 당대 교황 Pius Ⅺ(1922~ 1939)와의 사이에 라테란 협정(1927)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의 중점은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 시내에 교황국권을 인정할 것과 교황권은 파시스트 정부와 무솔리니를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이어서 무솔리니는 바티칸의 대 정비 공사를 담당하기로 했다. 그는 이 공사를 통해 ‘신흥 로마제국의 재건’을 꿈꾸었다. 2차 대전에서의 패배로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Piazza 동쪽부터의 현존하는 대로는 그 때의 것이다.
9) 종교개혁의 미술에 끼친 영향
1517년 로마교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술 활동에도 심각한 영향력을 끼쳤다. 프로테스탄트는 종교미술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시대를 살았던 알부레히트 뒤러(1471~1528)는 「요한계시록 연작」을 대형 목판화 작업을 통해 하였다. 중세 말엽 독일에서 무르익어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폭발한 로마 카톨릭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성경 말씀의 내용을 일반에게 깨우쳐 주는 도구로써 미술의 역할을 부여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계시록의 예언들이 그들의 생전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뒤러의 그림은 그림 이상의 의미를 가졌었다. 사실 루터와 칼빈 등의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음녀의 상징인 바벨론 교회로 보았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그래서 계시록 18장의 바벨론의 멸망은 당대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의 날의 공포와 계시록의 예언들을 힘 있게 시각화한 뒤러의 작품이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에서 보아왔던 숭배적 의미에서의 그림이 아니라 말씀의 내용을 깊이 깨닫는데서 오는 감동을 미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성경적 주제 이외의 자연을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순수한 자연 그 자체가 회화의 독립된 주제로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미술가는 사회적으로 천한 기술자로서 일반적으로 인식했는데 종교개혁의 사상은 이러한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뒤러가 나중에 종교개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네덜란드에 방문했을 때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조합회관에서 연회를 베풀고 사회적으로 지체가 높은 관리들도 이 화가를 깊이 머리 숙여 존경했다는 글을 남기고 있다. 이는 개신교권의 북유럽의 국가에서 직업에 대한 귀천보다 그 사람의 재능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독일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미술은 미의 법칙을 추구하는 것보다 그림으로써 성경말씀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그는 그림으로써 설교를 하고 성경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가 그린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그림은 그의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여태껏 보아온 어떠한 그림보다도 생생하게 죽음의 처참함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리고 있다. 신체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뒤틀려져 있으며 가시들은 상처를 내어 살갗을 찢어지게 하며 검붉은 피는 시신의 병적인 초록색과 눈에 띠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그림에서 십자가는 상징적이거나 심지어는 장식적인 형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처참한 죽음의 현장이다. ‘그의 처참한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셨다. 죄의 결과는 끔찍한 죽음이다’라는 생생한 메시지를 그림을 통해 전하고 있다. 화면 오른편에는 침례요한이 성경을 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경대로 죽으심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손짓을 하고 있다. 그는 말씀의 진실한 전달을 위해 화면에서 미적인 표현을 희생시켰다.
오늘날 미술의 진보는 새로운 것의 추구에만 있는 듯 하는 풍조가 많지만 그의 작품은 그러하지 않다. 그뤼네발트의 작품은 미술가는 ‘진보적’인 입장을 갖지 않더라도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술의 위대성은 새로운 발견에 있지 않고 진리의 선포의 도구로써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속에 담긴 깊은 진리를 발견하면서 느꼈던 감동을 가장 주된 미술 표현의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한스 홀바인(1497~1543)은 원래 종교적 제단을 위한 그림을 많이 그렸으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초상화에 주력하게 된다. 그래서 영국으로 건너가 국왕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기도 했다.
반 헤어센은 성서의 주제를 현실적 풍속화와 연결시켜 그렸고, 아르쩬은 정물화적인 요소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안트워프와 브뤼셀에서 활동한 피터 브뤼겔은 풍경화와 풍속화에 많은 발전을 보였다. 그의 작품에는 네덜란드의 속담과 풍습, 성서의 주제 등을 다수의 인물을 배치하여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었다. 그는 크고 당당한 인물과 간결하고 힘 있는 구도로 농민 풍속화와 우의화를 제작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6세기 중반에는 종교적, 정치적 혼란으로 미술은 융성하지 못했고 프로테스탄트의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은 기존의 종교적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네덜란드 작가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주제를 전문화했다.
어떠한 종교적인 주제를 가지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는 시절에 인물화만으로도 독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종교개혁은 종교미술을 쇠퇴하게 만들었지만, 말씀 선포의 기능으로써의 미술이나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과 같은 다양한 미술의 기능을 일깨워주었으며 직업으로써의 미술가에 대한 긍지도 심어주었다.
개혁의 주요 흐름 가운데 두 갈래의 특징이 있다. 개혁(reformation)과 회복(restoration)을 주장하는 루터란과 재침례파 계통이다.
6. 17세기 미술
1545~1563년 동안 로마 카톨릭의 트렌트회의는 무려 25차례의 회의를 거쳐 그 당시 일어나고 있던 프로테스탄트운동을 정죄하고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이중적 카톨릭의 권위로 인정하고 카톨릭의 종교개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체제만이 유일한 정통 종교임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고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 Jesuit) 같은 새로운 교단이 생겨났다. 종교 재판소는 교리에 관한 한 일체의 자유를 허용치 않는다는 점과 교회의 결정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점을 은연중에 깔고 있었다. 예수회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탕으로 한 군대조직과 같은 형태로 창설되었다. 이러한 기구와 그 밑에 깔린 정신은 개인적인 사고의 파괴라는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반종교개혁의 사상은 이러한 로마 카톨릭 체제의 수호를 위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체제 중심주의로 카톨릭이 회귀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운동의 영향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개인의 이성의 판단에 따라 모든 사상 문제와 양심 문제를 조정하는 개인의 권리가 신장되어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로마 교황청에 도전이 될 것을 미리 예측했기 때문이다. 반종교개혁은 미술에서도 문화와 사상 면에서와 마찬가지의 영향을 끼쳤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회에 누적된 악습들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적인 그림과 조각들은 어떤 종류이건 그 가치를 모두 인정치 않는 데까지 갔었다. 성상과 그림들은 우상숭배의 냄새가 풍기는 것들이며, 교회 장식과 장엄한 미사예식 등은 사탄이 카톨릭 교회 안에 끌고 들어온 세속성을 나타내는 예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들은 중세의 성상 논쟁의 성상 부정파의 입장과 연결되었다.
로마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들과 타협하고자 하는 뜻을 포기하고 루터와 칼빈에게 도전하기 위해 전통적인 교리와 방법들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자, 신학자들은 종교미술을 교리적으로 다시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성상들은 우상숭배의 대상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심을 고취시켜 구원의 길로 이르게 한다는 증명 또한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반종교개혁자들의 미술에 대한 사상은 중세의 성상긍정파의 입장과 연결되었다. 트렌트공의회가 끝나기 전 미술은 카톨릭 교회의 가장 유효한 선교상의 무기로 재인정 받게 되었다. 1563년 12월의 마지막 회의에서 공의회는 ‘그리스도, 신의 어머니인 마리아, 그리고 다른 성인들의 성상들은 교회 안에서 반드시 형상화되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Canon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25회기, 제 2집).
트렌트 공의회 법령을 건축에 적용시켜 책을 쓴 카르로스 보르메오는 「건축교훈과 교회용구」에서 반종교개혁의 성당건축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반종교개혁의 중심적인 테마이며 17세기에서도 아주 대단한 중요성을 띤 문제, 즉 교회 자체와 그 속에 거행되는 예식은 예식의 장려함과 종교적 성격이 우연히 그곳을 찾은 내방객들까지도 압도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장엄하고 깊은 감명을 주어야 한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교회의 의식과 세속성에 반대하여 종교의식 상의 외면적인 허례허식의 중요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사실이 반종교개혁자들에게 교회의식을 더욱 더 장려하게 꾸밀 구실을 마련해준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주 장대한 종교의식은 신자들에게 감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래서 성당의 건축은 우선 눈에 띠는 장소에, 그것도 가능하면 작은 언덕일지라도 그곳에 오르는 계단이 있는 장소에, 교회가 그 이웃들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지어져야 한다고 전한다. 그 정면은 ‘진지하고 품위 있는 치장’과 성인상들로 장식해야 한다. 내부로 들어가는 주 제단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야 하는데 그 주 제단은 계단 위에 그리고 사제가 위엄을 갖추고 의식을 거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은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성물 안치소는 성당 중심부로 이끌려져야 한다. 화려한 미사예복은 의식에 위엄을 더해주며 전체예식에 적당한 조명에 신경을 써야 한다.
보르메오는 이어서 성당의 조감도도 그리스십자형 보다는 라틴십자가형을 추천하였다. 아마도 그는 비뇰라가 예수회의 본당 Jesu 성당을 위해 이미 개발했으며 극적인 효과를 바라는 반종교개혁자들의 요구에 이상적으로 부합되는 새로운 형태의 라틴십자가형 구도를 염두에 두었던 듯 싶다.
반종교개혁자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행하였던 성경말씀 연구와 설교, 만인제사장적인 세움을 제시함으로써가 아니라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통해서 종교로 좀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예수회가 종교적 감정을 고양시키기 위해 얼마나 감각에 호소했는지를 그 창시자 이그나티우스의 「영성훈련」 하나만 보아도 충분하다. 그의 「영성훈련」에서는 새 신도들은 수난의 장면, 지옥의 고문, 또는 천국의지복의 장면을 실감해보기 위하여, 아니 거의 다시 연출하는 것처럼 하기 위하여 오감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 신도는 이러한 일들을 정신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감각을 통해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반종교개혁의 신파와 구파간의 반목은 예수회와 도미니크회 사이의 논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도미니크회는 자신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후계자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체계를 이어받아 미세한 부분까지 이어가려고 애썼다. 반면 예수회는 이들 교의의 엄격함이 자기들의 포교활동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으며 특히 인간의 의지 부분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인정한 것보다 훨씬 자유로워 인간은 어느 정도 자기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대단히 긍정적인 신념을 발표했다. 1621년 그레고리 15세가 즉위하고 나서야 예수회의 견해는 실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이그나티우스와 사비에르 같은 예수회의 지도자들을 성인품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세속적이고 감정적이며 반지성적인 종류의 반종교개혁사상은 미술에 있어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양상을 낳게 하였다. 17세기에 일어난 바로크운동은 예수회에 의해서 주도된 미술운동에 다름이 아니다. 감정본위의 예술운동인 바로크 미술의 정신은 예수회의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수련」의 방법을 실제의 예술에 적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예수회
예수회의 창설자인 이니고 로페즈 레깔데(Inigo Lopez de Recalde)는 1491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로욜라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사가문에서 태어나서 왕의 궁정에서 기사견습생으로 일한 후 군인이 되었다. 1521년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여 심한 다리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더 이상 군대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병상에서 성인들의 전기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고(어떤 자료에는 그가 성경을 읽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소 회복된 후 그는 1522년 마리아 성지를 순례하고 그의 무기를 마리아 제단위에 걸어놓고 기사의복 대신 거지 옷차림으로 바꾸어 입었다. 다음 그는 약 1년 동안 잠적하여 철저한 참회와 묵상 속에서 일련의 영적인 황홀경과 환상을 체험했다. 그 때 그의 유명한 「영성수련」 초고가 쓰여 졌다.
그의 영성에서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와 그의 (수직적 질서의) 교회에 대한 순종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루터의 신앙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인해 공로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신앙이 중심이었다. 여기서 개신교 종교개혁과 카톨릭 종교개혁 사이의 현격한 대조점이 나타난다.
1528년 그는 칼빈이 공부한 파리 몽테이규대학에 입학했으나 두 사람은 만남은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타고난 지도력으로 같은 뜻을 품은 동료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그의 ‘훈련’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파리의 몽마르뜨르에서 순결과 청빈서약을 하고 ‘예수회’를 발족했다. 그리고 그들은 교황이 어디로 보내든지 가는, 교황에 대한 순종의 서약을 했다. 당시 교황 바울 3세는 교회 성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그나티우스의 일처리하는 솜씨에 감동되어 1540년 9월 27일 ‘교회의 전투부대(Regimini militantis ecclesiae)’라는 교서를 내려 예수회를 승인했다. 예수회는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수련」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반동종교개혁의 전위대가 되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일생을 보면 감동적인 회심의 경험과 종교적 열심히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의 중요한 삶의 계기는 마리아를 통한 계시로부터거나 마리아에게 충성함으로 시작된다. 로욜라는 자신이 영적 훈련에 몰입할 때 성모 마리아가 영감을 불어넣어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마리아 숭배는 어떤 성인보다 탁월하며 그의 선행과 금욕은 복음의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자력구원의 행위를 강조하는 점이 두드러진다. 또한 교황에 대한 충성은 무조건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교황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본부가 되는 Jesu 성당을 비롯한 바로크시대의 성당들은 그들이 내세운 청빈과 금욕의 영성과는 정반대의 인류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장식적인 조형물로써 가득 채워져 있는 점에서 전혀 겉과 속이 다른 현상을 보이는, 미술사상 가장 모순적인 양식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회의 전개과정을 보면 더욱 더 이 조직이 갖고 있는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단체는 세계선교에 가장 앞장섰는데 앞에서 예수회의 교리적인 면을 보았듯이 이들은 언제나 교묘하고 유연하게 처세하는 것을 정책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에 있는데 그 목적은 전 세계의 로마 카톨릭화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는 금언은 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의 개신교 위그노 대학살, 1586년 말엽 모라비아의 프로테스탄트 박멸 등과 같은 개신교도 근절이 이들의 본분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들은 핵심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이 자신이 속한 로마 카톨릭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의 수호자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그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로마 교회에 대한 무조건의 충성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를 의미하였다.
2) 17세기 초반의 유럽의 구교권 미술
‘바로크’라는 말은 17세기의 미술 경향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후세의 비평가가 이를 조롱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이는 황당무계하거나 괴기스럽다는 의미로써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에서 기인한다.
1575년 로마에서 바로크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 신축되었다. 그것은 유럽 전역에 걸쳐 신교의 종교개혁과 대항하려는 구교의 드높은 기대를 거머쥐기 위해 새로이 설립된 예수회 교단의 Jesu 성당이다. 단신행랑형의 어두침침한 주 행랑과 Dome 아래 밝은 내부가 극적인 대비를 이룬 이 건물은 회합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제단으로 향하게 하는 내부구성과 중앙부를 강조하는 디자인은 바로크 성당 건축의 원형을 이룬다. 회화에 있어서도 빛과 색채의 강조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가 선호되었다. 대체로 17세기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처럼 영원한 이상적인 모습보다는 변화해가는 현실적 모습의 세계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3) 이탈리아(Italy)
카랏치(1560~1609)의 제단화는 장중하고 동적인 느낌을 주는 종교화로 반종교개혁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방침과 합치되어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는 이상화된 로마 근교의 풍경과 고대 신화 또는 성서의 인물을 그려 넣은 혼합주의적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도 카톨릭 교회의 호평을 받았다.
카라밧지오(1565?~1610)는 풍속화와 정물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그림에서도 현실감이 넘치는 서민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현실 속에 예수와 성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림 속 인물의 내면적 드라마나 순교자의 처참함 등이 강렬한 명암 대비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면 「성 마태의 소명」은 일상적인 공간 속에 예수님과 마태를 연결시키고 있으며 르네상스적 전통을 그림 속에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종교화에 나타난 현실감은 신성모독으로 생각되어 「성모의 죽음」과 같은 작품은 성당의 인수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조각에 있어서는 건축가이기도 한 로렌쪼 베르니니(1598~1680)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17세기 서구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는 대리석으로 순간적인 표정동작과 대상의 재질감을 표현하는 놀랄만한 기교를 통해 젊어서부터 명성을 확립했다. 「성 테레사의 법열」에서는 조각과 건축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현실의 빛을 교묘하게 조각으로 연결시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상의 세계를 느끼도록 의도했다. 그는 성 베드로 성당 광장의 타원형 열주 행랑을 남겼다. 그리고 내부의 대제단과 천개도 그의 장식 기둥 조각이다.
베르니니의 제자인 볼로미니는 18세기 고전주의 건축가들이 ‘바로크’양식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볼로미니의 건축양식이다. 그는 코린트식 원기둥과 율동감 있는 커브의 벽면 등을 거대한 압력으로 비뚤어진 것 같은 긴장을 느끼게 한다. 로마의 예수회 본당인 jesu 성당과 같은 일반적인 바로크 양식에서는 올려다보는 원근법을 구사한 천정화가 발달했다. 그래서 천정은 뚫린 듯한 성당 내부와 천국이 직접 연결된 것 같은 일률적인 효과가 이루어지고 있다.
옆의 그림은 베르니니를 추종한 화가 지오반니 바티스다 가울리가 그린 로마의 예수회 성당 천정장식이다. 이 미술가는 우리에게 교회의 궁륭형 천정이 열려있으며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곧바로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한다. 이 그림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예수의 이름이 성당 천정화 중앙에 금빛 찬란한 글자로 새겨져있다. 그 이름이 황홀하게 빛을 응시하는 많은 아기와 천사, 성자들로 둘러싸여있으며 모든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이 낙심천만한 몸짓으로 천국에서 쫓겨나고 있다. 이 혼잡한 장면은 천정의 틀에서 터져 나오려는 듯이 보이며 성자와 죄인들을 싣고 곧바로 성당으로 내려오는 구름으로 가득 차있다. 그림을 이같이 틀을 깨뜨리고 나오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를 혼란시키고 압도하여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환상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환상적인 그림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분별하여 보면 그림 중앙의 예수 이름은 바로 ‘예수회’의 이니셜을 딴 문자이다.
안드레아 포초는 예수회 사제로서 로마의 성 이나티우스 성당의 천정에 환각적인 천정화 「성 이나티우스의 영광」을 그렸다. 하얀 돌로 표시된 신랑의 중앙의 한 지점에서 쳐다보게끔 계획된 이 천정화는 하늘로 열린 환각적인 공간을 연출하면서 감동적인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하면서도 영광스러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회의 창시자 성 이그나티우스이며 그의 절친한 동역자 사비에르이다. 이들의 미술품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한 인간들의 자기숭배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절대성에 대한 숭배이다.
이러한 양식은 궁정건축의 장식에서도 본받게 된다.
4) 플랑드르
루벤스는 가장 바로크 정신에 충실한 화가이다. 플랑드르의 많은 재능 있는 화가들이 그의 지도 아래 있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마술사와 같은 솜씨로 모든 것을 생기발랄하고 강렬하고 유쾌하게 살아 숨 쉬는 것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그의 미술은 궁정의 사치와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이러한 왕과 제후들의 권력을 미화시키는데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예수회 교단과 플랑드르의 카톨릭 계통의 군주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3세 및 메디치 가문 출신인 마리 데 메디치, 그리고 스페인 국왕 필립 3세와 그에게 작위를 수여한 영국 왕 찰스 1세로부터 많은 그림 주문을 받았다. 그는 이 나라 궁정에서 저 나라 궁정으로 귀한 손님 대접을 받으며 외교적인 임무도 맡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소위 ‘반종교개혁’ 진영의 이익을 위해 영국과 스페인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맡은 적도 있다.
그의 종교화들은 미술적으로는 좋지만 영적인 문제투성이를 안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에게 영적인 내용은 문제되지 않았고 또한 관심도 없는 듯하다. 그는 그의 현란한 솜씨를 나타내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러한 점에서 그는 뛰어난 예술적 솜씨를 가장 영적인 타락의 도구로 유감없이 사용한 화가로 볼 수도 있다. 그는 수많은 종교적 주제를 그렸지만 그것들에서 신앙적인 느낌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프랑스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연작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그의 자유분방한 구상력과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 부드러운 필법은 보는 이에게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하지만 간교한 메디치 가문의 여성을 여신처럼 떠받드는데 그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예수의 분노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성 도미니크와 성 프란체스코」라는 작품은 붉은 옷을 걸친 예수가 번개를 땅으로 꽂으려 한다. 그의 손에 들린 번개는 양쪽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제우스의 번개이다. 이와 같이 제우스와 예수를 동격화하고 있으며 아래에 뱀으로 감긴 지구를 지키려고 하는 성인들을 그려서 지구의 멸망이 이들 중재자들에 의해 유보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의 왼편의 마리아의 저지와 함께 그린 이 그림의 의도는 분명하다. 무섭고 위엄에 찬 심판주로서 예수와 자비로운 성모 마리아를 부각시키려는 것이며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는 개신교도들을 향해 성인들의 중재가 얼마나 이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가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예수를 무서운 신으로 격하시키고 마리아와 성인을 높이는 것은 고딕시대부터 이어오는 마리아 숭배사상에 의한 로마 카톨릭의 전통이기도 하다.
루벤스! 그는 어쩌면 인류역사상 가장 탁월한 미술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지만 가장 사악한 자들의 도구로 그 재능을 사용한 불행한 자이다.
5) 네덜란드(Netherlands)
당시 네덜란드는 16세기 말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강한 북쪽의 홀랜드주가 중심이 되어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남부지역은 플랑드로로 카톨릭의 스페인령으로 머물렀다. 그래서 이 남부지역은 신교와 구교가 서로 대립된 지역인 만큼 미술에서도 두드러지게 종교적 영향력에 의해 구별이 된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회화는 국제무역에 의한 경제발전과 시민문화가 번영하여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새로운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다.
중세 이후 19세기 초까지 미술의 최대 후원자는 카톨릭 교회와 왕후 귀족이었다. 당시는 신화적 주제가 중심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주문 제작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부터 시민층이 주요한 고객이 되어 생활 속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가 제작되었고 미술의 독립된 장르가 발전했다.
17세기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는 암스텔담에서 활약한 렘브란트(1606~69)이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는 예외적인 거장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예배에 관한 종교화가 부정되었지만 기독교적 주제의 회화는 예배의 대상인 성화(Icon)로써가 아니라 성경의 깊은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작품들에서 성경 말씀의 깊은 묵상을 통해 주제를 발견했으며 이러한 깨달음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것은 ‘보는 성서’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베드로의 부인」, 「돌아온 탕자」 등은 그림속의 인물들을 통해 성경 속에서 느껴지는 인물들의 내면적 성찰까지도 표현하였다.
그는 또한 빛의 처리에 특이한 기법을 보여 소위 ‘렘브란트의 빛’이라는 독자적 경지를 구축했다. 그의 미술상의 특별한 업적도 사실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태양 광선에서부터라거나 또는 등불 등으로부터가 아니라 아기 예수로부터 빛이 발산되는 영적인 빛을 그림을 통해 나타낸 것이다.
실제로 그는 신, 구약성경의 주요사건이나 내용들을 하나하나 스케치로 남기고 있다. 성경을 그냥 전체로 통독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것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남겼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깊이 읽고 묵상했던 그를 떠올리게 한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렘브란트는 성경을 여러 번 되풀이 읽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성경속의 상황과 행동들, 환경들을 정확하게 머릿속에 떠올려 시각화하였다. 칼빈주의적 성경관은 성경무오설을 지지하기 때문에 그는 성경을 그림으로 옮기기 위하여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신학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주제로 한 초상화를 여러 점 남기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는 항상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프로테스탄트들의 말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회중적으로 편만했던 것을 엿볼 수 있게 하며 그 아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그의 미묘한 어둠과 인물표정의 정확한 파악은 독자적인 것이다. 또한 그는 표현의 수단이 되는 유화물감의 처리와 캔버스 화면의 바탕처리는 그 자체로써 눈부시게 빛나면서도 중후한 느낌으로 보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이끌어내는 유화 기법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였다.
그의 주제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표현 기술상의 관심도 개신교의 신앙적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성직자를 평신도와 구별하고 또한 성직자는 제사장이고 평신도에게는 수동적인 복종을 가르치지만 개신교에서는 ‘만인제사장’의 가르침과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성직’이라는 직업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화가가 자신의 직업에 필요한 모든 과정들을 연구하고 노력하는 것이 세속적인 돈벌이를 위한 것으로만 보는 관점과 그 모든 과정들이 생업인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의 차이는 문화와 산업의 발달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면서 이후에 신교와 구교권 나라간의 문화와 경제, 정치, 예술 등의 발전에 공통적인 현상들을 예견하게 한다.
루벤스와 렘브란트는 17세기 로마 카톨릭의 미술과 프로테스탄트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며 이들의 작품의 내용들은 그들이 속한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렘브란트보다 1세대 위인 프란스 할스는 개인초상화와 집단초상화 및 반신상의 인물을 주로 그렸다. 그는 대담한 화필을 살려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을 잘 잡아내고 신흥국가의 활력에 넘치는 시민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얀 스테엔의 풍속화, 베르메르의 실내의 일상적인 정경묘사 등은 일상생활의 사소함도 숭고한 예술적 주제가 될 수 있음을 깨우쳐 주었으며 개신교 사상의 반영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17세기 유럽에서는 실제 풍경을 관찰하여 그려진 풍경화가 제작 되었다. 그 가운데 네덜란드의 풍경화는 특히 사실적이고 아무런 꾸밈도 없는 순수한 자연과 도시를 그림의 소재로 택했다. 그들은 구도의 연구와 빛과 공기의 정확한 파악에 의해 평범한 소재를 풍경화의 걸작으로 만들어 내었다.
6) 스페인
17세기는 스페인 회화의 황금시기라고 불린다. 이 시기의 스페인은 로마 카톨릭의 수호국으로써 반종교개혁에 앞장섰다. 이 시기의 스페인의 종교적 경향은 신비적 경건에 의해서 특징지어 지는데 미술에서도 이러한 영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시대의 영성의 주요한 특징은 자기부정의 정적주의인데 하나님의 사랑이나 내적 계시의 황홀경 안으로 연합된 것이 믿어질 때까지 깊은 관상(묵상)과 소리 없는 기도 속에서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 영성의 기도는 오직 자기 포기의 토대위에서 전적인 몰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속에 피조 된 모든 것을 비운 영혼만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니니의 작품 「성 테레사의 법열」은 이러한 영성을 조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표현된 테레사의 영적인 황홀경의 표현은 이 시대의 신비주의적 영성을 바로크적인 예술가의 기질이 장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세빌리아에서 활동한 화가 주르바랑이나 뮤릴로 등은 이 시대의 스페인적 영성의 분위기를 잘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단순한 구성과 단조로운 색채 명암의 대비와 하늘을 향한 경건한 수도사들의 초상들이 이 시대에 많이 그려졌다. 그러나 여기에도 영적인 문제들이 없지 않다.
뮤릴로의 「성모승천」이나 벨라스케스의 「무염시태」 등은 이와 같은 경건하고 신비주의적인 자기부정의 영성 안에 마리아 숭배의 의도를 개입시켜 로마 카톨릭의 혼합주의적이면서 여신숭배적인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 같은 그림들은 그 당시 카톨릭이 승인한 마리아의 무원죄설이나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마리아의 승천설 등을 합리적인 카톨릭의 교리로써 확증하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다. 뮤릴로의 성모 승천에 관한 그림들에는 고대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신을 상징하는 초승달이 발아래에 한결 같이 그려지고 있는 점은 마리아 숭배의 뿌리가 어디로부터 기인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숭고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감미로운 화면의 느낌 위에 악한 영적인 의도가 카톨릭 계통의 미술품들에는 숨어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7) 바로크에서 로코코로
1661년 루이 14세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 건축이 착수된다. 그 후 수십 년의 재위기간을 통해 베르사이유는 루이 14세의 신적인 권위에 버금할 만한 위용을 갖추기 위하여 광대한 정원과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이 정비되어 갔다. 그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왕권의 행사자로서 역할을 다했던 인류역사의 큰 영웅들에 속하는 한 사람이었다. 인류 역사의 절대 왕권주의자들이 그러하듯이 루이 14세는 자신을 태양왕으로 불렀다. 자신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리스의 태양신 아폴로의 궁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루이 14세는 자신을 아폴로신의 현인 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684년 맹트농(Madame de Maintenon)과의 결혼 후에 예수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1685년 낭트 칙령을 취소하고 개신교를 불법화하여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파를 박해하고 얀센주의자들을 일소해 카톨릭교 국가로써 프랑스의 위세를 떨치며 공포정치를 펼쳤던 때였다. 특히 그의 시선은 감상자들을 내리깔아보고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있는 태양으로 자신을 신격화하였다. 그래서 이 그림이 있는 아폴로의 방 천정화도 태양마차를 끄는 아폴로 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교만한 전신상 초상화는 그래서 베르사이유 궁전의 아폴로의 방에 걸려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다른 방에는 「태양왕과 그의 가족들」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 속에서 루이 14세는 아폴로의 모습으로 보좌에 앉아있고 그의 인척 여인들은 다이아나, 유노, 플로라 등의 여신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아폴로 신 숭배는 정원에서도 이어지는데 「아폴로의 샘」 역시 그 가운데 하나이다. 큰 연못 가운데서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호령하는 아폴로 그 주위에 반인반어의 해신 트리톤과 바다괴물이 조각되어 있다.
1715년 루이 14세의 죽음과 함께 이러한 절대왕정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태양왕 한 사람에게 연결되어 있던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 해방이 되었다.
예술 활동의 차이는 뚜렷하였다. 전시대 예술의 장대함이나 장식성, 관념성이 바뀌어 경쾌하고 아기자기하며 산뜻하고 속되지 않는 경향과 자유롭고 친숙한 일상성과 감각성이 새로운 예술의 특징이 되었다. 이 시대의 미술은 일반적으로 ‘로코코’ 미술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8) 로코코 회화
프랑스 루이 14세 치세에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와토(1684~1721)는 루벤스의 연작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모사하고 연구하였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는 의상이나 풍속에 관심을 갖고 무대 효과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그의 회화적 특징은 가벼운 붓놀림과 풍부한 색채에 있다. 그의 대표작 「키테라 섬의 순례」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 섬에서 한 때를 보내기 위해 출범하려는 연인들을 그린 환상적 작품으로 로코코 회화의 기조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그림을 통칭하는 ‘우아한 축제(fetes galantes)’라는 말은 야외에서 사랑의 유희를 나타낸 것으로 로코코 시대에 유행한 그림의 일반적 호칭이 되었다.
프랑소와 부쉐도 또한 와토의 영향으로부터 출발했는데 화려하면서 애수를 띤 와토의 작품은 부쉐에 의해 밝은 관능성으로 변했다. 그의 후견인은 루이 15세에게 총애를 받은 퐁파두르 부인으로 당시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후견인 덕분에 많은 궁정 관계의 장식 사업에 종사한 부쉐는 유럽 미술 본래의 육체적 인간표현을 중시한 경향을 되찾았다.
부쉐의 제자인 프라고나르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의 사랑의 유희를 따스한 색채와 속도감 있는 터치로 표현했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로코코 정신의 정통적 계승자였다. 그의 광대한 공간과 비극적 정서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은 일찍이 낭만주의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장식적인 회화를 배격하고 중산층 가정의 실내풍경이나 정물화를 그린 사르댕(1699~1779)이 이 시대의 작가이다. 그는 서민들의 평범한 모습이나 행위를 포착한 인물화들로 그렸다. 현실감 있게 표현된 사물과 조용하고 평온한 빛으로 넘치는 단정한 구도와 화면의 텁텁한 질감은 그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성이다.
로코코 시대의 초상화는 모델의 한 순간의 미소를 즐겨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귀부인을 신화의 여신으로 간주하고 그린 초상화도 유행했다. 이것은 연극적 분장에 대한 로코코의 기호적 표현인 동시에 그리스 신화라는 서양문명의 기초적인 요소에 대한 암시로 전통과의 연결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18세기는 미술의 대중화와 사회적 제도의 변혁의 시대이기도 했다. 1700년 중반 이후 거의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던 관전은 비록 아카데미 회원에 한정되어 출품되었으나 미술품이 일반 대중과 만나는 열린 기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디드로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당시 관전 미술비평과, 화가와 고객의 중간역할을 하는 화상의 증가, 예술가의 파트론 탄생 등 미술의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표현기법 면에서도 판화, 수채화, 파스텔, 소묘 등 비교적 간단하게 제작하고 유통시킬 수 있는 분야의 유행이 미술 시장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 이탈리아에서는 환상적인 인간상, 풍속화 등으로 관심이 넓혀졌고 베네치아가 미술의 중심지였다. 지오바니 티에폴로는 뷔르쯔부르크 궁전과 만년의 마드리드 왕궁 등 각지에서 바로크의 벽화와 천정화를 제작한다. 그는 흰색이 많은 밝은 색채로 인물의 중량감을 없앴으며 시대고증 등에 속박되지 않는 유례가 드문 자유로운 화면을 만들어 내었다.
피에트로 롱기는 베네치아 시민 생활의 여러 가지 모습을 희극의 한 장면과 같이 그려냈으며 카나레토는 베네치아의 경관과 거기서 행해지는 축제나 행사 등을 정교하게 그렸다. 베네치아의 풍경화가 가장 유명한 화가는 구아드리인데 그는 많은 운하와 곤도라가 있는 풍경을 남겼다. 같은 베네치아 출신의 건축가이자 판화가인 지오바니 피라네지는 고대 로마 유적의 장대함을 간조한 판화를 만들고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7. 근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시 2:2~3)
시민 사회의 예술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1세의 제 1제정을 거쳐, 1848년부터 1852년 제 2공화정까지 프랑스 미술은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1)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한 마디로 신고전주의란 르네상스 미술을 바탕으로 하며 그 기초는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을 규범으로 삼는 운동이었다. 독일의 미술사가인 빈 켈만의 「그리스 예술 모방론」(1755년 출간)은 이론적으로 신고전주의 운동을 뒷받침 하였다. 빈 켈만은 예술은 자연의 이상화이어야만 하는 것, 그리고 그 이상화를 이미 실현하고 있는 그리스 예술을 모방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전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고대 지향의 밑바탕에는 로코코미술의 방종하고 향락주의적인 내용이나 감각적 양식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고대 미술의 형이상학적인 내용과 단순하고 장대한 형태미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반(反)로코코 정신은 계몽주의 철학자인 디드로의 지지를 얻었다.
계몽주의는 일방적으로 발전된 인류의 사상체계로만 부각되어 왔는데 그것은 이신론,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이 세상을 관계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자연법칙과 인과율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기독교적인 사상의 포기에서 발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았으며 이러한 불신의 사조는 자연주의, 즉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무한한 자연만이 존재했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며 마침내 진화론, 유물론의 사상으로 필연적으로 발전하게 되어있는 무신론 사상의 완곡한 시작점이다. 그러므로 신고전주의 사상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의 다신교적 인본주의 사상은 계몽주의자들의 무신론적 인본주의와 영적인 일체감을 가지는 것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기존의 왕정체제를 붕괴시키고 고대 로마의 공화제에 공감한 프랑스 혁명 미술의 양식으로써 채용되었다. 혁명 직전 신고전주의 회화를 완성시켰던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는 미술 행정과 실제 작품의 제작 등으로 혁명에 참여했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혁명기에 이르러 제정 양식으로의 변모를 이룩한다. 이 시기의 건축과 실내의 고대풍의 양식은 이전의 장식성을 잃고,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나폴레옹이 고대 로마의 황제를 모방하고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미술의 형식이 복고되었다. 혁명의 발발과 함께 다비드는 미술관계의 제도개혁에 관계하는 한편 「테니스코트의 맹세」 소묘와 「마라의 죽음」 등 프랑스 대혁명을 기록하는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제정개시와 함께 황제의 수석화가 칭호를 부여받은 그는 대작 「형제 나폴레옹의 성별식과 황비 조세핀의 대관」을 제작했다.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의 다비드의 작품에는 서양회화의 전통에 힘입은 정돈된 형식과 기록적인 사실성이 나타난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고전 예술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고 고전주의 정신을 19세기에 전달했다.
다비드에 이어 신고전주의 정신을 잘 이어 받은 화가는 장 그로와 도미니끄 앵그르이다.
장 그로는 나폴레옹의 초상과 원정 그림이 유명하며 그의 젊은 나폴레옹 상은 격한 동감과 정열을 느끼게 한다.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병문안하는 나폴레옹」과 「아이라 전장의 나폴레옹」은 군신과 같은 나폴레옹을 나타내면서도 전장에서 상처입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 이전의 그림과 달리 생생하게 모사하고 있다. 그는 스승 다비드의 고전주의적 가르침과 자신의 낭만주의적 기질 사이에 딜레마에 빠져 자살했다.
그로에 이어 7월 왕정기의 아카데미즘 지도자가 된 화가는 앵그르이다. 그는 구체제 말기에 태어나서 제 2제정 말기까지 살았고 색채에 대한 소묘의 우위와 정적인 구도라는 신고전주의의 특성을 시종일관 지속적으로 유지시켰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혁명기에 이르러 제정양식으로의 변모를 이룩한다. 이 시기의 건축과 실내의 고대풍 양식은 이전의 장식성을 잃고,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나폴레옹이 현인 신, 즉 이집트의 파라오나 로마의 가이사, 일본의 천황 등과 같은 영웅신으로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처음 영걸’ 니므롯(Nimrod)의 후예였던 것이다(창 10:8). 나폴레옹은 회화를 중요한 선전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승과 황제에 관련된 의식 그림이나 황제 가족을 비롯한 측근의 초상화가 대량으로 주문 제작되었다. 이러한 작품에는 신고전주의적인 웅대한 형식성과 동시에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사실성으로 보는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격동감이 필요하였다. 이렇게 신고전주의 이상화나 정적인 성격과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제정기 미술에 나타났다.
2) 낭만주의(Romanticism)
신고전주의의 질서정연한 양식과 신화적 내용의 배후에는 고대의 모방으로 각국의 독자성보다 범유럽적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는 로마가 그리스의 아티카파 미술을 공적인 미술로 채용했던 것과 상통하는 정신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침략은 국가개념을 확립시켰고 각각의 민족과 역사, 풍토에 뿌리박은 지역미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보편적인 고대 문명으로부터 개개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으로의 이행이 낭만주의 시대의 특징이다.
그 결과 낭만주의자들의 작품은 개성적, 주관적인 격정을 포함하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는 1816년 「메듀스호의 뗏목」이라는 낭만주의 그림을 그리며 이는 정부의 책임에 의한 시사적 사건을 그린 것으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외에도 그는 짧은 생애에 광인과 인체의 부분묘사 등 반 고전적 주제를 개척하고 격한 붓놀림에 의한 운동감 표현으로 낭만주의 회화를 출발시킨다.
들라크로와는 제리코의 정신을 더욱 완성시킨 미술가이다. 그는 동양적 주제와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 거친 붓놀림의 동세 표현으로 완벽한 반(反)고전주의적인 낭만주의 화풍을 나타냈다.
3) 사실주의(Realism)
사실주의 개념은 이미 19세기 초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회화에도 보였는데 점차 왕정의 반대와 강력한 부르조와 지배에 대한 불만으로 더욱 활발해지고 화가들은 사회현실에서 주제를 취하게 되었다. 제 2공화제 시기 일시적이나마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오만 불손한 지배층의 풍자화와 농민, 노동자의 모습이 그려지게 된다.
당시 사실주의는 보통 자연주의라고 불리우는 농촌을 그린 풍경화와 함께 발전해갔다. 19세기 전반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파리 근교 퐁덴블로 숲 등 흔한 풍경들을 제작했다. 그 중에서도 테오도르 룻소는 자연 그대로의 빛 효과 표현에 뛰어났다. 코로의 풍경화도 자연의 관찰에 의거하고 있는데 고전주의적 단정함을 갖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세련된 은회색을 주조로 하는 후기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또한 뛰어난 서민풍의 인물화와 많은 부인상을 남겼다.
1850년 전후 도미에와 밀레, 구스타프, 쿠르베는 사실주의 회화를 대표한다. 도미에는 풍자 판화가로서 오랜 경험에 의핸 캐리커쳐 풍의 대담한 기법으로 사회를 풍자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이에 반해 농촌으로 돌아간 밀레는 노동하는 농민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어 농촌 생활을 미술적으로 재발견하였다. 쿠르베는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을 하면서 도시의 노동자들을 그렸고 사실주의 미술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가 말한 ‘나는 천사를 보지 않았으므로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근대정신의 단적인 반영이기도 하다.
4) 혁명의 제전
18세기 후반 고대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고대건축의 유적조사로 얻은 지식으로 더욱 발전되었다. 이러한 고전 양식의 대표적 건축은 파리의 성 쥬느비에브 성당이 있다. 이 건축은 정면부의 코린트식 열주 행랑과 단정한 박공이 그리스의 신전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리스의 신전과 성당의 외형적 일치는 기독교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혼합주의의 결과이다. 이 건축물을 통해 우리는 그 당시의 로마 카톨릭이 무엇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이러한 혼합주의적 종교는 민중들에게 압제와 권위의 종교였기에 프랑스 혁명 시에는 판테온(Pantheon)으로 개칭되어 영웅들의 묘소가 되었으며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 등이 이곳에 안치되는 등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영웅 묘지로써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이성을 모든 것의 판단자로 생각한 볼테르는 계몽주의 사상의 출발점으로 사상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프랑스 혁명기의 미술 행정에 권세를 떨친 다비드는 「볼테르 유해의 판테온으로 이송」(1791)이라는 큰 제전을 연출했다. 신고전주의자와 무신론자와의 일치는 이러한 제전을 통해서도 볼 수가 있다. 다비드는 이어서 「자유의 제전」(1792), 「박애의 제전」(1793), 「최고 존재의 제전」(1794) 등을 연출했으며 그는 개선차와 사람들이 갖는 여러 가지 소도구와 디자인으로 왕조문화와 카톨릭 종교에 대한 연상을 피하기 위하여 신고전주의 양식을 철저히 채용했다.
이러한 제전에서는 개선차를 중심으로 한 행렬이 시내의 광장으로 향해 나가고 거기서 의식을 거행하는 방법이 취해졌다. 행렬과 의식의 장식은 화가와 건축가에게 맡겨지고 작곡가에게는 노래를, 시인에게는 노래의 가사 제작이 의뢰되었다.
제전의 시각적 연출에는 혁명에 있어 중요한 여러 가지 이념을 의미하는 의인상과 상징물들을 빼놓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자유」, 「평등」, 「박애」는 고대풍의 여신 옷차림을 한 여성상으로 나타내었다. 구체적으로 자유는 고대의 해방된 노예가 머리에 쓰고 있던 프리기아라 불리우는 천으로 된 모자로, 평등은 삼각형의 수량 측정기로, 박애는 작은 나뭇가지를 묶은 장대로 나타냈다.
프랑스 혁명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취했으며 혁명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력기원을 거절하고 1792년 9월 22일부터 새 시대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5) 근대 미술의 종교적인 성격과 비밀결사
19세기 초 독일 회화는 상징적 인간 표현으로 향했다. 빈 아카데미 학생이었던 프란쯔 폴과 프리드리히 모바베크는 아카데미 고전주의적 교육에 만족할 수 없어 1810년 다른 동료와 함께 로마로 이주한다. 이들은 폐가가 된 수도원에서 종교적 공동생활을 하면서 제작 활동을 했다. 이들은 라파엘과 뒤러라고 하는 언뜻 보면 양립하기 어려운 화가를 본보기로 하여 선묘에 의한 명확한 형태와 선명한 색채로 중세의 기사도 전설과 기독교적인 주제를 그렸다. 의도적인 원시적 표현과 염세적 종교관으로 중세 회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추구했던 이들을 미술사는 ‘나자레파’라고 불렀다.
이들의 종교적 공동생활과 분리주의적 삶이 외형적으로는 경건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 속에는 중세의 타락된 종교적 유물들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는 적그리스도적인 영의 지배를 받는 어두움과 죽음의 그림자를 반영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운동은 영국의 라파엘 전 파(Pre-Raphaelite Brotherhood) 등에 영향을 주면서 현대 미술까지 침투되고 있다.
라파엘 전 파는 최초의 상징주의 운동으로 분류되는데 1848년 단테 가브리엘로세티와 존 머레이, 윌리엄 홀먼 헌트 등이 ‘라파엘 전 파 형제단’을 결성했다. 이들이 종교적인 집단 같은 공동생활의 외형마저 갖추었으나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미술작품의 내용들은 성서와 중세의 역사를 비롯하여 세익스피어와 단테의 문학에서 주제를 얻으면서 신비주의적 상징적 세계를 추구했다. 이들의 영향력은 국제적인 미술운동으로 번져나갔으며 그 내용은 죽음과 불안, 허무와 그리스 신화에의 집착 등으로 채워졌다.
스위스의 화가인 아놀드 벡크린도 현대의 물질주의를 버리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환상의 세계를 지향한 상징주의 화가였다. 벡크린은 이탈리아에서 고대 신(神)들이 사는 세계를 발견하고, 디오니소스적 생명력과 죽음의 정적이 감도는 작품을 남겼다.
오딜론 르동은 우울한 정서와 무의식의 전율을 표현했으며 1890년 이후 르동은 꽃이나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파스텔과 유화에 의한 채색화를 제작하여 가장 풍부한 상징주의 회화를 만들었다.
프랑스의 피에르 사반느와 귀스타프 모로는 19세기 초 낭만파와 세기말 사상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상징주의 화가이다. 사반느는 훌륭한 벽화가로서 리용과 마르세이유, 파리 등에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벽화는 벽의 평면성을 의식한 정적이고 권위 있는 구도를 갖추며 간결한 색채와 명상적인 분위기로 고갱, 모리스 드니, 피카소 등에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말에 상징주의는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전 유럽으로 퍼지고 유겐트 스틸, 혹은 아르누보라고 불리는 공예미술 운동과 밀접하게 어울리면서 20세기 현대미술을 태동시킨다.
중세의 동경과 기사도 정신, 그리스 신화에로의 복귀 등은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경향인데 이러한 것들은 프랑스 혁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프리메이슨(Freemaison) 비밀 결사단의 외형과 내면을 그대로 닮은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프리메이슨 중에서 새롭게 부상한 일루미나이티이다. ‘일루미나이티’는 계몽주의와 같은 성격의 명칭인데 자유, 평등, 박애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인본주의 집단으로써 세계정복을 위한 신세계질서를 꿈꾸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대부분이 프리메이슨의 영향권 내에 있었던 혁명가들은 기독교를 금지하고 성경을 불태웠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금지시키고 자유의 여신을 찬양했다. 근대 사상이나 역사의 배후에는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이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감추어져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들 비밀결사단의 외면은 얼핏 보기에는 기독교적인 단체같이 보이지만 그 내면은 종교혼합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사상의 밑바닥에는 인본주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 비밀결사단의 정체는 악한 영에 의해 지배 받는 중세 이래 이어져 내려오는 종교 속에 들어온 사탄의 무리들이다(계 2:10). 교회 속에 사탄의 가르침을 좇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다. 이들은 교회 속에 들어와서 교회를 모든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간음시키는 무리들로서 ‘음녀’(계17:1)이다. 이 악한 영은 사람이나 단체나 종교를 통해서 그 영향력을 이어져오고 있으며 ‘광명의 천사’(고후 11:14)로 가장한다. 일루미나이티나 계몽주의는 모두 광명을 나타낸다. 이들의 영향력은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에 광범위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미술에서는 위와 같은 단체로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폴 고갱은 인상주의의 감각적 현실과 빛의 과학적 묘사에 반대하면서 1888년 소위 종합주의적 양식을 확립한다. 이것은 선명한 색채를 단순화된 윤곽 속에 평면적으로 칠하는 기법으로 상사상이 돋보이는 관념과 주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후 고갱의 영향력은 보나르 뷔야르, 모리스 드니에 의해 나비파를 형성시킨다. 나비파란 히브리어의 ‘선지자’라고 하는 말로 그 이름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세기말 상징주의에서 종종 노출되었던 종교적 비밀결사의 영향력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유화와 조각뿐만 아니라 판화, 포스터, 책의 삽화, 타피스트리, 가구, 연극의 무대 장치, 의상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아르누보 미술과도 깊게 관련하고 있었다.
미술과 기독교적 주제와의 만남은 흔히 기독교 미술로써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이 두 분야의 만남은 역사적으로 항상 결론에 가서는 ‘혼합주의적’ 양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경향이 많다. 근대 미술에서 이러한 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가가 윌리엄 블레이크였다. 그는 자신의 시와 삽화를 동시에 인쇄하는 기법을 개발해서 중세의 사본과 같은 채색 삽화들을 많이 남겼다.
블레이크는 그림의 주제 면에서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적 종교혼합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현실보다는 항상 환상의 세계에만 집착했으며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기독교적인 주제들도 사실은 자신이 창조한 신화의 세계를 투사하는 정도이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그리면서도 그 형상은 엄격하게 보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라 화가의 상상 속의 한 존재인 우리젠(Urizen)이라고 부르는 보편적 신이었다. 그는 우리젠을 세계의 창조자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창조자도 사악한 혼을 지닌 자로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가 비록 기독교적인 주제들을 많이 그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적인 영성과는 전혀 반대되는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정신세계에 집착했다.
이와 같은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적인 미술가이지만 그 내면은 전혀 다른 신비주의적 경향의 미술들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로 이어지고 있는 영적으로 위험한 미술들이다. 프리메이슨이나 예수회 등의 단체들이 기독교적인 외형을 많이 띠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사탄적인 속성을 가진 것들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도 같은 경우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수행이나 기도는 결과적으로 악한 영적인 도구로 사용되기가 쉽다. 근대 미술에서 이어지는 종교적 비밀결사와 같은 성격을 띤 운동들도 이와 같은 구조 안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다.
6) 조각
19세기 후반 조각의 공적인 주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은 이 시대의 정신이 인본주의적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성경은 이와 같은 과시적인 조형물을 높이 세우는 사람들의 정신이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영웅 심리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시대 조각의 특징은 공공기념물이 많이 제작된 것이다.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는 민족 통일을 기념하는 조각이 많이 만들어지고 프랑스의 제 3공화국에서는 자유와 공화국을 상징하는 기념비가 전국에서 만들어졌다. 뉴욕 항 입구에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도 프랑스에서 제작한 것이며 파리 시내 「공화국 승리」, 「죽은 사람의 기념비」 등도 이러한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우수한 조각가들은 예술적 가치에 문제가 드러난 기념 조각보다 순수 예술작업에 열중하게 되어 공공조각에로의 관심은 점점 적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조각은 오귀스트 로댕에 의해 한층 발전해 나간다. 1877년의 「청동시대」는 로댕의 독창적인 인간표현으로 초기 시대의 대표작이다. 「까레의 시민들」은 14세기 영국군의 포위에서 시(市)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적에게 내던져 저항하는 까레 시민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공적이 주문 조각이지만 로댕은 받침대를 없애고 관람자와 같은 높이의 크기로 제작해 현실감을 더했다.
7) 아카데미즘과 살롱회화
1860년대 중반 이후 역사화의 전통은 쇠퇴하였다. 이무렵 아카데미의 중심적 화가들은 신고전주의 화풍으로 매끄럽게 마무리된 화면을 계속 유지하고 새로운 시민사회의 취미에 대응한 여러 가지 표현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카바넬은 로마대상, 이탈리아 유학, 미술 아카데미 입회, 국립 미술학교 교수라고 하는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이상화된 나체상으로 절대적인 명성을 얻었다. 여신의 곡선미는 앵그르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제롬은 고대와 이국적인 주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되었는데 그의 「시이저의 죽음」은 단순한 역사화라기보다는 19세기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갈망을 대변하고 있다.
8)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1860년대에 마네, 모네, 드가 등의 등장으로 자연이 주는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여 나타내기 시작한 인상주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도 작가의 주관적 느낌을 강조했다. 근대 회화운동의 대표적인 경향인 인상주의는 19세기 말기에 가장 프랑스를 중심으로 성행하였으며 유럽 회화의 주류적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가 살롱에서 낙선한 해인 1863년, 마네를 포함한 다수의 낙선을 둘러싸고 소장미술가들 사이에 심사의 불공정에 분개하여 항의적 성격의 단체를 결성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들의 항의를 수용하여 연 <낙선작 전시회>가 인상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인상파’라는 말은 1874년 모네, 르노아르, 세잔느, 드가, 피사로, 시슬레 등이 참가한 전람회를 보고 저널리스트가 그들 작품들의 스케치적 화풍을 비난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상파 전람회에 모인 화가들은 명확한 미학과 인상주의 이론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모네, 르노아르, 피사로, 시슬레 등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잘 표현하였으며 이들을 대표적 인상주의 화가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인상주의의 기원은 19세기 전반 서양회화에 넓게 나타난 자연주의 경향에서부터이다. 자연주의 회화의 가르침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야외에서 직접 자연을 대하며 제작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생표현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게 되었으며 현장에서 느낀 감각을 빨리 표현하게 하고 밝고 생생한 효과를 얻는 기법과 느낌을 중요시하였다.
모네와 그의 동료들이 주축이 된 인상주의는 1860년대 중반 퐁텐블로 숲에서 탄생하였다.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바르비종파의 화가들과 크게 다른 것이 있었다. 바르비종파가 낭만주의적 자연을 생각한 것에 비해 이들은 도시인의 시선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인상주의자들은 전원의 풍경 그 자체보다는 활기찬 교외의 행락지를 선호하고 파리의 시가지 철도 등을 즐겨 그렸다.
인상주의자들은 가능한 빛의 인상에 가깝게 표현하기 위해 ‘터치’의 분해와 ‘시각 혼합’이라는 수법을 도입했다. 이것은 물체의 고유색을 얻기 위해서 물감을 서로 섞기보다 순색의 점들을 화면위에 나란히 찍는 병치혼합의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모네는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데 그의 작품들은 감각주의의 극치이며 인상적인 표현에 숙달했으며 만년에는 추상적인 화면에 도달하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중심으로 한 물랭루즈나 물랭드라갈레트 등에서 자주 만났으며 그들의 작품에 이 지역은 많이 담겨있다.
몽마르트르(Montmartre)는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춤과 술과 쾌락의 동네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몽마르트르는 1534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예수회의 7인 동지회가 발족된 곳이기도 하다. 이들 일곱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겠다는 이상에 불타서 성직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형제로서의 유대로 뭉쳐서 청빈, 정결, 예루살렘 순례에 청원을 바쳤다. 이 서원은 몽마르트르 언덕에 순교자의 여왕 성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에서 바쳐졌기 때문에 몽마르트르의 서원이라고 한다. 이 언덕의 정상에는 흰색의 예수성신 대성당이 있다. 예수회가 태동한 몽마르트르가 예술의 중심지가 된 것은 바로크 미술에 예수회의 지대한 영향력과 더불어 예술 운동과 예수회의 상관관계를 엿보게 한다.
9) 후기 인상주의
1880년대 중반 인상주의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다. 폴 세잔느는 인상주의 미학에 가장 깊게 관여하고 있었던 화가이다. 그는 처음에는 낭만적 성격의 주제를 어두운 색조로 그렸는데 피사로와 만나 자연을 관찰하고 냉정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것을 배우면서 자연의 근원적 형태를 찾는다. 그는 인상주의에 결여된 형태감각을 회복하며 물질적 존재감을 되살렸다.
폴 고갱은 인상주의의 감각주의와 빛의 과학적 묘사에 반대하면서 1888년 소위 종합주의 양식을 확립한다. 이것은 선명한 색채를 단순화된 윤곽 안에 평평하게 칠하는 기법으로 상상력과 주관적 분위기를 담은 작품들을 제작하여 이후에 보나르 뷔야르, 모리스 드니에 의해 결성된 나비파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 나중에 고갱은 서양문화와 문명을 증오하며 원시적인 자유와 생활을 좇아 타이티 등 남태평양의 섬에서 살다가 죽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반 고호는 전도사 생활을 한 적이 있는 신앙인이었으나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친 후 화가가 되었다. 초기에 그는 어두운 색조로 농민들의 소박한 생활을 그렸으며 밀레의 그림을 많이 모사하였다. 1888년 파리 체제 이후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를 알게 되면서 새로운 기법으로 밝고 강렬한 색채에 의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는 짧은 생애 중 마지막 10년 동안 놀랄 만큼 정열적인 작품들을 남기고 권총으로 자살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현대 표현주의 회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8. 현대
세기가 변하는 1900년대부터 제 1차 세계대전의 시작 전까지 15년간을 프랑스에서는 ‘아름다운 시대(Belle Epoch)’라 부른다. 이 시기의 파리는 몽마르트르의 빨간 풍차로 상징되는 것처럼 화려하고 향락적인 분위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아르 누보’(프, 새로운 양식), ‘유겐트 스틸’(독, 젊은 양식), ‘모던 스타일’(영, 현대 양식) 등으로 불리는 다채로운 공예 예술운동이 유럽을 석권하고 있었다. 이것은 국가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명칭을 갖고 있었으나 미술 전 분야에 걸쳐 상호교류와 영향이 이루어졌다. 조형적 특성으로는 화려한 곡선 문양을 중심으로 참신한 장식기법이 활용되며 새로운 시대 미학을 추구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윌리엄 모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미술과 공예’(Art and Craft) 운동과 미술 잡지 「리뷰 블랑시」 주변에 모인 프랑스의 예술가들, 즉 로트렉과 나비파를 비롯하여 벨기에의 전위예술 그룹 ‘자유 미학’의 동료들, 독일의 미술잡지 「유겐트」와 「빵」을 무대로 활약한 화가들이 제 각기 개성과 특색을 유지하면서 광범위한 세기말의 예술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위적인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 이들의 의식은 ‘새로움’, ‘청춘’, ‘현대’ 등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뮌헨, 베를린, 빈에서 연이어 결성된 순수미술 그룹인 ‘분리파’도 과거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는 점에서 같은 성격으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귀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하는 빈 분리파는 오스카코코슈카, 에곤 쉴레와 같은 강렬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화가들을 탄생시킨다.
1) 야수주의(Fauvism)와 표현주의(Expressionism)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에 참여한 젊은 화가들은 매우 강렬한 색채표현 때문에 당시의 비평가들로부터 야수(Fauve)라고 불려진데서 ‘포비즘(야수주의)’이 탄생되었다.
상징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구스타브 모로의 문하에서 마티스, 루오, 마르케, 블라맹크, 드랭 등과 후에는 반 동겐, 뒤피, 브라크 등이 동참한다. 이들은 신인상주의 색채이론과 고호의 순수한 감정표현에 영향을 받아 색채의 독자적 표현을 추구했다. 색채를 재현적, 사실적인 역할로부터 해방시켜 감각으로 호소하는 표현수단을 확립하려고 했다. 이들 운동에는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려는 강렬한 내적인 충돌이 있었으나 작품의 개성은 뚜렷했으며 짧은 기간에 그 운동들이 끝났다. 나중에 브라크는 입체주의(Cubism)로 전환한다.
야수주의가 탄생한 1905년, 독일 드레스덴에서는 루드비히 키르히너와 헥켈 등의 젊은 화가들에 의한 전위미술 그룹 ‘브뤼케(다리)’가 결성되었다. 그 후 막스 펩슈타인과 에밀 놀데가 참여하면서 독일 표현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이들의 작품은 야수파와 공통점이 많으나 색채가 어둡다.
2) 입체파와 미래주의
입체파는 형태와 구성에 강조점을 둔 운동으로 피카소와 브라크, 후앙 그리와 레제, 들로네 등이 함께 했다. 이들은 파리의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에서 공동 작업을 하였다.
스페인 출신 파블로 피카소는 1900년 초부터 파리에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으로 자신의 창작세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흑인조각과 고대 스페인의 원시미술에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아비뇽의 처녀」, 「게르니카」 등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일생에 걸쳐 수차례의 이혼과 결혼을 하면서 많은 화제를 남겼다.
3) 추상과 구성주의
현대 미술 전반에 나타난 추상미술은 제 1차 세계 대전 직전 유럽의 여러 도시의 전위미술가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추상미술은 오랜 미술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미 있어온 것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된 것은 재현성의 거부로 인해 획득되는 미술의 자율성의 확립에 있었다.
감정의 거침없는 표현으로 화면의 유동성과 자율성을 강조한 ‘뜨거운 추상’과 감정을 절제하고 기하학적인 구성미를 추구한 ‘차가운 추상’운동이 일어났다.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 피카비아 등이 이 운동의 대표적 작가들이다.
4) 다다, 초현실주의
제 1차 세계대전 중 취리히의 카페 볼테르는 다다운동의 산실이었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현대 미술운동의 산실의 명칭으로 다시 부활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로부터 적극적으로 추구된 무신론적 사상의 종착점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핵심 멤버 트리스탄 짜라가 다다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했을 때 그 말 속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들을 거부하는 허무주의 사상이 지적인 교만과 함께 깔려 있었다. 그들은 불신, 저항, 파괴, 도전, 부정 등의 안티(Anti)적 운동이었다. 뒤샹이 소변기를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했던 것처럼 이들은 모든 방법으로 과거의 예술과 문화의 철저한 파괴와 부정을 나타내었다.
1920년 전후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초현실주의는 꿈과 무의식, 또는 환상과 비합리의 세계에서 새로움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독일에서 파리로 온 에른스트, 스페인 출신의 살바도르 달리, 벨기에의 르네 마그리트, 프랑스의 이브 탕기 등 초현실주의자들은 제각기 꿈과 현실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초 현실’을 나타내고자 했다. 1924년 시인인 앙드레 브르통이 ‘쉬르리얼리즘 선언’을 발표했다.
5) 에콜 드 파리파
현대의 여러 미술운동들이 어느 이념과 미적 경향에 의해 움직여왔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운동에 참가하는 일이 없이 자기의 세계를 계속 표현해 온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파리에 와서 방랑 생활 속에 서정성이 강한 작품을 만든 ‘에콜 드 파리’ 화가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탈리아 출신 아데메오 모딜리아니, 러시아에서 온 수틴, 샤갈, 일본인 후지타시지, 불가리아 출신 파스킨 등이 ‘에콜 드 파리’ 화가들이다. 프랑스 출생으로 몽마르트르에서 술에 빠지면서도 독학으로 도시의 풍경들을 남긴 유트릴로도 여기에 속한다.
6) 제 2차 대전 중에서 전후(戰後)
전쟁 전 초현실주의 조각가로서 많은 작품을 했던 자코메티는 철사와 같이 가늘고 왜곡된 인체를 표현하여 전쟁의 영향으로 존재에 대한 근원적 불안감을 표현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기분이 나쁘게 무참하게 녹아가는 인간상을 그렸다. 그의 작품에는 전쟁의 비극과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담은 동시대의 문학에서 나타난 실존주의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장 포트리에, 볼스, 뒤뷔폐 등도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원시적이면서도 퇴폐적인 분위기, 부정형의 형태와 죽음과 피를 연상시키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분위기의 작품들을 고독하게 추구해갔다. 러시아로부터 프랑스로 이민 온 니콜라 드스탈은 남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은 화가였지만 스스로 생명을 끊었는데 이들의 삶과 예술은 전반적으로 죽음을 가까이 하는 영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7) 표현세계의 확대
오늘날에는 회화, 조각, 건축이라고 하는 전통적 분류로써는 파악하기 힘든 작품들이 수없이 만들어진다. 또한 퍼포먼스와 해프닝 같이 전통적 미술의 틀에서 벗어난 시도들이 많다.
이러한 새로운 미술 속에는 새로운 방법과 재료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있는가 하면 ‘미니멀 아트’와 ‘컨셉추얼 아트(개념미술)’ 같이 예술 본연의 자세에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내던지는 것도 있다. 극단적인 변화와 자유로운 추구를 한 후 현대 미술은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새삼스럽게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새로움을 좇아 지속적으로 달려온 후에 인간의 본질과 미술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이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이다.
볼테르 이후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한 이래 현대 미술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과 치외법권적인 자유를 누려왔다. 그 결과 미술은 난해하고 전문화되어 평범한 생활인들과의 관계는 멀어지고 소수의 전문가들만 통하는 분리현상으로 치달아가고 있다. 같은 미술가들이라도 서로의 작품경향에 따라 이해하지 못하는 이 현상은 단절과 분리의 시대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모든 활동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은”(사 5:20) 결과이다. 그래서 바벨탑의 결과가 혼란과 소통의 막힘이었듯이 현대의 미술도 그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본 미술
기독미술인에게 떠나지 않는 부담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간다하겠지만 여러 가지 사조와 주의가 난무하며 온갖 기상천외한 행위까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용납되며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거의 치외법권적 영역인 미술계의 현실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는 한국 근, 현대사에서 많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세계 유래를 찾기 힘든 짧은 역사 가운데서도 양적인 부흥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본받을 만한 기독미술가는 거의 없는 현실을 보아도 기독교와 미술의 현실적 접목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미술에다가 신앙적인 주관(특히 기독교적인 것; 불교나 기타 종교 또는 무속은 오히려 전통적인 것으로 선호되지만)이 강하게 표출될 때 미술가가 이 세상에서 속해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인 미술계는 그 작가나 작품을 그들의 필드(field)에서 룰을 벗어난 것처럼 여겨 퇴장시켜 버린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실제로 피해를 맛보면 신앙과 미술을 분리하거나 미술의 큰 소리에 가리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속삭임으로서만 신앙적 양념을 곁들인다. 그래서 큰 풍경 속에 보이는 마을에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그리거나 추상적 형태 속에 숨은 그림처럼 신앙적 기호들이 있는 정도의 작품을 제작하면 제법 용기 있는 작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뜨거운 신앙의 체험이 있고 성경적 안목이 생긴 자는 이러한 소극저인 표현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갈등을 떨칠 수 없다. 그의 신앙이 자라날수록 이러한 내면적 생명력이 분출하려고 더욱 기세를 가질 것인데 안일한 표현이나 타성적인 표현의 한계 속에서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미술은 다른 예술보다 시각적이며 직접적인 감동을 주는 것이다. 미술의 표현은 언어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작가의 세계관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전해지게 된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 그의 미술작품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 비그리스도인과 같을 수 있을까? 주일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와 말씀묵상들이 그리스도인 미술가의 작품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리스도인 미술가들이 개인의 신앙심은 확고하다고 하더라도 그 신앙심을 작품과 연결시키거나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그러한 세밀한 영역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더 이상 애매하지 않다. 많은 기독교 미술을 논하는 책들이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려주고 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화실의 궁극적인 지도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나 선교단체나 기독교 기관이나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화실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성경과 미술을 연결하려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러한 책들은 미술의 현장에서 화필과 물감과 캔버스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성경학자 내지는 기독교문화 이론가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그들에 의해 도상적 작전은 이미 수립이 되었다. 이제 실천적인 전사가 필요하다. 미술세계라고 하는 영적인 전쟁터에서 직접 상처를 입기도 하고 승리를 맛보기도 한 ‘하나님의 군대’(마하나임)가 일어나 이기기로 약속된 전쟁터에서 이김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이다.
본고는 ‘이 시대 미술의 현장에서 기독미술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도구로 쓰여 질 수 있을까’를 구체적으로 연구한 것이다. 본고의 주된 내용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생각이 가미되어 하나님의 뜻이 흐려지지 않도록 그때그때 논지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였고 전체적으로 성경적 세계관의 기초위에 생각들을 전개하였다. 더불어 필자의 신앙체험 가운데 만났던 혼돈스러웠던 문제들에 대한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해결해 주신 것들도 반영되어 있다. 영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이 미술과 만나서 시각적인 구체성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고 구체적인 것들의 배후에 있는 영적인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본고에서 기독미술이라는 내용을 이루고 있다.
1장에서는 기독교와 미술의 관계에서 미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살펴보았다. 이 기초 위에 다음의 생각들을 전개시키기 위한 것이다.
2장에서는 성령 충만했던 브사렐과 오홀리압이라는 미술가들로 대표되는 성경적 미술가들의 모델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위한 미술’은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 고찰하였다.
3장에서는 성경적 모범을 반역하여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죄 된 본성에 이끌린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람을 위한 미술’을 다루었다.
4장에서는 본고의 논지가 지나치게 지엽적인 미술 분야에 집중되어서 성경 전체적 관점과 떠나있지 않도록 논지의 위치를 재확인하였다.
5장에서는 신앙의 원리와 결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미술과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신앙을 나무에 비유하여 나무둥치에서 뻗어나간 여러 가지 중의 하나인 미술을 살펴보면서 2장과 3장의 논지가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되는지를 살펴보았다. 2장과 3장이 가지에서 나무둥치로 나아갔다면 여기서는 둥치에서 가지로 나아가는 형식을 취하였다.
6장에서는 미술은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실기에 대한 성경적 조망과 신앙적 원리들을 적용하였다.
본고의 전체적 전개에 있어서 성경의 미술적 용어가 가지는 상징적이거나 광의의 의미를 제한하여 미술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고의 한계를 넘어서는 내용으로 발전해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제한을 통해 우리의 생각들을 명료하게 할 수 있는 좋은 면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들은 2001년 무더운 여름동안 생각들이 쌓여진 후 가을에 하나님께서 강하게 돌진하셔서 이 생각들을 풀어내어 쓰게 하신 것이다.
1. 성경과 미술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서도 창작의 역할이 강조되는 미술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천적으로 창조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無)에서 창조’(cretio ex nihilo) 하셨지만 인간은 이미 창조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창조를 해야 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와는 근본적이고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가의 창작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이고, ‘인간됨’ (mannishness)의 본질적인 면이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사역을 통하여 보여주신 또 하나의 미술가적 태도는 그 창조하신 것들을 감상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3, 18, 21, 25, 31)라고 하신 것이다. ‘보시기에’는 시각적인 행위로써 시각예술인 미술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좋았더라’는 표현은 미적(美的) 쾌(快), 불쾌(不快)를 나타내는 말로써 미학적(美學的)인 용어이다.40) 그러므로 우주의 대예술가이신 하나님의 사역적 속성의 희미한 그림자를 미술가는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전혀 영적인 관점을 떠나 있는 미술활동에서도 다른 인간 활동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성경적 용어들이 그대로 사용오디고 있다. ‘창조’라든가 ‘영감’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창세기 1장에서 살펴본 하나님과 미술이 관계는 ‘보시기에 좋았듯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미술이 가졌던 창조성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보시기에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것으로 그 창조성은 오용되었다. 창조성은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지만 인간의 창조성에서 나온 모든 것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성(creativity)이 창조자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기독교 미술의 기본 전제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이다. 기독교 미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목표는 창조자의 원래의 의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2. 하나님을 위한 미술
“이 백성은 내가 나는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시 43:21)
성경 속에서 미술가의 모형과 같이 등장하는 브사렐은 미술인들에게는 영광스럽게도 최초의 성령 충만을 받은 인물이었다.
출애굽기 35장은 이들 미술가들에게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미술을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브사렐에게 ‘하나님의 신(神)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출 35:3) 일하게 하셨다. 진 에드워드 비이스 2세는 그의 저서 The Gift of Art에서 미술가를 위한 은사를 말하면서 이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의 견해와 나의 생각들의 차이점들을 전개하는 과정에 구체적인 본고의 논지가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진 에드워드 비이스 2세의 글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그는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여’ 즉 ‘성령 충만’과 그 이하에 나오는 ‘지혜’, ‘총명’, ‘지식’을 미술가를 위한 은사로써 같이 다루고 있다. 필자는 그와는 견해를 조금 달리하여 ‘지혜’와 ‘총명’, ‘지식’은 앞에 나오는 ‘성령 충만’의 결과라고 본다. 필자는 ‘성령 충만’은 브사렐의 영적인 상태이고 이로부터 ‘지혜’와 ‘총명’과 ‘지식’은 뒤따라 발생되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그는 ‘지혜’(Ϭορία, 헬)를 ability라는 RSV 영어성경을 따라 해석하여 ‘재능’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필자와 견해 차이는 현격하다. ‘지혜’에 대한 의미는 앞으로 전개될 본고의 핵심 내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상세하게 그 뜻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지혜에 대한 성경사전적 의미는 skill, wisdom, clever, ability 등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현실적으로 적용시키는 능력을 말한다고 필자는 본다. ‘성령 충만’을 받은 브사렐에게 나타난 지혜는 모세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식양을 따라’(출 25:9) 그것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사람의 취향이나 생각을 섞지 않고 표현해 낸다는 것은 위로부터 온 지혜를 받은 자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ability와 같은 의미는 오히려 그 아래에 나오는 구체적 미술 행위를 하는 기능적 솜씨를 나타내는 단어들과 더 어울린다고 보겠다. 이어서 나오는 ‘브사렐과 오홀리압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41)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지혜’는 구체적 기능을 나타내는 용어라기보다는 영적인 통찰력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지혜’는 지식과 현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고, 지식과 지식을 연결시켜 활용될 수 있게 한다. 본문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인간의 재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계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이 명하신 ‘식양’이 브사렐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표현의 주체는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지혜로운’(출 36:1) 자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자이지 자신의 의지로써 일하는 자가 아니다. 이는 ‘미술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이 성령 충만을 받아 지혜를 가지는 것이다’라는 본고 전체의 주된 사상이다. 신약 성경은 브사렐에게 주어진 지혜가 기도를 통해 얻어질 수 있으며(약 1:5), 지혜의 보고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골 2:2)임을 말하면서 브사렐에게 임한 지혜는 ‘위로부터 임한 것’임을 더욱 뒷받침 해주고 있다.
미술가에게 성령 충만이 가져다주는 지혜는 미술 사역의 뚜렷한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항상 미술 사역자는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출 36:1)이어야 한다. 그들의 작품들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하신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브사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출 36:1)들의 창작의 원칙은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출 25:9) 것이었으며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출 25:40) 일할 것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성령 충만을 받은 브사렐은 위로부터 임한 지혜로써 성막을 지었지만 성막의 진정한 설계자와 건축자는 하나님이시다(히 11:16).42)
이것은 하나님과 미술가 간의 정상적인 관계이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이 정상적인 관계가 흐트러질 때에 미술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며 가증한 것이 된다.
브사렐을 통해 성경이 보여주는 미술가의 정상적인 길은 성령 충만을 받아서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는 자이다. 그의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오직 ‘여호와를 위하여’43)이다.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가장 구체적인 미술행위는 성전 건축에서 집약되어 드러나고 있다.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해도 미술의 주된 대상은 건축이었다. 회화, 조각 등은 건축의 부속물이었다. 성막에서 보여진 하나님과 미술가 사이의 원칙은 성전건축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진다. 부왕 다웟은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대상 28:12)을 따라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야 할 것을 말했다. 다윗은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대상 28:19) 한 것이므로 성전을 건축할 때, ‘식양대로’ 할 것의 원칙을 당부한 것이었다.
성전건축에서도 미술가는 다른 어떠한 미술적 전통이나 시각적 효과보다도 위로부터 온 ‘식양’, 즉 하나님의 뜻을 다라야 할 원칙이 주어진 것이다. 히브리서 8장은 하나님의 뜻인 식양대로 일하는 원칙을 따르는 것은 하늘의 법을 지키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같다고 말하고 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히브리서 9장은 비록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지만 ‘참 것의 그림자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히 9:23, 24)을 만드는 일에 성막을 제작한 자들이 참여한 것으로 해석해 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원칙이 지켜진 미술은 땅위에 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신약에 와서 성전의 개념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변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고 말했다. 그는 구약의 공간적인 개념을 초월한 의미에서 성전을 말하면서도 우상을 그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대비시켜 다루고 있다.
우상은 본 장의 ‘하나님을 위한 미술’에 반대되는 것으로 다음 장에서 다룰 ‘사람을 위한 미술’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성전의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 또 다시 크고 다른 차원의 성전으로 연결되어지면서 변하고 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계 3:12).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 된 삶을 산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속하여진다는 것이다.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다다른 곳에서는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고 기록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스러운 곳에서는 성전과 성전 아닌 것의 분리가 없고 또한 성전 부재(不在)의 성전에 도달한다. 미술적 실현의 가장 이상적인 대상으로써 다루어왔던 성막과 성전의 개념은 영적인 변화를 거듭하면서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결혼의 장대한 우주적 실현이다.44)
구약성경에서 성막이 사람의 손을 빌어서 만들어졌지만 그것을 만든 미술가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 ‘지혜’로써 일함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손이 하나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솔로몬 성전이 ‘식양을 따라’ 지어진 것과 사도 바울이 말한 인격화된 성전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사람의 뜻은 결여되고 하나님의 뜻, 즉 ‘명하신 것’이 드러나는 대원칙에 일치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출 40:19, 21, 23, 25, 27, 29, 32)
3. 사람을 위한 미술
“그러나 야곱은 나를 부르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괴로워하였으며”(사 43:22)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가운데 제 2계명을 ‘형상제작 금지’에 대한 것으로만 이해하고 많은 그리스도인 미술가들이 이로 인해 갈등과 좌절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45) 그러나 본문을 깊이 살펴보면 형상제작 금지가 하나님의 참 뜻이 아니라 그 형상제작의 목적에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서 제 2계명이 십계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바벨론 남쪽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에 위치하여 상업과 문명이 발달했던 갈대아 우르는 우상숭배가 심한 지역이었다.46)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나와 오랜 세월을 보냈던 가나안 지역도 주변 국가들이 모두 다신교적 신관과 우상숭배를 하는 곳이었다. 특히 430년간 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했던 이집트의 환경이 어떠했는가를 알게 되면 제 2계명을 내리신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성경은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이 주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출 1:11)하는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체적으로 건축한 것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는 일은 그들이 출애굽한 연대를 살펴서 그 당시 이집트의 미술과 연관시켜 보면 알 수가 있다. 출애굽의 연대에 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47) 이들의 연대적 간격은 약 200년 내에 있으므로 어느 견해를 통해 보더라도 미술 양식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이집트는 여호와 유일신관을 신앙의 핵심으로 지켜나가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살기에는 부적절한 환경이었다. 이집트인은 동물조상설을 믿었으며 자연숭배(Anthropomorphism=神人同格觀)가 발달하여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사상과 과학 예술이 발달하는 과정에는 이 종교관이 항상 뒤따랐다.
창세기에 처음 나타나는 이집트와 아브라함과의 접촉시기부터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 거주한 시기로 생각되는 이집트 중고왕국(中古王國) 시대(11왕조에서 17왕조까지, BC 2040~1567)에서 근고왕국(近古王國) 시대(18왕조에서 25왕조까지, BC 1567 ~664) 초기까지의 시기는 이집트에서 가장 왕성한 건축공사가 이루어진 시대이다.48) 이집트의 건축은 주로 죽음과 관련된 그들의 종교관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G. Maspero(1846~1916)는 ‘고대 이집트인들은 현재의 주택을 임시적 주거지로 생각하고 죽음 후의 분묘는 영원한 주거지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는 특히 돌을 다듬는 자(mason)들의 솜씨가 탁월했다.49) 특히 람세스 Ⅱ의 아부심벨 대암굴 신전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사상이 배경이 된 세계 최대 최고의 석조 조형물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둘러싸고 있던 우상 숭배적 풍토와 이집트의 대규모 석조 건축공사에 직접 참여한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은 뛰어난 석공(mason) 기술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 2계명을 출애굽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강력하게 제시하신 것은 위와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우상들을 만드는데 길들여졌던 장인의 습성들을 강력하게 차단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제 2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곧이어 나오는 출애굽기 20장 23절에서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사람을 위한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거듭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조형적 활동의 목적이 하나님을 위하여인가 사람을 위하여인가에 가장 중요한 관심을 보이시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술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질 때 성경 전체 가운데서 가장 격한 감정을 드러내시고 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은 바로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드러낸 하나님의 마음이었다.50)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민감했던 개혁자들이 가장 먼저 행했던 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든 ‘주상(柱像)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부수었다’(왕하 18:4).51) 개혁자들은 말씀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의 두루마리에 명령이 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한 것이다.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신 7:5). 이것은 교회사에서 성상 파괴운동(Iconoclasm)52)에서 재현되어졌으며 종교개혁시대에도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미술행위의 목적이 ‘사람을 위하여’ 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위하여 미술이 드려지는 일들은 끊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반역과 오만의 정신은 사람을 하나님같이 숭배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만 돌리게 하는 도구로 미술을 앞장 세워 사용한 것이다. 사람을 위한 미술은 표면적으로 볼 때 그것이 사람만을 위한 미술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쉬운 것도 있지만 애매한 것들이 많이 있다. 수많은 종교화들이 실상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화들의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비록 하나님에 관하여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간들의 해석 체계와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53) 성경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것과 사람을 위한 것의 절충점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33)
“그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더니 그 자자손손이 그 열조의 행한 것을 좇아 오늘까지 그대로 하니라”(왕하 17:41)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자기식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절대적이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불신의 태도이듯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과 사람을 위한다고 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54)
미술가들이 가장 자신에게 속기 쉬운 것이 자기 합리화인데 자기식의 표현력이나 미술적 효과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맞추어 표현하거나 과도히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때 그것은 자기를 위한 미술, 곧 사람을 위한 미술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죽고(의지의 결여)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십자가의 원리가 배제된 모든 종교적 미술은 사람을 위한 미술이다. 그런 면에서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온 미술은 사람을 위한 미술이었다. 그러므로 ‘거듭난 미술’에 대한 요청이 생겨나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3)
4. 검증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를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여기에서 지금까지의 논지들이 그 자체적인 논리로 진행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었는가를 검증하고 생각들을 진전시키고자 한다. 인간의 정치, 경제, 예술, 과학 등의 다양한 활동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이라는 개별적인 활동에서 출발한 본고의 생각들이 전개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사상과 연결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본고의 타당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점이다.
비유컨대 하나의 큰 나무에 속해 있는 수많은 가지들 중의 하나인 미술이라는 가지의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개된 생각들이 나무의 둥치와 접목된 가지의 안쪽 끝에 다다르게 되니까 그 후부터는 생각의 진행이 가지인 미술의 차원을 떠나 나무의 둥치인 하나님 말씀으로 편입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도달한 것은 앞에서 전개한 생각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는 검증으로 볼 수도 있다.
정치, 경제, 예술, 과학 등의 모든 분야의 활동들도 그것을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조망해 보면 큰 나무에 속한 가지들과 같이 하나님의 창조, 타락, 구속의 기본적인 틀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의 활동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구조 속에 있는 다양성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고는 이제 나무의 둥치, 즉 성경의 주된 사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수많은 가지들 중의 하나인 미술로 생각들을 전개하고자 한다. 이 과정들이 막힘없이 순조롭게 연결되어질 때 기독교적 미술의 정체성(identity)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옛 언약(舊約)의 파기와 ‘사람을 위한 미술’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시 78:10)
가인은 인류 역사에서 자기구원의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적 발달의 시조가 되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 세운 ‘성(城)’은 문명의 업적들을 남겼다. 발명과 발견, 과학과 예술, 진보와 개선의 시작이 가인의 성에서부터 이루어졌다(창 4:16~22). 문명의 업적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앞을 떠나’(창 4:16)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이 가인의 길(유 11절)의 특징인 것이다. 가인은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자의 대표라기보다는 자기의지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자며 자기를 믿고 희생을 거부하는 자였다.
그는 종교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종교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었다. 그가 가진 것은 육의 종교였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2)
가인은 홍수 이전의 인물로서 노아 이후의 세대와는 단절된 시대의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징으로만 비쳐진다. 구약 곧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진실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실 것이라는 언약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주된 죄는 우상숭배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순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의 모형과도 같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계의 여러 민족으로부터 격리와 분리를 지향(指向)했던 가나안 시대에는 타민족들과 우상숭배를 하면서 관계와 교제를 끊지 않았으며 정치적 결합을 지속해 왔다.55)
하나님이 계획하신 배타주의(排他主義)에 반(反)하여 육적인 포용정책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반하여 불신앙적인 간음을 범했다.56) 바벨론 포로시기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계적인 선교의 임무를 준비하도록 다루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대로 고립해 나와서 이방인들을 더러운 ‘개’로 보았으며 바리새57)인들의 지도 아래 그들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육적인 강조는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 치달았다. 하나님이 보편주의(universalism)를 원하시면 이들은 자기들만 선민이라는 민족국수주의(nationalism)를 내세웠다. 하나님이 분리를 원하시면 이스라엘은 연합을 꾀하고, 하나님이 연합을 원하시면 이스라엘은 분리를 추구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생각을 따라 살았다.
“저희는 마음이 미혹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시 95:10)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와 심판을 이스라엘에게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구약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앞장에서 다룬 ‘사람을 위한 미술’에서 보았던 것, 즉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생각을 기초로 하고 있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반역한 이스라엘의 신앙의 모형이 ‘사람을 위한 미술’에서도 발견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1) 성(城)을 통해 본 사람을 위한 미술
신, 구약 성경을 건축가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城)에서 시작해서 성(城)으로 끝나고 있다.58) 하나님을 떠난 가인이 성(城)을 쌓았듯이 ‘세상의 처음 영걸’(창 10:8)인 니므롯은 레센이라는 큰 성(창 10:12)을 건축하였다.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하늘까지 높아지려고 하였다(창 11:4). 바벨 성을 쌓아 올리다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당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강하게 반항하며 역사를 통하여 바벨의 오만과 반역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성경은 다니엘서의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통하여 앞으로 전개될 세계 역사를 거대한 신상이 건축된 형태로써 보여주고 있다(단 2:31~35). 신약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다시 큰 성이 등장하였다가 무너지는 것으로 사람의 성의 말로를 기록하고 있다(계 18장).
사람은 큰 성을 쌓고 ‘모든 것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라고 외치면서 진보라는 신(神)에 대한 신앙으로 역사를 이어갈수록 하나님의 뜻과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그들이 연구하고 사색하여 학문의 체계를 세우고 정치를 조직화할수록 사람들이 정한 자기들 세계의 논리에 짜 맞추어진 결과만 도출될 뿐, 하나님의 뜻과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역사를 통해서 도출되어지는 상관관계를 보면 하나님의 뜻이 가려질수록 사람들은 큰 건축공사를 시도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10세가~20세기까지가 영적인 암흑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타락된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많은 성당 건축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6세기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은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반작용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조형물인 건축이나 조각에 대하여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신 것은 미술활동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것들과 상관해서 이어질 영적인 타락을 경계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인 공허감은 ‘사람을 위한 미술’을 통하여 제작된 우상숭배의 길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6. 새 언약(新約)과 ‘하나님을 위한 미술’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언약의 책이다. 미술과 하나님의 말씀의 정상적인 관계를 추구하고 있는 본고가 하나님의 언약과 만나게 되는 것은 본고의 방향이 정도(正道)를 가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장 핵심사상이 언약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구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세우셨다. 새 언약은 영적이며 내적인 것이다. 율법은 선과 악의 길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선한 일을 행하고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새 언약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신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장벽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육체의 한계 때문에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육체를 성령이 거하시는 곳으로 만들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였다.5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브사렐과 성막 제작자들이 받았던 성령 충만의 결과로 주어진 지혜와 총명과 여러 가지 재주들이 구약시대에 미리 맛볼 수 있었던 새 언약 백성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삶은 이들 미술가들에게 내려졌던 특별 은총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위한 미술을 원하셨다. 미술은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그 모습들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새 언약(新約)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러한 삶의 다양한 표현 가운데 하나인 미술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위한 미술’로 회복되어야 한다. 회복을 위한 구체적 방법과 과정은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얻어야 한다.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셔서 그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본고에서 구체적인 미술의 방법들을 확립하여 그것들을 제시하고자 의도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이 뜻을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적인 본성으로 하나님께 접근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영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솔로몬 성전의 안정감보다는 성막의 이동성이 하나님의 뜻에는 더 우위에 있고 왕이 다스리는 시대보다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시대가 더 우위에 있다. 그러나 사람은 성막보다는 성전을, 하나님보다는 왕을 더 원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갔다. ‘하나님을 위한 미술’은 기도와 말씀과 성도의 교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해 주시는 주제와 표현의 방법들을 가지고 그분의 뜻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방법과 관습들의 많은 것들은 버려야 할 것이며 먼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의 빈약한 이성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결론을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과 우리가 동행하면서 그때그때 주시는 것들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신다. 사변적인 결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가운데 위로부터 임하는 영감을 받아 미술적 활동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대하시고 있다. 미술 활동도 이러한 점에서는 신앙의 원리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자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 어떤 예술작품도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수가 없다. 예술 작품은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백적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7. 기독교적 미술실기 지도에 관하여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출 35:34)
기독교와 미술에 관한 많은 저술들은, 미술도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기독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도구로써의 역할이 여러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실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미술에 대하여는 내면적인 동기제공 이상의 역할은 어렵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미술가의 전문성에 속한 것이다. 기독미술 실기의 전문성과 다양성은 어떤 단순한 공식에 의해 지배되지는 않지만 본고에서는 효과적인 그리스도인 미술가가 되는 방법을 제시하겠다.
모든 실기는 그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과의 관계가 내용과 형식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고 내용과 형식은 서로 간섭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기독미술가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체계화된 방법들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가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결코 가치중립적이거나 공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행한 작품에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 묻어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작가는 자기가 의도하는 바를 적합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그에 상응하는 기법과 재료와 크기 등 모든 기술적인 요소들을 적용한다. 이처럼 정신적이 것 내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순수미술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표어일 뿐이다. 순수미술의 추구는 작가가 그 작품에서 일체의 인간적인 의지를 제외시키고 미술 자체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작가가 지닌 세계관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상태를 동경하고 있다. 그래서 미술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 배제된 순수 미(美)의 최고 지선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미술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채우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표현적 근거를 얻어낸다는 점에서 순수 미술적 지향과는 반대적 입장에 서있다. 기독교적 미술의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미술가는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Calling)임을 깨닫는 자이기 때문에 미술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가 뚜렷하고도 명백하다. 일의 차서에는 그 자체의 논리가 있다. 그리스도인 미술가는 그리스도를 그의 작품을 통하여 풍성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성경적 안목을 강화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기독교 미술은 무의미하다. 성경공부와 기도생활은 기독미술가에게 풍성한 표현적 자료들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표현해야 할 것들을 말씀을 통해서나 기도 중의 환상이나 영감을 통하여 공급해 주신다. 이러한 표현자료들을 풍성하게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친숙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실기에 있어서 구체적인 표현능력도 크게 신장이 된다.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고 작가가 붓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자 할 때 성령께서는 그 화가의 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면 그것을 보는 영적인 사람들은 그 성령 충만을 공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미술가는 성경을 깊이 알고 날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구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미술대학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데생시험의 대상을 석고상을 택해왔다. 그것은 여러 가지 여건이 고려되어 편리하게 채택하고 있는 것인데, 문제는 이 석고상들이 주로 그리스나 로마의 신상들이거나 황제들의 초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그리스도인 미술학도들에게는 이러한 실기평가 방법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이것은 미술이 오늘날까지 왜 그토록 우상숭배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소묘를 통한 묘사력을 키우는 일은 기독미술가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다. 현대미술에서 사실적인 표현력이 경시되는 것은 그 내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대의 사상이 구체성이 없이 다원화된 방향으로 전개됨으로 그러한 사회현상의 반영으로써 미술도 거기에 상응하는 비정형적(非定形的, informal)인 표현이 주류를 이루는 것일 뿐이다.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를 분명히 아는 기독미술가에게는 이와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적 표현력의 깊이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훈련을 거쳐야 하는 것이며 미세한 형태의 변화나 색감의 진동은 사람을 깊은 감동으로 이끈다. 우리나라의 미술계는 짧은 시간에 서양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다양한 미술적 경향들이 수용되어서 기초적인 부분이 약하다. 특히 미술대학들의 특성과도 같은 자유주의적 풍조는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실력을 연마하는 것보다는 너무나 다양한 미술사조들을 실험하는 곳처럼 되어버려 다채롭기는 하나 깊이가 없다.
사실적이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훈련의 과정과 성실성이 요구되어진다. 본고에서 필자는 기독미술가는 사실적인 표현만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기독미술도 다양한 표현방법을 구사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적 미술사조의 풍조를 좇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표현의 근거가 되는 성경이 보여주는 다양성 때문이다. 성경에는 모세오경이나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 서신서, 교리서 및 계시록과 같은 다양한 문학적 장르의 내용들이 그것들에 상응하는 표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표현력을 기르는데 높은 비중을 두어야 하는 것은, 다른 어떤 표현보다도 사실적인 표현력은 쉽게 획득되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순간적인 감정의 비약이 아니듯이 미술 또한 일평생 우리의 성실한 훈련을 요구한다.
이 훈련의 과정들에서도 신앙의 원리들이 구체적으로 적용이 된다. 현대미술의 다양한 표현방법들은 사실적 기초가 풍부한 사람에게는 적용이 결코 어렵지 않다. 그것은 단색화인 소묘의 명암 표현이 풍성할수록 색채감각이 신장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미술 실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표현에서 깊이 있는 표현으로 나아가기는 심히 어렵지만, 깊이 있는 표현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나아가는 것은 쉽다는 것이다. 기독미술가가 표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들은 분명해야만 제대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사실적 표현들이 요구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투로 생활과 연관된 비유를 많이 들어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 된다. 그러므로 사실적인 표현력의 강화는 기독미술에서 중요한 것이다.
많은 경우 사실적인 표현력이 결핍되어서 다양한 소재의 표현이 제한을 받거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익숙한 기법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런 경우 주제가 기법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기법에 주제를 맞추는 경우가 되며 이러한 표현은 호소력이 약하다. 현대의 미술가들은 뜻을 중요시하지 않고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의지를 오래전부터 버렸기 때문에 난해함 그 자체가 현대미술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에서는 무의미 그 자체가 미술의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이러한 점은 기독미술과 현대미술의 경향과의 현격한 차이이다. 기독미술가는 말씀의 탁월성이 어떠한 미술적 논리보다도 우선하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암시적 표현이나 추상적 표현의 방법은 많은 경우 적절치 않을 때가 많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 14:8)
기독미술가는 어떠한 표현방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복음을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미술적인 논리에서 본다면 이러한 점은 미술가를 제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설교가나 전도자도 이러한 제한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지혜로운 자에게 이러한 제한은 일평생 퍼 올려도 고갈되지 않는 미술적 상상력의 샘이 된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문학적인 내용을 미술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전달성을 지닌 미술이 발달한 곳은 19세기 북유럽과 러시아 사실주의 미술이다. 우리나라에 주로 많이 소개된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경향은 미술작품에서 전달성을 제거하는 경향으로 발전해왔다. 쇼펜하우엘이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말한 것은 예술은 예술 이외의 것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예술적인 논리에 집착하게 된다는 예술의 속성을 나타낸 것이다.60) 기독미술가는 형식면에서는 19세기 북유럽과 러시아의 사실주의 미술들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미술이 흔히 상업주의적 발상과 저질 예술시장의 요구에 영합하여 신앙적 본질을 외면하고 기독교적 감상주의에 물들어 세상적인 미술이 지니고 있는 예술에 대한 기본적 도리조차 저버린 저질적인 작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들은 수요자의 요구에 맞추다 보니 일방적으로 부드럽고 고운 색채로 하나님의 말씀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다른 한 부분들을 배제한 달콤한 미래의 축복에 관한 설교 같은 것으로만 꾸며져 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는 분명히 위와 같은 밝고 기쁘고 평안함을 노래하는 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만 붙잡고 있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복음의 온전성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기독미술에서도 어둡고 죄악된 모습들이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반역한 세상의 비정상적인 모습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고난과 영광, 시험과 연단을 통한 정화(淨化)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루기 위한 열심에 상응하는 미감(美感)의 표현이 작품의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기독미술이라고 해서 언제나 종교적인 주제만을 다루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러하듯이 기독미술은 개인의 삶 전체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기독미술은 삶의 총체성을 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미술가는 생애를 통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낼 폭 넓고 심도 있는 작품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 사회적 권력을 장악한 잘못된 기독교가 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인류에게 가한 수많은 폭력들은 신에게는 불공평하고 억압적인 존재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게 했으며 사람의 이성을 신의 자리에 대체시키는 길을 열어주었다. 잘못된 기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참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마음에 새기고 신의 이름으로 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작하는 것이 옳은 그리스도인의 제작 태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미술작품이라고 해도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기독미술 실기에 대한 생각들은 결코 고정된 방법으로 제한할 수 없다. 언제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자유롭게 그 흐름을 따라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시대와 개인과 환경과 여건에 따라 유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가 가장 기본적인 기독미술가의 태도인 것이다.
미술작품 속에 나타난 종교혼합주의
(1999년 7월 기독교문화연구소 주최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
1. 미술과 기독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
미술활동은 형상을 통하여 성립되는 예술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형상제작을 금지하거나 지극히 경계해야 할 활동으로 경고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성상 배척론자들을 제외하고 교회의 역사는 미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미술을 이용하여 성경 내용을 도해하거나 신앙심을 고취시키거나 미술품(성상) 숭배로의 다양한 목적은 가지고 전개하면서 성경의 경고는 현실적 관행에 압도되어 무시하게 되었다(개신교회에서는 종교개혁 시기 이후 변화되었으나 로마 카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 등에서는 현재까지 적극적으로 미술품을 활용함).
성경의 금지 사상과 현실적 관행 사이에서 빚어진 내면적 모순 속에서 ‘기독교 미술’이라 일컬어지는 미술활동 속에는 기독교의 참된 정신을 희생한 내용들이 산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론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인 미술가들은 전문성의 난해함을 이유로 일반에게 가려진 역사적 오류들을 밝혀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복음적으로 활용할 대안들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2. 바벨론과 우상의 원형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모세의 율법이 쓰여진 배경에는 주변 국가들의 우상숭배로부터 구별되어야 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들 우상을 숭배하는 주변 국가들과 대립, 갈등, 혼합, 구별을 반복하면서 언약 백성의 순결성을 지키고자 하는 우상과의 투쟁의 역사이다.57)
성경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우상들은 구약성경의 바알, 아스다롯, 아세라, 다곤, 그모스, 마르둑, 몰렉, 담무스, 느보, 네르갈, 니스록, 슥곳브놋, 신약성경의 제우스(쓰스), 헤르메스(허메), 아데미 등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비롯된 이들 우상들의 기원은 고대 바벨론으로부터 소급된다. 시날 평지는 구석기, 신석기가 없이 발달된 신전 문화가 전개되었던 곳으로 진화론자들도 인정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발상지이다. 이곳은 성경의 창세기의 출발점이며 타락한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게 된 우상의 원형(Archetype)이 발생한 곳이다. 그러므로 바벨론(갈대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바벨론에 대한 기사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3. 바벨론에 대한 고찰
창세기 10장에 니므롯의 시날 땅의 바벨(창 10:9)에서 처음 등장하는 바벨은 바벨탑(창 11장) 사건에서 연결되며 창세기의 아브라함 시대의 배경을 이루는 유프라데스강 하류(오늘날 이라크)에 위치한 구 바벨론 제국(갈대아, BC 2800~2500)에서 BC 605년경 느브갓네살왕 시대의 신 바벨론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그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의 귀족 계층들을 바벨론으로 이주를 시킨다(왕하 25:1~21, 이 사건을 마태복음 1장에서는 중요한 시대 구분의 기점으로 삼는다/ 마 1:11, 17, 스룹바벨에 대해 주목할 것).
고대 중근동을 지배했던 바벨론은 BC 539년경에 메데, 바사에 의해 정복을 당하여 그 종말을 맞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은 바벨론을 실재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며(벧전 5:13) 요한계시록은 아직까지 멸망 받지 않은 것으로 묘사하며 마침내 멸망 받을 이세상의 마지막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다(계 18장).
Babel(balbel)이라는 뜻은 혼란시키다, 혼잡하다(창 11:9)는 뜻으로 언어의 혼잡에서 비롯된 바벨의 정신은 인류의 기본적인 정신적 개념의 혼잡을 초래했다. 성경에 의하면 바벨탑을 쌓게 된 세 가지 동기는 교만, 단결, 의지, 허영심이다.
바벨론의 속성은 음녀(계 14:8, 17:1~5, 17:15~16, 18:9, 19:2)와 음행하는 것으로 영적인 간음(구약성경은 우상숭배를 음행으로 묘사하고 있다)을 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비해 마침내 도래할 새 예루살렘은 이기는 자(계 21:7),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계 22:14),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자,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계 19:9), 그 아내(계 19:7), 열 처녀 비유 등을 통해서 순결한 신부는 구별된 삶을 산 ‘혼합되지 않은’ 참 이스라엘인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바벨론은 항상 큰 세력이다. 큰 바벨론(단 4:30, 계 17:5), 큰 성 바벨론(계 18:2),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계 17:1) 예외가 아니다. 알곡과 가라지, 참과 거짓, 순결한 처녀와 음행한 음녀의 양자(兩者) 대립구도는 그 때가 올 때까지는 후자가 득세(得勢)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4. 또 다른 바벨론
(소돔, 고모라, 애굽, 가나안, 두로, 시돈, 앗수르, 메데, 바사, 헬라, 로마, 현대의 강대국들)
다니엘 2장의 신상에 대한 해석은 세계 역사를 축약해 놓고 있는데 그 머리가 바벨론이다(단 2:28, 8:20). 세계사의 강대국들은 바벨론의 머리로부터 출발하여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나 그 몸통을 이루고 있으므로 영적(靈的)으로는 같다.
소돔과 애굽은 영적으로 보면 같다(계 11:8). 바벨론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으며(사 13:19), 모압은 소돔과, 암몬은 고모라와 같다(습 2:9).
마지막에 멸망 받을 세상의 세력인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18장은 옛 바벨론 제국의 심판 기사가 있는 사 13장, 사 47장, 렘 50~51장, 겔 26~27장의 두로의 멸망 기사가 짜 맞추어져 인용되어 있다. 또한 사 14장 12절의 바벨론=계명성(루시퍼) 비유와 겔 27장의 두로왕=사탄의 기사들은 바벨론의 영적인 실체는 사탄이며 이는 시대와 지역 국가를 달리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니므롯주의(主義)의 연장인 적그리스도이다.
5. 헬레니즘, 또 하나의 바벨론
고도의 인간 신뢰, 서양의 합리주의의 근원, 절충주의 정신, 유연하고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태도, 어떠한 종교나 사상과도 합류할 수 있는 자세로 희랍, 로마, 동양사상을 흡수한 헬레니즘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또 하나의 바벨론적 사상이다.
알렉산더는 세계사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역사에 있어서 영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는 동서 간의 문화적 연합인 소위 헬레니즘(Hellenism)을 형성했다. 그것은 고의적 정책의 산물이요, 로마(Greco-Roman)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실지로 로마의 정신세계의 바탕이 되었으며 로마 제국이 세계 혼합종교의 용광로가 되어 애굽, 바사, 바벨론 소아시아의 밀교들이 뒤섞여 바벨론적 종교혼합이 결정체를 생산케 한 것이다. 바사의 마자드(Ahura Muzda - 조로아스터교의 선의 신), 희랍의 제우스와 로마의 주피터, 바벨론의 마르둑과 애굽의 터베의 암몬 그리고 팔레스틴의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主神)의 개념으로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헬레니즘 사상은 진화론적 사상 체계의 근원이 되며 범신론 또는 다신론 사상으로 출발하여 결과적으로는 무신론에 귀결(歸結)되게 되어있다.
또한 이것은 현대인에게 가장 친숙하고 보편적이며 공식적인 사상이 된 이성 존중의 계몽주의 정신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헬레니즘 사상의 바벨론적 성격은 고도의 지적인 옷과 아름다운 예술로 치장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분별력이 없이는 그 영적인 실체를 드러내기가 어렵다.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습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33)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습 1:5)
(말감은 암몬족의 우상이다)
위와 같이 헬레니즘 정신은 기독교 신앙과 이방 우상종교를 혼합하여 새로운 바벨론주의를 만든 것이다. 보편주의와 절충주의가 진리를 잠식시킨 것이며 진리가 심각한 오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참과 거짓’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며 적그리스도가 이 위에 큰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적그리스도(요일 2:22), 적그리스도의 영(요일 4:3), 많은 적그리스도(복수형, 요일 2:18)).
“인자가 오실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거의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눅 18:8)
문명의 기독교화에 의해 세계가 기독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 의해 증가된 거짓 기독교가 참 교회를 배척하는 것이다. 바벨론의 사상이 진리에 혼합되어 진리가 그 순수성을 잃어버릴 것이요 그리스도의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앉게 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멸망 받아야 될 것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이다.
믿음의 승리자는 끝까지 타협함으로써가 아니라 진리를 수호함으로, 인간 발전의 영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붕괴로, 하나님과 문명의 타협으로가 아니라 세상 왕국의 멸망으로 오게 된다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6. 미술을 통해 들어온 바벨론적 요소들
교회 안에 들어온 바벨론의 혼합주의 정신은 적극적으로 미술을 활용하여 거짓을 참된 것으로 호도해왔다. ‘기독교 미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대다수의 것들이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깨닫는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어야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그리스도인 미술가에게 있어 절실히 요망이 된다. 이는 성경의 기본정신에서 처음부터 떠나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위대한 인류 문화의 걸작품들일지라도 영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일 수가 있다.
우리는 여태껏 많은 부분에서 위대한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위대한 기독교 예술품인 것으로 당연시해왔다. 그것은 서양미술사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기독교적’(基督敎的)이라는 주제들과 ‘예술’의 인간 활동들이 바벨론적 혼합주의 종교정신과 희석되어지면서 기독교의 기본 정신에서부터 떠난 ‘기독교적인 미술’을 생산케 했으며 이는 영적으로 보면 바벨론적 요소들이 많이 담긴 미술이 되는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미술관이 되는 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예배당인 것이다.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적 입장에서는 완전히 떠나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심지어 우상적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성상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되고 있다. 이러한 미술품들은 오랜 기간 동안 바벨론적 영성을 주입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을 타락시키는 미혹의 도구로써 사용되어 온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를 통해 역사하는 사탄의 활동도 이와 같은 것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기독교 미술은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본고에서는 현실 진단의 단계로써 참된 기독교 미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며 이러한 문제점들은 기독교 미술이 존재하는 곳에는 늘 유혹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기독교 미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말씀에 자신의 영성이 젖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 후에 사역(使役)에 임해야 한다. 기독교 미술은 철저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 많은 그리스도인 미술가들이 일어나 앞에서 살펴본 위험적 요소들은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여 오류로 점철된 미술사의 교훈을 딛고 일어설 때 참된 기독교 미술의 가능성이 보이게 될 것이다.
61) 아스다롯은 고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방의 우상으로서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다. 바알신의 아내로, 바알은 태양을 상징으로 삼고 아스다롯은 달을 상징한다. 애굽에서는 이쉬타르(Ishtar)로, 헬라에서는 아스타르테(Astarte)로 불리워진다.
사사기 8:21~26에는 이스마엘 사람들은 새 달(Crescent, 초승달) 형상의 장식을 지니고 다녔던 것을 기록하고 있다.
“약대 목에 꾸몄던 새 달(초승달) 형상의 장식을 취하니라…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그 외에 새 달(초승달) 형상의 장식과…”(사 8:21~26)
새 달(초승달) 모양의 형상의 장식을 애호했던 이스마엘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길게 이스마엘을 영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자로,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난 자로 대비시키면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29~30)
라고 말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혼합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집단의 상징으로 발전되는데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형상이 초승달이다. 이것은 고대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스마엘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는 하나같이 초승달 장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수천 년간 이들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초승달 모양의 형상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적하는 육적 인본주의 집단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초승달 형상은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흘러오면서 마침내 기독교에도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미술사를 통해서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초승달 장식 슈메르여신상
마리아상에 나타난 초승달 석공조합인장 다이아나상 다이아나상 머리에 초승달 장식이 있다
에베소의 아데미상 (행 19:23~41)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유방이 여러 개이다 성당의 벽화인데 이 그림의 팔걸이에는 아데미상이 있다
석류를 든 마리아상 석류는 아스다롯 여신상의 상징이기도 하며 다산을 의미하는데 이번에는 마리아상이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석류이다
<뱀 모양을 통해 본 종교혼합>
뱀은 성경에서 사탄의 상징이다. 요한계시록은 용을 사탄의 상징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마귀의 나라로 상징되는 애굽은 뱀을 가장 거룩한 동물로 숭배한다. 성경의 내용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 뱀 모양의 형상이 기독교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 이것이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종교 혼합주의의 결과물인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굽의 왕들은 그들의 관 중심에 뱀을 조각하여 숭배하며 그들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16세기의 이 그림 속에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의 종교혼합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온갖 잡된 종교들이 광장에 나열되어 있는데 뱀 모양의 두 기둥이 중심에 위치해 있다.
성당 건축의 외관에 적용된 뱀 모양의 기둥 이 뱀 모양의 기둥이 성당 주 제단 앞에 엄청난 크기로 위치해 있다. 뱀 형상이 이 종교의 중심을 지배하고 있다. 로마 성 베드로 성당 내부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는도다
…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그러나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그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더니 그 자자손손이 그 열조의 행한 것을 좇아 오늘까지 그대로 하니라” (왕하 17:33~34, 39~41)
<종교혼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
태양신 숭배사상
근래에 와서 전국적으로 새해 아침을 해맞이를 하면서 소원을 비는 일들이 점점 성행하고 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별 생각 없이 해맞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일반인들과 다름없이 새해 소원을 빈다고 한다. 우리는 현대 첨단 과학시대의 문명의 이기들로 만들어진 도구들이 전혀 상상 밖의 점술이나 운세 등의 미신적인 것들을 부추겨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과학적 현대문명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해맞이 행사의 풍속도도 위와 같은 사례에 속한다.
최근에 와서 확산되고 있는 해맞이 행사를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또한 이러한 풍조의 배후에는 어떤 영적인 배경이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태양은 이 땅의 생명체들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들에게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크게 숭배 받고 있다. 그래서 태양숭배 사상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인류 역사의 많은 민족들이 자기들을 ‘태양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거나 절대 권력자들이 스스로를 태양으로 칭하였다. 역사적으로도 태양은 인류가 가장 숭배하는 자연물로써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고대 이집트의 신 Ra는 태양신이며 이집트의 왕들을 파라오(Pharaoh/바로)라고 불렀던 것은 절대 권력자인 왕들이 ‘태양신의 자손’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의 인명이나 지명들 또한 태양숭배와 연관된 것들이 많다. ‘라(Ra)암셋’(출 1:11), 온 제사장 보디베라(Ra) 등이 그러하다. 이집트의 북부지역인 온(헬라어로 ‘헬리오 폴리스’)은 태양숭배의 중심지 벧세메스(Bethshemeth)와 같은 지역이다. 벧세메스의 주상(柱像)들과 애굽 신들의 집(렘 41:13)은 이집트의 상징적 대형 건축물들이다. 주상이라 함은 태양숭배의 상징 기둥 조형물인데 미술사에서는 이를 obelisk라고 부른다. 오벨리스크는 태양숭배의 대표적 조형물인데 역사상 인류의 영웅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오늘날 세계 주요도시의 중심에 옮겨져서 세워져 있다. 미국의 워싱턴 백악관 앞, 뉴욕의 센트럴 파크,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 영국 런던의 템즈 강변, 로마의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광장 중심 등에 세워져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흔히 성당 앞에 이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이 세상의 신은 태양숭배의 조형물들을 고대 문화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 세워 자신의 승전 깃발로 삼고 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로부터 태양신 아폴로 숭배를 배웠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의 지배층 특히 제국의 후기 시대의 군인들과 황제의 종교는 주전 1세기에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태양신 Mithras를 숭배하였다. 미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주요 신앙대상이었다. 메데-페르시아 제국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는 하늘의 신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지만 태양신 미트라를 아후라 마즈다의 눈이라 보아서 미트라 숭배가 겸하여 이루어졌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내에서 많은 박해와 도전을 받았던 것은 로마황제의 수호신으로서 미트라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던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AD 274년에는 아우렐리안 황제에 의해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영원한 태양신’이란 뜻)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황제의 신격화와 숭배는 이미 도미티안 황제 때(주후 81~96년,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부터 본격화 되었다. ‘가이사냐? 예수냐?’라는 질문은 ‘태양신이냐? 예수냐?’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 내에서 결코 태양신 숭배에 무릎 꿇지 않고 신앙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태양숭배와 관계되는 성경의 기록들은 적극적인 우상숭배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우친 개혁자들의 반응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 온 땅에 있는 태양상을 찍고’(대하 34:7), ‘태양수레를 불사르곤’(왕하 23:11) 하였다. 에스겔이 본 가증한 환상 가운데 여러 우상숭배가 악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것들 중에 ‘더 큰 가증한 일’(겔 8:15)은 ‘동방 태양에 경배’(겔 8:16)하는 모습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태양숭배는 독재자들이나 절대왕권의 상징으로 사용되어왔다. 고대 제국의 황제들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절대 권력의 대표적이 인물인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신을 태양왕이라고 칭하였으며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을 태양으로 선전하며 자신의 생일을 태양절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공통점은 자기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구체적 형상으로 그리거나 조각하여 그것을 크게 세워 숭배하게 한다는 점에서 태양숭배는 영웅숭배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대 신화에서 태양은 주로 남신으로, 달은 여신의 상징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이며 이러한 영적인 것들의 근원에 대해서 계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우상숭배와 가증한 것들의 근본을 성경은 바벨론이라고 밝히고 있다.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계 17:5). 바벨론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집단의 총칭이다. 바벨론의 최초의 통치자는 ‘세상의 처음 영걸(영웅)인 니므롯’(창 10:8)이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창 10:10)이었다. 유대백과사전은 니므롯이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케 한 자’라고 말한다. 이는 성경을 근거한 해석이다. 역사와 전설 그리고 신화로 전해 내려오는 자료들을 통해 알렉산더 히스롭은 태양신의 뿌리가 니므롯(Nimrod)임과 달신의 뿌리가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Semiramis)이며 이들 사이에 탐무즈(Tammuz)가 태어났는데 탐무즈는 환생한 니므롯이라는 환생설의 뿌리를 밝혔다. 구약성경에는 탐무즈(담무스) 숭배를 에스겔의 환상 중에 ‘큰 가증한 일’(겔 8:13)로 기록하고 있다.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겔 8:14)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면죄부를 발매할 정도로 로마 카톨릭이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자존심을 담은 대역사로 이루어진 건축물이었다. 또한 이 건축물은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할 정도로 반(反)성경적인 내용물들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인류 역사가 자랑하는 대성당 건축물을 폄하하는 주장으로 들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성경적 시각으로 이 건축물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정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베드로 대성당의 외부광장 중심에 태양숭배 기둥인 obelisk가 세워져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가 있는데 또한 대성당의 내부 주 제단(high alter)의 중심에 태양 형상이 있다. 대성당 안과 밖의 중심이 태양과 연관된 형상들로 철저히 계획하여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대성당 건축을 단지 외형적 화려함과 과시적 물량주의에만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건축이 태양숭배와 암묵적으로 관련된 적극적인 배교행위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개신교회의 출발이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라는 구호로 돌아가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이교적 종교형태들이 교회 안에 적극적으로 들어와서 오히려 그것들이 주된 경배의 대상이 되는 현상들이 많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한국 역사에서 기독교는 직접적으로 태양숭배와 크게 투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나라이며 일본(日本)이라는 뜻이 ‘태양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일장기는 태양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일본 천황은 현인신(現人神) 즉 ‘살아있는 신’으로 받들어졌다. 일본 사람들은 천황을 아마테라스 신의 아들로 보았다. 일본의 신도(神道)는 이러한 신관을 기초하고 있다.
일제시대 한국의 여러 종교들이나 기관들이 신사참배에 순종할 때에 한국의 기독교인들 중에 주기철, 이기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김린희 전도사, 박관준 장로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용사들이 투옥되면서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것은 태양신(사탄)을 거부한 것이었다. 일제의 태양신 숭배는 집요해서 한국교회가 예배를 시작하기 전 5분간 동방요배(또는 황거요배), 즉 천황이 있는 동방을 향해 목을 숙여 절하게 만들었다. 또한 예배당에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의 이름이 들어있는 가미다나(신의 누각)를 강제적으로 설치하게 했다. 이는 교회 안에 태양신이 중심에 자리 잡고자 하는 영적인 식민지 전략이었다.
이상에서 성경과 교회사에서 태양숭배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창세기 1장 3절에는 하나님의 처음 창조가 빛이심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이 빛은 같은 장 16절에 나오는 광명의 빛들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창 1:16). 두 큰 광명은 태양과 달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태초의 빛’과 ‘광명의 빛’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빛’(요 1:9)으로 말하고 있다. 앞의 창세기의 빛들과 ‘참 빛’은 창세기의 빛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피조물들인 것과 참 빛은 창조주이심에서 크게 다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 된 빛이 아니라 ‘참 빛’이시다. 그분은 빛들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 1:16).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참 빛’은 가시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 과거나 미래까지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앞에 만물이 발가벗은 듯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심판은 완전할 것이다.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우리 인간의 유한성을 통해 이해되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성전이 없는 성전,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계 21:22)이요 ‘그 성은 해나 달이 비췸이 없이도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등이 되심을 인하여’(계 21:23)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계 21:24) 다니게 되는 곳이다.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악한 영은 ‘거짓의 아비’(요 8:44) 마귀의 영이다. 이 악한 영의 하는 일은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게’(롬 1:25) 하는 궤계이다. 그러므로 태양숭배 사상은 항상 인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2005년 3월
신규인
찬송화가, 성경을 연구하다가 그의 전공과목인 미술 분야에서 영적인 형상들을 발견하고 이를 성경적 세계관으로 조명하고 있다. 고신대학교, 대신대학교,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문화연구소 등지에서 기독교와 미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첫댓글 신규인 집사님의 새로운 책 원본입니다. 혹 필요한 분들은 참고하시기를...... 외부로 유출은 하지 말고^^
대구 성시화운동본부에서 파송한 신규인 미술선교사님의 글입니다. 책으로 발간되어 대구신학, 영남신학, 그리고 부산의 고신대에서 교재로 활용 중인 내용입니다.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