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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합니다.(시 13:1-6)
아버지의 이름은 “딕”이고, 아들의 이름은 “릭”입니다. 릭은 태어날 때 탯줄에 목이 감기는 바람에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에 걸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릭은 컴퓨터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담아 전한 말이 “달리다. 달리고 싶다.”였습니다.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과 함께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릭이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자선달리기대회에 나가 8Km를 완주했고, 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는 장애가 사라진 것 같아요.”
이들은 1982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마침내 42.195Km완주에 성공합니다. 이들의 최고기록은 2시간 40분 47초입니다. 마라톤을 시작한 지 4년 후 아들은 더 큰 꿈을 말합니다. 그것은 철인 3종 경기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영을 할 줄 몰랐고, 자전거도 여섯 살 이후로 타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절대로 불가능하다며, 그것은 미친 짓이고, 오히려 아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만류합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이 일에 도전하였습니다. 아들을 고무보트에 태우고 3.9Km의 바다를 헤엄쳐 건너고, 자전거로는 180.2Km의 용암지대를 지나고, 마지막으로 42.195Km의 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다른 선수들보다는 한참 뒤에 골인지점에 들어온 이들 부자를 사람들은 기립박수로 맞아주었습니다.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어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말합니다.
“네가 없다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
릭의 아버지 딕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는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그들 부자가 가능하게 만든 것은, 어떤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처한 고난까지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편은 150개의 시편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탄식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탄식시라고 함은 “고난과 시련”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1절을 읽어보면, 시인이 심한 고난과 역경으로 인하여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지경에 처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시인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였으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을 연속해서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겠습니까? 6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에서 4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할 정도로 시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 말을 새번역성경에서는 “언제까지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이 말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 나온 탄식이요, 애원이요, 절규입니다.
개인의 탄식시는 시편 중에 찬송시 다음으로 많을 정도로 40편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시편은 단체적인 성격보다는, 개인적인 성격의 탄식과 애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탄식시를 읽어보면, 시인의 삶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시인이 처한 삶의 정황을 알아야 합니다. 시인이 당하고 있는 삶의 정황이란, 인간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까닭 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그의 주변에는 시인을 죽이려는 이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수와 대적으로 인하여, 그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 근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원수는 계속하여 시인을 넘어뜨리려고 달려들었고, 그는 시인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랑을 삼고 있습니다.
여기 시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왕입니다. 그가 이 시편을 지은 것은 왕위에 올랐을 때가 아니라, 원수 사울왕을 피하여 도망다니면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에, 기록하였습니다. 시인 다윗은 심히 가난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비천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원수 사울은 자고하고, 행패를 부리고, 자기 욕심대로 하고 싶은 욕설은 다 퍼붓고,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그가 쓴 여러 시편에서, 그의 형편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시 3:1)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 5:9)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시 11:2)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시 7:2)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시 17: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시 22:12-13)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시 25:19)
다윗은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울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이스라엘 전군을 이끌고, 블레셋을 맞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어린 청년 다윗이 출전하여, 거인 골리앗을 물리쳐 죽이고, 이스라엘의 대승을 이끌어냈습니다. 사울과 다윗이 블레셋을 이기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면서, 춤을 추는 중에, 개선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소고치며 춤추며, 사울왕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면서 노래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은 천 천이요 다윗은 만 만이로다”
이 말은 “사울은 수 천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사울은 다윗은 죽도록 미워하고, 그 앞에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왕이 그렇게 나오니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 다윗을 대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적장 골리앗을 죽인 자는 자기의 사위를 삼겠다고 했습니다. 사울왕은 왕으로서 그가 한 말 때문에, 다윗을 사위로 맞았으나, 장인이 그의 집에 출입하는 사위를 죽이려고 안달합니다. 장인과 사위 사이는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하루는 사울왕에게 악신이 들어 번민하고 있는데, 다윗이 들어가서 수금을 연주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다 싶어, 사울은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으나, 다윗은 하나님이 내신 사람이기에,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에, 다윗은 사울의 어떤 신하들보다도 지혜롭게 용맹하게 행하여 블레셋을 물리치는데, 백성의 인기가 다윗에게 집중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머리가 잘 회전됩니다.
“이제 다윗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밖에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집을 떠나 모압으로, 블레셋으로 망명생활을 하였습니다. 망명생활도 한계가 있어, 유대 광야로 숨어들었지만, 3천명의 군인을 풀어, 이 잡듯이 수색하고, 뒤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어도, 살려주고, 다시 도망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다윗왕입니다.
사무엘상 26:20절을 보면,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라고 다윗이 말했습니다.
도망자의 신세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하고 살았습니다. 보잘것없는 메추라기와 같았고, 뛰어보았자 벼룩과 같은데, 온 산을 뒤지며, 수천 군사를 풀어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살아날 가망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힌 이들을 “원수”라고 하며, “대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원수와 대적으로 인하여,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지만,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원수와 대적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면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수를 이기게 하여 달라든지, 원수를 죽이시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지만 않으시면, 하나님이 시인을 생각해주시고,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고, 영안을 뜨게 해주시면, 문제는 해결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개인적인 탄원의 기도요, 탄식을 기도와 시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나, 나에게서, 나의, 나를, 내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시가 인도자를 따라, 성전과 회당에서 찬송으로 사용되는 중에, 나의 기도가 이젠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노래로 바꾸어졌습니다. 이 시편이 시집에 들어온 후로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벗어나, 전 민족, 전 성도들의 기도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개인적인 성격에서, 공동체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목동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장군이 되고,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까지, 엄청나게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아멘.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시편 22:1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언제까지이니까?”라는 말은, 수난자의 탄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다윗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을, 원수들에게 알리는 말입니다. 말의 표현이 소극적이고, 절망적인 표현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신뢰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이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언제까지이니까”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회의적이 표현을 통하여,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계속해서 영성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3-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아멘.
회의와 탄식에서 시작된 기도가 간구하는 기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다윗은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원수가 자기를 괴롭히고, 대적이 일어나 치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고, 영성을 확실하게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의 응답을 원하고, 그의 영안을 열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다윗이 신앙적으로 나태해지면, 원수들은 자기들이 이겼다고 기뻐할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주변의 어떤 사람들을 인식하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낙심하고, 절망에 이르는 것을 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마약에 손을 대고, 술이나 유흥에 빠져보지만, 더욱 공허하며, 더욱 상황만 악화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말에 “자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살(自殺)이란 말은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살이란 말이, 엄청나게 나쁜 것을 아시고, 한번만 뒤집어 생각하고, 거꾸로 생각해 보라고, “살자”라는 단어를 주셨습니다. 자살할 정도의 각오라면, 그런 결심을 가지고, 한번 살아보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많은 고통이 있어,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다”, “나 혼자 감당하기에 버겁다”.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내일이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역경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고,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수인 적은, 예방주사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도 능히 겪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삶의 여정에서, 아무런 탈이 없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장애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홀로 넘을 수 없는 태산 같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유명한 C. S.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본래 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가 1929년 기독교를 믿으며 회심한 후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통의 문제를 저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특별히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였습니다. 그의 책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고집스럽게 우리의 주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나, 고통 속에서는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여러분!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메가폰이란 확성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는 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직면하였을 때에, 우리에게 큰 소리로 다가오시는 음성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고, 남에게 전가하고, 사회와 환경과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말고, 나에게서 찾아야 하고, 내가 먼저 바로 서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힘든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지만, 우리가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다 준비하시고 주시려고 하지만,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36:37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갖추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은 자기들에게 그런 은총이 주어지기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구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다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5-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아멘.
다윗은 고난 중에 탄식하며 기도하다가, 그 기도소리는, 어느 순간, 찬양하는 소리로 바뀌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는 중에, 그의 영안이 열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간구는 찬양으로 바뀌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과 후대하심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윗을 후대하여 주셨습니다. 좋게 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께서 베푸신 은덕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주의 사랑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주의 사랑은 크십니다. 주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일본의 소설가 오엔 겐자브로가 199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게 말한 내용입니다.
“나는 일찍이 문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던 유명한 문학평론가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에 커다란 전화의 계기가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부부에게 히로키라는 정박아가 태어난 것입니다. 어째서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밝히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아이가 나의 문학에 있어 새로운 빛을 던져 주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하여 생명의 신비로움과 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의 소중한 아들, 히로키는 오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여준 나의 문학의 스승입니다.”
오늘 우리는 환경을 탓하고, 원망하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우리의 고통을 승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사망의 잠을 자고, 영적으로 침체한 자리에 빠지면, 그것은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지나야 할 터널이, 길면 길수록, 사실은 그것이 지름길이요, 빠른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터널을 만나면 가끔 “아-”라고, 터널이 끝날 때까지 크게 소리를 칩니다.
여러분! 지금 긴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사실 지름길로 오신 것입니다. 멀고 험하고 비탈진 길로 돌아와야 하는데, 터널로 인하여 단축하여 빨리 오신 것입니다.
지금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사방에서 조여오는 느낌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까? 우리 앞에 큰 파도가 밀려와도 사랑의 닻줄을 든든히 내린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후대하셨으며, 은덕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한 때 미국 오페라 계에서 활약하였던 할버튼이란 유명한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버튼은 자기 아들과 이웃집 아이가 놀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이웃집 아이가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을 잘 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할버튼의 아들은.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안다”라고 당당히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화를 들은 할버튼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서재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실컷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장님을 알고, 권력자를 알고 있지만, 우리는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청주 시장을 잘 안다. 나는 도지사를 잘 안다. 나는 대통령을 잘 안다.”라는 말보다는 “나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제도 사랑하셨고,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는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이 찬양의 고백처럼,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주를 사랑하며, 주를 찬양하며, 즐거이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림으로, 이 땅에서 즐거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감사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앞에 고통과 시련의 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고통과 시련은 저희로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홀로 지고 가기에는 버겁고 외롭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까?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한번 기억해주시고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옵소서.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방황할 때에 주의 사랑을 의지합니다. 우리의 근심이 변하고, 우리의 기도가 감사와 찬송으로 변하게 하시옵소서. 우리에게 은덕을 베푸시고 후대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함께 하셨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제 이후로, 날마다 우리 주님과 동행하면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