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23. 원명정사 법문.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26 조주선사. 조주스님이 남전선사에게 묻기를“어떤 것이 곧 도입니까?” 남전선사가 이르기를“평상심이 이 도이니라” 하자 조주스님이 이르기를“돌이켜 취향해야 하나이까?”하니 남전선사가 이르기를“취향하고자 헤아리면 곧 어긋나리라” 조주스님이 이르기를“헤아리지 (취향)않으면 어떻게 바로 이 도임을 알수가 있나이까?”하니 남전선사께서 이르기를“도는 아는 것과 알지 못함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니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망각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곧 무기라. 만약에 곧 헤아리지 않음으로 도를 참으로 통달하면 마치 큰 허공과 같아서 툭 터져 통하거늘 어찌 억지로 시비하겠느냐?”하자 조주스님이 말 아래 크게 깨달았다.
강설: 평상심이 도라고 하자 조주스님이 “평상심이 도라면 그 도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이까?” 하였다. 이에 남전 선사는 “도에 나아가려고 하는 생각(분별, 집착심)을 내면 곧 어긋난다”고 하였다. 그러자 조주스님께서 “취향 하고자 않는다면 어떻게 그게 도임을 알수가 있습니까?” 하니 남전선사께서 “도는 안다는 것과 알지 못하는 두가지를 다 초월한 것이다. 왜냐하면 안다 라고 하는 것은 망각(망념됨) 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무기(아는 것이 없는 무정물 같음)라는 것이다” 하시고 헤아리지 않음(분별 계교함이 없는 무위, 무념) 그대로의 청정본심은 상이 없는 큰 허공과 같아 툭터져 넓은(확연)것이거늘 여기에 시비(옳고 그름을 가림)할것이 없다”하셨다. 이말 아래 조주스님이 크게 깨달은 것이다. 平常心是道는 중생의 평소 분별하는 마음씀이 아닌 청정묘유의 마음 그대로 쓰는 불보살의 묘용심인 것이다.
조주선사가 어떤 僧의“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으로 오신 뜻입니까?”라는 물음에 인하여 “뜰앞의 잣나무니라” 하자 僧이 이르기를“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하자 조주선사가 이르기를“나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다”하니 僧이 이르기를“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으로 오신 뜻입니까?”하자 선사께서 이르기를 “뜰앞의 잣나무니라” 하였다.
강설: 여기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을 때 조주선사가 “마당앞에 잣나무라” 한 이것이 화두가 된 것이다. 이 도리는 말밖의 소식(격외선지)인 것이다. 깨닫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僧이 그 말아래 깨닫지 못하고 잣나무라는 상으로 일러주시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자“나는 상으로써 일러주지 않았다”하자 다시 묻는 답 또한 “마당앞에 잣나무” 라 하였으니 기막힐 일이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마당앞에 잣나무라 답하신 뜻을 일러보라?” “오동나무에 잣이 열렸느니라”
조주선사가 어떤 僧이“학인이 총림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으니 스님께서 가르침을 보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는 물음에 인하여 조주선사께서 이르시기를 “죽은 먹었느냐?, 먹지 못했느냐?” 하니 僧이 이르기를 “죽은 먹었습니다” 하니 조주선사가 이르기를“발우를 씻어라”하자 그 僧이 크게 깨달았다.
강설: “가르침을 주십시요”한 조주스님의“죽은 먹었느냐” “먹었으면 발우를 닦아라” 하신 뜻을 알아야 이 스님과 같이 말아래 대오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란이 가섭존자에게 “부처님께서 금란가사 외에 따로 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니 “아란아” 하자 “예”했고 여기서 깨닫지 못하자 “문앞의 찰간대를 꺽어버려라” 한 도리를 알면 조주선사의 뱃속을 걸림없이 드나들 수 있으며 師와 악수 공행 하리라.
조주선사께서 엄양 존자가“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아니할 때 어떻습니까?”라는 물음에 사께서 이르기를“내려 놓아라”하니 존자가 이르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아니했거늘 무엇을 놓으라고 하나이까?”하자 사께서 이르기를 “그럼 짊어지고 가거라” 하자 존자가 크게 깨달았다.
강설: “무엇을 놓으라 했는가? 내려 놓아라” 한다면 무어라 답할것인가? “.........”
조주스님가 한 노파가 재물을 시주하고 대장경 굴림을 청함으로 인하여 師께서 산상에서 내려와 한바퀴 빙 돌고는 이르기를 “굴려 이미 마쳤느니라”하자 사람(심부름인)이 노파에게 돌아가서 이같이 말해주자 노파가 이르기를 “요즘(이번에) 대장경을 모두 굴려 주시기를 청했거늘 어찌하여 화상은 단지 대장경 반만을 굴리셨는고?” 하였다.
강설: 이 노파야 말로 늙은 한 여인이 아닌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조주선사가 대장경 반만 굴린 도리를 아는가?” “마음이 허해서 시주은혜를 갚으려다 노파에게 들켜 버렸느리라” “대장경 전체를 어떻게 하면 온전히 굴렸다 할까?” “법상에 오르기 전에 굴려 마쳤느니라”
이것을 들어 강해한 스님이[노파가 조주의 말씀과 행동에 대해서 대꾸한 말을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라 수준급이다. 대단히 도가 높은 노파이다. 이 노파가 골탕 먹이는 노파이다. 조주스님의 절 밑 동구에 길이 두 갈래가 나 있는데 거기에 노파가 살면서 조수스님을 찾아오는 스님들마다 길을 물으면 반대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동쪽으로 가면 빨리 가고 서쪽으로 가면 빙빙 돌아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노파는 꼭 빠른길을 가르쳐 주지 않고 빙 둘러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늘 골탕을 먹은 스님들이 조주스님에게 동구에 어떤 노파가 가르쳐준 길로 오니까 몇시간을 헤매서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조주스님께서 그 말을 듣고 “내가 한번 가보겠다” 고 하면서 그 절의 동구에까지 가시어 노파에게 물었다 “조주의 절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까 노파가 다른 스님들에게 하듯이 둘러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조주는 그 말을 듣고 가르쳐 주는 대로 빙빙 둘러서 몇시간을 걸어서 절에 오시고는 대중들에게 법문을 하시기를 내가 노파한테 속았느냐? 노파가 나한테 속았느냐? 말할 필요도 없이 노파가 속은 것이다. 노파가 여러 스님들을 속였지만 조주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파가 가르쳐준 대로 왔다고 해도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했는데 이것은 위의 노파와 같은 맥락의 법문도 아닌 것이니, 법을 모르면 이런 허물을 지어 중언부언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위의 이야기를 바로잡아 살피도록 하겠다.
오대산 길목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겠다고 스님들이 찾아가다가 한 노파를 만나서 “오대산은 어디로 가야하오?” 라고 물으면 노파가 “곧장 가시요”하여 걸어가는 스님의 뒤를 보고 “저 스님도 저렇게 가는군” 이라고 스님마다 그렇게 하였다고 하는 말을 들은 조주선사께서 “그럼 내가 한번 가서 살펴보겠다”하시고 똑같은 물음과 똑같은 답과 똑같은 말을 듣고 돌아오셔서는 “내가 그 노파를 간파했노라” 라는 화두인 것을 잘못 인용한 것 같다. 만일 이때 노파를 만나 같은 답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이를 것인가? “사람을 속이려 하지 마시오” 했으리라 여기서 속인다는 말을 잘못 알면 참으로 속게 되는 것이다.
조주선사가 듣기를 속가의 수행인이 스님들을 점검하기위해 말하되 “나에게 열 꾸러미의 돈이 있으니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일전어(본성으로 돌려 보이는 한마디)를 하면 이 돈을 곧 주겠다” 한다함에 사께서 삿갓을 쓰시고 문득 가셨다. 이 말을 들어 이르기를 “무제는 신선되기를 구하되 신선이 되지 못했으나 왕교는 단정히 앉아서도 문득 하늘에 올라갔도다”
강설: 만일 조주스님 같이 하지 않고 그 돈을 가져올 수 있는 일전어를 이르라면 어찌 할것인가? “다시 돌려줘야 옳을 것인가?”“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소이다”
조사께서 수유화상 계시는 곳에 이르러서 주장자를 잡고 법당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가거늘 수유화상이 문득 묻기를 “무엇을 하오?”하니 조주선사께서 이르시기를 “물을 찾고 있소” 수유화상이 이르기를 “나의 이 속에는 한 방울 물도 없는데 무엇을 찾는 거요?” 하자 조주선사께서 주장자를 기대어놓고 문득 나가버렸다.
강설: 여기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간 뜻을 살펴야 할 것이며 “물(마음)을 찾고 있소”하니 “내 이속에는 한방울 물도 없거늘(청전진공) 무엇을 찾고 있나?” 하자 들었던 주장자를 기대놓고 문득 나간 소속을 알아야 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이요 용화상박이니 역시 대선지식들의 법위가 둘아님을 보게 되도다.
27 혜충국사 혜충국사가 서천(인도)의 대이삼장(경율논에 밝은 교학자)이 당나라 성루에 와서 이르기를 “내가 타심통을 얻었다”고 함으로 인하여 숙종황제가 혜충국사를 불러서 시험하게 하여 사께서 묻기를 “그대가 타심통을 얻었느냐?” 대이삼장이 이르기를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감당키 어렵습니다)” 하자 사께서 이르기를 “그대가 말해보라. 노승이 지금 곧 어느 곳에 있는가?” 이르기를 “화상은 일국의 스승이온데 어찌 서천강가에 다투어 건너는 배를 구경하고 계십니까?” 하자 사께서 잠시 있다가(양구) 또 묻되 “그대는 말해보라. 노승이 지금은 어느곳에 있느냐?” 하니 이르기를 “화상은 이 일국의 스승이온데 어찌하여 천진교 위를 향하여 원숭이 희롱하는 것을 보십니까?” 하므로 국사가 세 번째 물음에는 대이삼장이 거처를 알지 못하거늘 혜충국사가 꾸짖어 이르기를 “이 여우같은 요정이여! 타심통이 어디에 있느냐?”하시니 대이삼장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치 이르기를 스스로(본자성) 머무를 때에는 마음의 자취가 드러나지 않으니 모든 하늘이 꽃을 받들길이 없으며 마구니와 외도가 가만히 아무리 엿보려 해도 볼 수가 없는 것이며, 내지 부처의 눈으로도 엿볼수가 없는 것이로다. 또 세존의 삼매를 가섭이 알지 못하고 가섭의 삼매을 세존이 알지 못하며 세존의 삼매를 세존이 또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도다)
강설: 타심통을 얻으면 상대의 마음움직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재주인 것이다. 그러나 삼매에 들어 自處之際인 청정법성의 정에 머물 때는 佛佛이 不相見이라 부처와 부처도 서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작은 재주로 어찌 본성을 깨쳐 알아보겠는가? 만일 삼장법사가 참으로 깨우친 이라면 이런 신통자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불교계 일각에서는 오매일여니 숙면일여니 하고 떠들어 마치 자기의 법위가 그러한 경계에 이르렀음을 자랑처럼 하는 이들이 있는데 참으로 오매일여, 숙면일여에 들었다면 든줄 모르는 것이 든 것임도 모르는 야호의 짓인 것이니, 깊은 잠이 든 이가 깊은 잠에 들었음을 모르는 것이요, 잠이 깨었을 때에 깊이 잠이 들었었구나 하고 유추하게 되는 것이니 이때는 깊은 잠이 아니요, 일여도 일여함을 알았다면 일여가 아닌 것이다.
혜충국사께 어떤 僧이“어떤 것이 옛 부처님의 마음입니까?” 하고 물음에 인하여 사께서 이르기를“담벽과 기왓장과 자갈이니라”하였다.
강설: 이것을 들어 강해한 스님이 “다 감정이 없는 무정물인데 혜충국사의 답은 무정물도 다 불성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했으니 법리를 모르면 말 밖의 뜻을 모르고 이렇게 말에 끄달리게 되는 것이다. 불성은 온 우주일체에 두루 상즉 하므로 식정 있는 유정물에게는 물론 이 우주 안에 있는 무정물에도 상즉한 것이다. 그러나 갖춘 불성의 정의는 그렇지 않으니 불성의 갖춤은 유정물에 한정 되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평등(진여)문인 眞諦로는 일체처에 두루하나 俗諦로 살피면 무정물은 불성의 因이 없음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옛부처의 마음입니까” 묻는다면 “담벽, 기왓장, 자갈도 아니니라” 하리라. 허물구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