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봉오리 같이 불쑥불쑥 솟은 산
한산모시 치마자락에 매달린 절
곡신의 뻐신 오줌발 타고 앉아
꽃다운 비구니를 감추고 있더라
나는 베이스로 출렁이는 가슴을
서해 개펄에 절이며 오다가
동화사서 벌겋게 달구어온
가슴속의 불덩이를 도려내어
저무는 변산 앞바다에
내 패대기를 쳐버렸네
포도주를 거르다
여러해 동안 나는 포도주를 담가왔소
술밥으로 굳이 포도를 택한 것은
그 빛깔을 좋아하는 까닭이요
베니철죽, 따알리아, 붉은 코스모스,백일홍
그것들이 뿌리 내려 곰삭은 붉은 황토와
해와 노을과 모닥불과 알불 같은 여자를
나는 지금 포도주를 걸러 놓고
그것들을 마루로 불러 들여
주거니 받거니 마시며
붉게붉게 물들어 븕은 시를 쓰오
아 컵에 담긴 한 잔의 포도주
이 선홍빛 출렁임을 누가 외면 하리
죄의 그늘을 거두는 이 향기를
부지깽이
우리 언 가슴 녹이려고 모닥불 피우다
사그라져가는 불꽃 쏘시기려고
막가지 툭 분질러 푹푹 쑤셔대던 부지깽이
가리불 쏘시기다 타들어 가는 부지깽이를
개숫물 통에 푹 담그면 뿌지직
유언을 남기며 피어나는 흰 연기가
살강 밑 어둠을 소지해갔다
부지깽이의 속은
모닥불, 그 모닥북 속에만 있지 않고
아궁이, 그 아궁이 속에만 있지 않고
삽살개나 쫓는 것도 아닌
오직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낸
혁명이 오기 전에 개혁을 써시기는
꺼져 가는 정열을 되살아나게 하는
아 푹푹 쑤셔대는 이 살 맛
빛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피나 묻혀
어둠을 발겨먹는 불귀신이 되리라 하자는 것이다
밥의 시
가을이면 우리집은 대물린 싸전처럼
빛바랜 그릇들이 한 자리에 모여
종류별로 곡식을 담고
모양내기 시합이라도 하듯 옹기종기 놓여있다
씨 뿌릴 때부터 거둘 때까지 그 여덟 달 동안
연장을 들고 광부처럼 땅을 쥐어뜯느라
집보다는 밭에 그늘보다는 뙤약볕 아래 있는 시간이 많던
별보고 나갔다 별보고 깃드는 제비 같은 마누라
별빛과 햇발이 호미 끝을 벌겋게 달구어 여문 곡식들이
우리 두 식구의 일 년 양식이 된다
허구헌 날 일손은 돕지 않고
밥도 안되고 돈도 안되고 영양가 없는 시를 쓴다고
골머리 싸매고 앉아 심봉사처럼 눈을 끔적끔적
땅을 보고 하늘을 보고 먼 산 바라보는 두 눈
바람이 스치고 별이 어리고 달이 어룽져 붉게 물든 두 눈에
슬픔이 어리어 넋이 나간 사람이 될 때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호미로 쿵쿵 짓눌러 다지며
맛이 간 서방이라고 아리는 속을 땅구박으로 풀던 마누라
아 내 대신 구박 받아 열매 맺어준 밭떼기처럼
나도 이제 이웃까진 못 맥여 살리더라도
마누라 허헌 속이나 채울 수 있는
그런 시 한 되빡 거뒀으면 참 좋겠다
부산에 대하여
더 갈 곳 없던 기차가
바다로 빠지지 않으려고 뻗대어선 곳
백두로부터 밀물처럼 밀려온 전쟁의 아품을
온몸으로 끌어 보듬고 자유의 마지막 젖줄로 남아
분단의 아품을 갈무리한 어머니였다
국군 따라 대책 없이 흘러와 멈춘 이곳
고향보다 소중한 것이 목숨 이였기에
앵벌이로 구두닦이로 부두의 개로
자갈치의 행상으로 국제시장의 점원으로
넝마처럼 흐르며 닻줄처럼 살아온 오십 년
아들을 낳고 딸을 낳고 정을 낳아
지워야만 사는 고향의 이름들을 지우면서
종간나 아새끼를 외치며 살다보니
출렁이는 파도 같은 이곳 사투리에 맛이 들었다
고향이 그리운 한을 악마구리로 풀던 자갈치와 국제시장
이산의 우체부였던 영도다리와 용두산 계단
전선이듯 선혈이 낭자한 오 륙도 바다
내 땅이면서도 서럽기만 하던 아쟁 같은 오감을
잉걸불 같은 자유 하나로 보텨온 부산이여
오는구나, 이제야 통일의 기미가 오는구나
철로가 이어지고 물길이 터지고
새들이 부럽던 반세기의 휴전선도 밀어붙이고
밀물처럼 오는구나
아 눈감을 수 없어 뱃고동소리로 울던 백골들
이제야 눈을 감을랑가
부산 앞 바다에 허연 파도가 스러지고
연락선이 들개처럼 운다
실향민1
곧 돌아가겠지 마련한 옷이
그동안 몇 벌이나 되던가
단숨에 달려가리라 마련한 신발이
그동안 몇 컬래나 되던가
한 시도 잊지 못하던 그이를
알아볼 수나 있을런지
그저 끽해야 오년이면 마나겠지
홀로 살아온 세월이 오십년
이젠 영영 틀린거야
아 고향일랑 이쯤해서 잊어야할랑가
유언장을 써야겠다
거기 누구 나 숨 끊어지거든
땅에 묻지 말고 태워서
행여 강물에 뿌리지 말고
잘게 환을 지어 철조망 따라 뿌려주소
온갖 새들 뱃속에 나를 담고
가고 싶던 북녘땅 떠돌아다니다가
살았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는
아으 그이 가슴에 철푸덕 안겨놓게
실향민2
그저 끽해야 한 오년이면 만나겠지
홀로 살아온 세월이 오십년
한 시도 잊지 못하던 그녀도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살았을랑가
곧 만나겠지 마련한 부롯지가
그간 몇이나 되던가
곧 터지겠지 물리친 억압이
그간 몇 태산이나 되던가
복성 껍질 같던 그녀의 불따구
아 이제 영영 틀린거야
이쯤해서 잊어야할 그녀인가
유언장을 써야겠다
어이 동무들 나 숨 거두거든
인민장으로 땅에 묻어선 안되
반다시 장작불에 날 태워
그 열기로 언 기슴 녹이소
하여 뼈는 콩콩 바수어
강물에 뿌려주소
남녘의 강가에 나와
크렁크렁 양치질 하는
아으 그녀의 입 행굼이 되어구게
가을 나무
하늘이 높아지고
달이 휘엉청 밝더니
나무들이 뒤척이며 옷을 벗는다
사람은 올 때
발가 벗은 채로 왔다가
떠날 땐
겹겹으로 옷을 껴입고 가는데
나무는 날 때
옷 입고 와서
갈 땐 빨가 벗고 가는구나
아 저 나무들 처럼 우리도
다 벗고 갈 수는 없는 것인가
귀또리
행여 고일까
다 비워 내는 산중의 계곡
돌돌거리며 흐르는 물이
낙엽을 보듬고 놀다가
속세를 눈치 첸 듯
푸른 돌 부여잡고
희게희게 울며 떠나간다
휘엉청 달이 밝아
찬바람 소슬 하더니
서리를 호명 하는가
자지러지는 귀또리 소리에
온 산이 뒤척이며 옷을 벗는다
밤 숲을
아쟁 같은 울음으로 도배하는 귀또리
너 비록 미물이나
이별이 서러워 애진 이 사내 맘을
알아 주는 이 너 뿐이로구나
산마을
도시 아이들이
아비가 자랐던 산마을을 찾아왔다
콘크리트가 키운 아이들
오늘 따라 시냇물은
도시 아이들이 거북한지
구시렁구시렁 군담을 한다
제자리를 알고
제자리에 깃드는 것은
하늘에 순종하는 것
그 이치를 말하듯 붉은 노을이
시냇물 속으로 뚝뚝 떨어진다
가재를 잡는 아이들이
이슬 머금은 푸른 달 속에서 놀고
어른들은
삼십 년 동안 나누지 못한 말들을
비울 줄 모르는 술잔을 통해 나누고
마을 둘러친 산은
또 다른 산고를 치르느라 몸을 뒤척인다
보리피리
지배지배 지지배배 주비주비 지배
종다리 하늘 높이 솟구치며 시끄럽던 오월
보리 이파리 은빛으로 바람나는 들판은
모두 순이와 내 것이였다
나를 끌고 앞장선 순이가
실한 보리 뽑아 피리 만들어 불면
삐이삐이 찌이찌이 삘릴리리 소리에
종다리는 더욱 야단법석이고
나는 깜부기를 뽑아
붉게 읶어가는 순이 얼굴에 분칠을 했다
허면 순이는 나를 보리밭 속으로 넘어뜨리고
나는 순이를 향해 황소처럼 대어들면
한사코 밀쳐내는 순이에게 애걸했다
대보기만 하자 대보기만 하자
아 오늘 이 봄날
보리도 없고 종다리도 없고
순이도 없는 들판에 홀로 서서
나는 반백이 되어 으악새가 되어
보리피리 대신 풀피리를 불어본다
키질
폭풍이 휩쓸고 간 들판이 여물어
갈무리한 곡식을 키질하는 어머니
구릿빛 얼굴에 제운 햇발이 번들거린다
쭉정이는 날려가고 남은 알갱이
깜부기와 돌이 더 많다
뽀얗게 먼지를 둘러쓴 어머니
털썩 주져 앉아 바보 같이도
오래도록 잡티를 골라낸다
드디어 모아쥔 한 줌의 알곡
학자 같은 어머니의 얼굴
아 어머니
이 겨울이 오기 전에
나도 좀 키질해주세요
꿈
나는 한 생을 꿈속에서만 살았네
그러기에 학교에서 소풍 가는 곳을
언제나 미리미리 알곤 했었지
전날 밤 꿈속에서 보았으니까
또 내 여인이 누구이며
그가 바로 내 뼈다귀임도
소년 때부터 미리미리 알고 있었지
꿈속에서 그녀와 늘 만났으니까
내가 가난하고 어리석은 시인으로 살 것임도
미리미리 짐직하고 있었지
바람과 구름을 타고 세상을 떠도는 꿈을
언제나 꾸었으니까
그리고 그 꿈의 꿈속에서
붉은 우유로 가득한 태반을 찢고
새로 태어난 꿈을 꾸었지
다시는 꿈꾸지 않는 生을 살고픈 꿈을
번식기
생선을 구우면서 환풍기를 트는데
그 속에서 퍼득이는 소리가 났다
환풍기를 얼른 끄고 들여다보니
후티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명이 다칠까봐
환풍기 사용은 금지 되고
생선을 맛보지 못한 채 끼니를 때운다
후티새야 너는 왜 둥지를 숲에다 틀지 않고
환풍구 속에다 틀었느냐
오늘도 그 의문을 털지 못하고 집을 나서는데
밤새 비를 맞은 산이 어제보다 더욱 푸르다
아 이 봄 날
물오른 숲에 둥지 트는 것 들처럼
나도 둥지 하나 틀고 싶다
대숲
대의 고장 남도 땅엔
쉼 없이 술렁이는 대숲 천지라
대숲소리 들으며 잉태했다가
대숲소릴 들으며 나서
대를 보듬고 산다네
연 만들어 띄워
연줄에 낮달 올려 거문고 타고
도롱태 엮어 우주를 담아 굴리고
아 달빛을 흔드는 저 대금의 소리
죽창을 든 녹두장군이
황토현을 넘어온다
부채를 든 할량
죽장 짚고 삿갓 쓰고 훠이훠이
댓가지 흔들지 않음 몸살 나는
남도 땅 남도 사람들
오늘도 대들 잘려나가지만
秋霜 같은 죽순들 불끈 솟는다
患者
뻥튀기 여인네 등에 업혀서도
잘도 잠자는 아기와
기차소리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귀뚜리 부엉이 소쩍새 우는 소리에도
잘도 잠드는 사람이 있건마는
어찌하여 나는
푸른 달빛 쏟아지는 소리에
담을 넘는 고요소리에
요다지도 보채어 잠 못 들어 하는가
장날
똘감이 시세 좋던 초등학교 적
앞으론 대봉감이 더 시세 좋을 것이라며
똘감나무를 잘라버리고
대봉나무를 심던 아버지
대봉나무가 자라서 주렁주렁 열리고
내 나이 스무 살 남짓 되던 해 겨울
화롯불 앞에 둘러앉아 홍시를 먹으며
대봉보다 단감이 더 시세 좋을 것 같구나
하시더니 이듬해 봄 아버지는
내 허벅지만한 대봉나무를 싹둑 잘라버리고
단감나무를 고접 하셨다
고접 단감이 잘 자라 쪼락쪼락 열리고
그렇게 두어 번을 열리고 나서 아버지는 가셨다
그후 단감 시세는 다시 물러지고
떫은 감이 도로 시세 좋게 된 오늘
장터 구석진 자리에서 털모자를 둘러쓰고
대봉박스 앞에 앉아있는 한 노인을 보았다
차를 멈추고 감 시세를 물으니
한 박스에 삼만 원인데
시세가 해마다 물러진다며 코를 푼다
아 나는 오늘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았네
감 시세처럼 쪼그라든 시골 장터의 초겨울 한낮에
단감나무
남도 순천에 오월이 오면
골골의 단감나무 밭이
긴 잠에서 깨어나
움들이 겉껍질 모자를 벗고
뚤래 뚤래 세상을 둘러보다가
유채꽃 같은 감잎을
무더기로 피우기 시작하네
개걸스런 햇살이 감앞에 들치면
감꽃들 진창으로 피어나
또록또록 눈을 뜬 채
우유빛 향기를 날리며
이랑 지고 이랑 피어나면서
동네 아이들 불러 모아
신랑 신부 놀이로 왁자하네
감꽃 폭풍 속에서 내 유년이
지푸라기에 타래타래 감꽃을 꿰며
금목걸이를 두를래
금팔지를 두를래
손짓을 하네
첫댓글 잘 여문 시를 가져오셔서 카페지기인 저로서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자주자주 뵙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