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 대 그레고리우스(604년 3월 12일)
큰 인물이라는 찬사를 당연히 받을 만한 이 거룩한 교황은 내 세의 정화를 믿는 가톨릭 교리의 증거자일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 「대화(Dialogen)」에서 불쌍한 영혼들의 환영(幻影)에 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개종(改宗)한 종교 작가인 파버(F. W. Faber)는 「모든 것은 예수를 위하여 (Alles für Jesus)」라는 저서 제9장에서 이 교부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 그레고리우스(Gregor)는 그의 저서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교부이자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장려한 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기도는 그 이후 수세기 동안 대단히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복자 페트루스 파버(Petrus Faber SJ. 1546년)는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신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 여러 가지 이유 중 특히 가장 큰이유는 그가 연옥론에 관해서 아주 명쾌하고 효과적인 설명을 했다는 데에 있다'라고 말했다. 복자 페트루스 파버는 또한 만일 성 그레고리우스가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에 관해서 그렇게 훌륭한 논증(論證)을 해놓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는 그 이후 수세기 동안 그토록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페트루스 파버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설교할 때마다 특히 성 그레고리우스를 찬양하는 말을 신자들의 마음속에 늘 전달해 주었다."
성 그레고리우스의 「대화」 중에서도 특히 제4권의 여러 가지 기적에 관한 보고와 죽은 이의 환영(幻影)에 관한 보고로 인해 이 성인은 비난을 받아 왔다. 비난의 이유는 이 책이 꼭 필요한 비판을 빠뜨렸으며 기적만을 바라는 그 시대의 경향을 더욱 부채질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의기 소침하고 낙담하게 하며 지상 생활에 위안이나 기쁨을 거의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바르벨(P. J. Barbel)은 그의 저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그리스·라틴 문학사"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오늘날의 미신과 시대적 망상들을 좀더 명확하게 관찰해 보면, 우리는 성 그레고리우스의 대화에 대해 판단할 때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될 것이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가 「대화』 제4권 55장에서 보고한 환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로마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고(故) 유스투스(Justus)의 환영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이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자기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어느 날 수사 유스투스가 수도회의 규칙을 어긴 것을 발견한 성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회개 시키기 위해 벌을 주었다. 심지어는 유스투스가 죽은 순간과 사후에 그에게 지정된 묘지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히 처리하였 다. 그러나 교황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사 유스투스가) 죽은 후 30일이 지났을 때, 나는 고인이 된 이 형제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내세의 정화소에서) 고통을 겪고 있을 그를 생각하고 나는 그를 (거기에서) 구해 내기 위한 방법 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수도원의 부원장인 프레티오수 스(Pretiosus)를 불러 놓고 매우 침통하게 그에게 말했다. '우리 형제인 유스투스가 연옥에서 고통을 받게 된 지도 한참이 지났습니다.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 할 수 있는 한 힘껏 그를 도와 연옥의 고통에서 구해 냅시다. 그러니 이제 가서 그를 위한 30일간의 성 미사를 바치도록 합시다. 하루라도 빠뜨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프레티오수스는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를 충실히 완수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일들 때문에 날짜 세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런 중에 한 번은 수사 유스투스가 밤중에 동료 수사인 코피오수스(Copiosus)에게 나타났다. 유스투스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코피오수스는 그에게 물었다. '형제여, 어찌 된 일인가? 여 떻게 지내고 있나? 그러자 유스투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사정이 나빴으나 지금은 잘 지내고 있네. 오늘 나는 (복된 천국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되었네.' 이 말을 듣자마자 코피오수스는 이 사실을 수도원의 동료 수사에게 알렸다. 그러자 수사들은 날짜를 헤아려 보고, 이 날이 성 미사를 올린 지 꼭 30일째 되는 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피오수스는 동료 수사들이 미사를 올렸던 것을 전혀 몰랐고 동료 수사들은 코피우수스가 본 것을 전혀 몰랐었다. 그러나 서로 똑같은 시간에 코피오수스는 형제들이 봉헌한 미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형제 수사들은 코피오수스가 본 환영())을 알게 되었다. 환영과 속죄의 제물은 서로 일치했으며, 고인이 된 수사 유스투스는 성 미사의 은총으로 (연옥의) 고통에서 분명히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성 대 그레고리우스의 이러한 보고에 근거하여 "그레고리안 미사"의 경건한 관례가 생겨나게 되었다. 즉 30일간의 연속 미사를 드릴 때 죽은 이들이 천국의 복락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다는 확고한 희망을 갖고 그 미사를 올리는 것이다.
하여간 성 대 그레고리우스는 언제나 죽은 이를 위해 성미사를 바치는 일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대화 제4권의 55장 도입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죽은 후에도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없어지지 않고 있다면, 죽은 뒤라 할지라도 영혼들에게는 희생(미사) 봉헌이 매우 필요할 것이며 심지어 사자(死者)의 영혼들이 그러한 미사를 자주 간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장에서 교황은 한 사제에게 나타나 도움을 청한 죽은 이에 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사제는 이 죽은 이를 위해 일 주 일간이나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으며 그를 위해 거룩한 속죄의 희생 제물을 날마다 바쳤다. 그랬더니 이전에는 며칠씩이나 계속해서 나타났던 이 사자(死者)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 성미사를 바치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유익한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은 이들의 영혼이 살아 있는 이들에게 그렇게 해주도록 간구하고, 그들이 연옥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5
성 그레고리우스는 「대화」 제4권 39장에서 "사후에 연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백하게 성서 구절을 증거로(특히 마태 12, 32; 1고린 3, 21 이하) 내세워 확실히 존재한다고 답변했다. 같은 책의 끝부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선행을 통해 이곳(현세)에서 미리 보속하지 못한 소죄(小罪) 들은 그곳(연옥)에서 누구라도 고통을 겪으며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 클루니의 성 오딜로(1048년 12월 31일)
유명한 개혁 수도인 클루니(Cluny)의 4대 수도원장이었던 성 오딜로(Odilo)-그는 그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였 으며, 그 당시 교황 및 황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1028년에서 1030년의 시기에 그의 전체 수도원들에 대해서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다음날에 모든 죽은 신자들을 위해 미사와 죽은 이들을 위한 성무 일도 (Totenofficium) 그리고 자선을 통해 공통적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불쌍한 영혼들의 아주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이와 관련된 성 오딜로의 훈령은 문서로 보존되어 있으며 교육에 매우 유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왜냐하면 성 오딜로 수도원장에 의해 도입된 '위령의 날'은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나 위령 예식의 행사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선의 의미인 회사와 가난한 12명에게 베푸는 식사에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연옥 영혼들을 돕는 것이다.
클루니 수도원과 개혁 수도원들의 영향하에 '위령의 날'의 제정은 매우 급속히 전체 교회로 퍼져 나갔다. 그로 인해 불행한 영혼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구원을 받았다. 그 후 교황 베네딕도(Benedikt) 15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고통 속에서 '위령의 날'에 모든 사제들이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 성제를 단지 한 번이 아닌 세 번을 베풀어도 좋다(1915년 8월 10 일고 허용했다." 이러한 특권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 이야기에 속한다. 50
성 오딜로와 관련해서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미사 성제나 기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곤궁한 동포들에 대해 '자선' 과 선행을 베품으로써 불쌍한 영혼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 오딜로는 이런 일을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를리어(J. Hourlier)"는 성 오딜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지칠 줄 모르는 관대한 도량을 지닌 그는 모든 고통받는 이들과 만나기를 원했으며 그들을 돕고자 노력했다. 거듭되는 무서운 흉작과 생필 품의 결핍 그리고 물가 등귀와 기근이 겹쳤던 그 시기에 그는 감동적일 만큼 대담하게 곤궁한 이들을 돕고자 애썼다. 가난한 이를 위해 심지어는 성구실(聖具室)의 전례 그릇과 교회의 재화까지도 팔아 버렸으며 개인적인 자선을 동냥해서 얻은 것을 나누어 주는 등의 일까지도 기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영혼들을 돕고자 했으며 특히 불쌍한 영혼들을 연옥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미 클루니 수도원에서 불행한 영혼들을 위해 봉헌되었던 조력 행위로서의 "대원" (미사 성제, 기도, 자 선)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과 관련해서 모든 죽은 신자들을 위한 추념일을 그 다음날(11월 2일)로 제정했다. 그는 불쌍한 영혼들의 진정한 친구였기에 정화의 불속에 있는 영혼들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곧잘 묘사되었다. 예를 들면 17세기부터 안트베르펜 (Antwerfen)에 있는 성 안드레아 교회(SL-Andreas-Kirche)의 동상 및 빈(Wien)의 바로크 박물관에 있는 마 울페르취 (Maulpertsch)의 그림에 잘 표현되어 있다."
피앗미희님이 카톡으로 보내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