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 3. 27. 21:08
■ 삼청동 도회화첩(三淸洞道會畵帖)
[요약]
1654년 음력 9월 5일(孝宗 五年) 이루어진 오늘날의 대구 경북권 생원 이상, 관직 역임자 26人의 계회 모습을 그린 계회도와 좌목으로 구성된 표제 『삼청동 도회화첩(三淸洞道會畵帖)』으로 절첩본이며 전반 2면에 古松이 둘러선 넓직한 터에 참석 인원 전체 26人과 악공, 무희, 시종, 마부 등 19人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6面에 걸쳐 26人의 직책, 성명, 字, 生年, 本貫, 居住地를 기록한 座目이 있다.
<크기> 접은 상태 19.2×36 / 계회도 39×3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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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1654년 9월 6일, 삼청동에 영남출신 관료 15인과 생원진사 11인 등 모두 26인이 모였다.
나이로는 22세의 진사 김총(金璁)부터 60세의 활인서별제 안홍정(安弘靖) 까지이며, 신분은 종4품 봉상시 첨정 김광우(金光宇)부터 종9품 전참봉 장학(張澩) 까지의 관료 15인과 생원 진사 자격을 갖춘 11인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고향이 주로 대구 경북 지역이다. 일종의 향우회를 연 것이다. 향우회를 연 것은 어떤 계기였을까? 참석자의 인명정보가 적힌 좌목의 정보와 설월당 종택의 <보첩(寶帖)>에 적혀 있는 행사 일자를 통하여 답을 찾을 수 있다.
좌목에 기록된 사람 중 5명의 신분이 신진사(新進士) 또는 신생원(新生員)이고, <보첩>의 말미에는 '갑오구월초육일회우삼청동(甲午九月初六日會于三淸洞)'이라 적혀 있다.
<甲午式年司馬榜目(1654)>에 방방일(放榜日)이 9월 5일이다.
즉 갑오년(1654) 사마시 합격자 발표가 있은 다음 날에 이들 합격자를 위하여 영남 출신 인사들이 삼청동에서 모임을 가진 것이다.
이 1654년의 식년시에서 영남 출신은 생원시에서 20인, 진사시에서 19인이 합격하였는데, 양시 합격자가 3명이므로 실제로는 36인의 합격자가 있었다.
이 36인 가운데 5인이 삼청동의 영남 향우회에 참석한 것이다. 그리고 참석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첩을 만들었다.
계회도의 관례상 참석자 수만큼인 26부가 제작되었을 것이다. 첩은 계회의 명칭, 계회도, 좌목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참석자의 시문이나 작첩한 사람의 서발문이 수록되었을 것이다.
현재 이 <삼청동도회도>는 2부가 남아 있다. 설월당 종택의 <보첩>과 계명대 동산도서관의 <삼청동도회도첩>이 그것이다.
설월당본은 그림 2면과 좌목 6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계명대본은 표제 1면, 洪汝河(1620-1674) 서문 3면, 그림 2면, 좌목 6면, 宋鴻來(1876-1948) 발문 1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월당본은 원본인지 알 수 없으나 계명대본은 모임에 참석하였던 인동(구미)의 남파 장학(1614-1669)의 집안에 가전되던 것을 바탕으로 1894년 여름에 摹寫하여 새로 제작한 것이다. 그 내용은 발문을 지은 회천 송홍래(1876-1948)의 석판본 <회천선생문집(1953)>에 수록되어 있다.
모임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다. 오늘 이 시간에 여기에 계신 분들과 저도 인연이다.
아주 먼 옛날에 어떤 목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기념하는 첩을 나누어 가지고, 참석한 후손들이 대를 이어 모임을 이어나가는 사례가 발견된다. 안동 지역의 우향계(1478)와 임계계(1613), 성균관의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1480)가 그러한 사례이다.
우향계는 1478년에 경북 안동의 5문중 12명(안동권씨 3명, 흥해배씨 4명, 영양남씨 4명, 안강노씨 1명)이 결성한 친목 모임이다.
이 모임은 일제시대에 잠시 중단된 것 이외에 지금까지 매년 음력 3월 18일에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에는 안동댐 옆에 우향각을 짓고, 2006년에는 우향사를 지어 13명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임계계는 1613년에 환갑을 맞이한 임자생(1552)과 계축생(1553) 11명이 안동의 학가산에서 결성한 모임이다.
이 모임 역시 현재도 이어가고 있고, 당시 계회도 또한 4점(순흥안씨 안담수, 진주하씨 하우성, 영해박씨 박흡, 안동권씨 권위-도계서원)이 전하고 있다.
이 계회도는 2010년 10월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11명 가운데 연락이 닿지 않는 허응길의 후손을 찾는 과정에서 동산도서관 소장의 필사본 <만력십이년갑신문무과방목(1584)>과 <하양허씨족보>가 촬영되기도 하였다.
정지교부계는 1480년 6월 6일에 성균관에 있던 김굉필, 최부, 박담손, 신희연, 송석충 등 5인이 결성한 모임으로 1481년 8월 8일에 재차 모임을 가지는 등 두 차례 모임이 있었다.
그러나 사화 등 화를 당하면서 송석충은 고향인 영주로 낙향하였고, 이 때 가지고 온 계회도가 송석충의 문집인 목판본 <눌옹선생유사>에 판각되어 전한다. 이 세 경우 모두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모임을 결성하고 지금도 모임이 이어지는 사례이다.
우리는 이번의 영남 과거 합격자 환영 향우회 성격의 모임인 <삼청동도회도첩>을 통하여 조선시대 모임 문화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모임이 존재한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여러가지 목적의 모임이 수도 없이 만들어졌겠지만 현재 그 모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글을 알아서 기록을 남기고 기념 사진첩 성격의 계회도를 남긴 경우로 한정된다. 오늘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