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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大田)시 ‘장태산(壯泰山. 302m)휴양림’을 가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8월25일 절기는 입추(立秋)와 처서(處暑)를 지나 새벽공기는 제법 시원하여서 가는 여름이 되려 아쉽게 느껴진다. 추석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와서 벌초(伐草)다 잔치다 하여 오늘은 동참 인원(31명)이 그리 많지않은 편이다.
칠곡휴게소에서 준비해 온 조식을 회원님들이 드실동안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산색(山色)은 푸르다 못해 검푸르게 보이며 더는 성장을 멈추고 가을 맞을 채비를 하는 것 같으다. 여느 휴게소가 그러 하듯이 칠곡휴게소도 예외없이 상당한 길지(吉地)에 자리하고 있음을 간파(看破)합니다
차는 신나게 달려 추풍령휴게소에서 잠시 쉬고는 줄곧 내달아 ‘서대전IC’에서 내려 20여 분을 달려 서남방의 ‘장태산휴양림’ 부근에 이르니, 인공조림(人工造林)으로 가꾸어진 ‘메타쎄콰이어나무’가 쭉~ 쭉~ 하늘 높이 솟아 도시(都是) 끝간데를 모르겠도다!
그럭저럭 출발깃점인 휴양림 주차장에 당도하니 시계는 거의 10시가 다 되어간다. “장태산 자연휴양림”이라 새겨진 거대한 자연석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시 되돌아 5분 여를 걸어서 “큰그늘다리”를 지나 “질울다리”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잘 다듬어진 포장도로를 따라 얼마를 오르니 “숲속 어드벤처 보수공사 등으로 인하여 팔마정 출렁다리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가는 날이 장날인가? 출렁다리 밑을 지나 팔마정(八馬亭)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여서 주위의 경관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八馬亭’은 사방 1칸에 홑처마 우진각지붕으로 지어져서 건축양식이 특별하다. 절벽 아래로는 갑천(甲川)이 흐르고 연하여 장안저수지가 조성되어 만수(滿水)가 되면 참으로 장관(壯觀)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내문에 “팔마정 유래”가 있는데, 과거 물이 잠기기 전에 “팔마(八馬)마을”이라고 불려졌던 곳으로 산세(山勢)가 ‘여덟마리의 말’이 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둔한 필자(筆者)가 짐작컨대 여덟마리까진 모르겠고, 금남정맥에서 뻗어나온 가느다란 한 줄기가 장태산을 지나 이 곳 갑천(甲川)에서 그 지맥을 드리우고 있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울러 90년도에 정자가 처음 세워져 있었으나, 안전문제로 2006년에 철거되었다가 기성동 주민들의 건의로 2011년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하니 퍽 잘 됀 일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내려와 출렁다리 입구에 이르니 통제는 없고 10명 이상은 건너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다. 생각보다는 너무 왜소하여서... 가볍게 건너 후미의 몇 분들에게 사진촬영을 해 드림니다. 요즈음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소에는 “출렁다리” 건설이 하도 유행이라! 웬만한 규모의 다리는 크게 감동(感動)을 주지 못합니다 그려!
그러고 보면 사람의 몸에만 면역(免疫)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도 면역이 생기는가 봅니다! 형제바위봉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팔라서 쉬엄~ 쉬엄~ 쉬다 오르고 오르다 쉬면서 여유롭게 진행합니다.
선두는 어디메쯤 갔는지 보이지 않고 후미에는 필자를 비롯하여 황까페지기님, 김해진님, 정일영님, 김두열님 등이 함께 오르면서 이런저런 주제(主題)없는 얘기들로 화기애애(和氣靄靄)합니다.
그 많은 얘기들 중에서 모두들 오늘날 시국(時局)에 대해서 걱정이 많으시다. 안보문제를 비롯하여 경기침체와 한미일관계의 악화, 외교문제 등 등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하나같이 걱정하신다. 대학(大學)에 “정유구어민사(政惟求於民事)(정치는 오로지 백성을 섬기고 잘 살게 하는데 있다.)”라고 했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
그럭저럭 형제바위봉에 도착하니 선착하신 남산님들 몇 몇 분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형제바위는 약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 황까페지기님과 함께 답사를 해 보니 경사가 심해 안전철책으로 막아놓아서 사진촬영에는 별로다.
기대했던 것 보다는 실망스러워서... 우스개로 “광고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니, 폭소에 폭소를 합니다 그려! 다시 ‘형제산’으로 올라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표식(標識)을 자세히 보니, 작은 소나무에 명찰을 달아놓은 것 같으다.
호오이~ 호오이~ 솔숲길을 10여 분을 걸어서 “장태루(壯泰樓)”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장태루는 팔각정자로 지어져서 오색단청을 입혀 보는 눈이 현란하고 장엄하여 전망대(展望臺)로 알려진 곳이다. 연하여 정자 앞으로는 넓은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야외공연도 할 수 있겠으며, 가장자리 한켠에는 높다란 통신철탑이 하늘을 찌를 듯 하다.
아울러 장태산(302m) 휴양림의 정상으로서 ‘금남정맥’의 대둔산 부근에서 북동쪽으로 한지맥이 흘러나와 매봉, 장군봉(268m), 형제산, 안평산(471m) 등 네 줄기로 나뉘어져서 그 사이에 ‘장태산 휴양림’이 있으며, 그 잔여지맥은 조중봉, 명막산, 침산으로 이어져서 갑천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안평지맥’이라 한다.
게다가 이 주위가 갑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며, 안평산 너머 동으로는 유등천이 흘러서 대전 원촌동 부근에서 갑천으로 다시 합류하여 신탄진 부근에서 금강(錦江)에 흘러드니... ‘산태극 물태극’을 이루고 있어 천하에 길지(吉地)라 하겠습니다.
황까페지기님께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는 바지런히 걸어서 ‘전망대광장’에 이르니, 선착하신 윤갑용회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회원님들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시계는 벌써 12시가 지나고 있으며 시장끼도 느껴져서, “금강산식후경(金剛山食後景)”이라 했듯이 전망대 한켠의 평상위에서 점심을 드심니다.
점심후 넓은 잔디광장을 둘러보니 남쪽 방향의 한켠에 7층석탑이 한기가 세워져 있는데, 잔디밭 어디에도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니 비보탑(裨補塔)으로 세워졌는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도다.
한편 북쪽으로 ‘장안저수지’가 바라다보이는 고즈넉한 곳에 전망대가 있는데, 안내문에 “문재인대통령 부부 장태산자연휴양림 방문”이라고 씌여져 있으며, 그 아래는 의자에 앉아있는 두 분의 ‘뒷모습사진’이 담겨있다.
나란히 앉아있는 뒷모습을 뵈니 원망 했었던 마음은 간 곳 없고 왠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든다. 같은 인간으로서 만백성의 요구와 원성을 감당하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 온다. 일개 가정도 다스리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국가(國家)를 경영하려면 더 말해 무삼하리요! 권좌(權座)는 누구나 탐(貪)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또한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자리가 아니겠는가!
천상(天上)에 피어오르는 뭉개구름을 바라보면서 허허로운 발걸음으로 전망대를 뒤로하고 산림문화휴양관으로 진행합니다. 얼마를 걸었을까, 헬기장을 지나 장태산 자연휴양림으로 나려가니 점심후라 배도 든든하고 숲향기도 감미로와서 흥얼~ 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휴양림 내려가기 얼마 전부터는 아름다운 나무들과 풀꽃들을 심어서 정원을 꾸며 놓았는데, 다래나무, 으럼덩굴, 오미자, 머루, 붉나무, 꾸지뽕나무, 사철나무, 장구밥나무, 화살나무, 조팝나무, 황매화, 병꽃나무, 미선나무, 산철쭉, 까치밥나무, 쪽동백나무, 앵도나무, 왕보리수나무, 산사나무 등 등 셀 수 없이 많아서 수종(樹種)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려!
연하여 ‘휴양림전시관’ 내에는 기이한 형상의 나무솟대와 메타쎄콰이어나무에 대한 특성을 잘 설명해 놓았다. “장태산휴양림”은 故 임창봉 회장이 1973년 사업을 정리하고 전재산 200억 원을 투자해 약 30만평의 땅을 20여 년간 직접 가꾸었으며, 도중 두 아들과 함께 조림사업을 하던 中 산림청의 권유를 받아 1991년 “민간휴양림”으로 지정된 후 1992년 산림전시관, 썰매장 등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어 개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메타쎄콰이어”는 빙하기 때 공룡과 함께 모든 나무들이 멸종했으나, 이 나무는 지금까지 버티어 오고 있으며 키는 300feet(약 90m) 이상 크며 나이는 3200년~4000년 까지 산다고 한다. 나무 열매는 달걀만 하고 씨는 한 개당 150~300개 정도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휴양림을 찾는 인원이 년간 30만명 이상 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공덕이 능히 하늘을 덮고도 남겠습니다 그려! 아람드리 나무들이 쭉~ 쭉~ 뻗어 올라 온 계곡을 그늘지게 하고있어 가족단위로 또는 친구들과 연인들의 아름다운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아래쪽으로 나려올수록 인공조림(메타쎄콰이어)의 분포는 더욱 넓어져서 인산인해(人山人海)라 함이 좋겠고, 우측으로 조성된 작은 연못에는 연밭을 조성하여 모두들 사진촬영을 하느라 바쁘시다!
가는 계절은 어쩔 수 없는지 잠시 그늘에 앉아 쉬고 있으니 등골에 흐르던 땀이 그새 말라있다.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 소리에 넋을 놓고 있는데, 그토록 교앙(驕昻)하던 매미 울음소리의 기세(氣勢)가 많이도 꺾인 것 같으다!
천지(天地)는 만물(萬物)을 창조하였고
피조물(被造物)인 인간은 자연을 사랑하였네
얼시구 절시구 한평생이 꿈속에서 헤매는 듯
어화 둥~둥~ 해거름에 그림자만 남는구나
하산주를 마치고 귀갓길에 시간이 일러 옥천에 ‘故 육영수 여사 생가와 정지용 선생의 생가’를 답사하기로 하여 신나게 달림니다. 차에서 내려 교동리(校洞里) 입구에 들어서니 어찌나 주위 환경이 변화 발전 되었는지 어리둥절하게 느껴진다.
2009년도에 답사를 왔을때는 주위가 모두 논 밭이었는데, 그 새 전답(田畓)은 간 곳 없고 찻집이며, 기념품점, 식당 등이 즐비합니다. 우측으로는 ‘전통문화체험관’을 짓고 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육여사님 생가 주위로는 전에 없던 수 만평의 연밭이 조성되어 가히 “연꽃(蓮花)마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 새 말끔히 새로 복원단장 되어서 몰라 볼 정도다. 솟을 삼문을 들어서니 입구 사랑채에는 육여사님의 대형 초상화(肖像畵)가 모셔져 있어 간단히 예를 올리고 우측으로 돌아드니, 연당(蓮塘)에는 연꽃은 지고 잎만 무성하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안채로 나아가니 여사님의 학창시절 사진과 본가에서 출가(결혼)전에 사진들을 많이도 전시해 놓았다. 복원하는 과정에서 옛 모습보다는 더 웅장하게 지어진 느낌이 든다.
장독대 앞에는 자그마한 석빙고도 보이고, 뒷 뜰에는 우물도 2개나 있다. 그 뒤로 경사진 언덕위로 후원도 넓어서 잔디밭을 잘 조성해 놓았다. 제일 높은 곳에 올라 전체를 조망해보니, 주산에 거문성(土星:함지박 모양)이 보이고 그 옆으로 금성(金星:부봉으로 노적봉이라고도 함)이 참으로 아름답게 솟아있다. 연하여 본신 청룡(靑龍)이 좌에서 우로 휘감아 내려오다가 집앞 부근에서는 아름다운 아미산(蛾眉山:눈썹산:부봉:案山) 모양의 봉우리가 적당한 거리에서 감싸주고 있으니 보기드문 명당이라 하겠습니다.
장서(葬書)에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했는데, 어찌 우연이 겠습니까? 안내문에 1600년대부터 삼정승(김정승, 송정승, 민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여사님의 아버지 종관(鍾寬)씨가 1918년에 매입하여 1925년에 육영수 여사님(1925~1974)이 태어나 1950년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다 한다.
흔히 교동집(校洞宅)이라 불리워 졌으며 1969년 이후 퇴락하여 방치되어 오다가 2002년 ‘충북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어 2004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10년 5월에 완료하여 모두 13동의 건물이 있다. 생시(生時)에는 26년을 거주했던 곳에 사후(死後)에는 영원한 주인(主人)으로 살고 계심니다 그려!
2~3분을 걸어서 “정지용(鄭芝溶)생가”에 도착하니 소담한 초갓집이 윗채와 아랫채가 정겨웁게 마주보고 서 있다. 몸채(윗채)는 정면5칸에 측면3칸으로 부엌과 방2개며 부엌에는 무쇠솥 2개와 키, 싸리채반, 정사각밥상, 8각밥상, 대나무조리, 채, 박바가지 등이 보이고 아랫채는 창고 헛간으로 사용했던 듯 짚덕석, 탈곡기, 지개, 써레, 짚소쿠리 등이 전시돼 있다.
전깃불도 없던 그 시절에 호롱불 아래서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밤늦도록 공부하던 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려! 싸립문 밖으로 나오니 옛 우물이 보이고 그 앞으로 꽤나 큰 “물레방아”가 자동으로 시렁 시렁 돌고 있슴니다.
‘실개천’을 건너려고 보니 바닥 안내문에 “청석교 상판(舊구 황국신민서사비)”이 길게 덮여져 있는데, 이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 옥천 죽향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황국신민서사비”라고 돼 있다. 광복후에는 글자를 지우고 “통일탑”으로 사용되다가 1994년 이 곳에 옮겨 놓았다. 밟아야 건널 수 있으니 ‘일제치욕’을 씻는 방법도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슴니다.
문학관으로 가는 중간 마당에는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문학관 안으로 들어서니 검정두루마기를 입고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 선생의 모습이 참으로 인자하고 단아하게 느껴진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선생의 옆자리에 앉아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한바퀴 둘러봅니다.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옥천읍 하계리에서 부친 정태국과 모친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 [풍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으며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납북되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시집(詩集)으로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이 있고, 시문집으로는 문학독본, 산문이 있다. 120여 편의 많지 않은 작품들이 있으며 절제된 감정과 사물에 대한 정확묘사 그리고 섬세한 언어 감각으로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큰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전시물에는 그의 ‘지용 문학상 수상작’과 작품속의 내용들을 ‘만화 케릭트’로 그려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무엇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향수”를 잠시 옮겨 봅니다.
향 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하 생략)
육여사님의 생가와는 지척에 있으며 두 분의 환경은 많은 차이가 있어 여사님은 관계(官界)의 정상에, 선생은 문학의 정상에, 시차(時差)는 23년차를 두고 출생하여 49세와 48세를 사시다 타계(他界) 하셨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하늘의 뜻이 너무나 큼니다 그려!
(지용문학상 수상작) (만화 케릭트)
동쪽의 ‘실개천’은 오늘날 하천제방을 새로 쌓아 옛 향수는 사라지고 ‘넓은 벌’은 식당이나 기념품점, 찻집, 양옥집들로 가득하여 옛 이야기는 들을 수 없는데... ‘짚 이엉’으로 덮여진 담장위로 햐얗게 핀 박꽃이 함박웃음을 짓슴니다.
단기 4352년(서기 2019년) 8월 25일
한밭(大田)시 ‘장태산 자연휴양림’ 및 옥천
‘육영수 여사 생가’와 ‘정지용 선생 생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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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그간 강녕하신지요?
차일피일 바쁘다는 핑계로 산행후기가 많이도 늦었습니다.
당일 산행에 동참 하셨던 모든님들과 진행에 수고하신 모든 임원님들께도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림니다.
벌써 9월 초 하루이네요!
졸문의 후기를 감상하시고 많은 질정(叱正)을 바라오며 님들 항상 강녕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황까페지기님과 김해진 선생님의 작품사진을 많이 활용하였슴에 감사를 드림니다.
항상 수고가 많습니다.
바뿐중에도 추억이 다시 생각 나도록 후기를 보면서 감사 함을 전 합니다.
황까페지기님 잘 계시는지요?
늘 함께할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 삶의 한 모습을 수놓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장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오며,
항상 강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