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조선인들의 어머니. 서서평, 엘리자벳 조안나 셰핑
엘리자벳 조안나 셰핑(서서평)은 1880년 9월 26일 독일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안나 쉐핑은 3살 배기 딸을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 조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이민해 버렸습니다. 셰핑의 현재와 미래는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그나마도 셰핑은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셰핑은 태어나면서부터 버림과 외로움을 몸소 겪으면서 자랐습니다.
그의 나이 9살 셰핑은 혈혈단신으로 생모를 찾아 미국 길에 올랐습니다. 어머니의 주소가 적힌 종이쪽지 한 장 손에 들고 그의 어머니를 찾아 미국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1889년 어머니를 재회한 후 독일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면서 가톨릭 재단의 성 마가병원 간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901년 뉴욕에 있는 시립병원에서 간호사 실습을 하면서 동료에 이끌려 장로교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로마 가톨릭에서 장로교로 개종을 하게 됩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는 셰핑과의 종교적 갈등 문제를 빚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의절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의절을 당한 셰핑은 성경 교사 훈련 학교에 입학하여 8년이 지난 그의 나이 31세 때 겨우 졸업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두 번에 걸친 버림을 당한 셰핑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그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조선은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핑은 조선 선교를 지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음에 내몰리고 있다는 선교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셰핑은 선교사 서약에서 조선인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습니다.
1912년 2월 20일 32살의 셰핑은 미국 남장로교회 조선 의료선교사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선으로 가는 코리아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해 3월 19일 부산항에 도착했고, 그의 작은 예수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광주에 와서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었습니다. 그녀는 원래 성격이 조급했기 때문에 매사에 서서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서(徐)씨로 하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徐) 자로 두 번째 자는 무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 자를 붙여 서서평(徐徐平)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의 본 이름인 셰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습니다.
서서평은 서양 선교사라기보다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고무신의 한복을 즐겨 입고 된장국을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를 입고 맞는 신발이 없어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된장국은 그 독특한 냄새 때문에 서양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음식이었지만 서평은 그것을 먹음으로써 더욱 한국 사람으로 동화되기를 기꺼이 자처했습니다. 조선 사람과 차이가 있는 선교사가 아니라 온전한 조선 사람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평소 입는 옷과 신발을 신고 조선말을 하며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 서양 처녀 서평은 광주 사람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결혼도 거절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서서평의 첫 사역지는 광주 제중원 군산의 구암 예수병원 그리고 세브란스 등 새 병원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간호원을 총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실제 간호사로 일하는 와중에도 간호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서평은 일에 대한 적응력이 빨랐고 조직력에도 달란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유의 통찰력과 저돌적인 열정으로 조선에서의 새로운 지경을 개척했습니다. 당시 총독부가 2년 안으로 일본어로 모든 교육을 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서평은 일본어 공부를 해야만 했고 중국어도 공부해 한글과 한자가 병기된 신약 성경을 읽었습니다.
서평이 그때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시편 31절 24절을 꼽았습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노라복 부인이 하루는 서평과 인터뷰하면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서평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조선 여성들 가운데서 미래 지도자들을 키우는 일입니다.” 부모의 반대로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여인들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 없는 여인들 결혼은 했으나 아이가 없어 소박당한 여인들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 불우하고 기회를 놓친 다양한 계층의 여인들을 상대로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만주 윤락가에 팔려갈 19세 조선 소녀를 자신의 사비로 구출하고 윤락 여성들의 빚을 갚아주며 그들의 사회적 구조 혁신을 위해 2일 학교 현재의 한일장신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셰핑 선교사는 1년에 최소한 100여 일을 순회 전도 길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찾아 그들의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조랑말을 타거나 아니면 봇짐을 머리에 이고 100여리의 길을 예사롭지 않게 걸었으며 한 번 순회 진로 여행을 나서면 말을 타고 한 달 이상 270km 넘는 거리를 이동했습니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야 했습니다.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전도 여행을 다녀온 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이 넘는 조선 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렸습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 주는 것이 제게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서평에게 있어서 간호 사역, 사회 사역만큼이나 비중을 차지했던 사역이 전도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영문 전도지를 번역했고 지역 전도에도 혼신을 다했습니다. 전도대를 편성하여 전라도 일대를 다녔으며 추자도에도 전도했습니다.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각 교회를 방문해 부인 조력회를 만들고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조랑말을 타거나 조랑말이 이끄는 달구지를 타고 멀리 나가 전도했습니다.
주영웅 목사는 서평을 여걸 선교사로 부릅니다. 그것은 서평이 키가 큰 데다 당시 호랑이도 있고 강도가 난무하는 화순 너릿재를 조롱마를 타고 넘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위험이 뒤따랐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고개를 넘다가 조랑말이 도망친 일도 있었습니다. 호랑이나 큰 야생 짐승 소리를 듣고 미리 놀라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바람마저 강하게 불어 진흙탕 계곡으로 미끄러지기까지 했습니다. 서평은 믿지 않는 지역을 찾아가 직접 가가호호 방문하여 복음의 씨앗을 멀리 그리고 넓게 심었습니다. 이른바 축호 전도의 열심을 다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 많은 어려움을 기쁨으로 견뎌냈습니다. 순회 전도를 통해 서평은 가을과 겨울 농한기에 시골 교회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며 부인회를 조직했습니다.
선교사들과 함께 전도한 이교환 목사는 서평을 가리켜 1000대 일이라 하였습니다. 천 명분의 일을 할 만큼 열정과 근면함으로 일했다는 뜻입니다.
서평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돕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주로 여집사 박강산이 조사 보고를 하면 서평이 자동차의 구호품을 실어주고 박 집사가 처지와 형편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의복과 양식이 대부분이지만 당시에 귀한 감귤도 내놓았습니다. 박 집사는 내신 먹고 싶었지만 서평 자신도 먹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내놓는 것이라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1930년 마지막 선교 보고서를 썼습니다. 서평은 미국에서 많은 여성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여성들이 담배에 사용하는 돈만으로도 영적으로 죽어가는 많은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한센 환자들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실망하지 않으며 나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모든 피로를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궁핍한 조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서평은 어느 날 밤 2일 학교 교사인 이복림을 불렀습니다. 함께 외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복림은 좋은 곳에 가는 줄 알고 구두에 날씬한 몸차림을 하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서평은 광주천 부동교 및 어느 움막 속으로 불쑥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백발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서평은 아무 거리낌 없이 추운 겨울밤 다리 아래서 거적을 덮고 잠을 청하던 그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최 씨 아저씨 아직 안 죽고 살았소! 이불을 가져왔으니 덮고 주무시오. 서평은 이불과 요를 나눠주고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복림은 그때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추운 겨울 한밤중 빈민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덮고 쓰던 이불과 요를 나눠준 서평 찾아오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다 보니 정작 자신의 옷은 단 두 벌 뿐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한센 환자 두 사람이 떨고 있는 곳을 본 서평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한 장밖에 없는 담요를 둘로 갈라서 두 환자에게 각각 한 조각씩 덮어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서평이 죽을 때 양림천 움막에서는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그분이 살았어야 하는데.”
서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의 종교에서 구제를 제해버린다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제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제 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찍혀 들고 목이 터질 만큼 예수님을 부르짖고 신자라 자처한다 할지라도 구제가 없다면 그것은 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1929년 조선 간호부협회를 세계 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갓 1살 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서서평을 내쳤습니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그냥 데려다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돕고 소박이라도 맞으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낮은 곳을 향한 끊임없는 서평의 관심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사랑을 나누지 못한 상처가 크나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과부의 심정은 과부만이 알 수 있듯이 고아의 상처와 눈물을 그 자신이 충분히 겪었기에 진심으로 이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평은 고아뿐 아니라 행려병자와 같이 버려진 이들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는 양림천 거지들을 목욕탕에 데려다 묵은 때를 벗겨주었고 옷과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길에서 한센환자를 만나면 집으로 데려와 목욕시키고 밥을 먹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조차 한센환자를 보면 돌을 던지거나 피해 다니던 시절에 오히려 그들을 집에 들여 밥을 먹이고 새 옷을 입혔습니다. 동료 선교사들에게는 식모뿐 아니라 유모를 고용하거나 자녀 교육비 심지어 애완견의 사육비까지 지급되었습니다. 선교사의 하루 식대가 3원인데 반해 서평의 하루 식대는 언제나 10전이었습니다. 다른 선교사의 생활비 30분의 1로 하루하루 자신의 목숨만 근근히 버텨온 셈입니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 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완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습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 명에 달했습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에 다 들었습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최초의 광주 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습니다.
서평은 공창 폐지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돈을 들여 윤락 여성을 빼내고 공부시키는 데도 힘을 썼습니다. 만주 홍등가로 팔려갈 19살 설 모 양을 구해 하와이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 결혼까지 시켰고, 눈이 사시였던 윤영애의 몸값을 지불하고 이일학교에서 일도 시키고 공부도 가르쳤습니다. 서평은 돈이 없어 첩으로 팔려갈 처지의 여성을 경찰을 통해 구했고 다른 경우는 몸값 52원을 지불하고 빼냈습니다. 서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 그들을 볼 때마다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 등 윤락 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했고 윤락 여성들이 새 삶을 살기 원하면 대신 그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나아가 서평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무게를 귀히 여기며 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서서평의 열정은 수많은 윤락 여성을 나락으로부터 구했을 뿐 아니라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13명을 자신의 딸로 삼았으며 그들을 좋은 크리스천 가정에 결혼시켰습니다. 서평은 고아의 어머니였습니다. 자신의 월급을 아껴 조선 여성들을 가르치는 데 썼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들을 거두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유아들은 각별히 살피고 거리나 다리 밑에 기거하는 거지들을 어머니처럼 보살펴서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었습니다. 이 땅에 와서 고아원을 만들고 고아들을 돌본 선교사들은 많았지만 서평처럼 고아들과 한 이불을 덮고 삶을 나눈 선교사는 흔치 않았습니다. 고아들을 양육하고 결혼까지 시켜준 자가 38명이나 되었습니다. 서평은 한편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무슨 일이나 참지 못하고 보고 느낀 대로 그 자리에서 쏟아내었고 상대가 누구든 위신이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못한다고 학생들을 쥐여 박기도 하고, 2년이나 먼저 온 선임 선교사가 이일 학교 2층 마루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화가 났던 서 교장은 구두를 신고 들어오는 선교사를 계단 밑으로 밀어 떨어뜨린 일도 있었습니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교실에 구둣발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서평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는 미국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서평도 인간이기에 일을 저질러 놓고 난 뒤 후회도 하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서평이 천국 문에서 베드로를 만난 꿈 이야기는 성급한 성격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천국 문에서 몸이 건장하고 덥수룩한 수문장이 근엄하게 서평을 가로막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당신은 안 됩니다.” “나는 천국에 들어갈 믿음을 가졌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도대체 당신이 누구기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겁니까?” “나는 베드로요,”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것 아닙니까?” “잘못 보긴 왜 잘못 봐 당신은 조선에서 온 서서평이 아니요.” “맞습니다. 하지만 왜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그 성급한 성질을 고치고 오지 않으면 못 들어갑니다.” 그리고 수문장 베드로와 열두 진주로 찬란히 단장된 천국 문만 잠시 돌아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자탄의 고백을 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오. 라고 했는데 성질이 사나운 감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하나님이 병으로 고통을 주시는 것도 회개시켜 천국에 보내기 위한 기회요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주님! 저는 성질이 급해 많은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나만 잘 믿는 줄 알고 자만심이 강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함부로 정죄했습니다. 간호사로 있으면서 인내심이 없다고 환자들을 구박하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긍휼를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지장이 없도록 주님의 피 공로로 이 죄인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소서.”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던 서평은 스스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급한 성격을 다스리고자 이름을 천천히라는 뜻에서 서 씨로 정했습니다.
또한 그가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에 하는 것에 대해 여러 주장이 있지만 그의 성급한 성격도 한몫했습니다. 성격이 남성적인 데다 성급하기까지 한 탓에 결혼 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결혼해서 남편을 섬기느라 자신의 고약한 성질을 억누르는 데 신경을 쓰며 살기보다 하나님께서 그런 성격을 주신 것으로 믿고 오직 주님의 일에 전심전력하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서평은 한 감에 50점짜리 치마를 입고도 기뻐하는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절제가 몸에 밴 그는 2일 학교 학생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했습니다. 학교 안에서 무명 배나 세양포 옷으로 제안했고 명주 옷 같은 값비싼 일복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입고 올 경우 집에 돌려보내 갈아입고 오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이 필요 이상으로 깨끗하고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면 그런 옷은 교회에 갈 때나 입으라고 했습니다. 젊어서 멋 부리고 싶어 몸살을 앓던 학생들은 옷 입는 것까지 간섭한다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교실에서 크림 냄새라도 풍기게 되면 서 교장은 코를 씩씩거리며 범인을 잡아냈습니다. 머리에 기름기라도 번질거리는 학생이 있으면 당장 우물가에 가서 머리를 감도록 했습니다. 생일 기념행사, 환영사 송별식 등 낭비성 있는 교내 행사는 일절 금했습니다. 서평은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읽기와 기도하는 시간 이외에 일체 한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안일이나 쾌락은 말할 것도 없고 오락과 취미에 속하는 소풍 등산 낚시 영화 감상 등에도 한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 일했던 상당수의 선교사들이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서평 역시 1912년 한국에 와서 1934년 선교 사역을 마칠 때까지 스푸르라는 만성 풍토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1915년부터 앓기 시작한 스푸르로 20년 가까이 살았다는 게 어떻게 보면 기적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서평은 유능한 간호사였지만 성경학교 선생 등 다중 역할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 피로는 가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이 허약했을 때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해 먹을 것을 내놓고 추운 겨울이면 자신의 허술한 집보다는 광주천 다리 아래서 추워 떨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니 건강은 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병약한 상태에서도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늘 나는 많이 아프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약한 몸을 지켜주시리라 믿는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선교 보고를 할 때마다 2일 학교 부인조력회 주일학교 조선 간호부회 등 여러 사역을 잘 수행해야 하는데 쇠약한 몸 때문에 사역자들과 자주 만나지 못하기에 일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사역자들이 게으르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임종하기 한 해 전에는 병약한 몸으로 모슬포에서 생애 마지막 2주간의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때 동행했던 부인이 극구 말렸지만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 하자면 하나님의 사업은 언제 하겠는가! 약속한 일이니 기어코 가야 한다.”며 병상을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당시 서평의 간호를 맡았던 변 마지는 “위독하다 할 정도로 병세가 어려웠는데도 죽었으면 죽었지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가지 않을 수 없다며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슬포에서 2주간 사경회가 끝나자 서평은 처음 올 때보다 훨씬 회복되었으니 이제 나귀 타고 이 섬을 돌아보고 싶어 했습니다. 서평의 불타는 선교 열정에 감동한 서로득 부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찢겨지고 조각난 날개를 가지고서도 더 큰 비상을 계획하고 있는 정열이 얼마나 아름다운 봉사의 비전이며 승리인가 용맹스럽고 순수한 영웅적인 자질에 순교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서평은 임종 전 약 4개월 동안 병과 사투를 벌였습니다. 폐렴 증세도 나아져 회복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병으로 고생하자 의사들은 혹시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술을 받으면 좋겠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수술을 했습니다. 그러나 수술 후 너무 고통스러워했고, 일주일이 조금 지난 후 소천하고 말았습니다. 암인 줄 알고 수술했건만 죽는 순간까지 병의 원인을 알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주치의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호흡만 거두면 장기를 해부하여 연구 자료로 삼으세요.” 죽은 후에 그 원인을 규명해 다시는 자기와 같은 환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시신을 기증한 것입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시신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제 아무리 의학 연구라 해도 시신을 기증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서평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소천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판단됩니다. 하나는 오랫동안 알아온 스프루이고 다른 하나는 영양실조입니다. 그녀는 비록 가난하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었습니다. 스스로 가난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순교보다 어려운 길을 자청했는지도 모릅니다. 순교자란 죽는 순간 잠시 고통이 뒤따르지만 서평의 삶에는 길고 긴 가난과 굶주림 삶에 대한 유혹마저 이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130일간의 투병이 끝나고 죽음의 시간이 다가올 무렵 사나 죽으나 주님 위한 몸이 오니 죽더라도 오직 주님만 위해 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도 그동안 마무리 짓지 못한 사역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내가 품고 있는 포부는 하늘만큼이나 원대한데 이 병 때문에 천직으로 앓았던 병원일도 그만두어야 했고 2일 학교 경영도 몇 분의 1도 못하고 있다. 사명을 띠고 온 선교도 제대로 못하고 3년만 시간을 더 주신다면 하나님의 사업을 더하고 끝맺음을 찍지 못한 조선간호부회 국제간호협의회 가입도 마무리할 수 있을 터인데 오! 하나님 아픔을 덜어주시고 3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서평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죄 씻음 받을 기회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1만 분의 1이라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간호사로서 남의 아픔에 무감각했던 잘못을 깨닫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한국 백성이 베풀어준 사랑에 감사합니다. 몸을 의학 연구 자료로 제공할 수 있는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53세의 나이로 광주에서 만성 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서평은 선교비를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고 자신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사역하다 보니 결국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장 동전 칠전 강냉이 가루 두 호 뿐이었는데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됐고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선교사였습니다. 또 1930년대 미국 장로교에는 전 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했습니다. 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 맡에 걸려 있던 좌우명을 보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