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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후기 스크랩 결혼에 대하여...연극 新살아보고 결혼하자
반잔 추천 0 조회 76 07.06.16 16: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결혼은 새장과 같은 것이다. 밖에 있는 새들은 쓸데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속에 있는 새들은 쓸데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애쓴다."

 

                                                                                               - M.E. 몽테뉴 -

 


"영혼의 해후나 순수한 공감의 수간을 서로 가질 수 있는 사람끼리는 결코 결혼할 수 없고, 결혼의 전제는 사랑이 아니다."

 

                                                                                  - L. 린저/생의 한가운데 -

 


"결혼이란 모든 자랑스러운 혼과 독립적인 모든 것의 정신적 죽음이다."

 

                                                                            - F.M. 도스토예프스키/惡靈 -

 


"결혼이란 상대를 이해하는 극한점이다."

                                                                                                 - 팔만대장경 -

 

 

이처럼 결혼에 대체로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논의되는 일이 많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생존본능이라는 유전적인 문제는 이미 사람들이 접어 둔 지 오래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만일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둘 중 하나는 없어도 된다"고 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인간관계만큼 복잡한 것도 없다는 뜻이리라. 그중 결혼은 인간 관계의 가장 정점에 있으니 오죽하랴.

 

이러한 일련의 부정적인 시각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최근의 추세가 결국은 '사랑하면 결혼'에서 '살아보고 결혼'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계약결혼'이란 말이 흔한 시대고, '동거'는 이제 부끄러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공연계에서 가장 많은 소재꺼리로 등장하는 작품중 하나인 세익스피어의 명작 역시 결혼이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 많다.

 

"新살아보고 결혼하자" 역시 이러한 화두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졌다.

 

사람들이 결혼은 왜 하는 것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식은 적어도 '결혼의 전제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생의한가운데>>의 저자 L. 린저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시시콜콜한 공식인 듯 싶다.

 

그러나 사실 불완전한 남녀가 서로 만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의 인간이 되어 서로의 불완전성을 보완해 가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가는 길 혹은 그 과정이 '결혼'이라 하고 싶다.

 

그런데, 대부분의 결혼한 기혼남녀들은 "결혼이란 안해도 후회, 해도 후회"라는 말을 곧잘 쏟아낸다. 청첩장을 돌릴 즈음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해 놓고선 결혼 후에는 서로에게 사랑은 식었고, 실망만 가득하다고들 한다.

 

왜 그럴까? 그렇다면 살아보고 결혼하는 것이 나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新살아보고 결혼하자"는 시원스런 해답을 제시하진 못했다. 신세대 요즈음 결혼 풍속도 vs 구세대 결혼 풍속도의 구도가 이 연극에서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장면과 연이은 장면은 가정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평범한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배우자와 외도를 한다. 나중에 사돈으로 맺어질, 아니 이미 사실상 사돈관계로 맺어진 상태임에도 이를 알지 못한 채......

 

  

이들 사이의 대화가 걸작이다. 극중 동거녀인 세리의 父 강대풍과 극중 동거남 김종태의 母 고순자는 그간의 불륜 관계를 끊자며 옥신각신한다. 성적 매력을 더이상 느끼지 못하고서 가정으로 돌아가려는 강대풍과 가정에서의 속박과 재미없음을 견디지 못해 밖에서 지속적인 육체적 관계로 풀려는 고순자.

 

그들의 갈등이 불완전하게 매듭지을 무렵 신앙 생활에만 의지한 세리의 母 주은혜와 세속적인 그렇고 그런 삶을 유지해 왔던, 그러면서도 요조숙녀가 그리웠던 종태의 父 김대문은 우연히 만나 자신들의 배우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에 빠져 든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소외된 자란 이름으로 잘 포장된 것일뿐 전자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후자가 더 순수하게 느껴지는 건 '타락'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전자보다 '순수'란 이름으로 포장된 후자가 우리의 윤리적 이성과 감성을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더 익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덜 익숙함과 더 익숙함이 만들어내는 착각인지도 모를 일이다.

 

둘 모두 소외라는 관점에서 보면 차이가 없으며, 다만, 표현이 좀 더 순수하였느냐 아니면 솔직하였느냐의 차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결혼을 하였음에도 또다른 이성을 갈구하는 이유에 대해 동물학적 유전학적 본능 외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그건 에릭 프롬이 말한 "인간 소외"다. 함께 하고 있음에도 주변 관계로부터 괴리된 채로 스스로 고독과 외로움에 휘말려진 것은 또 무엇때문이란 말인가?

 

어쩌면 지나친 물질과 개인을 추구한 이기적 모습이 빚어낸 사회학적 병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렇지만 누구도 그것이 병임을 알지 못한 채 심하게 앓고 있는......

 

극중 종태와 세리는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함께 동거한다. 세리는 멋진 결혼을 꿈꾸며 매일 같이 결혼식을 종태에게 졸라되지만, 종태는 결혼이 왜 필요한 지, 현재의 상태가 왜 지속되면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왜, 도대체 왜? 여자는 결혼식을 원하고 남자는 원하지 않는걸까?

 

여자에게는 결혼 전 동거란 것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커다란 제약이 되는지, 여성 잡지 속에 등장하는 화려한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여성에게는 얼마나 근사하게 다가서 있는 것인지, 그 속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기를 바라는, 신데렐라가 되기를 꿈꾸는 것인지 남자는 알지 못한다.

 

반면 남자라는 동물은, 결혼은 그저 성취 내지 정복의 완성이며, 그 다음의 또다른 정복 대상 혹은 이상을 다시금 추구하게 되는 것임을, 가정이란 울타리를 그저 구속하고 속박하는 원천으로 인식할 수도 있음을, 이성적 감성적 인식 능력보다는 동물적 유전적 본능이 더 지배할 수도 있음을, 여성은 알지 못한다.

 

물론 극중 종태의 경우 이러한 측면보다는 가정을 꾸려갈 자신과 능력 없음과 현재의 상태로 동물적 본능은 충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부모로부터도 부부관계 즉 결혼이란 것이 그리 즐거운 것만이 아님을 안다는 이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랑하면 결혼'이란 공식은 혼인제도가 생겨난 생물학적, 사회학적 배경을 살펴 본다면 부인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필요가 만든 결합이라 해야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  

 

얼마전 만난 신혼인 후배 여성의 고민이 남성과 여성의 결혼에 대한 입장을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혼한 후 남성 배우자에게 매일 실망하고 있다고, 결혼 전 그렇게 잘 해 주던 남편이 전과는 달리 결혼 전 약속은 깡그리 잊은 채 자신에게 소홀히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살아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도로 물리자고 할 수도 없고 고민이란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 결혼 전 남성이 해 주던 정도의 공주 대접을 결혼기간 내내 받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남성의 경우 결혼 전은 그녀를 얻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에(그래서 사랑은 쟁취다라고 하던가?) 모든 시간과 비용을 다 들여 이른바 "올인"한다. 그러나 그것이 쟁취(결혼)되면 남성은 가정이 생기고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이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결혼 전 소홀했던 직장 일에 신경쓰며, 동기들과의 승진에 뒤쳐지지 않으려 먹기 싫은 술자리도 잦게 되고, 그렇게 사회에 몰입하다 보면 가정일에, 아내에 소홀해 진다. 이 경우 결혼 전의 행동과 다른 남편에게 실망하는 아내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이것이 참고 참다 폭발하게 되면 남편과 아내는 원만한 결혼생 활에 금을 긋고 많은 부부들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 한다. 

 

그래서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고 결혼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내려진 결론, 해보고 후회하자고?

 

나는 이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어떤 이유로 생겨났건 간에 짧게는 20년, 길게는 30년이상 서로 다른 환경과 배경에서 자란 전혀 다른 역사적 기억과 습관을 지닌 남녀가 만나 하나의 역사와 습관를 공유하는 것이므로 부딪치고, 깨지고 해서 함께 나누게 되는 또다른 역사적 산물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살아온 그 시간만큼 시간적인 조율과 조정 그리고 양보가 필요한 일. 종족 보전이라는 생물체의 본능.

 

한마디로 말해서 부딪치고 실망하고 충돌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친밀하기에 너무 쉽게 대했다가 실망하고 항의하고 투쟁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한 사람의 삶, 한 가정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을 눈 앞에 두지 않고서, 아직 미완성인  그 투쟁 혹은 충돌의 역사 속에 던져져 있으면서, 성급하게 결혼이란 것을 정의내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보고 결혼하자는 어떤가? 앞에서 내가 내린 정의에 대입해 본다면, 결혼하지 않은 동거는 언제나 헤어질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마지막 퇴로를 열어 둔 이상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기에 경영학적으로 보면 리스크 관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눈 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서야 결혼이 완성된다는 정의에 비추어 본다면 퇴로를 쉽게 열어 둔 것은 처음부터 그 완성에 이르지 않겠다는 나약한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관계는 죽음으로서 완성된다." 

 

 

 

살아보고 결혼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싶지만, 살아보고 결혼한다면 대부분 결혼에 이르지 못할 것 같다.(요즈음의 20대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 겠지만...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이고 마는가?) 상대의 단점과 원하는 것을 쟁취한 후의 그 익숙해짐 뒤로 '사랑'이란 두 글자가 숨겨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그 결혼 뒤로 사랑이란 글자를 숨긴 채 그 다음의 목표에 매진하는 반면, 여자는 그 결혼 앞으로 사랑을 내세우며 결혼 뒤 달라졌다고 섭섭해 하는 생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늘 자각하는 것도 결혼 생활을 행복으로 이끄는 좋은 방식중 하나일 것이다.

 

중견 배우부터 신세대 배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능숙한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였다. 정말 리얼한 젊은 남녀 동거인들의 연기력. 5000회가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종태의 母 고순자의 현대적 젊은이의 연애 관점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찌들고 힘들었던, 그래서 실망스러웠던 결혼 생활 경력이 아들을 결혼하지 못하게 붙들어 맨 것일까?

또 종교에 의지하여 그저그런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온 세라의 母 주은혜의 두려움은 어디서 온 것인가?

 

아빠들의 귀가 본능-집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연극 "新살아보고 결혼하자"는 이러저러한 숱한 의문들을 던지며 결혼은 무엇인지, 배우자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내게서 이끌어 내었다. 

 

막과 막 사이에 거울 같은 조그마한 소품들과 침대 분위기, 그리고 문짝과 블라인드의 위치 같은 것들로서도 수시로 바뀌는 무대들의 다양함이 좋았다. 그 좁은 무대에서도 몇 가지 소품만 가지고서 여러 상황의 집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니......

 

극의 전개 흐름을 따라 바뀌는 의상과 분위기가 제법 관객들로 하여금 보는 재미를 느끼게 했다. 여기에다 조금은 젊다 싶은 종태역의 배우 최현욱씨와 세리역의 배우 이미아씨는 마치 연인 내지 부부인 듯 착각을 느끼게 할 만큼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펼쳤다. 특히 두 배우들의 상황에 맞게 감정을 실은 적절한 대사 소화력과 애교와 분노를 부부의 그것, 연인의 그것처럼 목소리 톤과 스피드, 강약 등으로 조절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물론 다소 밝히는 듯하나 느끼함과 남편을 괄시하는 연기가 일품인 고순자 역의 배우 정이주씨와, 신앙 생활에 의지하면서도 적절히 무너질 줄 아는 주은혜역의 배우 강영하씨의 연기, 아빠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물씬 풍기는 연기에 능숙한 강대풍 역의 배우 허기호씨의 연기에 찬사와 축복을 보낸다.

 

 

 

그리고 각색과 연출에다 극중 김대문 역을 맡아 소화해 내는 박병모 감독께 찬사와 감사를 보낸다. 어수룩한 극중 배역 연기도 수준급인데, 그 많은 대사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표정 연기는 압권이었다. 그제 뮤지컬 "스트리트 가이즈"를 관람후 레스토랑 '원탁의 기사'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때의 이미지와 무대 위의 그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트집 잡을 구석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 연극의 흠이라면 흠이다. 그만큼 준비와 역량 있는 출연진과 스텝이 어우러져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럴 때 관객은 박수와 찬사란 이름으로 경의를 표하며, 다시금 까망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된다.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자신의 삶에 있어 자신은 무엇인지, 삶의 의의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배우는 최고의 수련 과정인지도 모른다. 숙명처럼 겪어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해 가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인지도 모른다.

 

극단 예우의 다음 작품을 기다림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결혼이란, 연애가 쾌락만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서, 인생을 자기의 대상으로 한다."

 

                                                               - H.발자크/두 사람의 젊은 아내의 手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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