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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1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진짜가 나타났다!
본문 : 누가복음 15장 28절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새번역>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가 회자될 때 마다 꼭 떠오르는 찬송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찬송가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입니다. 이 찬송가의 작사 작곡은 유명한 복음찬송의 작곡가인 윌리엄 제임스 커크 패트릭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 찬송가를 만들게 되었을까요? 이 찬송가가 만들어진 유래에 대해서 잠시 여러분들과 나눌까 합니다.
커크 패트릭이 펜실베니아 로우린스빌에서 있었던 캠프집회에서 찬송을 인도하던 1892년에 이 곡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로우린스빌 캠프집회에는 매일 밤, 우렁차고 윤기 있는 목소리로 독창을 하는 청년이 있어, 그가 부르는 찬송으로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부르는 당사자인 이 청년 가수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는 직업적인 음악기능인으로 와서 찬송만 불렀던 것입니다. 커크 패트릭은 이 청년의 재능과 목소리가 아까웠고, 저 목소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도 많은 성도들의 심금을 울리는데, 만일 그가 크리스천으로서 찬송을 부른다면 얼마나 더 복된 찬송이 나오겠는가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일이 마음에 걸린 커크 패트릭은 그에게 열심히 전도했지만 청년가수의 태도는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커크 패트릭은 이 일이 새삼스레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를 하면서 캠프집회기간 동안 기도로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커크 패트릭이 기도하는 중에 그의 심중을 찌르며 지나가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영혼들이 방황하다가 주 앞에 회개하고 오는 환상과 함께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였습니다. 커크 패트릭은 즉시 종이에다 다음과 같이 적어 나갔습니다. “Coming home, coming home, Nevermore to roam; Open wide Thine arms of love, Lord, I'm coming home”(나 이제 집에 옵니다. 더 이상 방황치 않고. 주여, 당신의 사랑의 팔을 넓게 벌려 주옵소서). 그는 단숨에 5절까지 써서 곡을 붙인 다음에 그날 밤 청년가수에게 넘겨주어 특송을 하게 했습니다. 청년은 힘차게 이 찬송을 불렀고, 순간 청년은 집으로 돌아올 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청년은 5절을 채 부르지 못하고 주님 앞에 통곡하며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찬송은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며 주 앞으로 돌아오게 한 놀라운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시의 성경적 배경이 바로 오늘 저희가 함께 나눈 누가복음 15장 11~32절 ‘탕자의 비유’입니다.
물론 이 찬송가가 만들어진 유래도 너무 흥미롭지만 저는 이 찬송가의 주어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 더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 찬송가를 작사한 작사가인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을 떠나 있는 '나'이기도 하며, 이 순간 바로 우리인 '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고향을 멀리 떠난 후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고통에 시달리다 보니 떠오른 아버지,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바보같이 귀한 세월 허무하게 보내고 나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뉘우치며 자꾸만 떠오르는 아버지, 돌아갈 염치도 없어서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고달프고 외로울 때마다 위로의 사랑으로 떠오르는 아버지, 내 모든 환경을 변화시켜 주실 큰 힘과 소망을 가지셨기에 자꾸만 떠오르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드디어 깨달은 자녀가 발걸음을 돌려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찬송가는 그려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 이제 옵니다! 내가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그리고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 찬송가의 전제도, 탕자의 비유의 전제도, 분명한 듯 보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깨닫고 돌아오는 이들은 누구든지 받아주겠노라! 사랑하는 자녀가 돌아올 때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이렇게 미리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꼭 돌아와라!”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이 있으셨기에 떠나갔던 이들이 돌아올 곳이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게 되었는데,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누가복음 15장 20절, 공동번역>
분명히 이 아버지처럼! 돌아오기만 하면, 계속해서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우리를 보고 측은히 여겨, 멀리서 우리를 보자마자 우리에게 달려오셔서 우리의 목을 껴안고, 우리에게 입을 맞추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전제를 이 찬송가와 탕자의 비유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찬송가의 5절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 바랄 것이 무언가 우리 주 예수" 혹시 저처럼 5절을 고백하다보면 울컥하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구절을 부를 때면 가슴 벅차 오르는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날 위해 독생자 아들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제 마음 속에 벅차오르고, 그 사랑에 눈물이 벅차오르고, 왜 또 그런 아버지를 떠났을까 죄책감이 차오르고,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차오릅니다. 하지만 결국엔 죄책감과 두려움조차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울컥하게 됩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시면서 기다려 주시는지요? 도대체 왜요?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모든 동역자 여러분! 이 전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결정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찬송가에 나오는, 바로 이 결정이어야 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누가복음 15장 18절A, 새번역>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찬송가 273장 후렴A>
본인이 탕자, 즉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하시든, 아니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하나님께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시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생각을 하셨다면 당장 결정하셔야 합니다. 헬라어 "πορεύσομαι(poreusomai, 포레우소마이)"이 잊지 않으셨지요? 이 헬라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더욱 흥미롭게 사용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I will go", "그래! 가자!" 지금 당장 움직이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지 마십시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깨달았다고 눈물만 흘리고 있지 마십시오. 그 눈물을 닦아줄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정말 돌아가도 될까? 망설이지 마십시오. 망설임의 시간동안 하나님과 재회한 후에 누리게 될 귀한 세월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깨달았다면 당장 돌아오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누가복음 15장 20절부터 이어지는 둘째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으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 클라이막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15장은 멀리 떠났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전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소위 이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로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진짜 탕자가 누구인지 옮겨가는 듯 보입니다.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함께 있지 않았던 첫째 아들이 '히든 메인 캐릭터', 즉 숨겨진 진짜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첫째 아들 역시 돌아와야 함을 말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몸은 같이 있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둘째 아들보다 더 멀리 떠나있었던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진짜 탕자는 오히려 첫째 아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드디어 진짜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깊이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찬송가 273장의 고백이 비단 둘째 아들만의 고백이 아니라 첫째 아들의 고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둘째 아들의 고백으로 사용되기에 찬송가 가사가 당연하다고 느껴졌다면, 첫째 아들은 이제 진짜 저 가사 대로 고백해야 하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진짜 '탕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멀리 떠났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 둘째 아들은 이제 탕자의 삶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늘 함께 살고 있긴 했지만, 돌아온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기조차 싫어하는 첫째 아들은 조금도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엔딩이 다가올수록 누가 진짜 '탕자'일까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첫째 아들이야말로 진짜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탕자이든, 탕자의 형이든, 떠났다가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이든, 떠나진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첫째 아들이든,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뀌지 않습니다. 바로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도, 첫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31절, 새번역>
첫째 아들이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아버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위로합니다. 아버지 자신의 것이 모두 첫째 아들의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첫째 아들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에게 아버지가 또 재산을 나누어 주실까봐 조바심이 났던 것일까요? 그냥 꼴도 보기 싫었던 동생이 돌아온 것 자체가 싫어서였을까요? 하지만 속상한 첫째 아들에게도 역시 동일한 아버지의 사랑과 위로가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행동을 보이는 첫째를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첫째 아들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나마 살아서라도 돌아온 동생을 생각하면서 함께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위로의 마음을 담아 이 비유의 마지막 엔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무도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 15장 32절, 새번역>
'나의 아들'이 아니라 '너의 아우'라고 표현하시는 예수님의 섬세한 비유에 깊은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주었고, 받아 주었고, 또한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다음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진 않지만 이 표현을 통해 첫째 아들의 화난 마음이 누그러지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도 비로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진짜 함께하게 되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아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이 구절을 마지막으로 '탕자의 비유'는 마무리가 됩니다. 둘째 아들로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이 비유는 알려진 대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비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렇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물론이고,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돌아오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든,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든 모두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대상이 나와 당신, 그리고 모든 인류라는 것입니다. 깨달았든지, 깨닫지 못했든지, 결론은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당장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자녀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비유가 바로 ‘탕자의 비유’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언제나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마지막에 꼭 이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둘째 아들일까?'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 첫째 아들일까?' 그도 아니면 '둘째 아들이었지만 첫째 아들이 된 것일까?'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현재 어떤 아들이십니까? 오늘 이 시간 스스로에게 한 번 답을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아들인지, 둘째 아들인지, 둘째 아들이었다가 이제는 첫째 아들이 되었는지!
그리고 결론적으로 본문 묵상을 마무리하면서 깨닫게 되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확신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둘째 아들이든, 첫째 아들이든, 둘째아들이었다가 첫째아들이 되었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아들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돌아오길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내가 둘째 아들이기에 둘째 아들처럼 깨달았다면, 당장 돌아오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내가 첫째 아들이었구나! 깨달았다면, 당장 돌아오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내가 둘째 아들이었는데 다시 첫째 아들이 되었구나! 깨달았다면, 당장 돌아오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이사야 55장 6~7절, 새번역>
결단 찬양 - 찬송가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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