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이에 따라 기다려지는 대상이 다르고, 그 나이가 되어야 그 심정도 헤아릴 수 있나보다. 어려서는 생일부터 시작해서 명절이며 시장에 가신 엄마에 이르기까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담방거리면서 들뜬 마음으로 몹시 기다린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새 책과 학용품을 비롯해서 새로 만날 선생님과 또래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이성을 사귈 나이가 되면 삶의 길동무가 될 짝을 밤낮없이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까지 앓아가며 기다리기도 한다. 짝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면, 둘 사이에서 탐스럽게 열릴 자식을 기다린다. 신기롭기 그지없는 금지옥엽(金枝玉葉)을 낳으면, '쥐면 꺼질까 불면 날까'하는 심정으로 사랑을 한껏 쏟아 붓는다. 다 키운 뒤에는 자신의 짝을 찾을 때보다 더 진한 마음으로 자녀의 짝을 기다리게 되나보다.
아들이 제대하고 몇 주 지난 뒤, 주말에 여자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오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서로 사귄 기간은 아주 짧지만, 마음에 쏙 드는 친구란다. 무엇보다도 가문이 믿을 만하고, 마음씨 곱고, 똑똑하고, 절대로 반항하지 않으며, 애교가 철철 넘쳐서 부모님 세대에서 끔찍하게 좋아할 친구란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인물도 그만하면 마음에 꼭 드는 규수'라면서, 모자라는 점은 하나도 없는지 칭찬만 널어진다.
"요즘 젊은이는 자기들끼리 오래도록 사귄 뒤, 부모 앞에 내세워서 천생배필(天生配匹)이라고 불쑥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요. 우리 아들은 깊은 사이가 되기 전에 미리 오겠다고 하니 들어주지요? 그만큼 자신이 있는 모양이에요."라고 아내가 거든다. "무엇보다도 본인 마음에 쏙 들고 집안도 좋다고 하니, 아들이 원하는 대로 먼저 만나보시지요. 됨됨이는 천천히 살펴보기로 해요."라고 권유까지 한다.
내가 바라는 첫째 조건은 번듯한 명문 집안도·아리따운 얼굴도·똑똑한 머리도 아닌 튼튼한 사람이건만, 그것마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어미와 자식이 한 통속이 되어 부산떤다. 사실, 어떤 관계가 될지도 모르면서 자식에게 부담가게 이러쿵저러쿵 떠들 일도 아니다. 게다가 아들이 군대에 입대해서 제대할 때까지 면회를 한 번도 가지 않은 일도 마음에 걸려서, "어떤 아가씨냐?"고 차마 한 마디도 묻지 못했다. 나도·어미도 숨겨 놓은 아가씨가 있을 줄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였다. '부모이면서도 둘 다 자식에게 그렇게 무심했나? 그래서 입대하는 날부터 제대할 때까지 한사코 면회를 못 오게 했었나?'
우리 집은 결혼 이후 내 집이라고 여기면서 드나드는 여성이라고는 아내 혼자뿐이다. 딸이 없는 집인지라 누가 선뜻 온다면 따님이 한 분 오시는 거다, 그것도 다 큰따님이. 마음만 숨겼을 뿐, 나 자신도 아들로부터 다 컸다고 알리는 신호를 난생 처음 받는지라 그 순간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감정이 일면서 야릇하게도 마음이 가볍게 들떴다. '살다보면 이런 기분도 있구나. 어떤 아가씨일까…….' 궁금한 가운데 은근히 기대하면서 달력을 보고 속으로는 함께 오겠다는 날짜를 손가락으로 세기까지 하였다. 그 속을 감추고 못이기는 척하면서, "당신 뜻에 따르지요."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하였다. 어미는 속을 드러내며 서두르기까지 하건만, 나는 반가운 내색을 보일 수가 없다. 그게 어미·아비가 같은 마음이면서도 가야할 다른 길이요, 짐짓 취해야하는 태도인가보다.
약속날짜가 주말이므로 가시버시1)가 함께 다니며 귀한 손님맞이 준비를 챙긴다. 아내가 "인연이 맺어지면 오래 기억되도록 저녁을 함께 먹어도 좋겠지요?"라고 묻기에 김칫국부터 마시는 기분이 들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결정한 모양이다. 가장 먼저, 푸줏간이며 생선가게와 푸성귀가게까지 부지런히 돌면서 필요한 물건을 조금씩 장만한다. 빵집에서는 먹음직스럽게 생긴 생과자만 고른다. 우리 내외는 평소에 거의 먹지 않는 과자라서 잘 모르므로, 비싸고 맛있게 생긴 것만 주섬주섬 골라서 넉넉할 정도로 두어 봉지 담는다. 집안 분위기를 살리려고 꽃가게에도 들른다. 꽃이 말하는 뜻을 몰라서 주인에게 "귀한 아가씨를 맞이하는데 어울리게 골라 주세요."라고 말하니까 장미, 국화, 백합 따위를 섞어준다. 과일가게에서 눈에 띄는 대로 종류별로 싱싱하고 빛깔과 모양이 좋은 것을 듬뿍 산 뒤, 집을 향해 매우 재게 걷는다.
아내는 어미의 사랑이 묻은 반찬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내의 일손을 덜어주려고 나도 나름대로 깨끗하게 집안청소를 한 다음에 이것저것 손질한다. 창문마다 커튼도 보기 좋게 치레2)한 뒤 평소 하지도 않던 향수도 가볍게 뿌리고, 거실의 장식장 물건도 가지런히 챙기고, 책상도 정리한다. 비좁던 방도 치우니까 제법 넓어 보이고, 평소에 없던 싱싱한 꽃이 등장하여 집안을 환하게 꾸미고, 구석구석마다 깨끗하니까 손님맞이 분위기가 살아난다. 이게 자식 사랑인지는 몰라도 아내를 돕는 척하며 정성껏 맞이하고 싶다.
그저 건실한 아가씨가 들어오기만 소망한다. 더 챙긴다면, 좋은 양친모시고 형제자매 사이에 띠앗3) 좋게 자라고, 지망지망4)하거나 잘난 체하는 성격보다 음전한 행동거지에 정이 찰찰 흐르는 아가씨이기를 바란다. 약속시간에 맞춰서 우리 부부의 간절한 바람과 정성스런 준비 속에 나타난 아들의 친구는 혈통 좋은 가문 출신답게 놀랍게도 족보까지 가지고 나타난다.
그는 여성이 아니라 암컷이며 은(銀) 빛깔의 털을 가진 퍼그(pug) 강아지이다. 미리 알려준 내용에서 여성이 암컷으로 바뀐 것 말고는 다 똑같지만 어이가 없고 허탈하다. 아내도 나도 서로 바라보며, 뜻도 없고 소리도 없는 웃음만 주고받을 뿐 할 말이 없다. 우리 속을 알 턱이 없는 아들은 "말씀드린 대로 변함없이 친구 삼아 잘 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어찌하겠는가, 어엿한 새 식구로 맞이하는 수밖에. 다 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우리 부부에게 우리 집을 내 집처럼 여기면서 드나들 귀한 아가씨 맞을 날은 다시 기다림으로 돌아왔다. 부모님도 자식의 짝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줄 우리가 결혼할 땐 미처 알지 못하였다. 아들도 오늘은 손뼉 치며 크게 웃고 있지만, 우리 내외 나이가 되면 오늘 제 짝을 정성껏 준비하며 기다린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리라.
1) 가시버시 : '부부(夫婦)'를 속되게 이르는 말.
2) 치레 : 잘 손질하여 모양을 냄.
3) 띠앗 : 형제자매 사이에 사랑하며 사귀어 두터워진 정.
4) 지망지망 : (성질이나 언행이) 조심성이 없고 나부대는 모양.
첫댓글 우리 아들이 대학 4학년입니다. 이 녀석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오면 어떨까, 그런 생각으로 읽었습니다. 좋은 글 두 편이나 고맙습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연말의 큰 행사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서 다른 일에는 옴짝달싹 못하실 텐데 짬을 내서 방문해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문학발전을 위해서 큰 일을 하시는 몸, 늘 건강하시기 빕니다.
저도 이제막 대학교에 가려는 아이지만 세월은 금방... 준비가 필요하겠어요^^**^^
군대간 아들이 제대하면 제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