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쇠 박보장기
고두쇠는 장기에 남다른 실력이 있다.
동네서 제아무리 잘 둔다는 사람도 그가 차포를 떼어 주고도 당할 사람이 없는 고수다.
특히 면상장기에 능해서 상대방이 교묘한 농포질에 망하고 그놈에 졸을 유독 히 잘 썼다.
그런 때문에 곧잘 내기장기에서 공짜 술과 안주를 따 먹던 위인이었다.
그가 석삼년 먹인 소가 제법 살이 올라 쇠전에 가서 파는 날이다.
달포 전부터 여물에 콩을 섞어 죽을 쑤어서는 정성을 들여 공들여 비육 했더니 제법 털빛이
붉고 기름기가 자르르하게 윤이 난다.
말이 소지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고 온 가족이 모두 나가 고서방 아낙이 홀로 밤을 지키는 경우
라도 외양간 황소가 씩씩대고 뿔질 하는 모습에 적잖이 위안도 되어 무섭지 않았었다.
이제 그 소가 마지막 새벽 여물을 먹고 주인 고두쇠에 의해 장으로 팔려 가는 날이다.
소에게는 이미 코뚜레 말고도 살코를 질러 온몸을 굵은 동아줄로 각을 떠서 싸매 놨으니 설령
녀석이 가다가 요동을 치더라도 크게는 달아나지 못하거나 지랄을 할수 없게 해 놓았다.
또 발에는 편자 말고도 짚으로 신을 해 신겨서 30리 길을 걸어가는데 돌 뿌리에 다치지 안도록
조치도 해 놓았다.
수원의 쇠전이 화홍문 건너 천변에서 섰는데 거기까지 가려면 결코 만만치 안은 거리다.
산길로 걸어서 말구리,작은말구리,도마치,버들치,뒷고개를 넘고 동문 밖에 다다라 내려가야 한다.
새벽부터 여주이천,안성,용인,화성,시흥 일대에서 모여든 장꾼들로 시끌벅적한 쇠전골목의 허름한
주막집과 국밥집들은 자못 뜨내기와 단골 손님들로 붐벼 댔다.
군데군데 야바위꾼들과 박보장기꾼 들이 순진한 농부의 소 판돈을 어찌 해 보려고 별수단을 다
부리는 악다구니들 우굴대는 사이를 지나 고두쇠는 쇠전으로 들어선다.
적당한 곳에 고삐를 매고 있자니 흥정꾼 장판쇄 가 다가선다.
그저 할일도 없고 직업도 없이 쇠전 서는곳 마다 찾아 다니며 남의 소를 흥정해 주고 몇 만원씩
구전을 받는데 그 대신 그의 눈썰미는 저울에 잰듯 정확했다.
소를 한바퀴 둘러보고 엽구리 이곳저곳을 손으로 움켜쥐어 어림하여 쇠 방댕이를 손바닥으로
힘껏 갈겨대며 600에 6할 하면 영락없이 정확하다.
이건 중량이 600 kg 이고 괴기는 6할 즉 360kg 이 나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말이 걸쭉하고 수완이 좋은 사람은 곧 여러 마리를 팔아 주고 돈도 곧잘 벌었다.
오늘 고두쇠의 소를 그 유명한 장판쇄가 맡은 것이다.
본래 장판쇄는 별명인데 원 별명 장판서(崔判書)를 누군가 말을 웃기게 고쳐서 그리 된 것이다.
장똘뱅이 주제에 판서는 당치도 안다며 " 판쇄 " 로 고친 거란다.
그는 몇 해전에 쇠전에서 날뛰는 소에게 바쳐서 죽다 살아났고 지금도 다리를 저는 사람이다.
그가 소를 쭈욱 돌아보는 동안 벌써 소를 사려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들었고 그 걸쭉한
말과 행동거지로 쇠방댕이를 철썩 갈겨대며 근량을 불러대니 곧바로 낙찰되어 값이 치루어졌다.
구전으로 만원을 넘겨주고 배에다 동여맨 전대(錢帶)에 돈 뭉치를 집어넣고 다시 어스랭이 소를
사 달라고 한다.
절대 물 먹인 소를 사서는 안 되는데 그걸 잘 봐주게 한다.
역시 걱실걱실한 장판쇄가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만 적당한 놈을 하나 골라주어 괴삐를 받아들고
값을 치루고 나니 전대에 한 20만원정도가 남았다.
그 돈이면 가난한 농가 살림이지만 여섯 식구 1년 가용이 되었다.
또 가을부터 이 소를 끌어다가 길러서는 여름내 일을 시키고 살을 올려서는 또 내다 개우(改牛)
를 해야 쪼달리는 살림이나마 할 것이다.
흐뭇한 마음을 곱씹으며 중소 한 마리를 끌고 나오는 고두쇠는 허기진 배를 광주집 주막에 들려
거리국밥에 막걸리 몇잔을 기울이고 나니 이제야 살 것만 같다.
벌써 골목 한켠에선 박보장기꾼 들이 한건 몰린 모양이다.
저 안성에서 왔다는 노인의 소 판돈을 몽땅 해 치운 것이다.
시골 노인이 딴에는 장기실력이 근동에 최고라고 자부해서 덤벼 들었다가 낭패를 본게다.
처음에는 몇만원 따고 보니 점점 크게 두다가 그리 됐단다.
넋나간 사람이 되어 다만 절반이라도 돌려 달라는 그의 애원은 소용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광주댁이 아예 박보장기구 야바위고 처다 보지두 말란다.
허어 ~ 내야 모 장기구 야바위구 관심두 읍다네 ~ 촌눔이 일해야 먹구 살지 내가 저돈을 딸
정도면 저눔덜이 저 짓을 왜 허것남? ... 걱정 말어 ~
값을 치루고 추석에 쓸 제사흥정과 아이들 옷 한벌씩을 사서는 걸망에 짋어지고 소를 앞세운다.
그러던 그 고두쇠가 3년후에 그만 박보 장기에 걸려 들어 소값을 다 날리고 분하고 원통해서
집을 안 들어와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혀 쇠전근처 여인숙을 모두 뒤져서는 안 들어온지 닷새만에
찾게 되었고 강제로 끌고 오다시피 해서 데려온 사건이 벌어졌다.
그의 말인즉 빈손으로 들어 가느니 그냥 이러다가 죽을 작정이라고 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사건이었다, 암만 병원이 멀고먼 수원에나 나와야 도립병원 밖엔 없던 시절
이지만 발바닥이 갈라지면 병원엘 안가고 철사로 꿰매질 안나 충치가 극심해서 죽을 지경이면
그걸 칼로 깨서 빼내고는 거기다 왕소금을 물고 버티던 천하에 노랭이요 독종인 그가 당했다니 ...
그건 마을 내에 무려 수십년을 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지 상당히 오래된 그 양반은 나무지게,바소쿠리,광주리,둥구녁,싸리비,삼태기 등
닥치는 대로 만들어서 장에 내다 팔던 천하의 재주꾼이었다.
이젠 그 우시장도 없어진지 오래고 그분이 만들던 모든 물건들도 이름조차 희미 해지는 시대인데
문득 가을을 맞고 보니 격세지감을 느끼는 가운데 이 글로서 고두쇠 아저씨 영전에 삼가 성묘를
대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