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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조 제2항
이준호
1.
나뭇가지로 산토끼를 끌어내린다. 철망에 나뭇가지가 닿지 않게 하려니 신경이 곤두서고 손목은 아프다. 빳빳하게 굳은 산토끼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축대 아래로 떨어진다. 나는 얼른 피한다. 붉은색의 고무가 코팅된 목장갑을 낀 손으로 산토끼의 귀를 잡았다. 의외로 부드럽다. 하긴 뼈가 없는 부위이니 당연하다. 털이 탄 듯한 노린내가 난다. 영혼이 빠져나간 눈은 구슬처럼 차갑고 투명하다. 이번 달 들어 벌써 두 번째다. 지난주엔 까치였다. 울타리가 차단장치가 아니라 생과 사의 경계라고 생각하니 으스스하다.
1.5미터쯤 되는 축대 위로 높이 2미터쯤 되는 철조망이 3미터 간격으로 세 겹이 쳐져있다. 첫 번째 철망엔 고압전류가 흐른다는 경고문이 붙어있고, Y자 모양의 철망지지대 꼭대기엔 면도날처럼 생긴 돌기가 수없이 달린 원형철조망이 둘러져있다. 그것만으로도 침입이 불가능할 터인데, 스위치로 자동개폐 되는 철망문을 통과하면 비탈을 뚫어 만든 터널 출입구엔 파란색을 칠한 철문이 버티고 있다.
무전기가 지직거린다. 잡음에 섞여 곧 차가 도착한다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오른쪽 끝까지 걸어가 산토끼를 계곡 아래로 던진다. 살쾡이나 족제비 같은 포식자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근무실로 올라가자마자 경적이 울린다. 차창이 내려진 대형트럭의 운전석에서 선글라스를 쓴 운전사가 손을 들어 보인다. 신원확인을 위해 꼭 차창을 내리도록 돼있다. 버튼을 누른다. 불완전 연소된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대형트럭이 철망문을 통과한다. 대형트럭이 파란색 철문 앞에서 정지하느라 차체가 출렁인다. 다시 버튼을 누른다. 트럭이 파란색 철문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진다. 나는 파란 철문 안에 무슨 시설이 있는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 고용계약서에 그렇게 명시돼있다. 본사 직원은, 특히 고용계약서의 제12조 제2항을 유의하라고 알려주었다.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에 온수를 받아 커피봉지로 젓는다. 탕비실에 감도는 퀴퀴한 냄새가 커피향에 지워진다. 냄새의 진원지는 퉁퉁 불은 라면가닥과 밥알이 막고 있는 개수대 거름망이다. 교대근무자는 6개월 먼저 왔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컵라면 국물을 바닥에 흘려도 구두바닥으로 슥슥 문대버리는 사람이다. 탁자에 라면국물이 묻어있는 건 다반사고, 책상이나 바닥에 과자가루를 흘려도 치우지 않는다. 냉장고에 넣어둔 생수를 마시려고 보면 생수병이 비어있기 일쑤다. 사다놓는 건 고사하고 치우기 귀찮으니까 빈 생수병을 냉장고에 그냥 넣어둔다. 세 살이나 어리면서도 호칭은 꼬박꼬박 ‘이 형’이다. 거름망을 대신 비워도 되지만 얄미워서 그냥 둔다. 치사하고 유치하지만 버릇을 잘못들이면 안 될 것 같다. 직장생활이 업무보다 대인 관계가 어렵다더니 맞는 말이다.
뜨거운 커피를 입으로 불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스테인리스 방범창살 너머로 나무들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 아래의 이차선 도로를 오가는 차들이 보였는데, 어느새 우거진 숲에 시야가 막혔다. 탕비실이 더 어두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건물은 삼 층이고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1층은 전기실과 기계실로, 출입금지지역이다. 담당직원이 따로 있긴 한데, 화장실이 안에 딸려있는지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2층은 내가 근무하는 곳이다. 건물 주변과 울타리 외곽, 안쪽과 바깥쪽 출입문 두 곳을 24시간 비추는 감시카메라를 모니터링하는 장치와 출입문 개폐 버튼, 옥외조명 버튼 등이 장착된 제어판이 있고, 출입문 옆엔 간이침대가 접힌 채 세워져있다. 2층엔 탕비실과 화장실도 있다. 3층은 잡동사니와 소모품을 보관하는 창고다. 폭이 좁은 건물은 각층의 면적이 12평 내외로, 바깥에서 보면 키만 크고 살집은 없는 사람처럼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좁은 면적 위에 실용성만 염두에 두고 지었다.
근무는 두 명이 24시간마다 교대한다. 근무실은 벽에 기대 세워둔 간이침대를 펼치면 꽉 찰 크기이다. 출입문 위 천장에 붙어있는 감시카메라 때문에 침대를 펼친 적은 없다. 반구형의 검정색 플라스틱 안에 감춰진 차가운 렌즈를 떠올리면 검정색 색안경을 낀 기관원이 연상된다. 감시카메라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근무실에선 카톡이나 문자가 와도 휴대폰을 열지 않는다. 피곤해도 의자에 기대 잠깐씩 눈을 붙일 뿐이다. 교대하고 보면 간이침대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어있다. 교대근무자는 간이침대를 사용하지만 나는 아직 그럴 배짱이 없다.
종이컵을 구겨서 버리고 식탁의자를 꺼내 앉는다. 식탁 아래에는 구형컴퓨터가 있고, 거기에 연결된 모니터가 식탁 한쪽에 놓여있다. 사양이 낮아 온라인게임은 꿈도 못 꾸지만 직원의 복지와 관련된 물건으로는 유일하다. 절전상태로 있던 모니터가 깨어난다. 게임을 시작한다. 화면 왼쪽 의자에 죄수가 앉아있다. 정면으로 세로로 된 철창이 있고, 그 너머는 복도다. 지도와 망치는 이미 만들었다. 마우스 왼쪽을 클릭한 상태로 오른쪽을 연속 클릭한다. 죄수가 부지런히 드릴을 만든다. 철창 너머 오른쪽에 그림자가 나타난다. 모자와 복장이 모두 파란색인 간수가 나타난다. 간수의 모자와 옷은 경찰에 가깝다. 방망이로 반대쪽 손바닥을 치며 화면 중앙까지 왔던 간수가 돌아선다. 나는 좀 전보다 더 열심히 중지를 움직인다. 간수가 사라진 오른쪽을 응시한다. 다시 그림자가 나타난다. 긴장하며 클릭 속도를 늦추는데 무전기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2.
검정색 SM5가 파란색 철문과 철망문을 차례로 통과해 나온다. 꽉 죄는 라운드티로 잘 발달된 가슴과 팔죽지 근육을 강조한 중년이 운전석에 앉아있다. 파란색 철문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머리를 스포츠로 깎아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교대시간이 일정치 않다. 아마도 근무자들끼리 시간을 조정하는 것 같다.
숲 사이로 난 완만한 시멘트 포장길은 거무튀튀하게 변색되었다. 여기저기가 운전에 지장을 줄 만큼 파이기도 하고, 보수한 표면이 볼썽사납게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하얀색 5톤 트럭이 철망문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은회색 SUV가 나타난다. 교대근무자의 차다. 눈이 뻑뻑하다. 고개를 젖히고 양쪽 눈에 인공눈물을 넣는다. 눈을 깜박이자 왼쪽 눈에서 인공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손등으로 문지른다. 약간 덥다고 느껴지는 실내는 건조해서 한 시간마다 인공눈물을 넣지만 소용이 없다. 오른쪽 소매를 걷어 팔꿈치 안쪽을 긁는다. 한동안 잠잠하던 아토피가 재발할 조짐이 보인다. 건조한 공기는 아토피의 적이다. 하지만 2층에선 히터를 조절하지 못한다. 중앙공급식 냉난방이니 아마도 1층에서 조절할 것이다. 송수화기를 들고 2번을 누르면 1층과 연결되는 전화기를 본다. 근무를 시작한 뒤로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전화는 급한 용무에만 쓰도록 돼있다. 안구건조증과 아토피가 급한 용무인 것 같지는 않다.
“이 형, 별일 없었습니까?”
교대근무자가 근무복 지퍼를 올리며 묻는다. 눈빛과 말투가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다
“없었습니다.”
피곤과 함께 짜증이 밀려온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습니까? 기분이 별로인 것 같네.”
내가 듣기에도 내 말투가 곱지 않다. 이런 유의 인간들은 자기가 뭘 잘못한지를 모른다.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그와 나는 우주공간에서 인력과 척력이 균형을 유지하는 행성들이다. 절대 가까워질 수 없다. 고민과 갈등은 이해하려고 할 때의 부산물이다. 포기하면 편하다.
“없었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나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정면으로 탕비실 옷걸이에서 외투를 떼어 근무복과 바꿔 입는다. 탈의실은 따로 없다. 탁자 의자에서 가방을 집어 든다. 9급 공무원대비 한국사와 영어 수험서가 들어있어 묵직하다. 짬짬이 공부할 생각으로 가지고 다니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가끔씩 예고 없이 본사에서 사람이 나온다. 성 씨가 정이고 대리 직함을 가진 그 사람은 출장을 나왔다가 들른 것처럼 말하지만 눈빛이나 행동이 암행의 혐의가 짙다. 그 사람에게 공부하다 들키는 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근무에 충실하지 않고 이직할 기회만 엿보는 사람으로 찍히고 싶지 않다. 공무원시험은 늘 3, 4점 차이로 떨어졌다. 그 점이 포기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 내 미래는 가방 안에 갇혀버렸다. 판도라의 상자에 봉인돼 아무도 꺼내주지 않을 희망처럼.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귀에서 지지직거리는 무전기소리가 들린다. 손바닥을 귓바퀴에 대고 비빈다. 이명이 사라지지 않는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유해환경 조성하는 수성화학 물러가라!!!
불안해서 못 살겠다 수성화학 이전하라!
지역개발 가로막는 수성화학 각성하라!!
국도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입구와 건너편 가드 레일에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이곳에서 3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대규모 위락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나 예비조사에서 수성화학이 위험시설로 분류돼 무산될 위기에 있다고 했다. 지역주민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들 몰려와 시위를 벌인다. 건성으로 구호를 외치는 노인에게선 절실함이나 긴박감을 찾아볼 수 없다. 권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불참하면 내야 한다는 벌금이 아까워 참석한 티가 역력하다. 전동휠체어를 타거나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노인도 꽤 된다. 몇몇은 한쪽에서 막걸리판을 벌이다 다른 노인에게 지청구를 먹기도 한다.
세수를 했는데도 졸리다. 눈을 비비고 마른세수를 한다. 자일리톨 껌을 꺼내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보나마나 민희다. 민희는 퇴근 무렵이면 꼭 전화를 한다.
3.
만난 지 이 년째인 민희는 농협에서 운영하는 마트에서 일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여상을 졸업한 민희는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을 잘 파악하고 슬기롭게 대처한다. 4년제 야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다니고 있다. 전액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적금을 부어 마련한 돈을 전부 자기 아버지 수술비로 내놓을 줄도 안다. 시장통을 지나다 노파가 떨이로 내놓는 오이를 사주기도 한다. 적당히 악착스럽고 알맞게 순수하다. 그 균형 감각이 마음에 든다. 그 점은 민희의 매력이다. 정규직이 되면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정규직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다. 마스터키를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손아귀에 그 마스터키를 쥔 것처럼 주먹을 꽉 쥔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준다.
“밥은?”
“먹었어요.”
“아버지는요?”
“일거리 있나 본다고 인력시장에 나가셨다.”
그렇게 인력소개소라고 알려드리건만 매번 인력시장이다. 하긴, 명칭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노동과 돈을 교환하는 곳이니 시장이 더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저 씻을게요.”
“우진아.”
어머니가 머뭇거린다. 뭔가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낼 때의 모습이다.
“말씀하세요.”
“돈 좀 구할 수 있겠니?”
“우희가 학교에 자리가 났는데…… 이번엔 확실한가 보더라. 학교 선배가 그 학교에 있는데 다리를 놔줬는가 보더라.”
모아둔 돈이 없는지는 잘 알 테고, 대출을 말하는 것 같다.
“얼마나 부족한데요?”
“이천은 있고, 한 삼천쯤…….”
3이 갈고리가 되어 목구멍에 턱 걸린다. 3 뒤에 붙은 동그라미 개수는 그대로 무게가 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내 눈치를 힐끔 본 어머니가 얼른 덧붙인다.
“우희가 학교에 나가면 금방 원금이랑 이자 갚는다더라.”
“비정규직은 대출도 안 돼요. 한번 알아볼게요.”
이런 일은 분명한 게 좋다. 어머니가 가볍게 한숨을 쉬는 것으로 수긍의 뜻을 전해온다. 쉽게 포기하는 걸 보면 크게 기대하진 않았나 보다. 기억의 갈피에 숨은 친구나 친척까지 끄집어내어 액수를 더해본다. 관계의 친소에 따라 액수가 오르내린다. 큰 액수에 기가 눌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돈이 없으니 교사가 되지 못하고, 교사가 되지 못하니 돈을 벌 기회가 없다. 빈곤의 악순환이다. 국문학과를 나온 우희는 6년째 임용고시에 매달리고 있다. 취직한 뒤로 매달 얼마씩 용돈을 주지만 그 이상은 나도 무리다. 보습학원에서 시간제 강사를 하는 우희는 피곤을 붙이고 다닌다. 눈 밑에 다크서클과 기미를 액세서리처럼 붙이고 산다. 화장이라도 하고 다녀. 지난달엔 용돈을 더 줬는데도 여전히 민낯이다. 임용고시에 청춘을 저당 잡힌 우희에게서 공시생일 때의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건 씁쓸한 일이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켠다. 오타쿠를 방에서 탈출시키는 게임이다. 방 안은 과자봉지, 빈 캔, 휴지 따위로 어질러져있다. 침대 위엔 침구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남자아이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 아이를 방문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 다른 게임과 달리 남자아이가 방해꾼이다. 방을 나가기 싫은 남자아이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훼방을 놓는다. 잠들기 전에 잠깐만 하려고 했는데 자꾸 실패한다. 일어나서 벽에 등을 기댄다. 서늘한 기운이 후드티를 통해 전해져온다. 베개를 등에 받치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도 의아하다. 자발적으로 은둔을 택한 아이를 왜 바깥으로 내보내야 하지? 몇 번인가 피로로 무거워진 머리를 흔들며 게임에 몰입한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가. 창문이 어둑하다. 시간을 보려고 머리맡을 더듬는다. 휴대폰은 내 어깨 근처의 시트 속에 있었다. 두진이 형에게서 전화가 두 통이나 와 있다. 눌린 머리칼을 정리하며 통화버튼을 누른다.
눈이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흐리다. 돌아가서 우산을 가지고 나오려다 말았다. 고깃집이 몰려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연기와 비릿한 냄새가 내 몸을 휘감는다. 갑자기 허기가 돈다.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내게 형이 손을 번쩍 든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점퍼를 벗는다.
“할 만하냐?”
형이 내 잔을 채워주며 묻는다. 머리칼은 목덜미를 덮을 만큼 웃자랐고 수염은 깎지 않아 지저분하다. 집에서나 입는 트레이닝복은 소매가 늘어났다. 형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다.
“무슨 일 있어? 형수가 뭐라 그래?”
형이 허허롭게 웃으며 술을 마신다. 그냥 해본 말인데 핵심을 찔렀나 보다. 두 학번 차이인 형과는 학교 다닐 때부터 붙어 다녔다. 모교에서 박사를 받은 형이 조교를 거쳐 시간강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다들 모교에 자리를 잡는 줄 알았다. 그런데 형이 전공한 현대시자리엔 타 학교 출신이 임용되었다. 교수들끼리 모교 출신 두 사람을 두고 다투다 의견이 조율되지 않자 제3의 선택을 한 것이다.
“나, 이혼할 거 같다.”
묵묵히 술잔만 비우던 형이 불쑥 말한다.
“…….”
“쪽팔려서 강의도 못 하겠다. 다음 학기 강의도 안 하겠다고 말했다. 먹고살 방도를 찾아야겠다. 학원을 나가든 과외를 하든.”
“강사법 시행되면 처우가 개선된다던데?”
해놓고 보니 쓸데없는 말이다. 내가 짐작하는 대답을 듣게 되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 대작을 하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한다. 취기가 빨리 올라온다. 화장실에 다녀오다 보니 형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힘줄이 불거져 파랗게 언 맨발이 애처롭다. 이혼한다거나 강의를 그만둔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울적해진다.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라진다.
눈을 뜬다. 내 방 침대 위다. 옷을 입은 채다. 옷을 갈아입고 양말을 벗는다. 양말에 흙이 잔뜩 묻어 더럽다. 왜 이러지? 기억을 뒤적이는데 목이 탄다. 주전자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다 문득 택시 뒷문을 열어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떠오른다. 양말 바람으로 시멘트바닥에 선 내가 형에게 슬리퍼를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구두는 내 발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형은 난처한 표정으로 택시기사에게 거듭 죄송하다며 나를 달랜다. 현관엔 내 구두 대신 형의 슬리퍼가 놓여있다. 한 짝은 현관문을 향해 있고, 다른 짝은 뒤집어져 바닥이 보인다.
모교에 갔다가 복도에서 형이 강의하는 걸 엿본 적이 있다. 잘 웃지 않는 형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눌변에 가까운 말투는 활기찼고, 온몸에 생기가 넘쳤다. 사람이 달라보였다. 뭔가를 하며 그렇게 행복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때 알았다. 아, 형은 강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구나.
형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다시 걸려다 이른 시간이란 걸 깨닫고 그만둔다. 숙취로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는 무겁다. 오타쿠 탈출게임 속의 남자아이와 형이 겹쳐진다. 강단에 남으려는 형을 알 수 없는 힘이 자꾸만 밀어낸다. 형은 사력을 다해 요리조리 피한다. 하지만 남아있는 건 형의 의지가 아니다. 형의 운명은 게이머의 실력에 따라 정해진다. 만랩(고수)을 만나면 금세 퇴출당하고, 쪼랩(하수)을 만나면 퇴출이 지연될 뿐이다. 퇴출되는 건 마찬가지다. 물론 그 원칙에선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내 의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30년이나 걸렸다.
4.
버튼을 누른다. 철망문이 반쯤 열리다 멈춘다. 다시 눌러도 꿈쩍도 않는다. 트럭운전사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전화로 철망문이 고장 났음을 알린다. 창문 너머를 주시한다. 공구상자를 든 1층 근무자가 건물을 나선다. 아래위가 붙은 작업복을 입은 그는 어깨가 약간 굽었다. 정글모를 쓰고 있는 데다 등만 보이는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걸음걸이로 보아 나이가 좀 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로는 많아야 30대 중반을 점쳤다. 몇 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가 반갑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다. 한참을 손보는데도 고쳐지는 기미가 없다. 그 사이에 1톤 트럭 한 대가 더 들어와 멈춰 섰다. 트럭운전사들은 내릴 생각을 않는다. 나는 무전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뭐, 도와줄 거 있습니까?”
쪼그리고 앉아 드라이버를 돌리는 그에게 묻는다. 대답이 없다.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리다 다시 묻는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근무자 B는 지금 제12조 제2항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한다. 적의도 호의도 스며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다. 알파벳 B가 나를 지칭한다는 걸 알아채곤 정신이 번쩍 든다.
“아, 예.”
나는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근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 그는 여전히 드라이버를 돌리느라 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말을 거는 것도 계약 위반에 해당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방에서 고용계약서를 꺼낸다. 혹시 필요할지 몰라 한 부를 복사해서 가지고 다닌다.
제12조 [계약의 해지]
1. 이 계약은 다음의 경우에 당연히 해지된다.
2. ‘갑’이 판단하여 계약 위반이 현저한 사유가 발생할 경우 ‘을’에게 계약 해지 를 통보할 수 있다.
근무 첫날 본사 직원에게 교대근무자 외의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라는 말은 들었다. 아무리 곱씹어도 내 행위가 ‘접촉’이나 ‘계약 위반이 현저한 사유’에 해당하는지 판단할 수 없다. 머릿속이 퓨즈가 나간 것처럼 컴컴해지더니 판단정지 상태에 이른다. 그제야 트럭 운전사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끙끙대는 걸 보면서도 차 안에만 머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접촉’을 꺼리는 것이다. 나는 애써 자위한다.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다. 친절이나 호의가 죄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근원 모를 위기감에 기분이 영 께름칙하다. 근무실 아래에 늘어선 철조망을 보고 있자니 바깥에 있는데도 갇힌 느낌이다.
“52호입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됩니까?”
무전기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트럭운전사들은 번호판의 뒷자리 두 개로 자기 신분을 대신한다. 근무실 너머로 살핀다. 나중에 도착한 트럭이다.
“죄송합니다. 1층 근무자께서 최선을 다해 수리하고 있습니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겠습니다. 고치면 알려주십시오.”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먼저 온 트럭이 들어가서 하차작업을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무작정 기다리느니 자투리시간을 활용하는 게 나을 것이다. 트럭이 공터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나간다.
“1호 출입문 개방해보세요.”
무전기에서 1층 근무자의 목소리가 잡음에 섞여 흘러나온다. 철망문을 1호 출입문이라 부르는지 오늘에야 알았다. 버튼을 누른다. 중간에서 꿈쩍도 않던 철망문이 열린다. 1층 근무자는 바닥에 늘어놓은 공구들을 챙겨 돌아선다. 대기하던 트럭이 들어가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전과 다를 게 없다. 식사를 하러간 52호에게도 상황을 알려준다.
탕비실로 와서 모니터를 켠다. 귀신이 출몰하는 방에서 탈출하는 게임이다. 처음 해보는 게임이다. 무섭기는커녕 어리숙하게 생긴 귀신들을 피해 숨겨진 열쇠를 찾아야 한다. 몇 번 해보고서야 만만한 게임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귀신도 게이머의 긴장을 누그러트리려는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열쇠를 발견하고 꺼내려는 순간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귀신에게 잡히고 만다. 거의 성공했는데, 아쉽다. 카톡이 왔다는 신호음이 울린다. 자판에 두 손을 올린 채 고개만 돌린다.
퇴근할 때 연락 줘. 사거리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기다릴게.
우희다. 돈 얘기겠지. 게임할 맛이 뚝 떨어진다. 트럭이 도착한다는 무전 소리가 들린다. 대답을 하려고 무전기를 들다가 멈칫한다. 무전기는 잠잠하다. 귀에서 나는 소리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근무실로 돌아온다.
“얼마나 마련할 수 있어?”
앉자마자 묻는 우희의 목소리가 절박하다. 입술은 바짝 말라 거스러미가 일었고, 눈은 움푹 들어가 중병 환자 같다. 우희가 이번 일에 얼마나 매달리는지 짐작이 된다.
“한 오백?”
잠깐 생각하다 말한다. 나도 학자금 대출을 상황하고 있어 더는 불가능하다.
“그건 확실해?”
“응, 근데 얼마가 부족한 거야?”
“천오백 정도……. 아빠 칠백, 엄마 삼백, 오빠 오백하면.”
손가락으로 티셔츠 앞자락을 꼬는 우희는 거의 울상이다. 손에 쥔 것도 아니고 닥닥 긁어서 모을 수 있는 돈을 합한 액수다. 속을 태우는 우희를 곁에서 지켜보자니 벽에 머리라도 찧고 싶다. 문득 공중화장실에서 본 장기매매 스티커가 생각난다. 정말 신장이라도 팔아야 하나. 민희도 세 달 전부터 새로 적금을 붓기 시작해 돈이 없을 것이다.
“너무 걱정 마. 나도 힘닿는 데까지 애써볼게.”
무책임한 말이다. 이제 겨우 몇 달 근무한 비정규직 근무자 B가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아직 밥 안 먹었지?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돼.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나는 반나마 남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일어난다.
“아냐, 학원 가봐야 돼.”
우희가 따라 일어난다. 말투가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했는지 덧붙인다.
“학생들 시험본 거 채점해야 되거든.”
우희의 뒷모습은 살짝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다. 집에 가도 잠자긴 글렀다. 안 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건만, 그렇게라도 해야 내 무능력을 용서받을 것 같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아직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카페인이 내 몸을 점령하고 있는 피곤을 몰아내며 영역을 넓혀간다. 그 느낌이 생생해 엑스레이를 찍으면 필름 상에 그대로 나타날 것만 같다.
돈을 빌려줄 만한 사람들의 우선수위를 따져보는데 길 건너 편의점 앞의 인형뽑기 기계가 눈에 들어온다. 유리 안에 갖가지 인형이 겹겹이 쌓여있다.
“답답하지. 제12조 제2항에 의거하여 너희를 방면한다.”
천 원짜리를 넣고 집게를 작동시킨다. 집게에 들린 곰인형이 배출구에 거의 와서 힘없이 떨어진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집게를 가로세로로 움직인다. 집게는 매번 헛손질을 하고 올라온다. 늘 3, 4점 차이로 불합격하는 9급 공무원시험처럼. 잠깐 사이에 오천 원을 날렸다. 되는 게 없다. 인형들이 가만히 있는 자기들도 뽑아가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한심한 놈이라고 비웃는 것 같다.
“에이, 씨!”
홧김에 뽑기 기계를 걷어찬다.
“아저씨, 그러다 고장 나면 물어줄 거요?”
편의점 사장이 유리문을 열고 인상을 쓴다. 나는 얼른 자리를 피한다. 득달같이 달려온 걸 보면 종종 있는 일인가 보다.
발신음이 두 번 가고 끊는다. 그러면 민희가 전화를 걸기로 돼있다. 근무 중이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무슨 일이야? 아까 통화했잖아.”
한껏 낮춘 민희의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보아 화장실이나 제품보관 창고다.
“돈 좀 구할 수 있어?”
“갑자기 웬 돈?”
나는 요점만 간추려 빠르게 설명한다.
“한두 푼도 아니고, 퇴근하고 만나서 얘기해. 전화할게. 물건 정리하다 와서.”
듣기만 하던 민희가 서둘러 말하곤 전화를 끊는다.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다. 아직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아직 짐이 여러 개 남아있다.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뒤적인다. 전화를 거는 것보다 돈 얘기를 꺼내도 되는 사람인지, 얼마를 말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게 더 어렵다. 언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이며 두 번째로 지목한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5.
“저거 좀 갖다버리죠.”
퇴근 채비를 하는데 교대근무자가 말한다. 그의 손가락이 배가 불룩한 검정색 비닐봉지를 가리키고 있다. 매일 하는 일인데 신경이 고슴도치 털처럼 곤두선다.
비닐봉지를 조수석에 던져둔다. 차를 주차장에서 빼내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앞쪽에서 자동차 엔진음보다 더 크고 거친 소리가 들린다. 경운기 소리다. 한두 대가 아니다. 길이 좁아 자동차 두 대가 엇갈려지는 건 불가능하다. 차를 세우고 잠깐 망설이는데 선두에 선 경운기가 보인다. 곧이어 경운기 행렬이 꼬리를 물고 길을 가득 채운다. 간간이 1톤 트럭도 보인다. 적재함에 사람이 가득 타고 있다. 본사에서 통보받은 집회시간보다 사십 분이나 이르다.
오른팔을 조수석 등받이에 얹고 뒤를 보며 차를 후진시킨다. 차문도 잠그지 않고 계단을 두세 칸씩 올라간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교대근무자는 내가 들어가도 모른다. 고개를 까딱거리는 교대근무자의 어깨를 잡자 흠칫 놀라며 이어폰을 뽑는다.
“무슨 일입니까?”
태연을 가장하지만 놀란 목소리다.
“시위대가 옵니다. 상부에 보고해야 할 거 같습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좀 더 두고 보지요.”
“오늘은 다릅니다. 다른 날보다 인원이 훨씬 많습니다.”
근무자가 천천히 일어나 창 너머를 살핀다. 내 말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하다. 좁은 길을 빠져나온 경운기와 트럭이 공터 안쪽부터 채운다. 노인만 있는 게 아니다. 중장년층도 꽤 눈에 띈다.
“경찰이 올 때까지 막으라는데요?”
본사와 통화한 교대근무자가 말한다.
“그런데요?”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말끝이 뾰족해진다. 옆에서 들었으니 그건 나도 안다.
“누군가는 여기 있어야 되니까…….”
교대근무자가 내 눈을 슬그머니 피한다.
“그 누군가가 왜 그쪽이어야 하지요? 난 이미 교대를 했는데.”
“그야 이 형이 나보다 나중에 왔으니까…….”
“야, 이 새꺄! 그게 말이야 방구야. 글구 한 번만 더 이 형이라고 불러봐. 입을 확 째버릴 테니까.”
내 인내심을 묶고 있던 끈이 툭 끊어진다.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의 얼굴에 집어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감시카메라를 의식할 통제력은 남아있어 입을 최대한 작게 벌린다. 감시카메라를 등지고 있어 잡히진 않을 테지만 표정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유지한다.
“아니, 이 사람이…….”
당황한 교대근무자가 말을 잇지 못한다. 돌변한 내 태도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이 사람이, 뭐? 말해봐. ‘이 사람’도 어린놈이 연장자에게 쓰는 말이 아니야. 이 찐따 새끼야.”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해두고 싶다. 수면부족으로 핏발이 섰을 눈을 한껏 치뜬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달싹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분노와 연민이 동시에 일어난다. 상대방이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여기는 이런 인간들은 정말 짜증난다. 그동안 맺혀있던 응어리가 풀렸는데도 기분이 더럽다. 바깥에서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1톤 트럭이 철망문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트럭을 막아선다.
“여러분들은 수성화학 소유의 시설물을 파손하려 하고 있습니다. 재물손괴는 민형사상 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나 이 철조망엔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어 대단히 위험합니다. 평화로운 집회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적대시하는 군중 앞에서 서 있자니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나온다. 버티고 선 장딴지에 힘을 줄수록 오금이 저린다. 이곳엔 게임처럼 탈출 아이템도, 탈출구도 없다. 이건 내가 직면한 현실이다.
“비켜, 인마. 네가 뭔데 막고 지랄이야!”
운전석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중년의 사내가 눈을 부라린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구릿빛이어서 흰자위가 유독 하얗다. 트럭이 위협하듯 공회전을 한다. 그래도 비키지 않자 트럭 범퍼가 내 무릎에 닿을 듯 바짝 다가선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전면창에 댄다.
“어이, 이 새끼 좀 치워.”
트럭운전사가 소리친다. 몰려든 사람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나를 끌어내려 한다. 민희가 사준 와이셔츠 단추가 투두둑 소리를 내며 뜯어져나간다. 바지 안으로 넣어 입은 와이셔츠와 러닝이 빠져나온다. 찬 공기에 노출된 맨살이 시리다. 나는 어금니를 물며 완강히 버틴다. 아버지나 삼촌뻘이지만 농사와 노동으로 단련된 악력이 보통이 아니다. 출입구를 향한 감시카메라가 내 모습을 낱낱이 찍고 있을 것이다. 전진하는 트럭에 내 몸이 조금씩 밀린다. 앞바퀴에 발이 낀다. 어쩌면 내가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치수가 작은 구두를 신은 듯한 압박감에 이어 묵직한 통증이 느껴진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차체를 두드리며 차를 빼라고 소리친다. 근무실을 올려다본다. 이곳 상황을 지켜보던 교대근무자가 황급히 몸을 낮춘다. 이만큼 했으면 제12조 제2항을 어겼다고 질책 받진 않을 것이다. 그러자 공무원시험을 포기했을 때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홀가분해진다. 발을 움켜잡는다. 아무래도 뼈가 바스러진 것 같다. 구두를 벗으면 겨우 형태를 유지하던 뼛조각들이 퍼즐조각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릴지도 모른다. 출입문을 열어달라는 무전기소리가 들린다. 귀를 비비거나 후비지 않는다. 어차피 이명이고 환청이다. 다른 사람들의 문을 열어주면서도 정작 내 문은 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든다. 점퍼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떠오른다. 문득 게임이 하고 싶다. 무슨 게임이든 상관없다. 탈출게임이기만 하면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