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와 그 원인을 제공한 18~19세기에 한국에 전래된 천주교 박해!
오래전에 파리에서 “앵발리드” 에 갔었는데 17세기에 루이 14세가 부상병 요양소로 지었
으나 현재는 “군사박물관” Musée d'Armée 으로 사용되며.... 프랑스 대혁명때 시민들이
이곳에서 약탈한 무기로 바스티유를 습격했다는데.... 나폴레옹은 돔 교회의 바깥쪽
입구의 지하에 묻혀있으며...... 박물관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넓습니다.
중세 시대에 기사들의 강철 갑옷과 창, 칼, 방패, 말에서 부터 근세 프랑스군의 총이며 대포,
군기, 훈장, 군복, 행진 및 전투대형에 이르기까지 수만점의 유물이 꽉 들어찾는데.....
루이 14세와 나폴레옹 시대에 유럽을 거의 정복하여 세계제국을 이룩한 모습이며 1860
년에 영국군과 함께 중국의 북경을 함락한 작전 지도와 전투 모형이 크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1861~1865년 나폴레옹 3세때 멕시코를 침략한 지도 등 자료에다가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를 식민지화해 가는 과정과 아프리카 식민지며, 또 아시아관에는 1900년 의화단 궐기시
프랑스와 일본등 8개국 연합군이 중국의 수도 북경을 점령한 모형이며 전시물등은......
“프랑스의 영광” 을 외치고 있으니 오기가 생기는지라 1866년 병인양요 자료를 찾아봅니다.
1866년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 강화도를 함락하고 한강의 노량진까지 수심을
측정하며 수도 서울을 위협했던 저들! 이른바 병인양요!!! 강화도의 왕궁 보물고에서
약탈한 금은이며 귀중한 서적들은.... 1993년에 떼제배 TGV 를 팔겠다고 “서적은 다 돌려
주겠다” 며 우선 2권을 들고 미테랑 대통령이 청와대로 김영삼 대통령께 전달하려 들어갑니다.
그런데 도서관 여직원이 울며, 불며 몸부림치면서 책을 가슴에 품고 내어놓지 않는 바람에 어르고
위협해 겨우 한권만을 반환하고는.... 프랑스로 돌아간 두명의 여직원은 눈물울 흘리며 국가의
문화재(?) 를 지키지 못한 죄로 “국립 도서관 사서직을 사직” 하니......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이 일제히 문을 닫고 "거국적인 문화재 지키기 운동" 을 벌였던 사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1866년 병인양요 때의 기록이나 유물이 없으니 프랑스 직원을
붙잡고 재우쳐 물었으나... 그 녀석은 영어라곤 못하고 나는 불란서 말을 한마디도 못하니
“벙어리와 귀머거리의 대화” 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리도
엄청난 사건으로 침략 전쟁인데....... 얘들은 한 귀퉁이에 전시할 가치조차 없는 모양 입니다?
훗날 누구 여행기에 보니 앵발리드 구내에 생루이 교회가 있는데 좌우 천장엔 60여개의 깃발
이 장식돼 있으니, 이 중에 파란 삼각천에 하얀 글씨로 ‘친병제5대 우영(親兵第五隊 右營)’
이 새겨진 군기가 있다는데.... 우영이라면 제물포(인천) 를 방어하던 부대로 이 깃발은
병인양요시에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파견된 우영 부대로 부터 노획한 것이라고 하네요?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교령(敎令) 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필두로... 수개월 동안에 공식적으로도 국내 천주교 신도 8천여명이 처형
되었으며,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림에 쓰러지는 부녀자
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으니..... 그 숫자 까지 모두 포함하면 피해자는 실로 엄청납니다!
기독교 성경을 불태우고 십자가와 마리아상이 처참하게 짓밟히니 1866년 병인박해 인데, 천주교
박해는 그 전에도 정조 때에 신해박해를 비롯해서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등 4번이나
있었으니..... 동아일보에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칼럼에는 “살아있는 순교” 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미와 떨어지거든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울어서 네가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산다. 그 울음을 주께서 들을 것이고 사람의 귀가 들을 것이고 종국에는 인정이 움직일 것이다.”
김소윤의 소설 ‘난주’ 에 나오는 말이다. 아이를 떼어놓는 어미는 정약현(다산 정약용의 형) 의 딸 난주
이고, 아이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당한 천주교인 황사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살배기 아들이다"
"신유박해는 백서(帛書) 사건이 단초로 황사영이 종교탄압에 베이징의 천주교 주교에게 보내려고
비단(帛) 에 쓴 밀서였다.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부인은 관비가 됐다. 황사영에 대해서는
알려졌지만, 역사는 관비가 된 부인에는 침묵한다. 영웅의 자리는 남성의 몫 이었다. 소설은
사실에 주목한다. 남편과 달리 부인에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순교(殉敎) 는 사치였다"
"신앙심이 덜해서가 아니라 두살 된 아이 때문 이었다. 배교(背敎), 종교를 배반 해서라도
목숨을 보전해 젖먹이를 거둬야 했다.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성모 께서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예수를 기쁨으로 낳았으며 그 아들의
마지막 길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주지 않았던가.” 난주가 택한 길은.... ‘살아있는 순교’ 였다."
"그녀는 제주도로 끌려갈 때 배가 추자도에 정박하자 모래밭에 있는 소나무에 아이를
묶어놓게 했다.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양민의
삶을 살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그렇지 않으면 노비가 될 터였다. 노비는 대물림 이었다."
"그녀는 제주도에서 37년을 관비로 살았지만, 신앙의 가르침대로 낮은 자들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추자도에 버린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녀가 노년에 아들을 만나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상처와
응어리를 풀어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상상이다. 이럴 때 "소설은 애도의 한 형식" 이 된다.
조선 중엽인 1618년 이지 남매 분재기(分財記) 에 보면, 노비 299구를 8남매가 분할 상속하는 내용이
나오며, 또 1570년 퇴계 이황 선생이 죽었을 때도 집과 논밭 외에 노비 367구를 5남매가 나누니
“조선은 노예제 사회” 였는데... 노비는 인간이 아닌지라 사람 인(人) 자가 아닌 “입 구(口)자” 를 씁니다.
노비제도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후 아베 신조 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가 서울에 무혈
입성후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김홍집 친일내각을 세우니, 이노우에 공사가 지도
해서 “갑오개혁”을 하는데... 노비를 해방하고 천민제도를 폐지하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
를 폐하고 500년간 이어진 과부 재혼금지제도를 철폐하니...... 일본의 강요가 아닌 조선
스스로 개혁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재산과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 했었나요?
1866년 5월 8일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7월 청의 주푸항에 도착해 텐진에서 프랑스 극동함대
(極東艦隊) 사령관 로즈 제독을 만나 신부들의 순교 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시켜줄 것을 요청하니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
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주력 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약속합니다.
1866년 10월 19일 작은배 3척의 함대는 한강을 정찰한후 11월 17일 로즈 제독은 게리에르등
7척 군함과 해병대 600명을 포함한 1,200명으로 강화도로 진출해 11월 20일에는 해병대
의 일부가 갑곶진(甲串鎭)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으며 11월 22일에는
프랑스군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공략해 점령하고 금은이며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합니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등 장수들을 양화진· 통진(通津)· 광성진(廣城津)· 부평(富平)· 제물포
등의 여러 요소와,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지에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면서.....
11월 25일에는 프랑스측에 공문을 보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로즈 제독은
조선 측의 선교사 처형등 천주교 탄압 행위를 비난하면서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합니다.
12월 2일에는 120여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다가 산에 매복중이던 한성근
(韓聖根) 등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으며......
12월 13일 프랑스군은 교동부의 경기수영(京畿水營) 을 포격하고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160여명의 프랑스 해병이 정족산성의공략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매복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 및 사격에 능한... 500여명의 조선군 포수들의
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니
로즈 제독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과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하는데, 12월
17일 프랑스군은 1개월간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등 관아(官衙)에 불을 지릅니다.
강화 이궁과 외규장각등에서 약탈한 19만 프랑 상당의 금은괴와 국왕의 인장, 수천권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갑곶진을 거쳐 청나라로 철군하는데...... 조선측 기록과는 달리
프랑스군의 기록에서는 병인양요 전체 기간중 프랑스군의 피해는 불과 “3명의 전사자와
35명의 부상자” 가 전부였다고 하니... 그럼 어느쪽 기록이 사실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습니다?
프랑스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지도 못하고 철수했으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는데.... 프랑스는 사전 준비
없이 북경의 함대를 급히 파견했을 뿐더러 때마침 베트남에서 반란(베트남인 입장에서는
독립전쟁?) 이 터져 2군데서 동시에 전쟁을 치를수는 없으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2018년에 스무날에 걸쳐 프랑스 전국을 일주하면서 지베르니와 루앙에 르아브르와
몽생미셀을 거쳐 생말로에 도착해 1박한후 페리를 타고 디나르 Dinard 에 가서
브레타뉴 언덕에서 대서양 바다를 내려보다가..... 문득 Préfet Maritime de la
Manche et de la Mer du Nord 이름으로 불렸던 로즈 Roze 제독을 떠올렸습니다.
저 이름은 보불전쟁 기간인 1869년 부터 1871년 까지 프랑스 서북부 브레타뉴 해안 을
지키는 프랑스 함대 사령관 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으로 보는데, 그는 병인양요 후
베이징으로 철수했다가 1867년 일본 요코하마로 가서는 1868년 프랑스로 귀국한후
해군본부를 거쳐 1869년 부터 대서양 브레타뉴 연안 경비사령관으로 근무했던 것입니다.
“이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萬言封事 만언봉사” 에
보면... “이 나라는 썩어 무느지고 있는 집 과 같습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느져 내립니다.” “때가 바뀌면 법과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천하에 없는 법이라고 하더래도 상황에 맞추어 개혁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조 는 귓등으로 흘려들었고 정조때 정약용이 같은 말을 했으나 반짝하다가 농사꾼 강화
도령을 허수아비로 세우면서 무느집니다! 찬란한 문화를 지닌 조선이 망하는데 억울한건.....
일본군과 전투도 한번 치르지 못했으니 그게 원통 합니다! 500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가
망하면서 전쟁은 커녕 공식 전투 한번 없이 망한 사례가 인류 5천년 역사에 또 있는지 궁금합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하늘 같은 상국인 대국 청나라가 영국에 패해 보호막이 사라졌음
에도 아무른 방비를 하지않은 조선이 망하지 않을수도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1866년
병인양요이니.... 대원군은 프랑스와 전쟁 대신에 개항을 해서 서구 문명을 수용
했더라면.... 1871년 신미양요때라도 저리했더라면 혹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성균관을 부수어 유교를 국교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고 천주교를 수용하며 사대부 선비들의
평생의 꿈이자 삶의 목적 그 자체인 과거제도를 폐지하고는.... 청년 100여명을 뽑아
프랑스(미국) 에 유학을 보내 5년후 저들이 돌아오면 관리로 임명하거나, 전공에
따라 철도, 전기, 조선, 철강, 무기공장, 자동차, 무역, 은행, 보험회사들을 세우게 합니다.
양반과 상놈 반상의 제도를 철폐하고 백정과 광대등 천민제도를 폐지하며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한 공노비와 사노비를 해방하고 5백년 철통같이 이어진 과부 재혼금지제도를
폐지하며 왕실과 회게를 분리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며 조세금납제에, 경찰을 행정
에서 분리하고 사법기관을 새로 만들며 의회제도를 도입하고 신문사를 설립했더라면.....
1570년 퇴계 이황이 죽었을때 노비 367구와 1618년 이지 남매 분재기(分財記)에 노비 299구를
분할상속하니 “조선은 노예제 사회” 로, 외거노비는 매년 연공을 주인께 바치는 보물이고
소작농도 많았는데.... 경자유전이라고 양반 지주의 논밭은 시세의 50% 정도 가격에 받아서
소작농과 천민 및 해방 노비에게 주고 매년 5% 씩 10년간 추수기에 분할상환 하도록 합니다.
지주들에게는 토지 대금을 현금이 아니라 장기 채권으로 주어 저 유학생들이 설립하는 조선과 철강에
금속과 무역등 회사의 주식으로 바꾸어 지주에서 주주가 되도록 하며.... 프랑스와 미국에 금광이며
철도등 이권을 주어 임시적이지만 이이제이로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을 견제케 하는 동안에.....
상공업을 발전시켜 커진 국력을 바탕으로 신식 군대를 육성했으면 독립을 유지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