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에 전주 예수병원에서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그 시절에는 비포장 도로가 많았는데 덜컹거리며 오토바이로 출퇴근 하다보니 그런것 같았고(40년도 더 전이라 오토바이도 귀한 교통수단 일때) ,이병원 저병원 전전하다 아주 심한 상태가 되어 아버지가 날 안아서 택시에 실어 예수병원에 입원을 시켯고, 신경외과 과장님인 부원장을 겸하시는 미국인 의사가 수술을 하셨는데, 수술이 잘 되어서 삼일만에 걸어다녔다.
삼십대 때에는 중증근무력증으로 가슴을 열고 흉선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고, 치료제인 그 독한 스트로이드제를 한우큼씩 복용 했지만 치료가 어려운 병이라는데 나는 다행이 일년만에 완해가 되고 후유증도 없었다.
사십대 때에는 갑상선 암 수술을 받았다.
다행이 건강검진에서 초기에 발견이 되었다.
방사선 치료를 세번에 걸쳐 받고 갑상선을 완전히 제거하고 지금은 완치가 되었다.
지금도 허리, 가슴, 목에 수술 흉터가 있으며
가슴에는 수술용 호치키스로 고정했던 흔적인 핀이 엑스레이를 찍으면 지금도 보인다.
난 그때도 상처가 아물기전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직원들이 놀라고 긴장을 하게 했단다.
전신마취를 장시간 해 놓고 이렇게 세번의 대 수술을 받다보니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일부러 각종 통신연수와 자격증을 따기위해 공부를 했고 퇴직후에도
자격증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게 다 기억력을 회복하기 위한 나의 처절한 노력 이라는걸 다른 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억력이 원 상태로 전부다 돌아온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그런 상태로 직장 생활을 어찌할수 있었는가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더구나 창의성이 필요한 기획업무, 그리고 꼼꼼함이 필요한 대출과 감정업무를 해야 되는데 어떻게 버텨 왓는가?
내 책상에는 투명 고무판 밑에 각종 업무처리를 위한 내용과 스크랩을 해둔 각종 자료들, 컴퓨터 모니터 앞에는 메모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게 내 모자란 기억력 대신 이었다.
그래도 밤을 세워서라도 남보다 앞서 가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살다보니 승진도 빠르게 하고 기억력도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 하였다.
기억은 많이 돌아왓지만 공인중개사를 하는 지금도 책상 구석구석 투명 고무판 아래는 업무에 필요한 사항이 스크렙 되어있다.
사람들은 내가 머리가 좋다고 한다. 승진 시험도 제때 합격해서 발령도 일찍 받았고
농협에 필요한 증권, 보험, 펀드 자격증도 직원들보다 먼저, 종류도 더 많이 취득하고 퇴직하고는 공인중개사 자격증과 부동산 관련 각종 자격증도 취득하고 농협에 있을때는 기획 업무를 무리없이 잘 해내는 것을 보고 머리가 좋다고 말들을 한다.
장사꾼 홍보지가 아닌 나의 인생사가 기록된 나의 명함
하지만 그건 날 잘 모르는 예기다. 난 그 모든것을 이루기 위해 남의 두배 세배를
노력해 왓거든요.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을해서 일 처리를 반듯하고 완벽하게, 남보다 더 뛰어나게 하기위해 밤에도, 휴일에도 일을 할때가 많았다.
공인중개사 자격증 취득할 때도 집사람이 무슨 고시공부를 하길래 책상에 붙어 사느냐고 잔소리를 하드만요.
집사람도 날 잘 모른다. 지금도 거래처나 중개관련 내용들을 기억을 못한다고 구박을 하곤 하니까요.
남이 한번 읽고 기억 할때 난 세번을 읽어야 기억이 되고, 고객도 남보다 여러번 만나야 기억을 하니까요.
농협에서 지점장 할때도 다른 지점으로 전출시 마다 주요고객 사진이나 특징을 기록한 메모리 노트를 만들어서 기억이 될 때까지 암기를 하며 문제없이 근무를 했다.
그래도 난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노력해도 안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 쉽고 편하게 되는 일도 없고, 죽도록 노력해서 안되는 일도 없다.
이건 내가 터득한 진리이자 진실일 것이다.
그 모진 병들을 다 이겨내고 직장에서도, 정년 퇴직후에도 멋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나 스스로 큰 박수를 보낸다.
여러분 !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멋진 사람인걸 잊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