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부산에서 끝이 난다. 아니 부산에 오면 바다가 시작된디. 아니 부산은 두 개의 산으로 되어 그 아래 바짝 엎드린 도시다. 말이란 게 '아'다르고 '어'다르다라 하지만 사용하는 위치나 사용하는 상황 등에 따라 같은 내용인가 하면 상반된 내용으로 되기도 한다. 이런 탓에 인간의 삶이 참으로 다양하고 다기하다.
이쯤해서 부산의 두 산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당연히 그 하나는 금정(金井)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부산(釜山-산의 이름)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금정산을 국립공원으로 하자고 야단들인가하면, 또 다른 山인 부산은 동구 도서관이 있는 증산왜성의 산 그 산이었다가, 아니고 자성대 그곳의 산이 부산이다라는 말로 설왕설래한다. 또 조선전기의 부산이 어떻고 부산 후기의 부산이 이렇다고들 한다.
금정산은 어떤 산인가하면 금샘이 있는 산이다. 즉 금샘이 바로 金井인 것이다. 금정산은 양산시 동면 다방리에서 시작하지만 정작저 멀리서부터 달려운 낙동정맥의 한 줄기다. 대체로 금정봉(또는 쇠미산)이 금정산 끝이면서 여기서부터는 백양산이 시작한다. 그리고 다대포 몰운대에 이르러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부산은 참으로 문화적 자산이 다양한 도시, 그래서 행복도시이고 근대와 고대가 동행하는 역동적인 도시다.
부산이라는 거대 도시의 연원과 그리고 거대도시의 융성과 번성, 근대화의 시발점 등을 돌아보면 앞뒤가 딱들어맞는 도시이며 세계적으로 역사를 쓰기에 가장 적합한 도시다.
동래와 연산동 복천동고분과 연산동고분은 어떤 곳인가 참으로 기가 막힌다. 이 곳에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쯤해서 삶을 이어가던 분들이 잠들어계신다. 그분들은 지금 우리 곁에 안계시지만 혼은 우리주변을 항상 떠돌고 있다. 금정산 그 아래 그리고 온천천변과 수영강 변에 언제나 발을 담그며 그리고 농기구를 씻고 칼을 갈며 그렇게 사셨다.
그 즈음 부산은 그냥 외진 바닷가 해안선을 간직한 해변의 포구와 발끝을 맞댄 그런 곳이었다. 왜가 무시로 드나들면서 이곳에 눈독을 들이는가하면 고려말에 잔뜩 독을 품고 덤비곤 했다.
그 무렵 왜는 무로마치시대라하여
① 1338년 무로마치막부의 시작.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쇼군에 임명되어 동생 타다요시(直義)와 함께 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내분으로 타카우지․타다요시 형제가 싸우게 된다. 이러한 동란이 길어지면서 각지의 무사들은 南北 両朝로 갈라져서 싸웠다.
② 막부의 지배가 안정된 것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시기로 그는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하나노고쇼(花御所)라는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을 짓고 그 곳에서 정치를 하였으므로 이 막부를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고 부른다. 요시미츠는 1392년에 남조 측과 교섭해서 남북조의 합체를 실현하고 막부의 전국지배를 완성시킴.
③ 무로마치막부는 각 지방에 있는 슈고(守護)의 영국(領国) 지배를 기초로 함. 막부는 지방무사를 조직하기 위해 슈고의 권한을 강화했기 때문에 슈고는 그것을 이용해 장원을 침략하고 지역의 무사를 가신으로 만들어 세력을 넓힘. 각 지방에 있던 슈고는 남북조의 동란이 깊어지는 가운데 점차 커다란 힘을 얻게 되어 일국(一国) 전체에 걸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데 이러한 슈고를 가리켜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고 한다. 슈고다이묘 중에는 여러 국에 걸쳐 슈고를 겸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쇼군의 권력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④ 1573년 무로마치(室町)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부산은 왜구의 노략질 내지는 피신의 장소였다.
고려말에 와서 연산 망미동시대를 마감하고 지금의 동래부 동헌을 새로 열어 동래가 명실상부 행정의 중심지가 되기에 이른다. 그 사이 부산은 왜구들이 넘나들면서 해안선 주변에 그들나름의 거처를 마련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무역 등을 내세워 우리 해안선과 부산을 넘보고 있엇다. 특히 대마도와 인접한 탓에 대마도에 살고 있는 왜들에게 부산은 언제나 기회의 땅 그체였었다. 왜인 그들이 맞닥뜨린 산은 금정산보다 부산이 먼저였다. 그래서 부산은 왜와 깊은 역사적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외세의 바다 중심의 부산이 된 역사"(부산 7000년 그 영욕의 발자취-최해군저)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당시의 일본역사를 끌이들이는가 하면 우리 부산이라는 거대도시의 한 축이 어쩌면 일본과의 깊은 연관을 가지면서 성장해온 이력 때문이다. 그래서 부산을 말하다보면 어느새 일본이 튀어나온다. 그런가하면 가야와 삼한시대 청동기 시대도 달려나온다.
금정산은 바로 온천천과 수영강을 유장하게 펼쳐놓으면서 사람살이가 좋은 그런 장소로 남아 있게 되었다. 우리 사람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씨족,부족국가를 이루면서 삶터를 가꾸기도 하고 결국에는 죽음의 흔적도 남기게 된다. 금정산은 청동기와 그 이전 과 그 이후의 사람들이 군집형태로 모여 움막을 짓기도하고 강변에 곡식을 재배하고 이를 항아리를 만들어 갈무리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때로는 왜와 거칠게 항전하기도 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어찌 할 것인가. 바로 이 두 산을 중심으로 뻗어내린 천혜의 사람살이터를 우리는 곧장 어느 한쪽만 바라보면서 부산이라는 도시를 운운하곤 한다. 금정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언제나 순리이지만 당장은 눈앞의 바다를 굽어보면서 정작 바다를 보기위해 딛고선 산마루, 아니면 준령을 잊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