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선(崔惟善)은 현종(顯宗) 때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여 7품직을 제수 받고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다. 문종(文宗) 때 여러 차례 승진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왕이 덕수현(德水縣)에 흥왕사(興王寺)를 창건하고 양천(楊川)으로 현을 옮기라고 명하자 최유선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옛날 당(唐) 태종(太宗)의 신성하고 뛰어난 용맹은 1,100년 이래로 견줄 사람이 없었지만, 평민을 출가시켜 승려로 삼거나 사원과 도관(道觀)을 창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고조(高祖)의 뜻을 준수하였으므로, 사서(史書)에서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태조신성왕(太祖神聖王)께서 「훈요(訓要)」에서 말씀하시기를, ‘국사(國師) 도선(道詵)이 국내 산천의 순역(順逆)을 살펴 사원을 창건할 만한 곳에는 사원을 건축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후대의 왕 및 공후(公侯)·귀척(貴戚)·후비(后妃)·신료들이 다투어 원찰[願宇]을 지어 지덕을 훼손하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조종(祖宗)으로부터 차례로 쌓아온 기업을 이어 받아 나라가 태평한 날이 오래되었으니, 진실로 비용을 절약하고 사람들을 아끼며 왕업을 잘 지켜[持盈守成] 후사에 전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민(民)의 재물을 비게 하고 민력(民力)을 고갈시키며, 급하지 않은 비용을 지출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른 날에 왕을 모시고 한담을 나누다가 왕이 조용하게 위로하고 칭찬하며 말하기를, “간쟁하는 것이 곧 충(忠)이고 좋은 것만 따르는 것은 아첨이다.”라고 하였다. 최유선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창업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오히려 쉽고, 이루어진 것을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유선이〉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권이부상서사(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權吏部尙書事)에 임명되었는데, 〈당시에〉 시어사(侍御史) 노단(盧旦)이 주문(奏文)을 올려 왕의 뜻을 거스르니 왕이 노하여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이 자는 충성되고 바른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며 끌어내어 관복을 벗기고 포박할 것을 명하였다. 최유선이 아뢰기를, “신하에게 죄가 있으면 당연히 헌사(憲司)로 보내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의 〈노한〉 마음이 풀렸다.
최유선은 후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고 동생 최유길(崔惟吉)은 수사공 섭상서령(守司空 攝尙書令)이 되었는데, 부친 최충(崔冲)은 나이가 많아도 오히려 병은 없었다. 하루는 왕이 나라의 원로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니 최유선과 최유길이 〈부친을〉 부축하여 나갔다. 당시에 훌륭한 일이라고 칭찬하였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 김행경(金行瓊)이 시를 지어 축하하며 이르기를, “상서령이 중서령을 모시고 을과(乙科) 장원이 갑과(甲科) 장원을 부축하네.”라고 하였다.
왕이 중구절(重九節)을 맞아 송악정(松嶽亭)에서 잔치를 베풀고, 사신(詞臣)들에게 명령하여 시를 짓도록 하였다. 〈왕이〉 최유선의 시를 보고 칭찬을 그치지 않았으며 상승국(尙乘局)의 말을 하사하였다.
곧이어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에 〈임명하고〉, 추충찬화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 守太師 上柱國)을 더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시켰다.
〈문종〉 29년(1075)에 죽으니 시호를 문화(文和)라고 하였다. 최유선은 〈최충의〉 대를 이은 유종(儒宗)이었고 두 왕을 바르게 보필하였는데, 비록 혁혁하다는 칭찬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중하였다. 선종(宣宗) 때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