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금오산 자락에 있는 금남면 대치마을에서 남해 바다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절경이다. 옛날부터 면우 곽종석 등 지역 선비들이 남해 금산 등지를 유람할 때 반드시 이 마을에 들러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다. 경치가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마을에 어진 선비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진양정씨 은열공파 후예들이 살아왔다. 입향조인 오봉(鰲峰) 정대수(鄭大壽)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이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곤양을 확보하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가도록 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이 마을에 살았던 선비 중 한사람이 바로 은열공 후예인 해산(海山) 정해영(鄭海榮)이다.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해산정(海山亭)을 보면 단아한 현판 글씨, 그리고 옛 선비의 기풍이 스며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응향실(凝香室)’이란 현판을 바라 보노라면 옛 선비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퍼져 나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해산정 주인이 바로 해산 정해영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산에서 생을 마치겠다는 바람을 ‘해산(海山)’이란 호에 담아 평생을 산 선비이다. 그는 1868년 수은(睡隱) 원휘(元暉)의 아들로 태어났다. 겨우 10여세에 어버이 섬기는 법을 알아 일찍이 부모 명을 받듦에 한 치의 어김도 없었다. 부친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자 형과 함께 받들기를 4년을 한결같이 해 칭송이 자자했다. 자라서는 중형 한재공 정규영을 따라 삼종숙인 효재공 정원항에게 수학을 했는데, 공이 칭찬하기를 “우리 집안의 쌍봉(雙鳳)”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885년에 중형인 한재공이 삼가의 삼산(三山)으로 이주를 하자 함께 가서 형제가 함께 거처하며 강학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어 세상에 드러날 것을 생각하고, 20세 때에 서울에 이름난 인사들과 왕래를 하였고, 과거에 응하여 의릉참봉(義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또 어진(御眞)을 서경에 봉안할 때 배종한 공으로 6품직에 올라 승훈랑이 되었으나, 곧 벼슬 길의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독서에 전념했다. 서울에 있을 때 일찍이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의 ‘동현학칙(東賢學則)’을 필사하여 책상에 항상 두고 살펴서 덕에 나가는 자료로 삼았다.
하려는 순암 안정복의 제자로 성재 허전의 스승이다. 그러니까 근기남인으로 성호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려가 지은 동현학칙은 주로 8~15세에 해당하는아동들이 사서(四書)를 배우기 이전에 읽던 초학교재라고 할 수 있다. 해산이 ‘동현학칙’을 가까이 두고 익혔다는 것은 바른 몸가짐을 기본으로 삼아 그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길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거창 다전으로 가서 면우 곽종석 선생을 뵙고 제자되기를 청하니, 면우가 그의 굳은 지조를 보고 이를 인정하였으며, 당대 지역 학계를 주도하던 대계 이승희, 회당 장석영 및 물천 김진호 등을 찾아가 또한 질의를 하였다. 해산은 삼가 노파(魯坡)의 산수를 좋아해 호를 노강(魯岡)이라 하고 수향정(漱香亭)을 강 위에 짓고 앞에 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연을 심고 고기를 기르며 화초를 심고 벗이 찾아오면 술 따르고 시를 지으며 고금을 담론하였다.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오는 사람들이 방에 항상 방에 가득찼다고 한다. 일찍이 해산을 만난 우인 조규철은 “참봉 해산 정공은 일찍이 곽면우 선생을 스승삼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 겨우 명을 얻어 국량을 펼쳤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강 위에 별장을 지어놓고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보내며 더욱 명산 대천을 찾아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었고, 당시의 스승과 뛰어난 선비들과 교유하지 아니함이 없었다.”라고 그의 삶을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해산은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명산 대천을 두루 찾아 다녔으니 금강산 가야산 두류산 금산 계룡산 압록강 등을 두루 유람하며 흥취를 시로 남기기도 했다.
또 고향인 금오산의 중방동(衆芳洞) 산수가 빼어나 일찍이 관포 어득강, 매헌 정기룡 등의 유적이 있었는데, 해산은 이를 방치해 없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 고장의 수치”라 여겨 계를 조직해 정자를 만들고 정에 돌에 새겨 표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매년 봄 가을로 동지들과 시를 읊고 돌아왔다. 1930년에는 진주의 옥봉동으로 이사해 지역의 문인 선비들과 ‘촉석음사(矗石吟社)’를 설립하여 시를 읊조리면서 응취를 돋우웠다. 그러다 진주에 머문지 수 년만에 세상이 시끄러워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 호를 해산이라 하니, 대개 바다에서 태어나 산에서 늙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때 해산은 나라 잃은 시대를 살아가던 선비로서의 심정을 밖으로 표출하고자 시를 지으며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곤양 남쪽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형 따라 18세에 삼가 삼산으로 들어갔네/성질은 편협하여 항상 바다를 생각하고/뜻은 분분하니 산을 사랑하네/빈주(賓酒)는 비록 공북해(孔北海)가 부끄러우나/풍류는 항상 사동산(謝東山)을 흠모하네/어찌 인간세상의 변화를 견딜고/고향 동산에 누워 산보는 일 기쁘네” 해산의 마음이 이 시에 모두 드러나 있다. 해산은 고향의 산수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 1946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임종에 자녀와 조카들에게 “호제충신의 도리와 정자들을 잘 보존하라”는 말을 남겼다.
하동 금오산 자락에 있는 금남면 대치마을에서 남해 바다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절경이다. 옛날부터 면우 곽종석 등 지역 선비들이 남해 금산 등지를 유람할 때 반드시 이 마을에 들러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다. 경치가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마을에 어진 선비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진양정씨 은열공파 후예들이 살아왔다. 입향조인 오봉(鰲峰) 정대수(鄭大壽)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이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곤양을 확보하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가도록 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이 마을에 살았던 선비 중 한사람이 바로 은열공 후예인 해산(海山) 정해영(鄭海榮)이다.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해산정(海山亭)을 보면 단아한 현판 글씨, 그리고 옛 선비의 기풍이 스며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응향실(凝香室)’이란 현판을 바라 보노라면 옛 선비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퍼져 나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해산정 주인이 바로 해산 정해영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산에서 생을 마치겠다는 바람을 ‘해산(海山)’이란 호에 담아 평생을 산 선비이다. 그는 1868년 수은(睡隱) 원휘(元暉)의 아들로 태어났다. 겨우 10여세에 어버이 섬기는 법을 알아 일찍이 부모 명을 받듦에 한 치의 어김도 없었다. 부친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자 형과 함께 받들기를 4년을 한결같이 해 칭송이 자자했다. 자라서는 중형 한재공 정규영을 따라 삼종숙인 효재공 정원항에게 수학을 했는데, 공이 칭찬하기를 “우리 집안의 쌍봉(雙鳳)”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885년에 중형인 한재공이 삼가의 삼산(三山)으로 이주를 하자 함께 가서 형제가 함께 거처하며 강학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어 세상에 드러날 것을 생각하고, 20세 때에 서울에 이름난 인사들과 왕래를 하였고, 과거에 응하여 의릉참봉(義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또 어진(御眞)을 서경에 봉안할 때 배종한 공으로 6품직에 올라 승훈랑이 되었으나, 곧 벼슬 길의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독서에 전념했다. 서울에 있을 때 일찍이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의 ‘동현학칙(東賢學則)’을 필사하여 책상에 항상 두고 살펴서 덕에 나가는 자료로 삼았다.
하려는 순암 안정복의 제자로 성재 허전의 스승이다. 그러니까 근기남인으로 성호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려가 지은 동현학칙은 주로 8~15세에 해당하는아동들이 사서(四書)를 배우기 이전에 읽던 초학교재라고 할 수 있다. 해산이 ‘동현학칙’을 가까이 두고 익혔다는 것은 바른 몸가짐을 기본으로 삼아 그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길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거창 다전으로 가서 면우 곽종석 선생을 뵙고 제자되기를 청하니, 면우가 그의 굳은 지조를 보고 이를 인정하였으며, 당대 지역 학계를 주도하던 대계 이승희, 회당 장석영 및 물천 김진호 등을 찾아가 또한 질의를 하였다. 해산은 삼가 노파(魯坡)의 산수를 좋아해 호를 노강(魯岡)이라 하고 수향정(漱香亭)을 강 위에 짓고 앞에 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연을 심고 고기를 기르며 화초를 심고 벗이 찾아오면 술 따르고 시를 지으며 고금을 담론하였다.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오는 사람들이 방에 항상 방에 가득찼다고 한다. 일찍이 해산을 만난 우인 조규철은 “참봉 해산 정공은 일찍이 곽면우 선생을 스승삼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 겨우 명을 얻어 국량을 펼쳤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강 위에 별장을 지어놓고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보내며 더욱 명산 대천을 찾아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었고, 당시의 스승과 뛰어난 선비들과 교유하지 아니함이 없었다.”라고 그의 삶을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해산은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명산 대천을 두루 찾아 다녔으니 금강산 가야산 두류산 금산 계룡산 압록강 등을 두루 유람하며 흥취를 시로 남기기도 했다.
또 고향인 금오산의 중방동(衆芳洞) 산수가 빼어나 일찍이 관포 어득강, 매헌 정기룡 등의 유적이 있었는데, 해산은 이를 방치해 없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 고장의 수치”라 여겨 계를 조직해 정자를 만들고 정에 돌에 새겨 표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매년 봄 가을로 동지들과 시를 읊고 돌아왔다. 1930년에는 진주의 옥봉동으로 이사해 지역의 문인 선비들과 ‘촉석음사(矗石吟社)’를 설립하여 시를 읊조리면서 응취를 돋우웠다. 그러다 진주에 머문지 수 년만에 세상이 시끄러워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 호를 해산이라 하니, 대개 바다에서 태어나 산에서 늙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때 해산은 나라 잃은 시대를 살아가던 선비로서의 심정을 밖으로 표출하고자 시를 지으며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곤양 남쪽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형 따라 18세에 삼가 삼산으로 들어갔네/성질은 편협하여 항상 바다를 생각하고/뜻은 분분하니 산을 사랑하네/빈주(賓酒)는 비록 공북해(孔北海)가 부끄러우나/풍류는 항상 사동산(謝東山)을 흠모하네/어찌 인간세상의 변화를 견딜고/고향 동산에 누워 산보는 일 기쁘네” 해산의 마음이 이 시에 모두 드러나 있다. 해산은 고향의 산수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 1946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임종에 자녀와 조카들에게 “호제충신의 도리와 정자들을 잘 보존하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