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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안식을 위한 인도여행-1
아직도 여행에 대한 설레임과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다. 분명 예전에도 지났던 그 길이고 보았던 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새롭고 마치 처음 마주하는 것처럼 두렵고 낯설기만 하였다.
인도. 한마디로 인도는 이렇다, 이런 곳이다. 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다들 하는 말이 인도여행이 어떠했냐고 묻는데 어떠했다라고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굳이 표현하자면 심신이 지친 나그네가 되어 쉼을 얻으려고 하였는데 더 많은 번뇌와 갈등과 혼란만 가득 안게 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여러 가지 외부요인들이 있었겠지만 내가 구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가운데 복잡한 미로와 발 디딜 틈조차 없는 바라나시의 수많은 군중들 속에 던져졌던 것 같다.
가야할 곳도 모르고, 해야 할 것도 모르고, 모든 것들이 낯설고, 생소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가운데 생김새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른 낯선 이방인의 방황이라고 할까?
정말 바라나시에서 겪었던 것처럼 수백수천이 되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가는데 휩싸여 나도 모르게 떠밀려가고 있는데 그렇게 밀고 밀치는 가운데 다다른 곳 갠지즈 강가에선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의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불길이 온몸을 휘감는 듯 불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고 또 한 쪽에서는 하나 둘도 아닌 수많은 죽은 시신들이 나무장작 위에 싸늘하게 뉘여 타오르는 화염 속에 숯덩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죽음과 삶이 뒤엉켜 갠지스강물을 향해 던져지는데 신을 향한 광란의 제사의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밤이 깊어지니 그 요란했던 악기소리와 노랫소리는 점차 사그라지고 그 뜨거운 불꽃도 커져가며 그 많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되돌아가고 깊은 정적이 맴돌다 갠지스 위로 스치는 바람소리와 찰랑거리는 물결소리 만이 적막을 깨운다.
그곳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아니 지나온 내 삶의 흔적이 낯설게, 외롭게 두려움에 휩싸여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 다 놓아버려
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많다 적다를
분별하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하면 집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옳은 것도 놓아버리고
그른 것도 놓아버려라
긴 것도 놓아버리고
짧은 것도 놓아버려라
하얀 것도 놓아버리고
검은 것도 놓아버려라
바다는
천 개의 강
만 개의 하천을 다 받아들이고도
푸른 빛 그대로요
짠맛 또한 그대로이다 (원효·신라의 승려, 617-686)
이번 여행의 주제가 ‘영혼의 안식’이다. 늘 일상에서 숨고르기조차 힘들만큼 분주하게 달려온 우리에게 이제는 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볼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도에서 진정 정신적인 쉼과 안식을 누릴 수는 있는 것인지?
드디어 인천공항을 출발, 홍콩을 경유하여 인도 델리 시내에서 24km 떨어져 있는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은 인도의 관문이자 가장 붐비는 공항 중 하나이며 35개의 외국 항공사가 취항하는 대표적인 국제공항 임에도 불구하고 터미널의 규모는 무척 조촐하였다. 터미널 밖에서 기다리는 가이드를 만나 버스를 타고 우리 일행은 곧바로 남부델리에 위치한 숙소를 향해 낯설음과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다음날부터 강행군이라는 가이드의 엄포로 호텔 주변을 살피는 여유조차 가져보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 다음 날 아침 우린 뉴델리역에서 열차를 타고 럭나우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 럭나우에서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한 후 4~5시간을 타고 가는 버스투어가 시작되었다. 럭나우에서 버스를 타고 쉬라바스티로 이동하는데 자동차 클락션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시골길을 가면서도 도로에는 화물차, 오토 릭샤, 사이클 릭샤, 자전거, 우마차, 경운기, 자전거, 사람들, 소몰이꾼과 소떼들이 뒤엉켜 불과 120여 km를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4~5시간이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노애락 삶의 이야기들이 내 눈과 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정작 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차창 밖으로 던지려 하고 있다.
+ 마음을 비우는 시
차창 밖으로 산과 하늘이
언덕과 길들이 지나가듯이
우리의 삶도 지나가는 것임을
길다란 기차는
연기를 뿜어대며 길게 말하지요
행복과 사랑
근심과 걱정
미움과 분노
다 지나가는 것이니
마음을 비우라고
큰 소리로 기적을 울립니다, (이해인, 시인)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는 것이니 그 무엇에도 미련을 두지 않고 털어버리기로 하였다. 비우고 또 비워 텅 빈 마음에 새로운 것들을 담아보리라 마음을 다 잡아본다.
쉬라바스티에 도착하여
쉬라바스티(한역 舍衛城)는 고대 북인도에 형성되었던 16개의 나라들 중 가장 강력한 군주국가 코살라국의 수도로서, 당시 이곳 코살라국에는 아지타 케샤캄발리의 유물론적 사상 및 자이나교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곳 쉬라바스티에는 석가모니의 전생애에 걸쳐 가장 오래 머물러 계셨던 까닭에 불교경전상의 무수한 일화를 담아 갖고 있는 곳이고, 현재에도 사위성 및 기원정사의 유적지며 앙굴리마라 스투파, 수닷타 장자의 집터와 더불어 데바닷타가 지옥에 빠져 들어갔다는 곳, 그리고 석가모니가 당시 유행하던 이교도들과의 대결에서 수많은 기적을 드러내 보이셨다는 곳 등이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에게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얼마 전에 서울시공무원으로 신규 채용되는 연수생들을 대상으로 서울시인재개발원에서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고 있는데 우리가 부르는 수도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와 서울특별시의 '서울'이라는 제도상의 명칭이 신라 초기의 도읍지(지금 경주)의 지명이자 국명이던 서벌 또는 서나벌 · 서야벌에서부터 시작하여 변전되었음을 얘기하고 고려·조선에서도 순 우리말로 수도를 서벌(徐伐) · 서울(徐穹) 등과 같은 '서울'로 부르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강의를 해왔다. 그런데 이 곳 지명인 쉬라바스티(Sravasti)가 한자 室羅筏로 음역되어 우리말의 서라벌로 쓰였다하니 서울의 어원이 바로 이 곳 쉬라바스티가 아닌가? 고대 인도의 지명이 우리의 수도에 대한 칭호로 쓰이다니. 우리와 깊은 인연이 맺어진 곳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석가모니께서 이곳 쉬라바스티를 처음 방문하신 것은 성도 후 약 4년 경의 일로 추정된다. 석가모니가 라즈기르의 죽림정사에 머물고 계셨는데, 그때 자기 아들 혼사를 위해 라즈기르를 방문한 수닷타(須達多)장자는 죽림정사에서 부처님을 찾아 뵙고 이곳 쉬라바스티를 방문해 주시기를 청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먼저 이곳 쉬라바스티에 도착한 수닷타장자는 이후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머물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프라세나짓왕의 아들 “제타(祇陀)태자 소유의 한 동산은 풍경이 좋아 숲과 꽃과 샘과 못, 수석(水石)과 기이한 새·짐승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리하여 장자는 태자에게 그 동산을 팔라고 청하였으나, 이에 태자는 “만일 동산을 사려거든 금으로 그 동산을 한번 펴서 덮어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수닷타장자는 곧 집에 있는 모든 금을 실어와 이곳 동산에 깔기 시작하였고, 이후 동산을 사고자 하는 장자가 이곳에 부처님께서 머무실 정사(精舍)를 설립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타태자는 장자의 마음에 크게 감복하여 그 땅을 내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이곳 쉬라바스티에는 크나큰 정사가 건립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불렀다. 기타태자(祇)의 나무동산(樹)에 외롭고 쓸쓸한 이들(孤獨)을 돕는(給) 수닷타장자가 세운 절(園)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이를 줄여 기원정사(祇園精舍)라 부르게 됐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이곳 기원정사에서 24회 가량의 안거를 지내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이곳에 머무시는 데에 따른 수많은 경전상의 일화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초창기에 생겼던 일로는 [능엄경(愣嚴經)]을 설하였음을 들 수가 있겠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시자 아난다의사랑에 얽힌 테마가 그 시발점이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제자 아난다가 쉬라바스티 성안에서 탁발을 마친 다음 어느 마을의 우물가에 이르러 마탕기라 불리우는 물 긷는 처녀에게 물 한 대접을 청한 일이 있었다. 이에 아난다가 물을 마시고 돌아간 후 그 처녀는 아난다의 숭고한 용모에 반해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고, 주술사였던 자기 어머니에게 호소하여 아난다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해달라고 조르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의 어머니는 특이한 주술로서 아난다의 정신을 산란스럽게 만들어 아난다가 그 집을 찾아오도록 유도를 하게 된다. 잠시 후 아난다가 불현듯 마탕기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무렵 처녀 마탕기는 방안에 의자와 침대를 준비하였고, 이내 그 집에 이르러 의자에 앉아있던 아난다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어 흐느껴 울면서 부처님의 구원을 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원정사에 머물러 계시면서 아난다의 하소연을 천안(天眼)으로 관찰하신 석가모니는 문수보살에게 명하여 아난다를 그녀의 집으로부터 구해오도록 시켰는바,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능엄경]의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후 경전은 [백산개다라니(白傘蓋陀羅尼)의 공덕력을 찬양하면서 그 다라니의 힘으로서 모든 마(魔)의 장애를 물리치고 여래의 진실한 지견을 통해 생사의 미혹함에서 벗어나게 됨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난 유혹을 떨쳐낸 아난다 보다 그 출가수행자의 모습에 반해 마음을 빼앗기고 목숨을 다 던져도 아깝지 않은 그런 사랑에 빠진 마탕기의 애절한 사랑이 더 마음을 움직인다.
+ 그리움을 마시다
님을 만나
나 님에게 흠뻑 취하였어요
님을 만난
그날 그 순간부터
나의 일상의 밥은
그리움
하루 세 끼니를
꼬박 그리움으로 채워요
그리움으로 내 몸이야
살며시 야위어 가더라도
그리움으로 내 정신은
더욱 초롱초롱 깨어 있어요
삼라만상이 고요히 잠든
지금 이 시각에도
님 향한 내 그리움은
졸음을 몰라요 (정연복. 시인)
하지만 출가한 몸이 어찌 세상의 정에 묶여 정진을 포기할 수가 있으랴?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국경지대에 전쟁이 끊이질 않던 시절, 진리에 대한 일념으로 목숨을 건 당 유학길에 오른 두 승려가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밤 무덤가에서 일박을 한 뒤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 어둠 속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이 해골 물인 줄 모르고 맛있게 먹은 원효가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一切唯心造)’는 진리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원효는 그 길로 신라로 돌아가 일승(一乘)사상을 정립해, 동아시아 불교의 최대난제인 중관과 유식의 공․유(空有) 대립과 갈등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선 신라의 천재승려 의상은 원효의 중도 포기와 상관없이 자신의 중국유학을 강행했다. 원효의 깨달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지만, 자신의 열정을 포기하기에 의상은 너무 젊었다. 홀로 유학을 강행한 의상의 꼿꼿한 기개와 열정은 중국 땅에서 더욱 버거운 난관을 만나게 된다.
의상은 그 길로 중국 등주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잠시 한 상인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단아하고 아리따운 규수가 있었다.
의상의 청아하고 도도한 모습을 본 선묘는 그가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사랑에 빠졌다. 의상 또한 그녀의 아름답고 고상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의상은 선묘에게 “나는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며 신명은 그 다음으로 했다”는 말을 남기고 종남산을 향해 떠났다. 의상의 굳은 의지를 본 선묘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 보살도를 성취하겠다”고 약속한다.
그 후 지상사로 올라간 의상은 지엄대사의 문하에서 일승법계(一乘法界)를 성취하였고, 지엄의 수제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 선묘는 의상이 신라로 돌아갈 때 바칠 법의와 발우를 담은 법구 상자를 정성스럽게 마련하며 의상에 대한 사모의 정을 보살에 대한 서원으로 바꾸어가고 있었다. 그 세월이 무려 10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묘는 의상이 이미 신라를 향해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의상이 갑작스레 신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치기 위해 10만 대군을 파병하기로 했다는 정보를 비밀리에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인들에게 안부를 전할 틈도 없이 부랴부랴 귀국길에 오른 의상. 그를 좇아 바닷가로 달려간 선묘는 의상을 실은 배가 저 먼 바다를 향해 떠나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선묘는 자신의 법구상자를 바다에 던졌다. 그러자 법구 상자가 파도를 가르고 의상의 품에 가 닿는 것이 아닌가. 이를 바라보던 선묘는 “저는 내세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의 몸으로 법사의 대원을 돕는 몸이 되게 하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뛰어들었고, 용으로 변하여 의상의 귀국길을 수호했다.
의상대사를 사랑한 선묘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매우 훌륭한 여인이 될 수도, 너무도 불쌍한 여인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로, 절망을 삼키며 십여년을 지새운, 그리고 끝내는 사랑하는 남자가 떠난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진 가련한 중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선묘의 삶 속에서 인내와 희생, 그리고 불국토를 향한 원력을 보았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애욕은 포기할 줄 아는 희생이 바로 그녀의 사랑을 완성시켰다는 이야기다.
후대 사람은 선묘의 사랑을 평하기를“재가의 애심(愛心)은 용맹한 신심(信心)을 일으켰다. 공경에 의하여 사랑을 이루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박용재·시인)
이후 영주의 부석사에도 그리고 서산의 부석사에도 선묘의 사당이 모셔져 있고, 바다 건너 일본에도 그 얘기가 전해져 교토 서북쪽 끄트머리에는 고잔지(高山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절은 한국과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곳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고승 원효와 의상의 일화가 담겨있는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 소장돼 있고 의상을 사랑한 선묘라는 여인이 보살로 모셔져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쉬라바스티에서 생겨난 중요 사건으로 “챤다마나의 모함”이라는 것이 있다. 그때는 석가모니께서 이곳 쉬라바스티에 머무신지 몇 년째가 되었던 때였는데 수많은 이교도들이 부처님을 시기하여 여러 가지로 부처님을 방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에 이교도들은 챤다마나(친쟈)로 하여금 불교신자로 가장케 하여 날이 저물어 기원정사에 들어가고 새벽녘에 정사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여러 번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였다. 그 뒤에는 점차 배가 불러가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 의혹을 사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들 앞에서 법을 설하고 계셨을 때 그 여인은 법회의 한복판에 나아가 “어찌 법만을 설하시고, 우리 사이에 태어나게 될 아이는 돌볼 생각을 안 하십니까?”하고 외쳤다. 이에 그곳에 모인 대중들이 의아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하늘의 제석천이 생쥐로 변하여 그녀의 허리끈을 물어뜯고, 홀연 바람이 불어 그녀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하였다. 그녀의 배에서는 나무바가지 한 개가 굴러 떨어졌고, 이 일이 들통 난 챤다마나(친쟈)는 정사에서 뛰어나와 도망을 치던 중 갑자기 땅이 갈라져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당시 자이나교 및 많은 외도들의 사상이 팽배해 있던 이곳 쉬라바스티에서 이와 같은 사건은 있었을 법도 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경전의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종종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잠시 라즈기야에 머물고 계셨던 석가모니께서는 “지금부터 4개월 뒤에 쉬라바스티 동쪽 암라(망고나무)숲에서 신통을 보이겠노라” 선언을 하시고 그로부터 4개월 후 석가모니는 그의 제자들과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교도들과 신통력의 대결을 보이셨고 동산지기가 부처님께 드렸던 망고를 잡수신 다음 그 씨를 땅에 심어 순식간에 피어오르게 하였으며, 부처님 몸에서 천분의 부처가 동시에 나타나 보이는 등 수많은 기적을 드러내 보이셨다고 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동산, 기원정사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는 B.C. 250년 경 순례차 이곳을 찾은 아쇼카 왕에 의해 두 개의 석주와 스투파, 그리고 기원정사 근처에 하나의 승원을 건립하였다고 하고 A.D.1~2세기에 걸친 쿠샨왕조 기간에 또 몇 개의 스투파와 사원, 그리고 불상이 조성되기도 하였다고 하여 A.D. 407년경 법현(法顯)스님이 이곳을 찾았을 때 “기원정사를 둘러싸고 98개의 승가람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A.D. 637년 경 현장(玄奘)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굽타왕조 하르스왕(606~647년 재위)의 통치기간으로 이미 쉬라바스티 및 기원정사 일대는 심하게 파손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가 찾은 기원정사는 남북 457M, 동서 152m에 이르는 승원유적지의 폐허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고 벽돌의 잔해와 주춧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기원정사 유적지의 남쪽문을 통과해 유적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나뭇가지에 불교기를 걸어 여러 갈래로 늘어뜨린 나무가 선뜻 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아난다의 보리수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나무이다. 석가모니 당시 이곳에 거주하는 많은 승려들과 신자들은 부처님이 언제나 이곳에 머물러 계셨으면 하고 바랬음에도 석가모니는 일년중 우기(雨期) 석달동안만 이곳에 머무시었다.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의 바램에 의해 아난다는 석가모니에게 보드가야에 심겨진 보리수의 어린 묘목 하나를 이곳에 옮겨와 심기를 청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를 승낙하셨고 목갈랴야나는 신통의 힘으로 공중을 날아 보드가야 보리수의 묘목을 옮겨왔으며, 이후 수닷타장자에 의해 이곳에 심겨진 채 이후 석가모니 부재시 이 나무는 이곳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의 귀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곳 보리수는 아난다의 보리수라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 보리수 옆에는 2개의 스투파 유적이 발굴되어 있는데, 그 옛날 수닷타장자가 이곳 동산에 황금을 깔 때 금을 제련했던 장소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아난다의 보리수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걸어들어가면 수닷타장자에 의해 건립된 최초의 기원정사의 승원터가 나타나는데 이른바 ‘코삼바쿠티’라 불려진다. 원래 부처님께서 개인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지어졌던 것으로 작은 규모의 초가집 형태를 띄고 있었으나 이후 벽돌건물로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법현의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머물고 계셨을 당시 프라세나짓왕이 전단향목으로 불상을 조성, 석가모니께서 머물던 간다쿠티(香殿)에 모셔 두었는바, 이후 이곳에 돌아온 부처님께서는 이 불상과 거처를 달리하여 남쪽 20m 떨어진 소정사로 이주하셨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이주하신 소정사로 추정되기도 한다.
아난다의 보리수 아난다의 보리수에 금공양을 하는 중생들
간다쿠티(香殿)는 프라세나짓 왕에 의해 조성된 전단향 불상이 모셔져 있었던 최초 기원정사의 승원터로서 법현의 기록에 의하면 “본래 7층이었는데 쥐가 늘 밝혀둔 연등의 기둥을 갉아 먹는 바람에 번개(幡蓋)에 불이 붙고, 드디어 정사에 옮겨 붙어 7층 가람이 모두 타버렸다”고 한다. 이후 이곳은 2층으로 재 건립되어 그 안에 전단향 불상이 모셔졌으며 그곳을 향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코삼바쿠티에서
기원정사 유적지의 북쪽으로 약 2km 정도의 거리를 가면 그 옛날 프라세나짓왕이 다스리던 코살라국의 사위성(舍衛城)이 있던 곳인데 널찍한 공터 위에 세워진 앙굴리마라 스투파 유적지에 이를 수 있다.
경전에 기록된 앙굴리마라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사위성 어느 바라문의 제자 중에 지혜가 뛰어나고 용모 또한 훤출한 앙굴리마라라 불리우는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스승이 왕궁의 초대를 받아 집을 비웠을 때 스승의 부인이 앙굴리마라를 찾아 이렇게 말을 건네었다. “그대는 체격이 뛰어난 대장부요, 나이를 따져도 나와 비슷하니 우리 서로 좋아하면 어떻겠는가?” 이에 앙굴리마라는 “스승은 아버지와 같고 부인은 어머니와 같은데,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하며 그녀의 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부끄러운 생각과 함께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게 된 부인은 남편이 돌아오게 되자 앙굴리마라가 자기에게 수작을 걸어 욕을 당하였노라고 거짓 고하게 된다. 이 말을 들은 스승은 질투의 마음속에 이내 앙굴리마라를 파멸시킬 방법을 생각하였고,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앙굴리마라에게 하게 되었다. “앙굴리마라여, 그대는 나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이제 오직 하나의 비술만을 체득하면 될 것인데, 그것은 오후가 되기 전에 100명의 사람들을 죽이고서 그 100개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면 되는 것이다.”
앙굴리마라 스투파에서
이에 평소 스승을 존경해 왔던 앙굴리마라는 스승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사람들이 많은 거리로 뛰쳐나가 보이는 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많은 시간이 흘러 12시가 가까워지자 99명의 사람을 죽이고 난 앙굴리마라는 마지막 한명을 찾고자 초조해 있는 차, 아들을 만나고자 길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를 발견하였고, 어머니라도 죽여 자신의 도업을 성취코자 생각한 앙굴리마라는 칼을 들고 어머니에게 달려들게 되었다. 그러한 미치광이의 모습을 바라본 부처님께서는 그 사이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제 앙굴리마라는 부처님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음질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 없었던 앙굴리마라는 “사문이여, 제발 걸음을 멈추시오”라 하소연을 하였고,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대 앙굴리마라여, 나는 멈추어 있는데 네가 멈추질 못하고 있구나. 세존은 언제나 스스로 머물러 일체가 그에게서 은혜를 입건마는, 그대는 스스로 살생의 마음을 내어 악행조차도 멈추지 못하고 있구나”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앙굴리마라는 이내 마음이 열리게 되었고, 이전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부처님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는 크나큰 깨달음에 이르를 수 있었으며, 참된 지혜의 극한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렇듯 부처님께 귀의한지 얼마가 되지 않아 앙굴리마라는 이전에 자신에게 목숨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 가족들의 원한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죽음을 앞둔 앙굴리마라에게 부처님께서는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사상의 핵심을 들려주셨다고 한다. “앙굴리마라여,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의 칼날 앞에 미운 마음도, 괴로운 마음도 일으키지 않을뿐더러, 그 죽이려는 사람을 향해 ‘네가 바로 부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보살의 마음이니라.”
+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정호승·시인, 1950-)
수닷타 장자의 집터로 추정되는 캇치치쿠티
앙굴리마라 스투파 터의 남동쪽 100m 지점에 위치한 이곳 수닷타 장자의 집터는 현재 캇치치 쿠티(Kachchi Kuti :캇치치 오두막)라 불리운다. 이 명칭은 이곳 유적지가 캇챠(Kacha)라는 벽돌로 수리되었다는 데 그 유래를 두고 있다. 발굴 결과 이곳 유적지는 A.D.1~2세기의 쿠샨왕조로부터 A.D.12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증·수축이 이뤄졌던 바, 현장 및 법현의 기록을 근거로 수닷타장자의 집터로서 추정되고 있다.
(계속)
첫댓글 컴퓨터 화면에 글이 넘쳐서 읽기가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