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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뼛속까지 100% 볼링인 이다
남상칠 양주시청 감독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찾아온 장애(고관절 골수염)로 3번의 수술과 재활과정에서 인생 반려자와도 같은 볼링을 만났다. 이후 자신의 두 딸까지 볼링선수로 키워낸 것은 물론, 볼링불모지나 다름없던 양주시를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볼링메카로 성장시킨 주역 중 한 명이다.
볼링과 함께 하는 동안 볼링잡지에서 볼링서적까지 무려 380권에 달하는 책자를 소장하게 됐고, 20여 년이 넘는 양주시볼링관련 다양한 자료까지 빠짐없이 모아오는 등 볼링잡학박사라는 칭호까지 얻게 됐다. 남 감독은 앞으로 양주시립볼링장겸 볼링박물관 건립이라는 원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볼링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많은 난관과 역경을 이겨낸 볼링인 남상칠, 그는 누가 뭐래도 뼛속까지 100% 볼링인 이다.
인생을 바꾼 볼링과의 만남
양주시청 볼링 팀(구단주 이성호 양주시장)이 지난해 11월 열렸던 제35회 대통령기전국볼링대회에서 여자부 종합우승을 안았다. 양주시청의 전국대회 종합우승 뒤에는 올해로 11년째 팀을 이끌고 있는 남상칠 감독(60세)이 있다. 남 감독은, 볼링불모지나 다름없던 양주시를 내로라하는 볼링메카로 성장시킨 주역 중 한명이기도 하다.
남 감독이 볼링과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27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앓기 시작한 고관절 골수염 수술을 3차례나 받고 난 후인 1994년, 재활과정에서 담당의사로부터 볼링을 권유받고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됐다. 3번째 수술 전까지는 볼링의 ‘볼’자도 몰랐었다. 그러나 왼쪽 고관절 대퇴부 관절이 약했던 그에게 담당의사가 볼링을 권한 것이 인연이 됐다. 97년부터는 양주에서 볼링장 운영을 시작하면서 직업까지 바꿨다.
볼링장을 시작하면서는 두 딸(선미, 다인)을 볼링선수로 입문시켰고, 주변 지인의 자녀들까지 볼링지도를 맡으면서 양주볼링의 원대한 꿈이 움트기 시작했다. 결국, 조양중, 덕정고, 백석고 등에서 볼링 팀이 창단되었고, 2010년에는 드디어 양주시청 볼링 팀이 창단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양주볼링이 기지개를 펴는 과정에서 양주시볼링협회 전무이사,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양주시볼링의 구심점 역할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일선 현장 지도자로 변신하여 많은 선수들을 발굴 육성하기 시작했다.
양주시청 볼링 팀이 제35회 대통령기전국볼링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풀뿌리 볼링에서 볼링메카로 탈바꿈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6년 만 하더라도 양주시 볼링은 학생선수가 전무했을 만큼 볼링 불모지였다. 그랬던 양주시에서 학생선수들이 볼을 굴리기 시작했다. 바로 남 감독의 큰딸 남선미(현 회천중 코치)와 작은 딸(다인)을 필두로 오선미(전 곡성군청), 이수정(전 양주시청), 가윤미(현 서울시설공단)선수의 볼링지도를 맡았다.
“당시 IMF 외환위기가 찾아와 볼링경기도 좋지 않았고, 학생선수를 발굴 육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죠. 특히, 대도시처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특기생제도를 통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여건 등 무엇 하나 갖춰져 있지 않았죠. 중학교 창단하면, 이들 선수가 진학해야할 고등학교를 창단해야 하기에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남 감독은 지역 볼링인들과 함께 힘을 모아 중,고등학교 팀 창단 결실을 보았고, 2010년에는 실업팀까지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관내 우수한 학생선수들이 성장하여 타 시·도 실업팀으로 가는 게 너무 아쉬워 결국 실업팀 창단을 추진했죠. 마침내 2010년 그 결실을 보았고, 올해로 11년차를 맞았습니다. 이 과정은 정말 꿈만 같았고, 지금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후회하지 않았기에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좋은 결실로 이어진 것 같아요.”
2020년 말 기준 양주시 관내에는 초등부 3명(남 1명, 여 2명), 중등부 13명(남자 11명, 여자 12명), 고등부 15명(남자 12명, 여자 3명) 등 모두 40명의 학생선수가 활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양주 출신(은퇴선수 및 지도자 포함) 선수들이 전국에서 현장을 누비고 있다. 현역 남녀 실업선수가 19명이며, 은퇴선수 8명, 볼링지도자는 11명, 프 로선수 3명 등 많은 우수선수(국가대표 등)를 발굴, 육성하여 양주시는 물론이고 한국볼링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렇듯 풀뿌리 볼링에서 시작한 양주시가 한국을 대표하는 볼링메카로 성장하기까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다져온 남 감독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주변 볼링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380권에 달하는 볼링서적 소장
남 감독은 애시 당초 볼링 전문 선수출신이 아니다. 불편한 몸을 재활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볼링을 알게 됐고, 그것이 인연이 돼 오늘날 볼링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남 감독 자택에는 방 1칸 전체가 볼링관련 서적 및 자료들로 빼곡하다. 잡지 등 관련 서적만도 380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여기에 20여 년 동안 양주시 관내 볼링관련기사 및 자료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보관하고 있다.
“제가 처음 볼링을 시작할 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기에 모든 것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기 시작했고, 볼링 서적, 잡지, 신문 등도 구독해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지금 서재를 빼곡히 채우고 있죠. 이는 저에게 있어 또 다른 볼링 자산이기도 하죠.”
이처럼 남 감독은 볼링과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개인 인터넷 카페운영을 통해 볼링인들과 정보를 나누고, 실업연맹에서는 홍보를 맡아 다양한 볼링자료를 홈페이지에 업로드하고 릴리즈 하는 등, 볼링 자료 다루기를 가장 소중히 하는 볼링인 중 한명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볼링으로 나눔 베품까지 실천
남 감독에게 있어 양주 볼링과 함께 해온 27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맨 앞에서 당기고, 때론 뒤에서 밀어주면서 힘든 과정도 많았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멈추지 않았다. 되레,
남상칠 감독 자택 서재에는 380여권의 볼링서적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양주 볼링의 길을 맨 앞에서 닦고, 또 뒤에서 튼튼히 다져주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린 선수들의 꿈과 희망을 같이 공유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어린선수들의 꿈과 희망은 바로 저의 꿈과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성적지상주위를 앞세워 정상만을 보고 달린 것도 아니다. 2009년 덕정고 학생선수들의 볼링 재능기부로 시작된 시각장애인 볼링교실은 이듬해 양주시청 선수들이 이어받아 올해로 12년째 매주(수요일) 이어오고 있다. 매년 연말이면 관내 독거노인 연탄배달 봉사활동 등 볼링선수들에게 볼링만이 아닌 볼링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필요성을 늘 강조하고 직접 실천해 오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재활치료로 시작된 볼링이 남 감독 인생을 바꿔 놓았다. 이제 양주시하면 바로 볼링이다. 다른 어떤 종목보다 인프라가 잘 구축되었고, 양주시를 대표하는 가장 매력적인 종목으로 발돋움 했다. 남 감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보다 더 큰 원대한 꿈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바로 양주시를 대표하고 전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립볼링경기장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결코 꿈같은 일 만은 아니다. 경기 북부 교통요충지로 부상한 양주에 시립볼링경기장과 양주볼링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볼링박물관을 건립하여 양주볼링을 한국볼링의 중심으로 이끌고자 하는 목표는 남 감독에게 새로운 희망이자 꼭 이뤄야 할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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