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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영국의 명예 혁명(2)
임광자 추천 0 조회 278 08.05.09 08: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Untitled

영국의 명예 혁명(2)

처음으로 이 페이지를 여시는 분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칼럼은 세계사의 어느 특정한 주제를 두고 작성한 것이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시대순에 따라 중요 부분을 발취해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오른쪽 위 글목록이나 왼쪽의 칼럼목록을 클릭하시면 지금까지 올린 내용의 목차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필요하신 것 읽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나. 명예혁명

(1)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

Kant dover찰스 2세가 카톨릭신자라는 것을 숨기고평생을 살았다면, 그의 동생으로서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는 처음부터 카톨릭신자라는것을 밝혔고,

저 심사율의 발표로 해군사령관직에서 물러 난바 있으며,휘그당에 의해 왕위계승 권을 잃을 번 하기도 하였었다.

(곁들인 사진들은 영국의 어떤 사진작가가 인터넷에올린 것을 복사해서 눈 요기로 실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것을 양해 말씀드립니다)

국교회(성공회)=의 나라에서 카톨릭교도의 왕이 등장했다는것은 그 자체가 심상치 않는 조짐이었으나, 즉위 후 그는 그의 형 찰스 2세보다는훨씬 굵은 정책들을 거침없이 펴 나가는 대담성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첫째, 그는 런던을 비롯한 자치도시가 가지고 있던특허장을 취소하고, 국왕에게 직접 소속시키거나 새로운 특허장을 발부했다. 이것은이때까지 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자치권을 제한, 혹은 취소한 것으로서, 케임브리지나옥스퍼드 등 대학의 인사에도 간섭하였으며, 도시의 모든 요직은 국왕의 측근이나토리당이 독점하게 되고 의회도 토리당만이 출석하게 되었다.

둘째, 궁정에서는 공공연히 카톨릭 풍의 설교와 예배가행해지고 국교회의 의식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리고 장기의회가 폐지했던 고등종무관 재판소를 부활 시켜서 국교회 성직자들의 사상을 단속하고 카톨릭으로 개종할것을 강요했다.

셋째, 그의 조카에 해당하는 찰스 2세의 서자 몬머스公(Monmouth,Duke of/Scott, James / 1649 ~ 1685)이 왕위계승 권을 주장하며, 네덜란드로부터150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 남서부에 상륙했을 때,

이를 체포하여 그 일당과 함께 조카를 거침없이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에 직 간접으로 연루된 800 여명을 체포, 서인도제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냈는데, 그 중에는 반도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부인까지 포함되어있었다.

넷째, 형식적인 의회의 동의를 얻어서 6천명의 상비군을3만 명으로 증강 시키고, 군대의 지휘는 카톨릭의 장교들만이 맡도록 하였다.

다섯째, 국왕의 특면권(特免權)을 악용해서, 정부,교회, 군대의 요직에는 전부 카톨릭교도들을 임명, 심사율을 무효화 시켰다.

Kant dover castle이런 일련의 강경한 국왕의 조치에영국의 젠트리와 런던 시민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국왕의 독주(獨走)는 계속되었는데, 1687년 이른바"신앙의 자유 선언"이 나오자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문제의 신앙 자유 선언이란, 신구 어느 쪽의 교인에대해서도 모든 형벌은 폐지하고, 예배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말이 신앙의 자유이지 사실은 카톨릭을 합법화 시키려는조치에 불과했고, 국왕은 의회가 반대할 것을 예견하고 법률이 아닌 선언(宣言)으로발표했다.

여기에 영국국민들의 즉각적인 반발이 있었고, 토리당내의신교도들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이듬해계속해서 "신앙 자유 선언"을 다시 내고, 매월 제 1, 제 2의 일요일에는국교회의 설교단에서 그것을 읽으라고 명령했다.

국교회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해 지기 시작했다. 국왕의명령을 따르자니 비국교도를 인정해야 되고, 거부하자니 지금까지 그들이 지켜온국왕에 대한 무저항주의를 버려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2) 명예혁명

켄터베리 사원의 대주교 및 국교회의 대표 7명은 결국청원의 형식으로 반대의 뜻을 국왕에게 전했다.

분격한 제임스 2세는 즉각 이들 7명을 반역 혐의로체포, 런던 탑에 감금했다. 그러나 런던의 배심원들은 이들에게 무죄를 선언하고,이에 고무된 런던 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소식이전해졌다. 아들이 없었던 제임스 2세에게 왕자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왕위계승 권을 가진 왕자의 탄생, 이것은 왕실이나국민 모두가 축복해야 할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당시 런던의 사정은 달랐다.

국왕의 전제정치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국왕이 죽고, 제임스 2세의 딸로서 네덜란드 빌렘 3세에게 출가한 메리가 왕위를계승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일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교도인 메리가 영국왕위를 계승하여신교도의 권익을 다시 보호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왕자가 태어났다면, 그가왕위를 계승할 것이고, 그렇다면 다시 카톨릭의 세상이 될 것이다.....이에 편승된별별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의혹과 불안은 증폭되고, 심지어 왕자의 탄생은 카톨릭의음모다.....등등.

여기에서 다시 휘그당과 토리당이 일치단결했다. 그들은체포된 7명을 석방시키고,

1687년 6월, 토리당과 휘그당의 대표 7명이 서명한국왕 초청장을 네덜란드 총독 빌렘 3세와 그의 아내이자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에게비밀리에 보내졌다.

coulsdon, 18 Km south of central London국왕초청장? 세상에는 이런 것도 있는가? 그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라고 한다.

"나라 사정은 점점 어렵게 되었고,....우리들은각자의 신앙, 자유, 재산에 관한 현정부의 시책에 만족할 수 없다. 귀족이나 젠트리를포함한 국민 20명 중 19명이 변화를 바라고 있다.

전하(殿下)께서 와 준다면, 우리들은 두 손들어 환영하고,전력을 다해서 돕겠다....."

이런 초청장을 받은 네덜란드 총독이라는 빌렘은 어떤인물인가? 앞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야기할 때, 그 집안의 내력을 기술한 바 있으나(칼럼제 56 호),

여기서 다시 간단히 소개하면, 네덜란드 독립전쟁을주도했던 오라녜家(Oranje : Orange家라고도 함)의 3 세대인 그는 신교도인 동시에신앙의 자유를 광범하게 허용, 군사력 또한 매우 강대하고, 공화제 보다는 군주제를선호하는 제임스 2세의 사위였다. 이런 빌렘 3세를 영국국민들은 그들의 이상적인군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청장을 받은 빌렘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이를 수락하자니,장인과 맞서는 것은 물론이고, 벌써 3대째 영국과 전쟁을 하는 네덜란드의 처지로서,적국인 영국의 왕이 된다는 것은 조국 네덜란드를 배신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들이 그를 영국으로 가게 만들었는데,이를테면 프랑스의 심상치 않은 위협과, 제임스 2세의 실책, 주위의 권유, 영국 왕이라는매력  등  등...초청장을 받은지 3개월 후, 빌렘은 제임스 2세의 폭정은그를 보좌한 사악한 고문관들의 잘못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영국으로 가기로결심하였다.

1688년 10월, 네덜란드에서 군대 1만 2천을 이끌고출발, 11월 5일, 잉글랜드의 도버에 상륙, 약속대로 영국인들은 그를 열렬이 환영하였고,그와 그의 군대는 런던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 두었던3만 명의 상비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들 상비군은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 출신의 카톨릭교도의장병들만 우대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영국 출신 장병들은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빌렘의원정대에 가담했고, 더욱 기막힌 사실은 제임스 2세의 제 2 왕녀 앤(Anne)까지 원정대에가담했다.

Windsor great park제임스 2세는 글자 그대로 사면초가(四面楚歌),고립무원(孤立無援), 하늘을 향해 "주여 저를 도와 주소서, 저의 자식들까지저를 버렸나이다"......

결국 제임스 2세는 어린 왕자와 왕비를 먼저 프랑스로보내고, 그도 영국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 닥친 폭풍우 때문에 도버해협을건너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귀족들에게 사로 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1688년 12월, 런던에 입성한 빌렘은 사태를수습하는 과정에서 제임스 2세의 탈출을 도왔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이래서 영국은 다시 카톨릭은 몰락했고, 신교도들의 세상이 되었다.

1689년 1월, 귀족들은 임시의회(convention parliament)를소집하고, 제임스 2세의 실정과 카톨릭 군주의 무익론을 선언하고,

국왕의 법률 정지권, 특면권,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課稅),평상시의 상비군 유지 등을 위법으로 규정하는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을작성했다.

1689년 2월 13일, 권리선언을 승인한 빌렘 3세와 메리는대관식을 가지고 즉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로서 영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는데,

이를 영국사에서는 사람이 다치지 않고 이룩된 혁명이라해서 영광스러운 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했고, 우리들은 이를 명예혁명(名譽革命)이라고번역하고 있다.

1689년 12월, 공동 국왕에 의해서 정식으로 의회가소집되고, 임시의회에서 작성된 권리선언을 정리해서 권리장전(權利章典 : Bil ofRight)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표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영국적인 의회제도가 마련되고양당 정치가 틀을 잡게 되었다.

"국왕은 왕권에 의해서 의회의 승인없이 법률을정지하거나,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 신민(臣民)이 국왕에게 청원하는것은 신민의 권리이고, 이런 청원을 행한 것을 트집 잡아 수감하거나, 의회의 동의없이 상비군을 징집할 수 없다.....

의회에서 행한 토론이나, 의사(議事)를 두고, 어떤재판소나 다른 어떤 곳에서도 비난하거나 문제 삼을 수 없다....왕실의 경비와 군대의편성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대략 이런 것들이 권리장전의 내용들이다.

다음 이야기 - 한가위가 되었네요. 추석에 관한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내용을 간단히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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