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문예창작과 대학원 임미리씨 열린시학 신인상 수상

[이은봉]

당선작 (지문 외 4편 )

                                                           임미리

구부정한 허리가 땅에 닿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
젊은 아들 앞세운 할머니, 동사무소에 들어선다.
민원 접수대에 가려 이마만 보이는 검붉은 얼굴하나
무표정하게 매도용 인감 한 장을 발급해 달라고 한다.
“지문인식기에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나는 컴퓨터 화면에 저장된 젊은 지문과
등고선 같은 낡은 지문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다.
긴 세월 건너온 듯 투박하고 거친 손마디
몇 번을 시도해도 지문은 일치하지 않는다.
자신 없다는 듯 올려놓은 손가락
파르르 떨고 있을 때 나는 손가락의 그늘을 읽는다.
갈라지고 굽은 손마디의 닳고 닳은 지문,
감추고 싶은 할머니의 생(生)을 손끝으로 더듬는다.
엄지손가락을 지문인식기에 다시 올려보지만
더욱 더 모호한 線의 길, 의심이 죽순처럼 뾰족하게 솟는다.
젊은 아들은 아니라는 듯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흘리지만
짧고도 팽팽한 긴장감, 활시위를 놓을 수 없다.
대나무 마디마디의 텅 빈 공허처럼
할머니의 뼈마디에 바람구멍이 생겼으리라.
읽혀지지 않는 지문과 지문 사이에서
숫새벽 같은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지난날들이
아무도 모르게 지문인식기를 빠져나가고 있다.
서둘러 인감을 챙기는 젊은 아들
현관문을 통과하는 모습 느낌표처럼 고개가 꺾어졌다.
검버섯 피어 형체가 없어진 할머니의 얼굴
어느새 운주사 돌부처를 닮아있다.



자목련 하르르 지고……



열린 유리창 너머 자목련 뾰족한 입술 내밀고 소곤거리는 시간이다. 우체부 아저씨 날렵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온다. 건네준 우편물 묶음에서 편지 한 통 소금으로 절인 조기처럼 생기 없이 툭 떨어진다. 봉투 위에 적힌 회수증이란 단어가 꽃잎처럼 가볍다.

봉투를 뜯으며 궁금증을 더듬는다. 누구일까.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줄 수 있는 이력을 왜? 잃어버렸을까. 돌아오지 않는 신분증과 이별을 하고 재발급을 받기 위해 생(生)도 수정하고 싶은 꿈, 꾸었을까, 주름살 가득한 얼굴 수정하듯.

손에 잡힌 여인의 신분증, 이름과 사진을 보며 나는 컴퓨터를 검색한다. 지문 같은 등고선을 따라가다 길을 잃은 나는 갑자기 캄캄해지는 울렁거림으로 멀미를 한다. ‘사망말소’ 인연의 고리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참빗으로 머리카락 빗어 내린 듯 한 여인의 얼굴을 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인, 이승을 하직하고 떠나는 길 내게 보여주고 간 사진의 얼굴이 흐리다.

멍든 자욱 같은 자목련 입술 벙그는데, 그 안 끝자락부터 꽃잎 핏기 잃으며 시든다. 바람은 열린 창문으로 꽃향기 부지런히 배달한다. 취한 듯 나른해지는 오후, 여인의 얼굴처럼 자목련 하르르 지고 있다.



봄의 전입신고



햇살, 가만가만 내려온다. 겨우내 잠들었던 잔디의 이불 거두며 전입신고 한다. 마실 다녀온 바람이 마스카라 올린 눈썹처럼 뾰족한 마음을 매화나무 가지에 걸어둔다. 매화나무, 자리를 내주면서 도도하게 꽃망울 터트린다.

어디서 무슨 소식 들었을까. 여기저기 줄을 서서 마음밭에 발 들여 놓는 것 있다. 구례에서 숨가쁘게 달려온 산수유, 너릿재 터널에서 속도위반으로 내려온 노란 개나리, 만연사 선정암 진달래꽃, 황새봉 친정집 앞마당에 살고 있는 살구꽃……. 빨리 얼굴을 보이겠다고 한꺼번에 팡팡 터진다.

햇살이 불러들인 꽃잎들, 명지바람에 휘날려 향기롭다 넌출처럼 이어지는 봄소식, 나비들 날아오른다. 멍울진 세포들 간지러워 일제히 눈 뜬다. 머지않아 전입신고 줄 잇겠다.



양파를 샀어요


는개비 내리는 퇴근길이었어요. 한적한 길거리 구석에 석고상 같이 앉아 있는 노점상 할머니를 만났죠. 양파의 겉껍질처럼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메마른 손마디가 보이네요. 비 가림도 없이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구부정히 앉아있는 할머니, 괜스레 훔치고 싶은 그리움 하나 목울대에 걸려 양파를 바구니 가득 샀어요.

마른 껍질을 벗기고 보니 둔부처럼 허연 속살, 탱글탱글한 탁구공처럼 곧 튀어오를 것 같았어요. 아! 그러고 보니 내 중심도 양파와 같이 고밀도로 차오르던 때 있었어요. 세상이 내 것이던 때, 하지만 물 흐르듯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갔지요. 순한 껍질을 벗기면, 두 눈이 아프고 따끔거려 눈썹창에 대롱대롱 물방울을 매달곤 했지요. 둥근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잘게 썬 양파를 볶으면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매운맛은 감쪽같이 사라졌지요.

때론 눈물나는 일들도 세월이 지나면 매운맛이 사라져서 달콤함과 향기로움만 남아 입안에 맴돌 때가 있지요. 그래요. 이렇게 달구워져 향기로워지고 싶을 때 있어요. 이제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말라 부서지는 껍질처럼, 손끝만 닿아도 무너지는 모래알 같은 척박한 마음자락,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더 많아진 거죠. 노점상 할머니가 파는 그리움처럼……



말랑말랑해지고 싶다



콘크리트 바닥을 뚫는 뿌레카가 가슴에 파고든다.
시끄러운 소음 귓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내 마음 속에서 파열음을 일으키며 드르륵거린다.
전선에 앉아 있는 참새들의 다정한 재잘거림
옆에 앉아 있는 동료의 격양된 목소리
성난 전화벨 소리,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무법자.
뾰족한 두뇌를 가진 뿌레카, 뚫고 들어간 자리 궁금하여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가슴을 들여다본다.
딱딱한 포장 아래에 깔려 있는 메마른 흙,
세상구경 나와 매캐하게 코끝을 간질인다.
오랫동안 어둠에 갇혀 있었던 탓일까?
바람이 지나가자 마른 몸 송홧가루처럼 날린다.
석회석처럼 변해버린 한 줌 흙을 만져본다.
구멍을 뚫어 한 줌 빛을 선사해주고 싶은
내 몸에도 이런 마른 꽃잎 같은 흔적 있다.
바닥이 깨지고 연한 흙이 얼굴을 내밀기까지
뿌레카는 콘크리트 바닥과 지금 한판 전쟁 중이다.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단단한 내 기억도
가끔은 누군가 깨뜨려 주었으면, 그리하여
어느 비 오는 날, 흙처럼 순하게 젖고 싶다.
체온이 전해오는 그대의 투박한 손끝에서
말랑말랑하게 빚어지는 옹기가 되고 싶다.



당선소감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며

창문을 열면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닙니다. 한 때는 흰 구름을 부러워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지 못하고 구름처럼 떠다닌다는 것, 어떤 것인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내게 사는 것은 공중에 부양되는 것처럼 항상 멀미나는 일이었습니다. 뭔가 토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을 뿐 아득한 어둠은 햇빛을 받아들일 줄 몰랐습니다.
세월은 느린 달팽이처럼 기어가고 부끄럽게도 나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도 한 톨의 온전한 씨앗이 되어, 삼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다가 조건이 주어지면 싹을 틔운다는 연꽃씨앗처럼 싹을 틔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내 자신 위안을 하겠습니다.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렵니다. 심사위원님들께서 걸음마는 떼어 주셨으니 열심히 걷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오늘 이 날을 기억하면서 초심이 빛바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살아온 날만큼 남은 生, 비록 늦었더라도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며 서두르지 않으렵니다.
시인의 길로 이끌어주신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 이상호 교수님과 광주대 이은봉 교수님, 경기대 이지엽 교수님 그리고 부끄럽고 부족한 글이지만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을 쓴다면서 그 동안 집안일에 소홀해서 불편해 했을 남편과 또한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는데도 건강하게 잘 자라준 사랑하는 상혁, 지효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임미리
전남 화순 출생.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심화과정 수료.제7회 전국 가사․시조․시 공모전 시조 우수상 수상. 현대수필 등단 한국수필학회원, 현대수필문학회원, 한국불교문인협회원. 현재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정 재학, 화순군공무원. emr1124@hanmail.net



심사기

새롭게 인식하려고 하는 적극적 자세가 돋보였다


많은 작품이 투고되었다. 전반적인 수준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눈길을 확 잡아채는 작품이 없어 못내 아쉬었다.
소구 씨의 ｢선산｣ 외 9편은 시적 형상화의 부족이, 한경용 씨의 ｢내 지하실의 복도｣ 외 10편과 예외석 씨의 ｢길을 찾아서｣ 외 14편은 사고의 단순함과 깊이의 부족이, 곽필종 씨의 ｢별빛 찬가｣ 외 16편은 설명적 어투와 참신성의 부족이 각각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정진혁 씨의 ｢멀어진다는 것｣ 외 9편, 이정신 씨의 ｢거북｣ 외 9편, 서양숙 씨의 ｢바이블 버스｣ 외 9편, 이우식 씨의 ｢화석 연료에 대한 통찰｣ 외 12편, 임미리 씨의 ｢지문｣ 외 20편 작품이 주목되었다.
정진혁 씨의 작품은 담고 있는 내용이 무난하다는 점에서 안정감을 획득하고 있지만 행과 행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보이고 시의 깊이 있는 전개가 다소 부족하였다. 서양숙 씨의 작품은 ｢바이블 버스｣에서 보여주는 확장 은유는 참신해 보였으나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으며, ｢밀랍이 들어있는 거울｣은 시상의 전개와 각 행의 연결, 과거 시제의 관습적 사용 등이 문제가 되었다. 이정신 씨의 작품은 같은 어조의 반복적 사용, 내면 응시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시의 내용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이우식 씨의 작품은 두 가지 점에서 걸렸다. 시적 대상이 되는 관념과 실제의 대상이 사고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 문제는 소재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탓할 일은 못된다. 문제는 이를 담아가는 과정이 각각 그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점이다. 관념은 관념인 채로 끝나고 ｢태안 보고서｣ ｢조국｣ 등의 후자 작품들은 내면화나 성찰이 부족하다.
임미리 씨의 작품을 당선 작품으로 결정한다. 다소간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응모된 작품 모두가 일정 수준을 넘고 있다는 것에 신뢰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생활에서 경험하거나 얻어지는 시적 대상을 응시하는 노력이 가볍거나 단순해 보이진 않는다. 시적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려고 하는 적극적 자세가 돋보였다. 좀 더 대상을 젊고 신선하게 보려는 노력을 가져준다면 좋은 시인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사위원: 이상국, 이지엽, 정일근 당선작

[이은봉]

임미리 님! 축하합니다.

[동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해바라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선애]

축하! 축하드립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