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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3일째 날)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에서 베네치아(이탈리아)로 이동(4시간 소요)
베네치아(베니스)는 섬의 도시라 더 이상 버스투어는 안되고 수상버스로 이동한다,
바닷 길 수로 표시를 위해 말뚝이 좌표를 잡고있다.
베네치아
베네치아의 어원
그리스 신화속에 등장하는 아프로디테애서 유래한다.
이 신은 여신으로 바다의 거품으로 탄생했다고 하며
사랑과 미의 심벌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황금으로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항해의 여신으로도
불리었는데 로마에서는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 여신 비너스가 바다와 관계가 있다는 데서 베네치아의 어원이 됨.
비너스는 천문학적으로 말하면 금성이라는 의미로서 금반지와 관련됨.
이상은 책에서 발췌함.
우리의 작품과 관련되서 적어봅니다.
포샤가 바샤니오게 준 반지는 금반지 일까요?
베네치아(이탈리아어: Venezia)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주의 주도이다.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다. 영어로는 '베니스'(Venice),
독일어로는 '베네디히'(Venedig)라 한다. 세계적 관광지이며,
운하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인구는 2006년 집계 당시 268,934명이며, 이 중 176,621명이 육지에 살고 있으며,
30,702명은 석호에, 61,611명은 구시가(Centro storico)에 거주하고 있다.
최근 지구 온난화로 인해 가라앉고 있다.
두칼레 궁전
베네치아는 원래 습지대였는데, 6세기경 훈족의 습격을 피해 온
이탈리아 본토 사람들이 간척을 시작, 도시를 건설하였다.
697년 초대 총독이 선출되어 독자적인 공화제 통치가 시작되었다.
11세기에는 십자군 원정의 기지가 되기도 했으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베네치아는 지중해 동부에서 유럽으로 운반되는
상품의 집산지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의 전란으로 사라진 예술과
공예를 그곳 공방에서 소생시키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유리, 양복지, 비단제품, 금, 철, 청동 등의
가공기술은 실로 뛰어난 것이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분쟁을 개신교에 유리하게 중재하여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하고, 1797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략을 받아 1805년 나폴레옹 치하의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되었다.
1866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광장 안쪽
광장 가운데 양쪽으로 레스토랑이 있다.
밖과 안쪽 식당에서 먹는 음식 값이 다르다,
물론 바깥 광장쪽이 훨 비싸다.
곤돌라 사공(콘돌리에르)
베네치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직업중 하나
사공이 되려면 국가자격증이 필요한데 엄청 어렵다네요
사공의 연봉이 우리돈으로 1억정도 된다네요~
4명씩 짝을지어 곤돌라를 탔다.
베니스의 역사를 느낄수 있는 베니스 운하 투어
낭만의 베니스 곤돌라 관광
11세기경부터 등장한 곤돌라는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교통수단입니다, 선두와 선미가
모두 휘어져 있는 선체와 그 위에 서서
긴 노를 젓는 사공(콘돌리에르)은 언제나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합니다. 이 로맨틱한 전통 배를 타고 운하곳곳을 누비며
베니스의 낭만을 ~~~
위 사진의 가운데 다리는 ..두칼레궁전과 감옥을 잇는 슬픔의 탄식의 다리입니다..
탄식의 다리는 총독부가있는 두칼레궁과 노오베라는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로 두칼레궁에서
재판을 받고나오던 죄수들이 이다리를 건너면 세상과 단절된다는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는
탄식의다리...더유명한것은 작가이자 바람둥이로 얄려진 카사노바가 저 감옥에서 탈옥했다 합니다.
베니스는 카사노바의 고향이기도 하다고 한다 ..
산타마리아 살롯테 대성당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C#단조 4악장 아다지에토
산 마르코 성당
성 마르코(마가)의 유해가 안치된곳
산 미르코 항에서 수상택시를 탔다.
수상택시를 무조건 권장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이 항로에 다 있다.
베니스를 둘로나누는 그란테 운하다.
이운하는 미로같은 작은 운하들이
연결되어있는 베니스의 주 교통이다.
4일째) 호텔 조식후 르네상스의 꽃이라 하는 피렌체로 이동한다,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이태리의 미켈란젤로 언덕!
피렌체의 동남쪽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피렌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절호의 지역이다.
두오모를 비롯해 베키오 다리가 인상적인 이 광장은
아르노강 남쪽 기슭의 언덕 위에 조성되어 있다.
이곳 광장의 곳곳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다비드상' 등의 복사품들이 있다.
관광객들의 사진촬영지로 유명하며 여러 복제품이지만 예술작품들과 사진촬영이 가능하다.
또한 장사꾼들도 많이 있어서 선물 등을 고르는 관광객들도 눈에 많이 띈다.
아름다운 중세풍의 피렌체의 시가지를 여러 각도로 바라보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도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멀리 두오모 성당이 보인다.
다비드(다윗) 상
사람을 얻는 자, 모든 것을 얻는다 동시에 세계 최고의 부자였다. 또한 당시 최고 권력인 교황의 주 거래처이자 유럽 각지에 지점이 있었던 메디치 은행을 운영한 하나의 기업이기도 했다. 메디치는 수많은 예술가와 인문학자, 과학자를 후원함으로써 암흑의 중세 시대를 접고 르네상스를 꽃피웠으며,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어 서구문명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했던 가문이다. 가문이 새로운 시대를 태동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들이 이룩한 성공과 실패의 부침을 살펴봄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선사한다. 특히 단순히 메디치 가문의 역사와 업적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낡은 중세 시스템을 마감시키고 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기반과 그들의 성공 원칙과 그 탁월한 통치의 비밀을 분석하고 있다. 낮춰 대중의 편에 서고자 했던 결과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던 메디치 가문에게서 우리는 인생과 경영에서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오늘날 리더십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부와 권력은 최종 목표가 아니며,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라고, 그리고 진정한 지도자라면 부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고 나아가 세상과 역사를 움직여야 한다는 진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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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테
메디치 가의 상징문양
1유로를 아래 함에 넣어주니
위 아래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이
환상이다.
미켈란젤로가 8살때 베키오 궁전 벽에 그린 그림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물론 가짜다)
16세기까지는 피렌체 공화국 정부청사로 사용
시뇨리아 광장 한켠에 있는 베키오 궁전 앞에는 여러 조각상이
서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다!
벽에 루이비똥 문양이 있다.
지금은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 청사는
무조건 새건물 이어야하고 시의회 의사당은 별도의 건물에 넓직한 의원전용
주차장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몇백년 된건물에 비좁고 전용 주차장이 없어
불편해도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참좋았다
물의 요정에 둘러쌓인 넵튠
코사모 메디치 상
메디치 가문에서 배우는 창조적 리더십
메디치 가문은 1397~1743년 346년간 유럽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다.
르네상스를 후원하고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을 피렌체에 기증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게 하고 레오10세 및 클레멘트 등 교황2명을
배출하고 프랑스 왕비 2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오페라가 탄생되었다.
서양식 식사 예절이 만들어 지고 , 승마를 위해 여성용 바지가
만들어 지고 하이힐 패션이 나온 것은 모두 메디치가와 큰 관계가 있다.
그들이 후원한 사람은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요 갈릴레이
그리고 아메리고 베스푸치(아메리카 대륙 이름 유래)다. 아메리고는
메디치의 후원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했다.
메디치는 원래 mugello의 조그만 농장주 였다. 그는 근처 마을
피렌체의 플로린이 기축통화를 사용되고 있음을 은행업을 하기로 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가 로마의 메디치 은행을 피렌체로 옮겨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막대한 십일조 자금을 로마로 옮기기 위해 어음의 필요성이
생기고 그래서 은행이 생겼다. 그러나 당시에는 교리상 은행 업을
할 수 없기에 장부를 사용하지 않았고 재량으로 이자를 주는 방법이
은행에서 사용 되었다.
그래서 신용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모직산업이 매우 국가 산업에
매우 중요했는데 메디치 가문은 유럽각국의 정보를 이용하여 모직
사업을 했다. 그들은 은행 업과 모직산업을 한 것이다. 신뢰와 정보를
이용한 사업을 한 것이다. 여기에 메디치 성장의 비밀이 있다.
1. 이 손가락을 보라. 한번 맺은 인연을 버리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지막 작품 “성 세례요한”에서 그림 속 요한의
손가락은 보통 현실에 예수를 가르킨다고 한다. 그런데 다빈치는 이
그림에서 요한의 손가락은 하늘을 가르친다. 이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교황 레오10세가 의뢰 한 것이다. 왜? 다른 것일까?
그 내막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발다사레 코사는 나폴리 출신해적인데 볼로냐 대학에서 가짜 법학박사
매입하고 추기경직을 매입했는데 신분상의 문제로 메디치 은행의 첫
고객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1410년 교황 요한23세로 취임했다.
당시 유럽사회는 가톨릭교회의 대 분열시기(1378-1417)로 교황이 3명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이 개입하여 교회통합을 위해 독일 콘스탄트에서 교황모임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요한 23세가 불법행위로 체포되고
35,000플로린의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하고 투옥하였다. 이 여행길에
코지모 데 메디치가 교황23세를 수행했다. 교황 요한23세는 하이델베르크
성채에 투옥되고 코지모에게 대출을 요청하였다.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16억원 정도다. 코지모의 소식을 들은 메디치가는 대출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석방된 요한 23세가 피렌체에서 망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심지어 임종을 하자 성 세례 요한 세례당 안에 교황 영묘를 제작해
주기도 했다. 임종 순간 이 모든 것에 감격한 요한 23세는 성 세례요한의
손가락을 기증한다(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박물관에 보관).
신뢰를 지킨 메디치 가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제 그림의 비밀을 보자. 즉 그림의 비밀은 메디치 가문은 절대로 한번
맺은 신의를 버리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메디치
가문이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런 다소 어리석은 행동을 보고 다른 은행은
모두 비웃는다. 하지만 메디치의 행동을 교황이나 왕들 귀족이 주목하고
있다가 모두 몇 년 뒤 주 거래 은행을 메디치로 변경한다. 막대한 자금이
메디치로 쏟아 들어 온 것이다. 이제 유럽 최고의 은행이 된 것이다.
한번 맺은 인연을 버리지 않는 메디치 가문의 신용이 형성된 것이다.
2. 심적내면을 성찰하라
이탈리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코시모 데 메디치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및 아랍어 독해 능력이 있었고 희귀 고문서를 수집하는 것이
꿈이 사람이었다. 그가 예술가 들을 후원해 르네상스가 발흥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도나텔로를 잘 후원했다. 도나텔로는 조각품을 깎으면 바로
조각품을 부수는 괴팎한 사람이었다. 이런 노나텔로가 작품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연금을 주어 후원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유언은
“ 도나텔로가 죽으면 내 곁에 묻어달라” 그만큼 관계가 돈독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후원하여 유럽최초로 플라톤의 전집을
그리스어세서 라틴어로 번역시켰다. 피치노에게 플라톤 아카데미를
지어주고 준 지침이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나”이다.
코시모는 내면 성찰에 관심을 가지고 인문학을 공부했고 행복해 했다.
왜 인문학 공부를 했을까? 가설1) 새 술은 새 부대에 자기가 새로운
세상을 이끌기 위해 플라톤 전집을 후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의 가치 즉 현상에 대한 분석, 이성적 판단,
사물의 관철이라면 플라톤은 초월적 사고 감성적 직관 창조적 영감이다
이것이 르네상스 가치다.)
가설2) 행복을 찾아서, 내면의 성찰을 통한 행복추구라고 볼 수 있다.
심적 성찰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예술을 사랑하고 학문을
추구했던 것이다.
3.인내하라 멀리하라
이후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바통을 이어 받는다. 그녀는 삼촌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후원과 지참금 약속을 통해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몰락과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서거로
지참금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탈리아 여자”로 지칭했다.
더군다나 잘 생기지 못했다. 그래서 앙리 2세는 미모의 애첩인 디안과
주로 생활했다.
심지어 황제 취임식 날 카테리나는 시녀와 서 있었다.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공식석상에서 한번도 슬퍼하지
않았고 웃으며 늘 당당한 모습을 이어갔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 고통이 있었다. 황통을 이어받을 아들을 얻는 방법을
알기 위해 카테리나는 앙리의 침실을 숨어서 남편과 앙리가 사랑하는
장면을 보고 그 방법을 훔쳐 봤다.
아들에 대한 열정이 깊었던 카테리나는 점성술사 노스트라 다무스를
고용하여 마음을 의지하고 비법을 찾으려 했다. 비방은
“신선한 암소의 똥을 먹어라”였는데 카테리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똥을
먹었다. 그런데 몇 달 뒤 놀랍게도 아들을 낳게 된다.
아들을 놓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59년 콩트와 용병대장 앙리 2세의 마상
창 시합이 있었다. 그 시합에서 창에 찔려 왕이 죽었다. 이제 의지 할 곳이
없는 앙리가 카테리나에게 폐하라 외치며 납짝 땅에 엎드려 싹싹 빈다.
바로 그때 카테리나는 콩트의 칼을 빼어 든다. 모든 사람이 앙리를
죽이겠구나 라고 생각할 때 카테리나는 “나는 너를 용서하고 내 남편이
사랑한 너를 나 또한 사랑하리라” 여기에 압도된 모든 사람들이 굴복한다.
카테리나는 사자의 힘을 숨기고 여우의 지혜를 보인 것이다.
아직 아이가 어리기에(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을 보고 배운 것이다)
인내하며 참고 참은 것이다. 그 후 그의 아들은 황제가 되고 그녀는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녀의 좌우명은 “나는 빛과 평화를
가져온다”였다. 메디치 가문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4,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져라
메디치 대공 코시모 1세가 집권하여 강력한 왕정을 실시하였다.
안전보장을 위해 자기와 아들의 집 사이에 비밀 바사리 통로를 만든다.
이런 것들로 그는 점점 대중과 멀어지게 된다.
그 후 코시모 3세는 체중 조절을 위해 바사리 통로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데 그 통로에 메디치 가문의 소장 예술품을 배치한다.
국민을 저버리고 혼자 만의 권력을 자랑하던 코시모 3세의 방만한
경영과 타락 그리고 무능으로 메디치 가문의 몰락을 가져온다.
실질적으로 메디치가를 일으킨 코시모 데 메디치가 너무나 유명해
많은 후손들이 코시모의 이름을 붙였다. 선조 코시모는 피렌체에서
걸어 다니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인사를 해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 했다.
어려움 사람을 만나면 돕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마음속 깊이 코시모를 존중했다. 그는 출장 갈 때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 겸손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를 사람들이
이탈리아의 아버지라 칭했다. 사람들은 1464년 추도사에서
“모든 상인들의 빛나는 귀감이여”라고 표현하며 존경을 표했다.
코시모의 무덤은 평판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그 위에 설 수 있게 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가 메디치가문의 전통을
만들고 힘이 된 것이다.
유럽의 가장 강력한 부를 형성했던 메디치 가문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한번 맺은 인연은 버리지 말라
내면을 성찰하는 인문경영자가 되라
카테리나처럼 인내하라 멀리 보라
당나귀를 타고 가던 코시모를 기억하라 즉 겸손하라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 가려는 경영인들은 이것들이 주는 영감을 잘
이해하고 마음속에 받아 들어야 한다.(문헌 발췌)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베키오 다리.
2차 세계대전 중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다리인데
뭇솔리니와 연합군이 전쟁할 때 협정하여 이 다리만 폭파하지
않기로 협정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과 함께 하니 이태리가 더 가까히 다가옵니다.
내년 봄에 계획되어있어 한장면 한장면 예습하듯 살펴보고 갑니다.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 꼭 배를 타 볼게요.
리차드님 덕분에 마음은 벌 써 이탈리아에 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번 맺은 인연은 버리지 말라~~ 기억할게요.
ㅎ 송설님께 기행문을 보여 드릴 수 있는게
영광입니다. 저도 전무한 상태에서 갔다가
상당히 헤깔렸네요.
다시 간다면 여행 가이드 북을 꼭 차고 갈껄
그랬습니다. 다시한번 간다면 베네치아의 유명 건물들을
하나하나 꼽아 볼 수 있을거 같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유명 금언
"한번 맺은 인연은 버리지 마라"
송설님과 카페에서 맺은 인연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