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동안, 남당유고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사연표(출생이나 사망연도가 적혀 있는, 이름이 있는 모든 인물)를 엑셀로 작성하면서 김성겸씨가 번역한 고구려사략과 유기추모경을 샅샅이 훑어보았다(중간중간에 typo가 다수 보이나 번역을 위해 굉장한 노력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나머지 백제왕기나 신라왕기, 고려사 열전, 화랑세기등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사연표도 추가하여 연표를 마무리할 생각이다.
이 자료로 기존사서와의 교차검증을 해볼 예정이다.
지금, 유기추모경과 고구려사략(xxx帝紀 포함)을 정독해 본 바,
남당유고가 진실(필사)이냐 거짓(창작)이냐에 대한 정반대의 정황증거 몇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1. 진실(일것 같다)는 정황증거
가. 高慈묘지명
1923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북쪽 근교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665-697) 묘지명
여기에는 고구려 역년이 708년으로 되어 있다.
알려진 바,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건국하여 서기 668년 망했으므로 역년은 705년이다.
708년이란 유일한 기록이 고자 묘지명인데, 고구려사략으로 이는 설명가능해진다.
始祖<芻牟大帝>紀
辛巳(서기전 40년), 夏, 與四豪(烏伊・摩離・陜父・芬奴)南来, 乘玄武(方丈大龜), 而至普述. 與三賢(再思・武骨・黙居), 逐虎攘鞨以開順奴
=> 서기전 40년에 順奴(部인지 國인지 모르겠지만)를 개창함
東明元年甲申(서기전 37년)二月, 卒本王延陀勃薨. 召西奴以國献順奴. 卒本之民推上為皇帝, 卽位於沸流谷西城山. 國號高句麗, 建元曰東明
=> 장인 연타발이 죽자 아내 소서노가 졸본국을 추모에게 바쳐, 추대를 받아 즉위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함
이로 보면, 705년은 순수하게 고구려라 불린 기간만 기준으로 한 것이고, 708년은 추모가 순노(국?부?)라는 (나라)이름으로 왕위에 올라 3년뒤에 고구려로 개칭하기까지의 기간을 모두 기준으로 한 역년으로 이해된다
나.
第十世<山上大帝>紀
(203년) 七年癸未八月, 國相<乙巴素>薨, 年六十五....<古記>作十七年癸巳.<卒本傳>作甲申八月薨.<三國史記>本紀及傳皆以七年卒.今姑依<史記>).
창작이라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기사이다
다.
第二十二世<安藏大帝>紀
戊申<安藏>十年......以下七張破損. ...
(528년)
창작이라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기사이다
2. 창작(일것 같다)는 정황증거(박창화가 창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필사자가 보고 베낀 그 원본이 누군가의 역사소설衍義인 것 같다는 의미임)
가. 고구려의 연호
㉠ 광개토대왕비 - 영락
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 고구려 사략에 보인다
㉡ 건흥오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 - 건흥
건흥명불상광배가 발견된 곳은 충주시 노은면이다.
建興五年歲在丙辰 佛弟子淸信女 上部兒庵造釋迦文像願生生世世値佛聞法一切衆生同此願
=> 없다
㉢ 서봉총 은합 - 연수
서봉총은 경주 소재의 고분으로서, 그 발굴품 중 은합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延壽元年 太歲在辛 三月中 太王 敬造合木于 三斤 延壽元年 太歲在卯 三月中 太王 敬造合木于 用三斤六兩
=> 없다
㉣ 연가 7년명 금동여래상입상 - 연가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의령군에서 출토되었다.
延嘉七年 歲在 己未 高麗國 樂良 東寺主 敬 弟子僧 演 師徒 四十人 共造 賢劫千佛 流布第二十九 因現義佛 此丘 招穎所 供養
=> 없다
㉤ 금동신묘명삼존불 - 경?
금동신묘명삼존불은 1930년 황해도 곡산군에서 발견되었는데 지리적인 위치로 보나 고구려의 것이 확실시된다.
景□四年在辛卯比丘 道國共諸善知識那婁賤奴阿王阿거五人共造無量壽佛一軀 (願亡師父母生生心中常値諸佛善知識等値遇彌勒所願如是願共生一處見佛聞法
=> 논외로 한다
㉥ 신포시 금동판 - 태화
1988년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절터에서 금동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太和三年 歲次 丙寅 二月 二十六日 甲戌朔
=> 없다
병인년은 ...,6,66,126,186,246,306,366,426,486,546,606,666년인 데,
역대 태화 연호를 사용한 나라는,
태화 (신라)(太和)는 신라(新羅) 진덕여왕(眞德女王) = 3년은 기유년
태화 (위)(太和)는 조위(曹魏) 명제(明帝) = 3년은 기유년
태화 (후조)(太和)는 후조(後趙) 석륵(石勒) = 3년은 경인년
태화 (성한)(太和)는 성한(成漢) 후주(後主) = 3년은 병오년
태화 (동진)(太和)는 동진(東晉) 폐제(廢帝) = 3년은 무진년.
태화 (북위)(太和)는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 3년은 기미년인 데,
이 중 어느 것도 병인년은 아니다.
병인년중 2월이 甲戌朔인 해는, 546년이 유일한 데, 이 해는 高句麗 陽原王 2년 = 新羅 眞興王 7년 이다.
고구려사략에는 이 때의 기록이 없으므로 이 연호는 논외로 한다.
㉦ 일본서기 - 대흥
일본서기(605년)에서는 영양왕을 '大興王'으로 적고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영락'의 경우처럼 '대흥'이 연호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 영양왕은 590년~618년 재위이고, 고구려사략에는 이 때의 기록이 없으므로 이 연호?는 논외로 한다.
㉧ 영강7년명 세갑 불상광배 - 영강
永康七年 歲次 甲 爲亡母 造 彌勒尊像 福願令 亡者神 昇覺 玆氏三會之初 悟无生念 究竟必果 堤若有罪 右願時 消滅 隨喜者 等同 此願
=> 없다
이상에서 보아, 이미 널리 알려진 영락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연호도 고구려사략이나 추모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고구려사략에 보이는 어떠한 연호(영락 제외)도 유물로 출토된 바가 없다.
나. 안장왕대 漢氏의 기사
삼국사기
三國史記卷第三十七
○<漢山州>
<王逢縣>[一云<皆伯>. <漢>氏美女迎<安臧王>之地, 故名<王逢>.]
<達乙省縣>[<漢>氏美女, 於高山頭點烽火, 迎<安臧王>之處, 故後名<高烽>
=> 이 기사와 고구려본기 안장왕조를 보면, 안장왕이 백제를 침공하고 漢氏美女를 만난 듯한 데, 남당유고 안장대제기에는 다른 것은 그리토록 상세하게 묘사(일자까지 기록한 기사도 유달리 많다)하면서도 위 삼국사기 내용과 동일한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 남녀간의 性기사에 대한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
烝母報子가 지나치게 기록되어 있고 또 상세하다.
烝母문제에서 중국에서도 친모와 관계한 것은 宋대 단 한 건만 기록이 보이는 데, 유기추모경이나 고구려사략에는 수시로 나타난다.
비근한 예로,
유리는 친모 예씨와 관계하여 자식을 낳고, 추모도 친모 류화와 관계하여 출산한 의혹이 있다고 되어 있으며, 왕이 아닌 경우도 친모(친자)와 관계했다는 기사가 아주 많이 보인다.
자기 이모, 고모, 친 여동생, 친 누나, 사촌누이등의 혈족과 관계한 기사가 수없이 보이는 데, 유전학적으로 보아, 근친상간이 횡행하면 열성유전자가 표출되어 여러 가지 유전적인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 데, 그런 기사-예를 들면 기형이라거나 요절등-가 보이지 않고 그 후손들은 모두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거의 장수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 같다.
또한, 남녀간의 성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자세하다.
왕과 왕후의 부부간의 성에 대한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대화를 누가 적을 수 있었을 까?
史官이 국가의 중요사도 아닌 안방의 대화까지 과연 다 채록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비를 태자나 왕자가 간음하여 애를 낳고 아버지는 아들의 처(며느리)를 간음하여 자식인지 손자인지도 모를 자식을 낳고 서로간에 또 그걸 자랑하고 기뻐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로 가능한지 의문이다.
3. 결론
고구려사략이나 유기추모경이 한 사람의 필체는 아닌 것으로 보아, 이들을 박창화가 직접 다 필사한 것은 아닌 것 같으며, 게다가 박창화의 말(화랑세기는 중요하니 잘 간직하고 강역고는 자기가 직접 작성한 것이며, 나머지는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고 했다는)이 진실이라면, 박창화는 누군가가 필사한 이들 사본을 보고 자기도 도저히 그 내용이 감당이 안되었을 것이다.
화랑세기는 자기가 직접 필사한 것(그 기록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인 것 같으며, 나머지 역사서 형식을 띤 남당유고는 누군가 필사한 것을 박창화가 입수해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닐까?
자기도 그 진실성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료로 인용을 하지도 못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2013년 9월 26일
첫댓글 katnani님> 1-가 : 김부식은 공식적인 고구려라는 나라가 건국된 때부터 기록한 것이고, 高慈묘지명은 고구려 건국의 모태가 되었던 나라가 세워진 때부터를 고구려로 본 것이니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2-가 : ‘건흥’, ‘연수’, ‘연가’, ‘태화’, ‘대흥’, ‘영강’, 등의 년호가 삼국의 연호가 아니거나 혹은 삼국의 연호였었지만 남당유고에서도 지워졌었을(왜곡되어졌었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남당유고의 저본’도 역시 ‘삼국의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 즉, 이 점이 ‘남당유고의 저본’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왜곡성’으로서 ‘남당유고의 저본’은 애당초 처음부터 ‘왜곡사서’로 편찬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실사를 기반으로해서 왜곡기록한 것이므로 그 왜곡의 시퀀스를 역추적하면 실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왜곡된 부분들을 모두 잘라서 없에버린 삼국사기 등’ 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내용들이 남아있는 남당유고를 심층적으로 분석,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단순하게 ‘창작의 근거’라고 보면 아주 큰 실수를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유물들도 ‘이미 왜곡된 남당유고의 저본’에 맞추어서 제작된 것들일 개연성을 열어두고 연구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물, 유적이라고해서 절대적으로 왜곡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며, 정상적인 아이큐를 가지 사람이 왜곡을 한다면 유물까지 왜곡하는 것은 어쩌면 더더욱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지적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나 : 고대사서(삼국사기 포함)에서의 ‘女性’은 ‘생리적인 여성’이 아니라 ‘영토, 피지배지, 지배권 등등’을 은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서 거의 대부분의 실체는 ‘피지배지의 실질적 통치자(土豪 등)’로서 거의 모두 ‘생리적인 男性’들입니다.
[물론 피정복지 토호들의 여자(딸)들을 정복자에게 시집보내는 경우는 있지만,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내용들은 모두 남자들의 활동입니다]. 삼국사기 등에서는 이러한 ‘여성은유기록’을 거의 대부분 삭제해 버렸지만, 표현상 유교윤리적으로 문제되지 않으면서 중요한 사건일 경우에는 ‘여성은유법’을 그대로 유지한 곳도 더러 발견됩니다. 즉, ‘漢氏美女’는 ‘漢=중국’이고, ‘美女=좋은 땅’을 은유하는 것으로서 안장왕이 백제공격을 포함해서 ‘알짜배기 중국땅(카오스는 현,산서성으로 추측)을 공략한 사실’을 김부식이 드물지만 ‘여성은유기법’을 사용하여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2-다 : 위의 ‘나’와 같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일단, ‘고대사서에서의 烝母補子’는 북방민족의 습속이어서 큰 흠이 되지 않는 것이며, 당연히 ‘아들이 생모를 범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보아야 하지만, 돌보아 줄 아들이 없는 義母일 경우는 장성한 아들(義子)이 거두었었던 것으로 봅니다. 왜곡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이러한 북방민족의 습속을 이용하여 ‘여성은유기법’을 개발해 낸 것입니다. 남당유고에 지천으로 등장하는 ‘여성은유기법’을 잘 분석하면, 당시의 다이나믹한 정치(정복)활동의 양상을 추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烝母補子’ : 후대에는 ‘어머니와 아들이 관계(sex)하는 의미’로 고착화되었지만, 처음에는 ‘[烝上補下]=윗사람이 솔선수범하고(烝) 아랫사람이 충실히받든다(補)’라는 의미였었던 것입니다... 즉, sex를 의미하는 단어는 아니었었던 것인데, 한족들이 ‘義母를 義子가 거두는 습속을 가진 북방인들’을 폄하하는 단어로 변형해서 고착화시킨 것입니다]
3 결론 : 카오스는...‘남당유고는 박창화와 그의 협력자가 반공식적으로 필사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물론 필사의 목적은 ‘남당유고의 저본에 대한 연구’를 위한 것이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필사를 해서 연구를 해보니 도저히 종잡질 못하는 내용들이어서 ‘어찌할바를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부는 약간 손을 대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다가 정세가 바뀌는 상황에서 박창화가 ‘슬쩍 챙겨서’ 가지고 귀국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물론 박창화는 그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남당유고 저본의 존재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백분 인정하였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박창화도 ‘남당유고 저본’에 기록된 ‘수수께끼(퍼즐)’을 풀지 못하고 만 것이라고 봅니다.
[참고 : 카오스는.... ‘남당유고 저본’은 8세기에 처음 편찬된 뒤 9세기까지 수차례 공식적으로 수정편찬된 것을 그 이후에 누군가(아마 이해당사자일 듯)에 의해서 일부가 의도적으로 개찬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 필사과정의 문제는 있겠지만, 절대 박창화의 창작품이 아니며, 수차례 개찬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내용이 달라지기도 했겠지만, 큰 맥락은 처음 그대로 였다고 봅니다.]
카오스님/
여성은유법에 대한 님의 집요?하신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증모보자가 처음에는 증상보하의 의미였다는 근거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http://tw.18dao.net/%E6%88%90%E8%AA%9E%E8%A9%9E%E5%85%B8/%E4%B8%8A%E7%83%9D%E4%B8%8B%E5%A0%B1
님의 모든 말씀은 도저히 근거를 찾아보기가 힘들군요..
역사서는 철학서가 아닙니다..
至如上烝下報,同人道於禽獸。(明·馮夢龍《醒世恒言》卷十五)
남당유고 저본이 8세기에 처음 편찬되어 9세기까지 수차례 공식적으로 수정편찬되었다는 근거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툭하면 뭐는 왜곡되었다 하시는 데 그 판단근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katnani님께서 조금 화가 나신 것이군요....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님의 역사연구 방향에서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시라는 것이니 조금은 진정하시길 바랍니다. 님께서 의견을 내신 것이고, 그에 대해 카오스가 견해를 밝힌 것이니,...조금은 'Dry'하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물론 카오스도 님의 견해나 주장에 대해서 아무리 동의하지 않더라도 일단 있는 그대로 '님의 견해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에 대한 최종 평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어쨋든, 몇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해 주셨기 때문에 그에 대해 카오스가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립니다....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1) '여성은유법'과 '증모보자'의 관계 ===> 카오스가 말하는 '여성은유법'은 모두 '통상적인 증모보자의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즉, '증모보자'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특정역사서에서는 '여성은유법'이 폭넓게 적용되어 있으므로 이를 구분해서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통상적인 증모보자'라고 하더라도 '친모와 친자의 관계(Sex)는 없었다'는 것만 말씀드린 것입니다..따라서 '여성은유법'을 '특정의 증모보자에 대한 해석문제' 때문에 일괄적으로 거부해 버리지는 마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나라 시기의 책은 이미 '통상적인 증모보자'를 전제로해서 언급한 것이므로 의미가 없습니다
3) '역사왜곡이 시작된 시기(8~9세기)' ===> 일단, '역사왜곡이라는 사건이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만일 있었다고 결론 지어져야만이 비로소 '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왜,어떻게(5W1H=육하원칙)'에 입각해서 사건의 실상을 규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언제일어났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애당초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역사왜곡을 했다라는 확실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물음"이 필요없겠지만, 현재로선 그러한 "증거"는 없고 단지 '정황증거'로서만 존재합니다. 즉, '의도적으로 역사왜곡한 사람들'이 "증거"들을 모두 없엤다고 봅니다. '정황증거로만 판단'
4) '역사왜곡이 있었다' ===> 카오스도 '너무도 많은 정황증거의 조합'으로 도출한 결론이므로 현재로선 간단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역설적으로 한가지만 말씀드리면,..'님은 왜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논쟁을 그렇게도 집요하게 하고 계신가요?'...아마, 다른 목적이 있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역사학계가 제시한 역사통설에 큰 의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산발적이긴 하지만, '현,역사통설에 반하는 증거나 논리가 많이 들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비록 생각하는 방향은 달라도 님과 같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음'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5) '남당유고의 저본의 편찬 시기(9세기)' ===> 앞에서 말한 '역사왜곡의 시기를 정황증거로 확인'한 뒤 내린 추론입니다만,...이를 뒷바침하는 증거는 '일본서기를 포함한 일본측의 고대사서들(고사기,풍토기, 만엽집 등등)의 편찬시기'가 앞에서의 '정황증거의 시기'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일본서기를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하나의 설명에 무수한 '異說'들이 존재합니다....무슨 역사서가 그렇게도 많은 '헷갈리는 이설'을 기록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이는 현존의 일본서기도 수없이 많은 異本들을 편집,정리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異說'들 하나하나가 바로 당시의 사건을 설명하는 방법상의 차이에서 ...
비롯된 것들이면서 그 이설들의 견해차이는 하나하나 이해당사자들이 존재하였었기 때문에 폐기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남겨져 있는 것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들은 비록 그러한 내용들을 많이 절삭하긴 하였지만, 우리나라의 最古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아주 많이 '들어 있습니다. 즉, 비록 편찬시기나 편찬의도는 달라졌지만, 일본서기나 삼국사기의 집필방법은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는 삼국사기가 일본서기와 유사한 사서를 저본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해 줍니다. 그게 바로 '남당유고의 저본'인 소위말하는 '古記類'인 것입니다....삼국사기와 맥을 같이하는 일본서기는 분명히 '諷歌와 倒語'로 썻다고 했습니다.
즉, '풍가와 도어'를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직설하지 않고 이리저리 말을 바꾸어서 썻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삽입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역사서를 쓰면서 '왜 말을 바꾸나요?'. 그것은 '실제의 사건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사건을 윤색해서 기록했다,(즉, 이것이 카오스가 말하는 왜곡입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풍가와 도어'는 단지 표현방법일 뿐이어서 실제로는 '왜곡하지 않은 것이 기본'입니다만,...이러한 '역사서 기술기법을 모르는 후대인들이 그 풍가와 도어를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함으로서 '풍가와 도어(은유된 실사)'를 '왜곡해석'해서 결국 현재의 통설과 같은 '왜곡사'로 만들어 버린 것임
설명하려면,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연 역사왜곡이라는 사건이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해결하신 다음에 역사연구에 접근하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여러번 강조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없었다거나 아주 지협적으로만 있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역사연구를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전문역사학자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니까요. 그러나 도저히 현재의 통설을 믿기 어렵다는 결론을 얻으신다면 '현재의 통설은 왜곡된 것이다'라고 보시고 연구에 몰입해 보시기 추천드립니다. 역사는 철학이 아니라 현실이며, 과학입니다. 그리고 증거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찾기 어렵게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카오스도 공학도입니다
2) '통상적인 烝母補子'의 의미와 '上烝下補'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烝母補子'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 그대로 임을 카오스도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x烝y補'라는 문형은 처음부터 '남여간의 sex'를 설명하기 위한 문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 x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고, y가 이를 잘 보필해서 따르면, 무슨일이든지 이룰 수 있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문형인 것으로 보았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 근거를 다시 찾지 못하겠네요.. 근거를 찾게되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서 일단, 카오스가 언급한 '(#) 부분만'은 취소하고 다른 부분들은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잘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물들도 왜곡된 남당유고의 저본에 맞추어 제작될 개연성이라니????????????
그러면 저 유물들의 연호는 왜 남당유고에 안나올까요?? 또 평행우주에서 온 겁니까?
일단, '평행우주'가 무엇인가요?...'카오스도 잘 모르것을 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재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카오스는 현실적으로 아주 진지하게 임하고 있습니다....어쨋든, '정상적이라면, 유물이란 있는 그대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왜곡되었다고 하는 사서에 유물에 기록된 연호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유물이 왜곡되었을 개연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유물은 유물'이고 '남당유고는 남당유고'로 별개로 연구되어서 서로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모든 유물이 '왜곡사서인 남당유고에 등장해야 한다'라고 보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즉, 이는 '남당유고의 저본이 비록 왜곡사서이더라도 수많은 저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관점에서도 수학공식과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역사왜곡의 전체적 구도'를 확실히 잡아야만 확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서 카오스도 '~~될 개연성'이라고 표현하여, '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실, 카오스도 위에서 님께서 열거한 '연호들'은 '왜곡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연호일 것'으로 봅니다만, 그 연호가 '남당유고에서 삭제해버린 실제 삼국의 연호'일수도 있겠고, '해당시기 중국의 연호'일 수도 있어서 아직은 1:1로 매칭시켜 보기 어렵다고 봅니다.